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착한 괴물

신이인의 데뷔 시집 『검은 머리 짐승 사전』(민음사, 2023)의 시적 주체는 순응하다 망해버린 ‘착한 괴물’이다. 이 괴물은 “웃으면서 울고 있”는 표정으로 잃어버린 자신의 인생을 찾으러 다닌다. 그는 자신이 배신당했다는 걸 안다. 그러나 이미 인생을 다 잃어버린 후라는 것도 안다. 그리고 그걸 되찾을 길이 더는 자신에게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때늦은 후회와 해소할 길 없는 분노는 이 시집을 관통하는 핵심 정서다. 동시에 그것은 오늘날 이 사회를 채우고 있는 중심 정서이기도 할 것이다.
  「Beautiful Stranger」의 화자는 사탕에 중독된 환자다. 사탕 없이는 살 수 없게 돼버렸는데 이제 와서 사탕 없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거의 ‘재앙’적인 상황이다. 일방적으로 사탕이 단종됨으로써 화자는 실존적 죽음의 상황에 처한다. 사탕을 잊지 못해 괴로워하던 화자는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쓴다. 수신인은 사탕을 판매하는 제과점 주인이다. 사탕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싶지만 정작 편지에서는 사탕의 이로움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사탕이라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곡히 사정한다. 속으로는 욕하면서도 편지에서는 굽신거리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시는 쓰고 싶은 내용과 실제로 쓴 내용이 괴리된 채 공존하는 심리적 장소가 된다.
  「Beautiful Stranger」의 표층 서사에는 마약(혹은 마약으로 표상되는 모든 상품)에 중독되어 자기 삶의 통제력을 잃어버린 자와 그들의 중독으로 자본을 증식하는 자의 기울어진 관계가 있지만, 중독자와 판매자는 일대일 관계를 넘어 개인과 사회라는 보다 확장되고 구조화된 상징적 관계로 이어진다. 그러나 누구나가 예상할 수 있듯 화자의 호소는 어디에도 닿지 않을 것이다. 소비자의 선택이 자발적이었던 것처럼 판매자의 선택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가 소비한 것이 그가 동의하지 않은 중독의 사슬이라 할지라도, 그 사슬이 모종의 구조로 소비자를 속박한다 하더라도, 그로 인한 ‘부작용’은 온전히 소비자의 몫이다. 어느 틈에 노예가 되어버린 소비자는 소비자 다음 단계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기실 그다음 단계라는 것은 설계되어 있지 않다. 그다음 단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상품성은 훼손된다. 그다음은 실재하되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인식되지 않는 영역이 된다. 만들어진 사각지대가 되는 것이다. 그 영역이 인식되는 것은 소비자를 필요로 하는 다른 영역에 의해서다. 이를테면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곳. 다른 한편에 중독자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 그들을 치료하는 곳이다. 소비자는 더이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소비할 수 없을 때 환자가 된다. 세상이 소비자를 필요로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또 한편의 세상이 환자를 필요로 한다. 소비자였던 그들은 이제 환자가 된다.


2. 변이 나르시시즘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나르시시즘의 고통』1)에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이후의 인간들은 유아론적 이상 자아에 집착하는 나르시시즘에 경도되어 있다고 본다. 이때의 나르시시즘은 기존의 프로이트적 개념으로서의 나르시시즘과는 다소 구분된다. 그가 강조하는 나르시시즘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심리적 개념으로서의 나르시시즘, 즉 자기애로서의 나르시시즘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사회적인 개념으로서의 나르시시즘을 의미한다. 사회적 나르시시즘은 말 그대로 사회가 조장하며 생성한 나르시시즘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반나르시시즘적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대는 개인을 거대 이념, 공동체적 가치관으로부터 분리시켜 고독한(사실은 고립된) 자기 경영의 주체 혹은 소비 주체로 환원시킨다. 이로써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새로운 종류의 유아론이 세상과 자아의 관계, 자아와 자아와의 관계를 지배하는 담론이 된다. 이졸데 카림은 이러한 자기 인식을 나르시시즘이라 호명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상을 띠는 사회적 나르시시즘이 출현한 이유는 뭘까. 객관적 권위, 진리, 공동체적 윤리, 이른바 ‘초자아의 문화’라 불리던 힘들이 쇠락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부장적 권위의 해체이자 집단적 초자아상의 약화, 즉 내적 검열관의 약화로 인해 본능의 유예가 해제되고 카오스적, 충동적 성격이 멋대로 날뛰게 됐다는 것이다. 약화되다 비어버린 자리에 나르시시즘이 들어선다. 나르시시즘은 이제 엄연한 사회적 원칙으로 자리잡는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나르시시즘은 인간 실존의 보편적 표상이 된다. 어떤 사람만 나르시시스트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집단적으로 나르시시스틱한 시대다.
  그런 한편 이졸데 카림은 나르시시즘에서 현재적 의미, 즉 새로운 인식의 기제로서의 역할을 발견한다. 나르시시즘의 사회화, 사회화된 나르시시즘을 다만 문화적 교란이나 구질서의 쇠락으로만 규정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계 관계와 자기 관계의 부상으로 보는 것이다. 요컨대 결여와 병증으로서의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의 한 형식으로서 나르시시즘을 파악하는 것인데, 그 핵심에 있는 것이 바로 자발적 복종이다. 1차 나르시시즘이 유아기 초자아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라면 2차 나르시시즘은 사회적 인정에 기반한 자아 이상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다. 2차 나르시시즘에 이르러 우리는 자신에게 기준으로 주어지는 완전함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운다. 자발적으로 복종한 만큼 기준을 충족하는 데에 실패할 경우 양심의 가책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을 겪는다. 파괴적 열등감과 광범위한 모욕감이 대표적이다.
  당연하게도 실패는 불가피하다. 이상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끊임없는 접근과 필연적 실패를 노정한다. 인간 실존의 보편적 이상으로서의 나르시시즘은 이제 우리에게 보편적 감정으로서의 열등감과 모욕감을 제공한다. 개인의 주체성을 앞세우며 근대의 세계관이 확립된 이래 자아의 분열, 자아와의 불화가 문학적 화두에서 벗어난 적은 없지만 그 분열과 불안이 나르시시즘적 고통 속에서 해석되는 것은 근래의 작품들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신이인의 『검은 머리 짐승 사전』을 비롯해 근래의 데뷔 시집에서 읽을 수 있는 감정들에는 공통적으로 나르시시즘적 고통이 있다. 그들은 사회적 인정 시스템을 내면화하며 자발적으로 승인한(복종한) 이상적 자아와 대결한다. 당연히 실패하고, 또한 괴로워한다.


3. 모멸 괴담

신이인의 「올드 앤드 뉴 트라우마」는 이 시집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시다. 화자는 건물의 38층에서 스스로 뛰어내린 27세 여성을 만난다. 여성은 화자가 서 있는 곳의 통유리 바깥에 서 있다. “이 괴담을 누가 믿어줄까.”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어지는 다음 행에서는 여성의 사연이 소개된다. 마치 그 여성이 들려주는 것 같은 목소리로 그녀의 사인일 수도 있을 만한 가혹한 삽화가 드러난다. 165센티미터에 46킬로그램이라는 ‘이상적’ 피지컬의 소유자인 여성은 흰 유니폼을 입고 일을 했다 한다. 여성의 일은 낡은 사람들을 “빈티지” 하다고 말하는 것이고, 젊은 자신이 “빈티지”한 그들의 친구라고 말하는 것이다. “낡음”은 늙음의 기능적 쇠락을 강조하며 상품성 없음을 드러내는 단어인 반면, “빈티지”는 늙음의 가치를 강조하며 고가의 상품성을 드러내는 단어이다.
  여자는 자신에게 ‘서비스’ 받는 사람들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도록 자신의 태도를 연습한다. 그 과정에서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일상적인 모멸감에 노출되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나르시시즘적 사회에서 이상적 자아는 늙음이 ‘빈티지’의 개념으로 치환되기를 바라지만 현실의 자아는 끊임없이 “낡음”을 직시한다. 그 반복 속에서 나르시시즘적 고통이 탄생한다. 그러나 고통은 그낭한 한 외면된다. 이 시는 그 사이를 매개하는 기만적 회로가 존재하며, 그 회로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데다, 언어적 현실이 실제적 현실로 인식되게 만드는 구체적인 사람이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의 서비스와 여성의 존재가 바로 그 언어적 현실을 구체적 현실로 치환시켜 준다.
  동시에 펼쳐지는 또다른 이야기는 헌옷수거함에 간 새옷이다. 한 번도 입혀진 적 없는 새옷이지만 헌옷수거함으로 들어갔으니 영락없이 헌옷으로 규정된다. 헌옷이 그 이름에 부합하는 존재가 되려면 다시 사람의 몸에 입혀져야 하고, 그러자면 유행이 다시 돌아야 한다.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다. 젊은 여성이 시간이 흘러 늙은 여성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헌옷이 된 새옷도 진짜 헌옷이 되기 위해 시간이 흐르길 바란다. 이들에게 미래는 가능성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가 사라진다는 점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최소한의 미래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현재를 포기한다. 현재가 주는 ‘모멸감’ 때문이다. 타인으로부터 무시당하거나 얕잡아 보일 때 사람들은 모멸감을 느낀다. 함부로 호명될 때 그 호명 속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모멸감을 느낀다.
  ‘빈티지’라는 상품화된 개념 속에서 낡음이라는 개념은 그 실체가 휘발된다. 그후에 남은 것은 기만적이고 실체 없는 언어적 교환 행위뿐이다. 여자의 죽음과 절망도 마찬가지다. “뛰어내렸는데 떨어지지 못한 모멸”이 그녀의 선택과 그녀의 죽음이라는 실체를 휘발시킨다. 「올드 앤드 뉴 트라우마」가 수록작들을 대표할 만한 시편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 시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언어적 패배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실체를 드러내는 진실의 통로가 아니라 실체를 은폐하는 기만의 통로로 기능하며 현실을 왜곡하는 굴절된 장치가 된다. 언어는 인간을 왜곡 상태에 적응하도록 속여 나르시시즘적 고통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왜곡 장치의 일부로 소모된다.


4. 자발적 고장

마음대로 사용하고, 사용을 중단하고, 그 이후는 상관하지 않는 세상에 대해 주인공이 응전하는 방식은 대칭적 복수다.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재고를 없애버리는 것, 한마디로 고장나는 것이다. 일종의 ‘보이콧’, 혹은 제공 안 함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선택. 시집의 앞과 뒤에는 각각 「마음가짐」과 「검은 머리 짐승 사전」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두 편의 시는 공통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마음가짐」은 작가가 독자에게 일러두는 말의 형태를 띤다. 앞으로 당신이 읽게 될 이 책 속 이야기는 허구라는 것과, 혹시라도 이 내용 중 어떤 것에 현실과의 유사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우연이거나 “독자의 망상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는 것이 그 내용의 전부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OUT OF SERVICE”라는 일종의 ‘경고문’이 붙어 있다. 서비스 안 함. 고장났음. 이 시의 마음가짐이란 ‘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불량품으로 세팅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부분은, 시와 시집, 통칭하여 ‘문학’을 둘러싼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맥락들이 상품과 소비재, 소비자와 생산자로 환원되는 바로 그 논리를 활용해 스스로를 생산자라는 지극히 편협하고 부분적인 의미로 축소 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나르시시즘적 고통에서 탈출하는 방식으로 시인은 자발적으로 상품성을 상실함으로써 사회로 하여금 창작자가 사라지는 결핍을 경험하게끔 한다. 사회로 하여금 창작자의 부재와 그로 인한 결핍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책의 말미에 수록된 시 「검은 머리 짐승 사전」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어떤 책임도 방기하는 ‘시인’이 등장한다.
  제가 작가가 된 것은 저의 잘못이 아니에요. 가까이에서 말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너무 남을 탓하지 마시고, 천천히 둘러보세요. 페이지마다 기념할 만한 품종을 재현해두었습니다. 그냥 인형이 아니고 약품 처리까지 다 된 진짜 가죽이에요. 안고 자면 큰 위로가 되겠지요? 자기 쓰레기감은 됐어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언젠가 달아났을 애들이잖아요?

  이제는 굳이 말을 고르지 않습니다. 막, 공들여, 애써서 얘기하지 않아요.

―신이인, 「검은 머리 짐승 사전」 부분

이 시는 짐승에 대해 말하려는 화자가 그 과정에서 겪는 고민에 대해 토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신이 아는 큰 짐승에 대해 사실적으로 말하려다보니 그 대상들에게 미안해진 화자는 덜 미안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예쁘게 말하는 법”을 터득한다. 예쁘게 말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한편으로, 그것이 거짓말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요컨대 ‘나’는 사이에 있다. “팜나무가 필요한 오랑우탄과 플라스틱을 삼킨 바다거북 이야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스크린”의 세계와 “동글동글 폭신폭신한 동물 인형들”을 쌓아놓는 “선물 가게”의 세계 사이에 ‘나’는 있다. 그러나 화자가 말하는 짐승을 닮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 짐승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스크린의 세계도 원하는 사람이 있고 선물 가게의 세계도 원하는 사람이 있지만 “예쁘게 말하는 법”을 고민하거나 말거나 하는 문학의 세계는 원하는 사람이 없다. ‘나’는 이제 “굳이 말을 고르지 않”으려 한다.
  시집 『검은 머리 짐승 사전』에는 폐기할 것이라고는 자신밖에 없는 자의 절박한 자들의 벼랑 끝 목소리가 다채롭게 재현된다. 그러나 신이인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은 반사회적 목소리와는 차이가 있다. 그들은 차라리 누구보다 사회적이었으나 그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스스로의 기능을 멈추기로 한다. 그러나 이미 사회의 인정이 중요한 기준으로 내면화된 사람들이 그 사회를 벗어나 독립된 세계를 일궈나가기란 요원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들의 정지상태가 비극적인 건 그 정지마저 사회에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때 사회에 부재의 경험을 제공하는 신이인의 방식은 일견 수동적인 공격처럼 보인다. 혹은 유아적인 일탈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방식을 나르시시즘이 인간 실존의 보편적 표상이 된 시대의 적극성이라 볼 수는 없을까.


5. 나르시시즘 시대의 중립자세

객관적 기준이 사라진 시대, 이른바 초자아의 문화가 사라진 시대, 나르시시즘이 인간 실존의 보편적 표상이 된 시대에 우리를 이끌어가는 준거 기준은 자기 자신이 유일하다. 그러나 자신을 기준으로 삼고 자신을 목표로 삼고 자신을 이상으로 삼을 때 동반되는 상시적 불안 역시 인간 실존의 보편적 고통이 된다. 나르시시즘 시대의 절망은 시에서 어떤 현실로 드러날까. 때로 그것은 글쓰기의 과정에 빗대어 표현되기도 하고, 미래의 꿈을 상상하는 궤도를 통해 표현되기도 한다. 박참새 데뷔 시집 『정신머리』(민음사, 2023)에 수록된 시 「창작 수업」과 강보원 데뷔 시집 『완벽한 개업 축하 시』(민음사, 2021)에 수록된 시 「작은 공터의 미래」를 같이 읽어보는 것은 사회적 개념으로서의 나르시시즘의 고통이 시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시적 상황 속에서 발견되는 감정을 중심으로 현실과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금칙 같은 것들이 있죠, 예를 들면
  선생님 쓰지 않기
  설명하지 않기
  단언하지 않기
  미리 생각하지 않기
  주어를 똑바로 잡되 ‘나’는 쓰지 않기
  시에서 시 얘기하지 않기(구림)
  꿈 얘기 쓰지 않기 (사실상 치트키)
  (비겁하고)
  ㅋㅋ 웃겨 정말
  지들은 다 해놓고선

―박참새, 「창작 수업」 부분

「창작 수업」은 제목처럼 시쓰기 수업 현장을 소재로 쓰인 시다. 이 시에서 대립하는 것은 스승과 제자다. 소위 좋은 시를 쓰기 위해 지켜야 할 방법들과 그 방법이 실제적 힘을 갖지 않는 현실이다. 이 방법은 오랜 시간 동안 ‘창작론’이라는 형태로 이어지며 문학이란 무엇인가, 시란 무엇이며 무엇은 시가 아닌가에 대한 공통 기준을 발효시키는 최소한의 법칙으로 작용해왔던 ‘힘’이다. 그러나 그 많은 규칙이 일순간에 모순과 기만의 규칙들, 현실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교실 안에서만 간신히 이야기될 수 있는 죽은 법칙으로 조소되며 창작의 세계에서 사실상 기각된다. 이때 조소의 근거는 창작의 방법이 가지는 구체적인 실효성의 여부가 아니다.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들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자들,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는 힘으로 존재하는 당사자들이 정작 그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소한의 ‘권위’도 인정되지 않는 세계에서 그러나 아직은 ‘창작 수업’이 행해지고 있을 때, 이 수업은 나르시시즘적 고통의 현장이 된다.
  강보원의 「작은 공터의 미래」는 일종의 ‘나의 꿈 소개서’다. “앞으로의 30년 미래에 대해 5년 단위로 작성”되는 조건에 따라 기술된 자기 꿈 소개서. 현재 서른 살인 화자는 서른다섯 살까지 학업을 마치고 여자친구와 결혼해 투룸을 구해 사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마흔까지는 열심히 일해서 노후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식물 관련 서적을 틈틈이 읽고 길을 가다 보이는 나무와 풀들의 이름을 맞히는 연습을 하며 지낼 계획도 세운다. 마흔다섯 살까지는 학자금대출과 전세금대출을 완납하고자 한다. 그런 다음에는 베란다에 화분을 놓고 작은 정원 만들기를 연습할 생각이다. 쉰 살까지는 정말로 정원을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베란다가 되었든 작은 공터가 되었던 그곳에 작은 정원을 만드는 게 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든 작은 정원을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든 다음에는 무료로 시민들에게 개방할 생각이다. 그렇게 예순 살까지 정원을 즐긴 뒤에는 자신이 만든 정원을 다시 골목의 작은 공터로 되돌려 놓고자 한다.
  「작은 공터의 미래」는 꿈의 노정에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배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낭만적인 ‘공유’의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인 결론에 가깝다. 시의 화자는 학자금대출을 받아서 공부를 했다. 과정을 마친 다음에는 오랜 시간 빚을 갚는다. 화자는 또 전세금대출을 받아서 집을 장만한다. 역시 오랜 시간 동안 빚을 갚는다. 꿈이라고 다를 수 있을까. 꿈을 꾸기 위해서 공공으로부터 재화를 제공받는다. 그것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경험한 뒤, 자신이 받은 것을 받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결과물로 돌려준다. 자아를 기준으로 이상을 만족하고자 할 때 경험하는 열등감과 모멸감, 기만과 분노 대신 그 기준을 자아도 초자아도 아닌 ‘공공’의 지대로 옮겨두면 공터의 미래로 상징되는 인간의 미래 역시 이런 모습이 아닐까.
  다시 신이인의 시를 한 편 더 읽어본다. 강보원의 시에서 “공터”로 드러난 제3지대가 신이인에게는 “도자기 컵”에서 나타난다. 「폴터가이스트」는 도자기 컵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조명하는 시다. ‘폴터가이스트’는 ‘poltern’(노크하다)과 ‘geist’(영혼)라는 말의 합성어로, ‘시끄러운 영혼’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인지할 수 없는 대상에 의해 물건이 움직이거나 소음이 발생하는 등 물리적 작용이 일어나는 현상을 가리키는데,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영적 존재의 등장이 물건을 움직인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영혼이나 귀신이 아니라 억제된 분노나 적개심 또는 성적 긴장 상태로 고통받는 사람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는 심리기능장애이론도 있다.
  「폴터가이스트」에서 화자는 손 닿을 곳에 가만히 있는 도자기 컵을 바라본다. 컵을 둘러싼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한다. 이 시는 도자기컵이 아니라 도자기컵 주변에 있으면서 자신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본다. 화자에게는 도자기컵이 아니라 “당신이 중요”하다. “당신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고 그러므로 이 도자기 컵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나’는 아무런 변화도 읽히지 않는 당신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엎질러지고 싶다”거나 “튀어나오고 싶다”거나 “손을 흉내내고 싶다”거나 “벼락같이 끌어안고 싶다”거나 “추적추적하게 만들고 싶다”거나 하는 기분들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일 수도 있고 도자기의 마음일 수도 있고 당신과 도자기가 아닌 제3존재의 마음일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을 존재의 공터라 부르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누구의 마음으로도 특정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의 것도, “당신의 것도”도 “도자기 컵”의 것도, 그러나 그 모든 것일 수 있다. 「폴터가이스트」가 특정할 수 없는 존재의 “있음”을 감지하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면 폴터가이스트적 존재는 ‘나’라는 무게중심이 과부하를 일으켜 나르시시즘적 고통 속에서 병들어가는 심리 상태에서 비롯된 새로운 인식법일 수도 있다. 존재의 공터를 시적 상황으로 재현하는 것이 부재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일 때, 사회에 부재의 경험을 제공하는 신이인의 방식 또한 새로운 적극성으로 호명될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박혜진

문학비평집 『언더스토리』와 서평 산문집 『이제 그것을 보았어』가 있다. 민음사 문학팀에서 편집자로 일한다.

나르시시스트가 심리학적 개념을 뛰어넘어 사회학적, 문화적, 정치적 개념으로 확장 또는 일반화되고 있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문학에서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자기 파괴적인 모멸감, 해소할 수 없는 열등감, 대상을 잃은 적개심. 그 불안한 감정의 진폭을 근래의 데뷔작 속에서 따라가보고 싶었다.

2024/10/16
69호

1
이졸데 카림, 『나르시시즘의 고통』, 신동화 옮김, 민음사, 2024. 이하 사회적 나르시시즘에 관한 내용은 이 책의 내용을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