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을 사랑한 외계인이 있었다
  하얗고 커다란 작약 한 송이를 조심히 들고 내려놓을 수 있는

  외계인이
  손을 펼치면 손바닥 안에 손바닥, 손가락, 손바닥, 손가락…… 무수한 겹으로 쌓여 있고

  외계인은 다른 이와 손잡을 때마다 가지고 있던 손바닥을 하나씩 잃어버렸다 손바닥을 우수수수수…… 흘리고 돌아온 날에는 작약에 가까이 다가가 냄새를 맡았다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손바닥들을 생각하며

  너무 슬퍼하지는 않았다
  작약이라 하면 꼭 약의 이름 같고 피오니라 하면 사랑하는 누군가의 이름 같아서

  둥근 주먹 같은 피오니
  봉우리 안에 잠든 수백 개의 돌기
  웅크려 잠꼬대하는 비밀
  꿈속의 춤들이 하나씩 발맞춰 꽃잎을 두드리고
  주먹을 열게 하고
  서서히 떨어트리고
  시들게 하고

  작약은 한 겹씩 외계인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피오니도 이제 잃어버릴 일만 남았구나 앙상해지는 하얀 작약 새하얗게 질린 손바닥을 가진 외계인은

  남은 꽃잎 남은 손바닥 한 장씩 기꺼이 떨어트릴 수 있는 것끼리 손잡고 싶었다

  외계인은 스스로를 피오니라고 불렀다

이실비

202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지만, 5년 전에 친구들과 독립문예지 《보라색씽크홀》을 만들며 시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수은아, 네가 그랬지. 시를 쓴다는 건 우리 가슴에 쾅 내려와 박힌 장면 속으로 한 사람을 밀어넣는 일 같다고. 우리는 그 사람과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2024/09/18
6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