아, 아, 들리나요?
   연자 1호에 타고 있는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도 참, 버릇처럼 안녕하냐는 말이 나와 버렸네요. 안녕하다니, 안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오늘 자전거를 타고 집 앞 공원에 산책을 나왔습니다. 혹시 들리나요?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


   우리는 그걸 ‘기억 라디오’라고 불렀다. 누가 먼저 그렇게 불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 라디오는 연자 1호가 목성을 지나고 토성을 지나 태양계를 벗어날 때까지도 우주선의 모든 스피커를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연자 1호는 우리가 타고 있는 우주선의 이름이다. 연꽃 씨앗을 ‘연자’라고 부른다는 걸 예전에는 몰랐다.

   날씨가 많이 안 좋네요. 그래도 다행이죠. 지금 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볼 수 있으니. 이제 마지막이 올 테니까요. 하하, 마지막이라니. 참 쓸쓸한 말이에요. 그렇죠?

   대체 사람들은 마지막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우리는 알지 못한다.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저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무덤덤했다. 차라리 눈을 감고 보지 말았어야 했을까? 우리는 직경 47㎞ 정도의 소행성이 시속 10만㎞의 속도로 날아가 유카탄반도에 떨어지는 걸 지켜보았다. 둥그런 폭발이 일어났고, 곧이어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는 불길이 지구를 삼켰다.
   지구가 서서히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서서히’라니. 단어 선택이 참 별로다. 우리는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보았기에 그 순간 지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었다.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는 순간 엄청난 먼지와 산산이 부서진 조각들이 대기권으로 증발했을 것이다. 잠시 뒤엔 용암처럼 녹아버린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졌을 것이다.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소행성과 부딪힌 지구의 대기는 한 시간 만에 260도까지 끓어오를 거라고 했다.
   지구는 죽어버렸다.
   우리는 모두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종이 인형이 되고 말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만약 땅 위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주저앉았을 거다. 세진이가 축 늘어진 채 둥실 떠올랐다. 모두 허둥대기만 할 뿐 우왕좌왕하는 사이 지나가 소리쳤다.
   “의무실에서 들것 좀 가져다줘.”
   지나 덕분에 우리는 들것에 세진이를 눕힐 수 있었다. 세진이의 혈압과 맥박은 다행히 정상이었다.
    “괜찮아. 충격으로 기절한 것뿐이야. 조금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지나가 말했다. ‘제2의 지구 탐사 체험대’에서 지나는 의료 담당이었다. 제비뽑기로 정해진 역할일 뿐이지만 어느새 지나는 자신의 몫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대장, 이것 좀 확인해 줘.”
   계기판을 보고 있던 호수가 나를 불렀다. 호수 역시 제비뽑기로 통신 시스템을 맡게 되었다. 가장 어이없는 건 내가 대장이라는 거다. 남 앞에 서는 일이라면 질색하던 내가 대장이라니, 어색하기 짝이 없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삐빅, 삐빅, 삐빅……
   수신 장치에 달린 램프가 쉬지 않고 깜박거렸다. 지구에서 전송된 메시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열어볼까?”
   호수가 물었다. 대장은 우주선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한다. 고개를 끄덕였다. 호수가 달칵, 재생 버튼을 눌렀다. 가장 최근에 도착한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난 꿈이 있는데……
   이루고 싶은 게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어른들이 미워. 이게 다 어른들 때문이야!


   숨이 턱 막혔다. 악에 받친, 울부짖음에 가까운 목소리. 그것도 우리 또래 정도 되는 아이의 목소리였다. 그 아이와 달리 우리는 연자 1호에 타고 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대장, 첫 번째 메시지에 안내문이 들어 있어. 들어볼래?”
   “좋아.”

   연자 1호에 탑승한 승무원 여러분, 반갑습니다.
   우리는 의연히 마지막을 맞이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디 살아남아 제2의 지구를 찾아 주세요.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는 접수된 메시지를 모아 연자 1호에 전송하고자 합니다. 이 메시지들은 우리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증거입니다. 부디,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걸까. 달이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결말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달은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달은 지구를 돌고, 지구는 태양을 돌고. 그 순환이 깨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란다. 헌데 창밖으로 보이는 달은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구나. 너희들이 보기에 달은 어떤 모양이니? 아아, 어리석은 인간들. 우리가 했던 실수는 영영 바로잡을 수 없을 테지.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여자의 목소리에는 짙은 한숨이 배어 있었다.
   화성 궤도에 진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달을 보았을 때 그 자리에는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 돌 조각들이 떠 있었다.
   제2의 지구 탐사 체험을 위해 달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별다른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달 기지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최고의 휴양지로 꼽히는 곳이었고, 우리처럼 탐사 체험을 오는 학생들을 위해 여러 나라에서 지어놓은 시설이 곳곳에 있었다.
   “선생님! 저 우주선 엄청 커요! 우리도 저거 타면 안 돼요?”
   “우리도 진짜 우주선 탈 수 있어요?”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때로 가고 싶다. 들뜬 마음으로 달 기지를 두리번거리던 그때로.
   사건이 일어나던 순간, 우리는 황미현 선생님과 함께 연자 1호 담당 연구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연자 1호는 제2의 지구 탐사를 위해 특수하게 제작된 우주선입니다. 플라즈마 엔진 장착으로 약 한 달 정도면 화성에 닿을 수 있습니다. 지구와 꼭 닮은 행성에 도착하게 되면 인간이 살기에 적당한 곳인지 탐사할 수 있도록 모든 장비와 시스템을 갖춰 놓았습니다. 다만 지금은 예산이 부족해 확실한 후보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 달 기지에서 무기한 대기 중입니다.”
   연구원은 우리를 연자 1호 안에 들어가 보게 해 주었다. 우리는 이미 제비뽑기로 탐사 체험대의 임무를 정해 놓은 상태였다. 아이들이 모두 들어가고 대장인 내가 마지막으로 발을 들여놓을 무렵, 엄청난 굉음이 들리더니 사방이 뒤흔들렸다. 우리는 모두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기지 전체에 경보음이 울리고 경고등이 번쩍거렸다.
   “너희들 모두 괜찮니? 다친 덴 없고?”
   뛰어들어온 황미현 선생님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연자 1호 안에 있었기 때문인지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선생님, 방금 무슨 소리였어요?”
   “뭐가 폭발한 거예요?”
   황급하게 뛰어다니는 연구원들의 얼굴이 몹시 어두웠다. 안내 방송으로 흘러나오는 소리는 한층 더했다.
   “지구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탄도 미사일이 달에 심각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현재 달이 파괴되어 붕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몇 번이나 똑똑히 들었는데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그때부터 기지 구석에 마련된 천막 안에서 며칠을 지내야 했다. 지구로 가는 셔틀 우주선 정류장이 모두 파괴되어 당분간 운행이 힘들다고 했다. 그때쯤이면 당연히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달 기지 체험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할 줄 알았던 우리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식이었다.
   “달이 부서지면서 지구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해일이 밀어닥쳐 대부분의 도시가 물에 잠기고 있어요.”
   연자 1호 연구원이 소식을 전하자 황미현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셔틀 우주선은 언제쯤 도착할까요?”
   “발사 기지도 대부분 물에 잠긴 상태라고 합니다. 복구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울며불며 집에 가고 싶다고 흐느끼면 황미현 선생님은 그저 등을 토닥여 줄 뿐이었다. 더 나쁜 소식은 그 뒤에 찾아왔다.
   “지구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소행성이 심상치 않다고 하네요. 아마 달이 제자리에 있었다면 궤도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겼을 텐데 현재로서는 지구로 곧장 돌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위로하며 꿋꿋하게 버티던 황미현 선생님이 풀썩 주저앉았다. 우리는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입을 다물었다.
   소행성의 궤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구 쪽을 가리켰다. 달이 있었다면, 달만 있었다면, 달만 제자리에 있었더라면. 아무리 되뇌어도 소용없는 말일 뿐이었다. 지구와 연결된 위성 화면에 심각한 표정의 대통령이 나타났다. 며칠째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울고 있던 우리는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말을 듣고 싶은 마음으로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의연하게 마지막을 준비해야 합니다.”
   콩알만 한 기대조차 품을 수 없는 절망적인 말이었다.
   “달 기지에 무기한 대기 중이던 탐사 우주선 연자 1호를 기억하실 겁니다. 지금은 지구에서 달로 가는 것도, 달에서 지구로 오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때마침 달 기지에 초등학생 어린이 아홉 명이 제2의 지구 탐사 체험을 위해 체류하고 있다고 합니다. 국민 여러분……”
   그 뒤에 들려온 말들은 마치 꿈결 같아 전혀 진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살아남아서 제2의 지구를 만들고…… 우리 은하의 나선형 팔 한구석 태양계에…… 무수히 많은…… 우리가 이곳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어린이들이…… 연자 1호 발사를 위해……”
   우리는 싫다고 했고, 황미현 선생님과 연구원들은 우리가 가야만 한다고 했다. 어른들은 연자 1호에 입력된 행성까지 가는 동안 노인이 되어 세상을 떠날 거라고 했다.
   “저는 가기 싫어요. 달 기지에 있으면 언젠가 셔틀 우주선이 올 거잖아요. 여기서 가족들을 기다릴래요.”
   세진이는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세진이에게 쌍둥이 언니가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황미현 선생님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소행성이 다가오고 있어. 지구가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어.”
   “우주선을 타고 알 수도 없는 별로 가는 건요? 그건 안전해요? 아무리 지구와 닮았다고는 하지만 거기서 정말 사람이 살 수 있어요? 산소가 없어서 숨도 쉴 수 없으면요? 외계인이 우리를 공격하면 어떻게 해요?”
   세진이가 울부짖었다.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다면 그 행성이 어떤 곳인지도 영영 알 수 없게 될 거야.”
   우리는 결코 특별해서 연자 1호에 탄 것이 아니다. 우연히 그곳에 있었을 뿐이다. 우리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대장, 나 좀 잠깐 볼래?”
   지나를 따라 의료용품과 식량이 잔뜩 쌓여 있는 창고로 갔다.
   “세진이 말이야.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 그런데도 점점 체온이 낮아지고 혈압도 위험한 수준이 되고 있어. 맥박도 너무 느려.”
   우리처럼 어린아이들을 광활한 우주로 떠나보내겠다고 결심했을 때 어른들은 예상했어야 했다. 죽어버린 지구를 뒤로하고 떠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대장, 너무 책임감을 느끼지는 마.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잖아.”
   지나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몇 마디의 말일 뿐인데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래, 고마워.”
   창고에서 나오자마자 세진이를 만나러 갔다.
   “세진아, 좀 괜찮아?”
   “너 같으면 괜찮겠니?”
   화살처럼 날아와 꽂히는 세진이의 말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도 힘들어. 힘들어서 다 포기하고 싶은데도 겨우 버티고 있는 거라고. 나도 너랑 똑같은 열두 살이라고.’
   나는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웃어보였다.
   “많이 힘들지?”
   “혼자 있고 싶으니까 좀 나가 줄래.”
   세진이가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어깨가 들썩이는 걸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메시지는 계속 도착했다. 이미 불타버린 지구에서 날아오는 메시지는 유령 같았다. 하긴, 우리는 늘 유령 같은 별빛을 보며 살아왔다. 우리가 지구에서 보던 별빛은 이미 사라져 버린 별에서 멸망 전에 보낸 메시지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576만 6천 572건. 지금까지는 그래. 아직도 일 초에 수백 개씩 들어오고 있지만.”
   호수가 보고했다. 세진이를 뺀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정기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우리 위치는 어디쯤이야?”
   “창밖으로 보이는 게 가니메데야. 목성을 지나서 토성 쪽으로 가고 있지.”
   “저 메시지들 말이야. 우리가 태양계를 벗어나도 받을 수 있을까?”
   호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아마 힘들겠지. 점점 신호도 약해질 거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그렇게 많은 유령들이. 우리는 유령들의 메시지를 싣고 제2의 지구를 찾아 나아가야 했다. 쉬지 않고, 지치지 않고.
   “메시지들을 듣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호수가 말했다. 우리는 모두 눈을 들어 호수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슬프다가도, 속에서 몽글몽글 뭔가가 막 솟구쳐 오르는 것 같거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라진 걸까? 우리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호수의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식량 관리와 배급을 담당하는 은우가 물었다. 호수 눈빛이 반짝였다.
   “우리 모두 함께 듣는 게 어때?”
   “뭐?”
   “내 제안일 뿐이야. 반대가 많으면 추진하지 않을게.”
   우리는 다수결로 결정하기로 했다. 찬성이 다섯, 반대가 셋이었다. 세진이의 의견을 포함하지 않더라도 찬성이 더 많았다. 호수는 우주선 안에 설치된 모든 스피커에서 메시지가 흘러나오도록 만들었다. 그때부터였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똥을 쌀 때도, 연자 1호의 항해 경로를 모니터할 때도,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들었다.

   (부스럭부스럭)
   (와삭와삭)
   야, 너희들. 연자방아인지 뭔지 타고 지구를 떠나버렸다며?
   (와삭와삭)
   이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아냐?
   나 과자 먹는 소리다. 약 오르지? 우주선엔 과자 같은 거 없지?
   난 과자 먹는다. 아직도 실컷 남았다.
   부럽냐? 부럽지?
   쳇, 난 너희가 부럽다.
   이왕 살아남은 거, 잘들 살아라. 빠이.
   (와삭와삭!)


   아무 말도 없이 자기 주변의 소리를 녹음해 보낸 사람들도 있었다. 공원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 누군가 코 고는 소리, 시장 상인들이 외치는 소리, 울음소리, 웃음소리……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소리. 메시지들은 공기처럼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그걸 ‘기억 라디오’라고 불렀다.

   “대장! 세진이가…… 세진이가……”
   우주선 안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세진이를 발견한 건 은우였다. 식사 시간이 지나도록 세진이가 나오지 않자 부르러 갔다가 쓰러져 있는 걸 보았다고 했다. 다행히 손목의 상처는 깊지 않았다. 지나는 세진이에게 안정제를 주사했다. 우리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우리도 세진이처럼 쓰러지지 않으려 기를 쓰고 버티고 있다는 걸.

   안녕? 내 이름은 임수진. 너희들과 나이가 똑같아.
   음,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난 2038년 11월 5일에 서울에서 태어났어. 내겐 태어날 때부터 함께였던 단짝이 있었지.


   쾅.
   의료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세진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언니 목소리야. 우리 언니……”

   세진아, 내 목소리 듣고 있니? 우린 정말 운이 좋아. 안 그래?
   저 넓은 우주에 나와 꼭 닮은 네가 있다니.
   네가 거기 있으면, 나도 거기 있는 거야.
   알고 있지? 네가 나야. 우린 언제나 함께 있는 거야.


   눈물이 방울방울 떠다녔다. 처음에는 세진이 눈물뿐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눈물방울은 셀 수 없이 많아졌다. 우리는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잃어버린 가족이라도 만난 것처럼 얼싸안고 펑펑 울었다. 우주선 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걸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모니터에서 알림 신호가 울렸다. 연자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한때 우리가 살던 지구는 사라졌다. 지구에 살며 울고 웃던 사람들도 이제 없다. 이 넓은 우주에서 우리는 고아가 되어 날아가고 있다.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퐁

연꽃 씨앗은 천 년이 지난 뒤에도 싹을 틔운다고 해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작고 평범해서 소중한 사람들이 살아남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2019/10/29
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