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틀에 빗물이 고여 있으면 손끝을 담가봐

  지워질 걸 알면서도 입김을 불어 나의 얼굴을 그리지
  밉더라도 헝클어진 머리칼, 넘어져서 생긴 흉터
  이목구비 어느 것도 빠뜨리지 않아
  그것도 나니까

  너의 실없는 농담 재미없지만 그냥 한번 웃어
  어려운 거 아니니까
  웃다보면 잠깐은 모든 게 사소해지기도 하니까

  나는 두 다리가 아플 때까지 걸어
  걷다보면 모르는 아파트 단지
  낯선 간판과 사람들
  알 수 없는 거투성이지만
  내가 또렷하게 보여
  지울 수 없는 내가

  때로는 눈을 감고
  때로는 눈을 떠
  조금 더 볼 수 있으면 봐
  그러곤 되돌아가

  움직이면 뒤꿈치 힘줄이 균형을 잡아줘
  내 몸이 만들어낼 수 있는 어둠의 크기로만
  그림자가 따라와

정다연

201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햇볕에 말리면 가벼워진다』와 산문집 『마지막 산책이라니』가 있다.

2024/09/18
6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