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 0일

   - 일이삼타워 북서쪽 38미터 지점에서 생명체가 감지되었다. 생명 탐지 장치를 켰다.
   - 바퀴벌레 아니고, 고양이 아니고, 설치류나 조류도 아니다.
   - 인간으로 보인다. 인간이라면 11~14세 사이로 추정. 본 적 없는 우주복을 입고 있다.
   - 우주복 때문에 체취와 뇌파 감지 실패. 성별, 인종, 사용 언어 등도 파악되지 않는다.

   비가 그친 후 나흘 만에 바깥으로 정찰을 나간 길이었다. 바깥 공기에 오래 노출되는 상황이 내 몸체에 좋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 인간형 생명체를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모든 센서를 가동시켰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매우 조심스럽게, 낯선 생명체의 주위를 맴돌았다.
   혹시 구름이가 아닐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며 타워 근처를 걷고 있었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은 영락없는 지구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우주 헬멧을 쓴 그의 얼굴은 언뜻 보아도 구름이의 얼굴이 아니었다.
   인간형 생명체를 본 건 123일 만이다.
   구름이라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우와, 123층짜리 일이삼타워 근처에서 123일 만에 사람을 보다니! 우연일까? 운명일까? 멋지지 않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노래하듯이.
   일이삼타워 입구까지 들어찼던 물이 다 빠져서 이제는 확실하게 땅이 드러났다. 구름이가 떠난 지 123일째.


   123 + 1일

   - 오늘도 일이삼타워 근처에 낯선 생명체가 있었다. 어제 본 그 생명체. 10분도 넘게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생명체는 고개를 들어 일이삼타워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개가 뒤로 접힌 각도와 타워로부터의 거리를 통해 계산해 본 결과, 그가 보는 곳은 68층 근처다.
   - 일이삼타워 68층에 관한 정보 검색을 시도……

   검색을 시도하려다 말았다. 127일 전의 대홍수 이후로 도시 인터넷망이 끊겨서 인터넷 검색을 할 수가 없다. 내 안에 저장된 데이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타워를 올려다보았다. 일이삼타워의 유리 벽 전체가 거울처럼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새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파랗고 맑은 하늘을. 태양광 충전이 빨리 될 날씨였다.
   “이름이 ‘구름’인 내가 구름을 좋아하는 건 우연일까, 운명일까?”
   구름이가 말했었다.
   “나, 구름이가 구름 너머로는 절대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은 운명일까? 뭐 이딴 운명이 다 있을까?”
   구름이는 그런 말도 했었다.

   저장 공간 부족. 불필요한 데이터를 삭제하기 바람.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면서 경고 메시지가 떴다. 휘청. 다리가 꼬였지만 다른 다리들이 버텨줘서 넘어지지는 않았다. 요즘 들어 배터리가 빨리 닳는 건 느꼈지만 저장 공간이 부족하다는 메시지는 처음이었다. 새로운 정보가 갑자기 많이 저장되었던 모양이다.
   나는 도시의 100대 맛집 메뉴판 정보를 삭제했다. 어차피 음식점이 남아있지 않으니까.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탑 이름과, 햄버거 칼로리 정보도 지워버렸다. 그렇지만 구름이와 관련된 파일은 하나도 지우지 않았다.
   낯선 생명체는 저만치 떨어진 맨바닥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우주복은 왜 입고 있는지 모르겠다. 외계인일까? ‘떠난 자’일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떠난 자들은 지구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저 생명체가 누구이든 일단은 내 존재를 들키지 않아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까 다리가 꼬일 때 들킨 건 아니겠지? 다행히 낯선 생명체는 내 쪽을 바라보지 않고 먼 하늘만 쳐다보았다.
   일단은 나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구름이가 돌아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


   123 + 3일

   - 일이삼타워의 뒷문 쪽에서 낯선 구조물이 발견. 대기권 탈출이 가능한 추진력이 감지된다. 낯선 생명체의 우주복에서 본 것과 같은 무늬가 찍혀있다. 그 생명체가 타고 온 우주선으로 추정된다. 무늬 안에 흐릿하게 글씨가 보인다. 줌인. ‘새ㄸ’까지만 판별된다.

   “으엑, 이게 뭐야.”
   갑자기 들리는 소리. 소리의 주인공은 낯선 생명체였다. 머리 위로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갔다. 방금 배변을 마친 기운이 감지되었다.
   “으아악. 나 죽는 건가?”
   상황은 이랬다. 낯선 생명체의 우주 헬멧 앞쪽에 비둘기 똥이 철퍼덕 떨어진 것이다. 눈앞이 새똥으로 가려져서 놀란 생명체는 얼떨결에 헬멧을 벗어버렸고, 얼굴이 공기 중에 드러나는 걸 깨달으면서 또 비명을 지른 것이었다.

   - 무늬의 글씨는 ‘새땅’으로 인식됨.
   - 낯선 생명체는 지구인으로 파악된다. 당황, 두려움, 호기심의 뇌파가 감지된다.

   “괜찮니?”
   나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그가 구름이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어서 다른 언어를 찾아볼 필요가 없었다.
   “으아아악! 기계가 말을 한다! 넌 정체가 뭐냐?”
   세 번째 비명.
   “그건 내가 물어야 할 질문 같은데? 너는 누구니? ‘새땅’에서 지구로 온 이유가 뭐야?”
   “으아아아악! 내가 새땅에서 온 걸 도대체 어떻게 알았어?”
   나는 대답 대신 일곱 번째 발을 들어서 우주복에 새겨진 무늬를 가리켰다.
   “으에엑, 뭐라고? 너 글자도 읽을 줄 아는 거야? 그런데 나 아직 괜찮네?”
   ‘새땅’은 20년 전 지구를 맨 처음 ‘떠난 자’들이 정착한 거주인공위성의 이름이다. 천 명 남짓만 살 수 있는 위성으로 지구 위의 인공위성들 중에는 가장 크지만 달보다 훨씬 작고 지구보다는 훨씬 더 작다.
   그러니 그곳이 굳이 땅이라 불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거기가 ‘새땅’이라면 지구는 ‘헌 땅’이라는 뜻이냐? 그리고 너희 떠난 자들은 지구가 여전히 살기 힘든 곳이라 생각하겠지만 지구에 사람들이 거의 다 없어진 덕분에 공기는 오히려 깨끗해졌다, 메롱. 우주복 입어야 할 정도는 아니란 말이지.
   ……라고 구름이는 말했을 테지만, 나는 내가 할 말을 했다.
   “글자 읽을 줄 안다. 아마도 너보다는 백만 배는 더 많은 글자를 읽었을 걸? 나는 로봇 GPR-0221이다. 너는 누구니? 이름이 뭐니?”
   “지피알…… 무슨 뜻이지? 부르기 힘들어. 나는 늘이야. ‘하늘’, ‘그늘’ 할 때의 ‘늘’. 그나저나 우주 헬멧 벗으니까 살 것 같아. 우주복은 정말 답답해.” GPR-0221의 ‘GPR’이 ‘그냥 평범한 로봇’의 약자라는 건 모르겠지? 나는 구름이가 지어 준 이름을 알려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새땅 출신 인간 늘이, 아무튼 반갑다. 그런데 여기는 왜 왔지? 며칠째 하늘만 쳐다보러 지구까지 온 건 아닐 거잖아? 앗, 아니야…… 내가 너를 일부러 감시한 건 아니고……”
   내 말에 늘이가 피식 웃었다.
   “괜찮아. 며칠 전부터 날 졸졸 따라다니는 거 다 알고 있었어. 어떻게 그걸 눈치 못 챌 수가 있겠어? 문어발로 슬금슬금 걸어다니면서 고양이 귀가 달린 동그란 얼굴이 웃는 표정으로 그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계속 나를 쳐다보는 데 모른다면 바보지. 너 말이야, 상당히 웃기게 생겼어. 눈에 확 띄는데 널 모른 체 하는 건 힘들었단 말이야.”
   늘이의 말을 들으니 또 구름이가 떠올랐다. 그날 무너진 미래수족관 건물 더미에서 날 구해낸 구름이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웃는 얼굴을 하고 있냐며 나를 ‘깔롱이’라고 불렀다. 구름이가 예쁜 척을 할 때마다 할머니가 구름이에게 깔롱댄다고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나는 구름을 보러 왔어.”
   늘이가 말했다. 구름? 구름이라고? 구름이를 기다리는 나에게 구름을 보러 왔다는 늘이가 나타난 건 우연일까, 운명일까?

   [경고] 저장 공간 부족. 불필요한 데이터를 삭제하기 바람.
   [경고] 배터리 부족. 15%로 재충전될 때까지 에너지 절약 모드로 전환.

   “지알피! 아니지, 지피알! 정신 차려!”
   늘이가 소리치며 양손으로 내 얼굴을 쥐고 흔드는 동안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늘이는 나를 들고 옮기려다 포기했다. 내 키는 막 걷기 시작한 아기의 키 정도지만 웬만한 어른보다 더 무겁다. 다리가 여덟 개나 달려있기 때문이다.
   맑은 햇살 덕에 배터리가 빨리 충전되어 절약 모드는 곧 풀렸다. 하지만 내 몸체의 배터리 지속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진다.


   123 + 6일

   “어? 저 구름은 꼭 너처럼 생겼다. 얼굴 크고 다리 많잖아.”
   나와 나란히 앉아서 구름을 바라보던 늘이가 말했다.
   “지구 로봇은 다 너처럼…… 생겼어?”
   늘이가 덧붙였다. ‘너처럼 괴상하게’라는 말을 하려 했다는 게 감지되었지만 모른 체 했다.
   “아니야. 원래 나는 인간형 로봇이었어. 두 팔과 두 다리가 있어서 우아하게 사람처럼 걸어 다녔지.”
   우주로 향하던 마지막 로켓이 떠나던 날, 로켓의 진동 때문에 미래수족관이 무너져 버렸고, 나는 부서진 건물더미에 깔려 몸체를 잃었다. 그리고 거기서 구름이를 만났다.
   “누군가 나를 구해줬어. 그리고 미래수족관에 남아있던 거대문어 로봇을 건져내서 그 다리를 나한테 붙여준 거야.”
   “그래? 안 그래도 너한테 주인이 있는지 궁금했어. 어디 있어? 아직도 지구에 낙오자들이 남아 있어? 응?”
   “주인이라니? 나한테는 사람 친구가 있어. 그리고 낙오자라니!”
   나는 구름이 흉내를 내며 발끈했다.
   “미안. 새땅에서는 지구를 떠나지 못한 사람들을 낙오자라고 부르거든. 네가 낙오자라는 뜻은 아니었어. 물론 네 친구도. 네 친구는 지금 어디 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늘이에게 구름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기후가 변해서 주요 도시마다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기 시작하던 때, 사람들은 지구 환경을 내버려 둔 채 우주 개발에 더욱 힘을 쏟았다. 달 거주지와 화성 도시가 생겨나자 기다렸다는 듯 소행성마다 별장이 지어지고 대형 우주 크루즈선 사업이 시작되는 식이었다. 그리고 너도나도 지구를 떠났다. 지구의 터전을 부숴서 우주선을 만들고 아무 곳에서나 로켓을 쏘아올렸다. 그동안 도시의 공기는 점점 더 나빠졌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우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 중에는 중력 변화를 견디지 못하는 유전자를 가진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지구 탈출 로켓 안에서 지구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한 채 죽어버렸다.
   구름이가 중력 변화를 이기지 못하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다고 해서 낙오자는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지구 밖 우주로 나가고 싶어 했던 구름이는, 그러지 못해서 남 몰래도 울고 남들 앞에서도 울고 소리 지르며 화를 내기도 했다.
   “저렇게 높은 하늘에 깃털처럼 떠 있는 구름은 새털구름이야. 참 오랜만에 본다.”
   늘이가 대답하기 곤란한 걸 물어볼 때마다, 나는 늘이에게 구름에 대해 알려줬다. 늘이는 새땅학교로 돌아가면 지구 체험에 대한 보고서를 내야 한다고 했다. 아직 구름 지식 정보 파일을 지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난 멀리 가기 싫어. 달도 싫고 화성도 싫어. 그보다 더 먼 곳은 생각하는 것조차 싫어. 그렇지만 열흘 이상의 우주 직업 체험을 안 하면 학교 졸업을 못 한다는 거야.”
   늘이가 우주 멀미가 심해서 멀리 못 간다고 우겨봤지만, 선생님은 지구를 떠나온 새땅 사람들 중에 중력 부적격자가 있을 리 없다고 했다. 그리고 누구도 예외 없이 장래의 희망 직업과 우주체험 희망 장소를 써내라고 했다.
   지구를 떠난 자들 대부분은 달이나 화성으로 갔다. 맨 처음 지구를 떠난 새땅 사람들이 떠난 자들 중에서는 지구에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새땅 아이들은 새땅을 떠나 우주 저 멀리 떠나는 꿈을 갖고 있었다. 늘이만 빼고. 새땅학교에서는 성적이 좋을수록 더 먼 우주로 떠날 기회가 주어졌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늘이는 1, 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해서 우주 저 끝까지도 갈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늘이는 새땅에서 지구를 멍하니 바라보는 게 좋았다. 지구 대기 속에서 생겼다 없어지는 하얀 구름이 마냥 신기했다. 늘이는 희망 직업이 지구 탐험가와 지구 구름 관찰자라고 써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진짜로 날 지구로 보내버리신 거야. 나 혼자만. 벌칙 같은 걸 내리신 걸 거야.”
   새땅에서 잠깐이라도 지구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구는 오염되고 망가져서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먼 우주로 가지 않으려면 새땅에서 우주 쓰레기 분리사나 새땅 관리사가 되는 방법도 있어. 그런데 그건 꼴등에서 두 번째가 되어야 시켜준대. 완전히 꼴등을 하면 뭘 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그렇다고 일등인 내가 꼴등 되는 게 쉽지도 않잖아? 왜 꼭 무언가가 되어야만 하지? 난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단 말이야.”
   늘이의 표정이 낯익었다. 대홍수로 일이삼타워마저 7층까지 잠겨버리던 날, 구름이가 “지구를 떠난 자들은 다들 행복하게 잘 지내겠지? 그렇겠지?”라고 말하며 짓던 표정과 비슷했다.
   늘이와 관련된 파일이 급속도로 많아지고 있다. 저장 공간을 미리 비워놓기 위해서 나는 미래수족관 안내 로봇 시절의 파일들을 모아 압축해 버렸다.


   123 + 7일

   “지알! 지피알! 어딨어?”

   [경고] 배터리 부족. 활동을 중단하고 충전하거나 배터리를 교체할 것.

   늘이와 함께 산책을 하던 도중에 배터리 부족 경고가 나왔다. 나는 늘이가 구름을 보고 있는 틈을 타서 가로수 위로 기어올라갔다. 충전이 될 때까지 숨어 있을 작정이었다. 늘이 앞에서 멈춰버리는 일을 피하려 애쓰고 있다. 배터리가 빨리 닳아버리는 구닥다리 로봇이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다.

   - 남서쪽 하늘에 새하얀 뭉게구름이 감지된다. 구름 분류상 적운. 적란운으로 발달할 가능성도 보임.

   배터리가 충전되자마자 사흘 전 설정한 자동 구름 관찰 시스템이 가동됐다. 저장 공간이 충분하다면 더 많은 구름 정보를 모을 수 있을 텐데……


   123 + 9일

   “지피알, 있잖아, 그……, 네가 말한 사람 친구 말이야……, 널 구해줬다는 사람, 지금 어디 있어? 혹시 죽었어?”
   늘이의 조심스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몰라서 답할 수가 없었다.
   슬픈 표정을 짓고 싶은데 내 얼굴은 웃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뻔했다. 그래서 더 높은, 더 머나먼 하늘을 쳐다보고 싶었는데 머리 위 하늘이 옅은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일이삼타워의 꼭대기도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 습도 상승 중. 정체전선이 형성되며 비구름 발달 상황이 감지된다.

   “나는 곧 떠나야 해. 지금 당장은 아니고, 며칠 안에 떠나려고.”
   늘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늘아, 나랑 어디 갈래? 좀 멀리, 저 위에.”
   나는 늘이와 함께 일이삼타워의 전망 엘리베이터를 탔다. 도시 시설 대부분이 멈췄지만 지열 발전으로 작동하는 일이삼타워의 엘리베이터는 멀쩡했다. 100층 무렵에서 엘리베이터는 구름에 둘러싸였다. 사방팔방으로 온통 희뿌연 구름만 보였다.
   “구름 속에서 구름이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되겠네! 운명적인 느낌이 들지 않니?”라고 말하는 구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대홍수로 일이삼타워의 전기 공급마저 끊겼던 날, 구름이는 구조 드론을 타기 위해 123층의 비상문을 나섰다. 구조 드론이 일인용이라 나까지 탈 수가 없었다. 자꾸 나를 돌아보는 구름이에게 나는 일이삼타워에서 기다릴 테니 꼭 돌아오라고 말했다. 태백산에 무사히 도착하면 꼭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며 구름이는 물에 잠긴 도시를 떠났다.
   열흘 후 비가 그치고 도시에 다시 파란 하늘이 나타났지만 일이삼타워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최소한의 에너지 레벨로 버티던 내 몸체의 배터리 성능은 매우 나빠졌다. 구름이의 연락도 없었다. 인터넷망과 전화선이 모두 끊겨서 도시 외부와 연락할 길이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구름이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몰라.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도.”
   구름이가 돌아오기 전에 나는 작동을 완전히 멈춰버릴지도 모른다. 구름이가 돌아와도 아무 도움도 못 되는 고물이 되어있을 수도 있다.
   
[경고] 배터리 부족! 저장 공간 부족! 시스템 보호를 위해 모든 작업을 중단함.

   갑자기 에너지 절약 모드로 전환되었다가 깨어났다. 늘이가 손컴퓨터에 뭔가 적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잃었던 줄도 모르고 구름 숙제인지 뭔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늘이가 나를 보고 얼른 손컴퓨터를 챙기며 생긋 웃었다.
   “늘아, 내일엔 떠나는 게 좋겠어. 곧 또다시 비가 올지도 몰라. 대홍수 이후에도 세 차례나 큰비가 내렸어. 괜히 여기서 고생하지 말고, 너라도 무사히 집에 가야지.”
   최대한 비장한 목소리로 말하려 했는데 내 입에서는 명랑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목소리 파일이 제대로 링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내일 떠날게. 그런데 네가 지피알 0221 맞지? 내일 내가 떠나기 전에 내 우주선으로 꼭 와줘. 알았지?”
   늘이가 재빨리 말했다.
   “내 이름은 깔롱이야. 구름이가 불러준 이름이야. 너도……”
   저장 공간을 정리할 때 목소리 파일도 치워버렸는지 어떻게 해도 명랑한 목소리만 나왔다.
   “너도 나를 깔롱이라고 불러도 돼. 지피알 말고.”
   “응, 깔롱.”
   늘이가 나를 보고 윙크를 했다. 늘이는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모르겠다. 내일 지구를 떠나서인지, 나랑 헤어져서인지.


   123 + 10일

   “나랑 같이 갈래?”
   늘이가 말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 로봇 깔롱은 작동을 멈추는 그 순간까지 구름이를 기다리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 아침에도 다리가 세 번이나 꼬여서 넘어질 뻔했다. 늘이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휴우, 다행이다. 사실 이 우주선은 일인용이거든. 같이 간다고 할까 봐 걱정됐어.”
   나에게는 늘이와 장난을 칠 에너지가 부족했다. 그래서 조용히 할 일만 하기로 했다. 늘이의 손컴퓨터에 접속해서 그동안 함께 바라본 구름 정보 파일을 전달한 것이다.
   “고마워. 나도 너에게 선물이 있어.”
   늘이는 우주선의 비상용품 가방을 열고 저장 디스크와 배터리를 여러 개 꺼냈다.
   “네가 허락한다면 이것들을 네 몸체에 장착해 줄게. 여분도 모두 남겨둘게. 어제 네가 기절한 동안에 네 몸에 맞는 배터리와 디스크가 있을지 비상용품 목록을 뒤져봤는데, GPR 로봇에는 모든 부속품을 다 쓸 수 있다고 해. 네가 특수한 로봇이 아니라 일반형 로봇이라서 다행이야.”
   늘이는 내 뒤통수 뚜껑을 열고 배터리와 디스크를 채워 넣으며 말을 이었다.
   “드디어 나도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모든 문제를 정확하게 다 틀리고 꼭 꼴등을 차지할 거야.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지구로 돌아올 거야.”
   늘이는 지구에 남은 자들과 만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구름이는 언제 돌아올지 알 수가 없어. 사실 지구에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목소리 조정이 가능해졌다.
   “괜찮아. 깔롱이 네가 나를 기다려 주면 돼. 구름과 함께.”
   늘이가 뒤통수 뚜껑을 닫고 쓰다듬으며 말했다.

   [상태] 배터리 가득. 저장 공간 넉넉. 모든 압축파일을 풀었음.

   “깔롱! 다시 올게. 그때까지 잘 있어. 구름이도 꼭 돌아올 거야. 그런데 구름이가 떠난 자인 나를 좋아할까?”
   떠나기 직전에 늘이가 말했다.
   “응. 그럴 거야. 반드시.”
   나는 네 발로 서서 나머지 네 발을 흔들며 소리쳤다. 웃는 얼굴로, 노래하듯이. 늘이가 짙은 회색 구름을 뚫고 지구를 떠났다.


   123 + 10 + 58일

   - 일이삼타워 남서쪽 71미터 지점에서 생명체가 감지되었다. 생명 탐지 장치를 켰다. 인간으로 보인다. 우주복은 입고 있지 않다.

   나는 낯선 생명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하늘에는 우주선처럼 생긴 렌즈구름이 떠 있었다. 깔롱의 일기는 오늘도 계속된다.

정재은

하고 싶은 게 있어도 할 수 없는 사람,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 그냥 사람, 그냥 로봇, 그냥 물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고 싶습니다. 서로의 이야기 속에서 만날 수 있어도 좋겠습니다. 이토록 끈적이는 지구가 삭막해져 버릴 그날에도. 그토록 텅 빈 우주가 복작거리게 될 그때에도.

2020/01/28
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