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청록색 유리병을 닦으면서 물이 아닌 다른 것을 담고 싶어졌다. 이를테면 거짓말을 빽빽하게 적은 만 원 지폐 같은 것. 팔랑팔랑 한 장씩 담으면서. 유리병을 채운 그 돈으로 무엇을 해볼 수 있을까 알고 싶었다.

  우리가 오랜만에 봤던 영화에는 파란 나무가 있었다.
  파란 나무를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파란 페인트가 칠해진 나무였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그는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 파란 나무를 도끼로 내리쳤다. 페인트 가루가 그의 옷과 머리카락에 달라붙었다. 그는 기침을 하며 잘린 나무를 트럭에 싣고 집으로 갔다. 나무로 식탁과 의자를 만들어 식사하고 생활하면서 그는 만족했다.

  영화가 끝나고
  너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알 것 같다고 했는데. 나는 파란 나무의 마음을 영영 알 수 없을 것 같아서. 우리는 다투었어. 우리는 왜 그런 것에 자신을 쉽게 투영할까. 투영해놓고 왜 괴로워할까.

  나는 네 마음을 알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날은 없었다.

  넌 언제나 있는 그대로 말했으니까. 있는 그대로라는 건. 네가 주머니에서 모노클을 꺼내 왼쪽 얼굴에 가져다 대는 것. 뺨과 눈썹 사이에 끼우고 왼쪽 눈으로만 세상을 확인하는 것. 네가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것을 내가 선택할 수 없다는 것.

  그때는 영화표가 만 원이었다.

  내 것이 아닌 문장만 갖고 싶어서 물과 빛에 대해 자꾸 썼다. 물에 반사된 빛이 어지럽게 반짝이고 그 사이로 돌이 가라앉습니다, 라고 쓰인 것을
  돌에 스며든 빛이 축축해지고 물은 어둠에 가까워집니다, 라고 만 원 지폐에 옮겨 적어 유리병에 넣었다. 그렇게 돈이 차오르는 유리병을 목이 마를 때마다 들여다봤다. 바싹 마르고 건조한 계절에는 도마뱀이 되고 싶었다. 눈꺼풀에 맺힌 땀을 혀로 훔쳐먹으면서 사막을 건너고 건너면서 한 번도 발자국을 돌아보지 않고 싶었다.

  페인트 냄새는 나무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쉬지 않고 일하면서 어색해졌다. 어색이라는 건. 입김으로 불어 만든 유리병을 손에서 놓쳐 깨트리는 일. 목구멍이 비명을 지르며 허락도 없이 제 역할을 하는 일. 만들고 부수는 숨이 얼마나 가까운지 깨닫는 일.

  네 주머니에서 모노클을 빼내
  내 오른쪽 눈에 가져다 대면 보이는
  파란 식탁과 파란 의자
  한 사람이 앉아 퍼렇게 멍든 발등을 내려다본다.

  흩어진 유리 조각과
  멀리서 보면 나뭇잎 같은
  만 원 만 원

  버스를 타고 일하러 가는 길에는 회전교차로를 지났다. 한강공원 근처였다. 둥그렇게 돌면서 얼핏 강과 초록을 느꼈다. 이렇게 가끔 기울어질 뿐인데. 사랑하는 것들이 나를 사랑하는 속력으로 치고 지나갔다.

이실비

202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지만, 5년 전에 친구들과 독립문예지 《보라색씽크홀》을 만들며 시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수은아, 네가 그랬지. 시를 쓴다는 건 우리 가슴에 쾅 내려와 박힌 장면 속으로 한 사람을 밀어넣는 일 같다고. 우리는 그 사람과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2024/09/18
6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