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위험한 자세는 다름 아닌 엄지와 검지를 살짝 벌린 집게손 모양이다. 너무 혐오적인 형상이기 때문에 감히 공적인 장소에 게재되는 것조차 용납될 수 없다. 전 세계적으로 대상의 작거나 적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통용되는 제스처가 문제가 된 것은, 이것이 한국 남성의 성기 크기가 작음을 희화화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면서부터다. 그리고 이것이 일부 커뮤니티의 소동을 넘어 거국적인 이슈가 된 발판은 온라인 게임 ‘메이플 스토리’의 집게손 논란 사건이었다. 2023년 11월 ‘메이플 스토리’의 직군 ‘엔젤릭 버스터’(이하 엔버)의 리마스터 기념 홍보 애니메이션의 빠르게 지나가는 한 컷에서 집게손 모양이 포착됐다. 해당 영상을 작업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여성 애니메이터 중 한 명이 SNS에 ‘페미 발언’을 한 것도 발견되었다. 유저들의 문의가 거세지자 개발사 넥슨은 모든 책임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돌리고 영상을 삭제했다. 이에 동조하듯 수많은 게임사가 유저들의 민원에 따라, 혹은 자발적으로 엄지와 검지가 조금이라도 가까워보이는 그래픽 작업물을 수정하거나 삭제했다. 영상에서 문제시된 장면이 이미 콘티 단계에서 개발사의 컨펌을 거쳤으며, 원화 역시 문제시된 여성 직원이 그리지 않았음이 밝혀졌음에도 유저들의 공격은 계속해서 여성 애니메이터에게 집중되었다.
  이 집게손 사태의 배후에 페미니스트를 물색하고 단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작용한다는 사실을 여기서 굳이 공들여 논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무런 의도도 없는 집게손을 물고 늘어지는 이들은 성차별적 권력구조를 뒤집어 피해자의 위상을 점하고자 하며, 여성이 혐오와 폭력에 노출되는 과정을 마치 스포츠처럼 즐긴다. 이 글을 집필하는 사이에도 르노코리아의 신차 홍보 영상에서 여성 직원이 취한 손 모양이 이슈화되거나, 현대 중공업 노조가 소식지에 옥외 캠페인 광고판에 등장한 손가락 모양을 성토하는 사설을 게재했다가 사과하는 사건 등이 있었다. 집게손의 유령은 일부 집단의 막연한 강변을 넘어 기성 매체와 전통적 산업 영역까지 잠식하며 실체를 부여받은 것이다.
  이렇게 집게손 논란이 일파만파 퍼지는 와중에, 콘텐츠 수정을 넘어 작업한 창작자들과 계약을 철회하거나 이들의 생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 분야는 주로 게임 업계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실 집게손에 대한 발작적인 반응은 게임 업계의 페미니스트 억압 사례 중 하나의 양상에 불과하다. 2016년 온라인 게임 ‘클로저스’가 성우의 개인 SNS 게시물을 사유로 계약을 철회하고 목소리를 교체한 사건 이래 수많은 게임 기반 여성 창작자들이 생계를 위협받고, 검열되고, 테러에 가까운 사이버 공격을 받거나, 오프라인 행사를 제한받기도 했다. 전국여성노동조합의 2020년 조사에 따르면 2016년 이후 여성인권과 관련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가 부당한 대우를 당한 여성 노동자가 게임업계에서만 최소 14명이다. 성우, 일러스트레이터, 캐스터, 보컬리스트, 번역자 등 업무 범위도 다양했다.1)
  일련의 반페미니즘적 테러에는 남성 서브컬처 향유자와 업계에 만연한 여성혐오, 정치혐오, 여성 (특히 프리랜서) 노동권의 취약성, 남성 청년 주도 온라인 커뮤니티의 유해성과 여론 형성 방식, 온라인 여성혐오에 대한 기성 권력의 무관심 등 여러 요인이 중첩되어 있다. 각각의 요인은 모두 중요한 동시대적 이슈이고 어떤 지면에서든 다루어져야 할 이야기이긴 하지만, 솔직히 다 떠나 그저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의 제스처에 벌벌 떠는 빈곤한 남성성을 비웃고 넘어가고픈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타쿠이자 게이머로서 결국 이 글에 손을 대도록 만든 의문은 이것이다. 이런 ‘취소’는 남성 게이머들의 입장에서도 매우 손해보는 일 아닌가?
  그간 문제시된 작업물은 이 콘텐츠의 핵심 소비자인 남성 게이머의 욕망에 충실한 형태로 제안되고, 이에 걸맞은 전문적인 기술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삭제된 ‘메이플 스토리’의 홍보 영상을 찬찬히 본 사람이 있을까? 이 영상은 뛰어난 동화 연출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은 스튜디오 뿌리의 작품이다. 아이돌이라는 엔버의 콘셉트에 맞게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담은 애니메이션은 화려한 연출과 유려한 동화로 캐릭터의 사랑스러움을 한껏 표현하고 있다. 이런 훌륭한 애니메이션이 실체 없는 논란에 의해 통째로 처분되는 상황을 보는 것은 서브컬처 향유자로서도 참담하다. 나는 여성향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어중간한 노출과 미소지닉한 언행과 미묘한 퀄리티로 빚어진 캐릭터들도 좋다고 안고 살아가야 하는 처지인데, 이 남성 게이머들은 자본과 업계 노하우를 쏟아부어 지독하게 귀여운 미소로 인사하는 엔버쨩을 스스로 내치고, 손가락과 눈이 마주칠까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왜 자신을 위해 차린 밥상을 차버리고 미소녀의 풍만한 가슴 대신 손가락만 보게 되었는가?


집게손에 분노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젊은 남성들의 페미니즘 백래시가 과열되고 테러로까지 이어지는 현상은 전세계적인 경향이다. 영미권에서 이들은 인셀(Involuntary celibate, 비자발적 독신주의자)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인셀 테러』의 저자 로라 베이츠는 인셀 커뮤니티가 일종의 광신도 공동체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교리의 핵심을 “섹스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 그것을 ‘거부당한’ 데 대한 분노”로 본다.2) 인셀은 성 시장이 계급화되어 있으며, 섹스 파트너로서 매력적이지 못한 자신은 여성의 선택을 받지 못할 것이라 믿는다. 여성들은 어리고 섹시할 때는 알파 남성에게 처녀성을 내주고 문란한 생활을 하다가 결혼 적령기가 되면 적당한 남성을 호구 잡아 그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갈취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런 권력 구조 속에서 연애하고 섹스할 수 없고 나중에 알파남이 버린 찌꺼기를 주워 먹어야 하는 자신들이야말로 이 사회의 가장 하위 계급이자 피해자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남성의 특권이라는 신화를 퍼트림으로써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성적인 욕망과 좌절을 기반으로 하는 인셀의 세계관에 비추어 보면 하필 집게손이 그들의 트리거가 된 이유도 명확해 보인다. 성기가 작다는 표현은 성적 대상으로서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가장 노골적인 표현으로서, 그들의 ‘성 계급성’을 가장 명확하게 인식시킬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인셀이라는 정체성만으로 일련의 검열 시도를 둘러싼 맥락을 다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뭉뚱그려 게임 업계라 말하기는 했지만 상술한 게임들은 공통적으로 귀엽거나 섹시한 여성 캐릭터를 콘텐츠로 내세우고 있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이들은 ‘미소녀’ 캐릭터를 팔고 있다. 미소녀는 아름다운 소녀를 이르는 일반명사로 쓰이기도 하지만, 서브컬처 현장에서는 일본 아니메 스타일의 ‘모에’(萌え)3) 데포르메 도식을 거쳐 만들어진 특정한 캐릭터 형상을 일컫는 말이 된다. 그리고 게이머들은 이 가상의 여성 캐릭터를 성적으로 욕망하고 이 세계에 몰입한다. 따라서 이것은 게임이라는 매체보다는 오히려 미소녀 서브컬처에 몰입한 이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지는 태도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페미니스트 검열 시도는 만화, 애니메이션, 서브컬처 분야 스트리머 등 여러 서브컬처 영역에 거쳐 일어났다. 다만 현재 서브컬처 업계의 핵심 콘텐츠가 미소녀 캐릭터 수집형 게임이기 때문에, 또한 소비자의 피드백이 즉각적으로 반영되고 상대적으로 ‘꼬리 자르기’가 쉬운 업계의 특성상 게임 매체 향유자의 화력이 더 과대표 되었으리라는 분석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페미니즘 검열 시도의 배후에는 서브컬처 향유자들, 오타쿠4)들이 공유하는 어떤 특성 혹은 인식이 반영되어있다는 것이다.


검열을 ‘취소’하는 검열

1967년 박정희 정권에서 ‘사회 6대 악’의 하나로 만화를 지정한 이래로 한국 서브컬처계는 늘 검열의 불안과 함께 해왔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과 같은 서브컬처는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며 수입된 (그것도 심지어 우리를 식민 지배한 일본에서 온!) 문화로서 아이들을 망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손꼽혀왔다. ‘불량 만화’를 검열하고 압수하고 불태운 역사적 아픔은 서브컬처 향유자들에게 새겨져 가히 민족적인 설움으로 남았고, 현재는 ‘셧다운제’와 ‘아청법’(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게임 등급제’ 등에 대한 반발로 대물림되었다. 특히 서브컬처 컨텐츠는 대부분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하며, 앳된 얼굴의 ‘미소녀’에 대한 성적 묘사를 주력 상품으로 하기 때문에, 아청법의 적용 범주는 민감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아청법의 주무처인 여성가족부에 대한 이들의 막연한 분노를 배가시키는 요인이 된다.
  한편으로 젊은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PC’의 신봉자로, 창작물의 검열과 수정에 앞장서는 이들이다. 이들은 본래 남성 청(소)년들이 주로 향유하던 (것으로 믿고 있는)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들에서 남성의 활약을 축소시키고 여성들이 밋밋하고 노출 없는 옷을 입게 만든 주범으로 인식된다. 특히 한국 게이머 커뮤니티에서는 2022년 ‘블루 아카이브’를 비롯한 여러 캐릭터 수집 모바일 게임이 민원으로 인해 등급이 재조정된 사건이 매우 큰 원한으로 남아있다. 실제로 ‘블루 아카이브’의 일러스트 수위는 주어진 등급을 상회하는 것이었으나, 남성 오타쿠들은 이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한 채 등급조정의 원인을 여초 사이트로 알려진 ‘해연갤’의 공격으로만 규정하였다. 이들은 ‘해연갤’ 유저들 역시도 아청법에 위반될만한 콘텐츠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고발함으로써 맞불을 놓았지만, 이미 조정된 등급이 변경되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 남성 오타쿠에게 페미는 남성을 혐오하고 여성의 우월주의를 부르짖는 것에 더하여, 검열의 주체로서 자신들의 실존(픽션 세계)을 위협하는 이들로 인식된다. 따라서 이들의 안에서 엄마-여성가족부-여초-페미-PC주의자(-종종 진보정당)는 검열이라는 하나의 전선으로 구축된다. 그리고 오타쿠들은 자연스럽게 표현과 향유의 자유를 억압받는 피해자로 위치하게 된다.
  검열의 피해자임를 호소하는 이들이 검열을 수단으로 삼는 것은 다소 모순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남성 오타쿠들에게 페미니즘 검열은 앞선 억압의 역사에 대한 복수극으로서 서사화되고 있다. 페미와의 ‘검열 전쟁’은 한국 서브컬처 문화의 존속이 달린 성전인 것이다. 이들은 창작자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히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이이제이의 방식으로 여성 창작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2016년 ‘예스 컷’ 혹은 ‘노 쉴드’ 운동으로 알려진 웹툰 규제 찬성 운동은 상술한 ‘클로저스’ 성우 검열 사태에 대해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를 내놓았던 여성 웹툰 작가를 공격하기 위한 집단행동이었다. 독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작가들이 자신들을 기만했다면서 웹툰계에 대대적인 검열을 호소하고, 기성 언론이나 정부 부처뿐만 아니라 반동성애성향의 종교계와 학부모회, 동인행사의 대관처에 이르기까지 평소에 서브컬처를 억압하거나 규제한다고 보던 주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서브컬처 판에서 검열 사례를 늘리는 것이 이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리가 없을 테지만, 이들은 페미를 척결하면 부당한 민원도, 검열도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따라서, 그것이 비록 자기 파괴적인 검열의 형태라 할지라도 이들에게는 먼저 페미를 몰아내는 것이 급선무의 방책으로 설정된다.


미소녀를 꿈꾸는 남성들

이상의 논의는 서브컬처 업계 페미니스트 검열 사태의 귀추를 계속 따라왔던 사람들에게는 그리 신선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쯤에서 조금 과도할 수 있는 이야기로 나아가보고자 한다. 앞선 검열 담론이 서브컬처계의 페미사냥을 정당화하는 표상적인 기제라면, 나는 이 담론이 재생산되는 내적 구조에 미소녀라는 도상과 이에 대한 이입의 방식이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직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분석은 대략 이런 내용일 것이다. 미소녀는 이상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여성으로서 현실의 여성에 대한 성적 대체품이라고 볼 수 있다. 오타쿠는 현실의 여성과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없으니 가상의 여성들이 자신(주인공)을 따르는 콘텐츠를 소비하고 이에 이입함으로써 대리만족을 느낀다. 즉 이들은 가상의 포르노를 수호하기 위해 현실의 여성 인권을 억압하는 결과에 이른 것일테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들에게 미소녀가 그저 성적 대상으로만 치환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중국 남성 서브컬처 게이머들 사이에서 남성 캐릭터가 존재하는 게임은 플레이하지 않겠다는 ‘유남불완’(有男不玩)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5) 일부 게임은 게임에 등장한 남성 캐릭터를 여성 캐릭터로 바꾸거나 남성 캐릭터를 삭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 중 개발단계의 게임 ‘아주르 프로말리아’의 주인공은 남녀 성별을 선택하여 플레이하게 된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게이머들의 반발을 샀다. 이에 개발사는 실제 게임에는 오직 여성 캐릭터만 등장한다고 발표하며 빠르게 논란을 진화했다.6) ‘아주르 프로말리아’의 사례는 매우 흥미롭다. 서브컬처 미소녀 콘텐츠는 전통적으로 수많은 여성이 한 명의 남성에게 성적으로 어필하는 ‘하렘물’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미소녀 수집형 RPG게임은 등장하는 캐릭터가 전원 여성이라고 할지라도 플레이어 캐릭터는 남성 게이머들이 이입하기 편하도록 남성으로 설정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유남불완’을 외치는 이들은 그 자신의 대리물로조차 남성의 존재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스스로를 미소녀로 상정하는 것을 더 안온하게 느낀다는 것인가?
  그렇다. 그들은 실제로 미소녀의 삶을 선망한다. 꾸준히 버추얼 유튜버(이하 버튜버)7)의 존재론을 다루어온 브레디키나와 동료 연구자들은 ‘버미육’8)라고 불리는, 실제로는 남성이지만 귀여운 미소녀 아바타를 사용하는 버튜버들의 활동을 주목한다. 이들은 미소녀의 모습을 취할 뿐만 아니라 제스처나 말투도 전형적인 미소녀의 양식을 따르며, 보이스 체인저로 어린 여성의 목소리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소위 ‘넷카마’9)와는 달리 현실의 자기 성별이 남성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으며, 시청자들 역시 이들이 남성이라는 사실을 주지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이 “귀여운 미소녀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물리적 세계에서 여성화되고 싶은 욕망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10)
  즉 그들은 젠더로서의 여성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소녀라는 특수한 존재가 되고 싶은 것에 가깝다. 아직 성별이 분화되지 않고 사회적 책임이 없는 존재인 소녀의 형상은 사회의 생산 및 재생산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된, 실제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자유를 의미한다.11) 미소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랑받고, 보호받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존재다. 연구자들은 ‘버미육’에게서 남성에게 기대되는 강하고 책임감 있고 권위 있는 역할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을 발견한다. 가상적인 소녀의 신체는 이미 사회적으로 규정된 남성됨의 모델에 부응할 수 없는 이들이 취하는 우회로가 된다. 따라서 아바타를 쓰고 있는 사람의 실제 성별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혹은 누군가는 그가 실제 여성이 아니기에 오히려 안심한다.) 중요한 것은 미소녀의 도상과 수행 그 자체에 내포한 자유(혹은 도피)의 공통 감각이다. 나는 이것이 ‘버미육’처럼 굳이 직접 미소녀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미소녀를 주인공으로 삼는, 그러한 기호가 경유되고 통용되는 장소들 일반에 해당하는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미소녀는 현실의 책임, 억압, 소외로부터 벗어나는 순수의 상징이자, 그 환상을 공유하는 장으로 기능한다.
  나아가 미소녀의 도상 구조 자체가 이 환상을 배가시킨다. 미소녀는 극도의 비움과 극도의 과잉을 통해 만들어진 도상이다. 이들의 신체는 중력장에서 벗어나 인간 몸의 복잡하고 추한 굴곡들을 매끈하게 만들고, 과장된 기호들을 덕지덕지 달아놓은 기괴한 몸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데이터베이스 이론은 미소녀가 ‘모에 요소’12)로 일컬어지는 전형화된 성적 취향의 분화와 조합으로서 만들어진 존재임을 보여준다. 그는 모더니즘적 거대한 이야기의 상실 이후 소비적 기호의 조합인 데이터베이스가 그 배후를 보충하는 것으로 보며, 그러한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주체가 바로 오타쿠라고 본다. 그런데 나는 오타쿠가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사고하고 소비한다는 요지보다, 아즈마가 오타쿠의 데이터베이스의 구성을 오직 모에 요소로만 정의한 것에 주목하고 싶다. 모에 요소들 그 자체는 아무런 우열값도 없는 완전히 대체 가능한 취미의 기호들이다. 다시 말해 미소녀는 순수하게 성적 취향으로만 구축된 존재로서,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맥락이 탈각되고도 존재 가능하다. 이를 구성하는 취향과 욕망 자체가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망각 가능하다. 이렇게 미소녀의 몸은 현실의 복잡한 권력관계로부터 단절되고 빠져나갈 수 있는 자유를 암시하게 된다.
  오타쿠들이 유달리 ‘사상’의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은 작품이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실제로 ‘클로저스’ ‘림버스 컴퍼니’ ‘블루아카이브’ 등 사상검증이 이루어진 미소녀 콘텐츠들의 스토리에도 시사적이고 정치적인 쟁점들이 다량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타쿠들의 사고 구조 속에서 어디까지나 미소녀의 배경으로서만 기능하도록 분리될 수 있다. 문제는 미소녀의 몸을 구성하는 제작 과정에서 ‘사상’이 개입되었을 위험이다. 페미니즘의 개입은 (혹은 그럴 수 있다는 의심만으로도) 납작한 표상에 현실의 무게를 매달고 미소녀의 순수성을 오염시킨다. 따라서 ‘사상’이 개입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은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하고 꼴리는 모습을 하더라도 이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으며, 빠르게 도려내야할 이물질로 치부된다. 미소녀가 표상하는 순수의 유토피아를 지키기 위해 남성들은 공동의 전선을 구축하고 이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어 더 이상 미소녀를 그 자체로 즐기지 못하고 손가락만 보는 자승자박의 상태로 이끈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일련의 페미사냥, 그리고 ‘취소’가 이리도 스무스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대중문화의 향유 주체가 겪는 실존적 위기가 동시대 대중문화의 생성 및 소비 구조와 조응한 결과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남성 오타쿠만의 경향인 것도 아니다. 여성 오타쿠 역시도 자신이 순수하게 덕질할 수 있는 영역를 지키기 위해 정치적으로 물의가 될 수 있는 작품과 향유자를 공론장에서 전지해온 역사가 있다. 비평은 그 구조가 무엇이며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면밀히 따지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그로써 위협받는 것은 현실의 몸, 현실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아름

미학 및 대중문화 연구자.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스타라이트 스테이지’ 프로듀서 9년차. 콜렉티브 옐로우 펜 클럽에서 활동하며 글을 쓰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기획을 한다.

아이돌의 무대를 잘 보지 못한다. 완벽한 미소와 몸매와 춤선으로 무대를 끌어가는 이들이 현실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왠지 답답해서 오래 쳐다볼 수 없다. 대단한 페미 투사라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게임 속에서 3D로 모델링된 미소녀 아이돌이 헐벗은 채 춤추는 모습은 잘만 보고 있으니까. 얼마 전 담당 아이돌의 새 코스튬이 출시되었는데, 마감(《비유》는 아니었다)을 치다 힘들 때마다 새 옷을 입은 그녀가 춤추는 장면을 멍하니 보면서 버텼다. 이거 완전 씹덕 아니냐; 현실의 아이돌보다 더 어리고 더 야하고 더 순종적인 가상의 여자아이에 열광하는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2024/10/16
69호

1
여성신문, 2020년 7월 18일 기사, 〈게임업계 ‘페미니즘 사상검증’ 해고 노동자 최소 14명〉 바로가기
2
로라 베이츠, 『인셀 테러』, 성원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3.
3
서브컬처 오타쿠들의 은어로 특정한 대상을 향한 열광, 강한 애정을 의미한다.
4
여기서 남성 청년-인셀-게이머-서브컬처 향유자들을 ‘오타쿠’라는 호명으로 뭉뚱그려 말하는 것을 양해해달라. 오타쿠라는 정체성은 쉽게 하나의 표현으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이 글에서는 이들이 단순 서브컬처를 즐기는 이들을 넘어 가상의 매체에 매우 친밀하고 몰입해 있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부르고자 한다.
5
서울파이낸스, 2024년 6월 3일 기사, 〈중국 게임시장서 커지는 ‘유남불완’ 운동···국내 시장 영향 끼치나〉 바로가기
6
“重要な局面を迎える中国のアニメ調スマホゲーム。大衆化の過程でぶつかった壁。「『有男不玩』運動」とは”, 《KULTUR》, 2024년 5월 26일 게재. 바로가기
7
유튜브 등의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자신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아바타를 내세우는 이들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서브컬처적으로 데포르메된 캐릭터 도상을 아바타로 사용한다.
8
버추얼 미소녀 수육(バーチャル美少女受肉)의 줄임말이다.
9
네트워크+오카마(일본에서 여성처럼 꾸미고 행동하는 남자를 일컫는 말)의 합성어로, 인터넷에서 여성처럼 위장하여 활동하는 남성 유저를 일컫는 말이다.
10
Liudmila Bredikhina and Agnès Giard, “Becoming a Virtual Cutie: Digital Cross-Dressing in Japan”, Convergence vol. 28, 2022.
11
Joshua Paul Dale, “Cuteness studies and Japan”, The Routledge Companion to Gender and Japanese Culture, Edited by Jennifer Coates, Lucy Fraser, Mark Pendleton, 2019.
12
모에를 효율적으로 자극하기 위해 범주화된 기호. 머리색, 바보털, 츤데레, 네코미미 등 주로 외관적 특질로서 유형화된 형태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