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비눗방울 여러 개가 떠다닌다. 두 사람과 금붕어 무리가 그 사이를 유영하고 있다. 비눗방울을 불 때 사용하는 막대 두 개도 함께 콜라주되어 있다.
“정말 괜찮겠어?”
  신발장에서 엄마가 물었어요.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어요.
  “오늘은 엄마랑 같이 쉬고 내일부터 가도 되는데……”
  엄마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옷깃을 정리해주었어요. 아무래도 괜찮지 않은 건 내가 아니라 엄마인 것 같아요.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신발장에 걸려 있는 거울을 봤어요.
  곰돌이가 그려진 하늘색 셔츠에 청바지. 내가 좋아하는 옷차림이었어요. 아빠가 백화점에 서 직접 골라줬던 옷이기도 하고요.
  “아, 참!”
  나는 신발을 신은 채 거실로 들어갔어요. 새집 바닥이 더러워지지 않게 발바닥 앞꿈치를 들고 뒤꿈치로만 걸었지요. 뒤 뚱 뒤 뚱, 느리게 걸어 빨랫줄 앞으로 갔어요. 거기에는 알록달록한 수건들과 아무리 빨아도 꼬질꼬질한 양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어요. 나는 그 사이에 걸려 있는 보라색 모자를 집었어요.
  모자에서는 아직도 비누 냄새가 조금 났어요. 나는 모자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다가 집을 나섰어요. 오늘만큼은 늦고 싶지 않았어요.

지난주 금요일, 엄마는 이삿짐을 다 내려놓기도 전에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했어요. 내가 새로 다니게 될 학교라고 했어요.
  2학년 3반 교실이 보이자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어요. 내 심장 소리가 들린 걸까요? 선생님이 나왔어요.
  엄마와 선생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교실 안이 궁금해졌어요. 어떤 애들이 있을까? 아는 친구가 한 명도 없는 교실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어요. 나는 까치발을 하고 힐끔 교실 속을 쳐다보았어요.
  ‘헛!’
  교실에 있는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어요. 아이들도 내가 궁금한지 자꾸만 복도 쪽을 쳐다보았어요. 교실은 금방 소란스러워졌어요. 떠드는 소리가 복도까지 퍼졌어요.
  나는 아이들에게 손인사를 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그냥 손을 내려놓았어요.
  아직은 그럴 준비가 안 된 것 같았어요.
  “불편하면 화요일부터 등교할까? 주말에 이삿짐 정리하면 힘들 거야.”
  이것 참 황당했어요. 하필이면 월요일이 현장학습이라는 거예요. 전학 첫날부터 현장학습이라니. 생각만 해도 피곤해지는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어요. 친구들이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어요.
  엄마랑 나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어요. 시끌벅적한 교실과는 달리 운동장은 아주 조용했어요.
  “저녁에 아빠랑 통화할래?”
  엄마가 물었어요. 나는 거기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걸 물었어요.
  “이제 평생 아빠는 못 만나는 거야?”
  “같이 안 사는 것뿐이야. 방학 때는 아빠 집에서 둘이 지내도 돼.”
  “나는 다 같이 살고 싶은데……”
  조금 전까지 선생님과 실컷 수다를 떨었던 엄마가 갑자기 조용해졌어요.
  이상했어요. 분명 학교 안에는 사람들도 많고, 엄마도 옆에 있는데 꼭 혼자 있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때였어요.
  “으악, 저게 뭐야? 쥐 아니야?”
  엄마가 교문 앞을 가리키며 펄쩍 뛰었어요. 가까이 가보니 거기엔 회색 모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어요. 아니, 자세히 보니 회색이 아니라 보라색이었어요. 여기저기 때가 묻어 회색처럼 보이는 거였죠. 쥐라고 오해해도 할말이 없었어요.
  “나 이거 가져가도 돼?”
  “안 돼. 제자리에 놓으면 새 걸로 사줄게.”
  하지만 나는 이 모자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어요. 외롭게 있는 모습이 꼭 나랑 비슷하게 보였거든요. 나는 모자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어요. 보라색 바탕에 물방울무늬가 그려져 있었어요. 보아하니 내 머리에도 딱 맞을 것 같았어요.
  “으휴. 나는 안 빨아줄 거니까 너 마음대로 해!”
  엄마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걸어갔어요.
  그사이 나는 그 모자를 품에 꼭 안았어요. 어쩐지 마음에 드는 모자였어요.

*

커다란 버스와 아이들이 모여 있는 운동장은 엄청나게 시끄러웠어요. 금요일에 봤던 운동장과는 딴판이었어요. 나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손에 쥐었어요. 혹시나 아이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까봐요.
  “그때 그 전학생 아니야?”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속닥거렸어요. 나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나는 갑자기 너무나 쑥스러워져서 그만 버스 뒤에 숨어버렸어요.
  ‘후!’
  버스 뒤에서 숨을 크게 한번 쉬었어요. 아는 사람을 보면 먼저 인사하라고 했던 아빠의 말이 생각났어요. 나는 아이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다시 버스 앞으로 나갔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그새 저 멀리 가 있었어요. 금세 나를 까먹었나봐요. 하는 수 없이 인사는 다음에 해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제일 마지막으로 버스에 탔어요. 아이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앉아 있었어요. 빈자리는 딱 한 군데 있었어요.
  “괜찮다면 나랑 앉을래?”
  맨 앞자리. 그러니까 선생님 옆자리였어요.
  선생님은 자리에 앉자마자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퍼부었어요. 오늘 아침은 뭘 먹고 왔는지, 전에 학교에서 좋아하던 장소는 어디였는지, 새 친구들을 만난 기분은 어떤지.
  나는 오늘 아침도 먹지 않았고 전에 학교에서 특별히 좋아하던 장소도 없었어요. 새 친구들을 만난 기분은……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혹시라도 선생님이 또다른 질문을 할까봐 재빨리 반대편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어요.
  창밖으로는 큰 도로와 나무들이 슉슉 지나가고 있었어요. 지난번 엄마, 아빠와 나들이를 갈 때도 이런 풍경을 본 적 있었어요. 그땐 아주 멋있어 보였는데 지금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어요. 대신 뒤에 앉은 아이들의 목소리만 크게 들릴 뿐이었어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아이들은 자꾸만 웃고 자꾸만 떠들었어요.
  나는 내 등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말 정말 궁금했어요. 맨 앞자리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으니까요.
  ‘뒤돌아볼까?’
  고민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나는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어요.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쥐고 있던 모자가 걸리적거렸어요. 나는 귀찮은 마음에 모자를 써버리기로 했지요.
  푹 눌러쓴 모자에서는 아직도 비누 냄새가 조금 났어요. 그때였어요.
  “전학생한테 말 걸고 싶은데 너무 조용해서 못 걸겠어.”
  “선생님이랑 호두 먹던데. 맛있었냐고 물어볼까?”
  모자를 쓰자 아이들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나저나 전학생이 쓴 보라색 모자 예쁘지 않아?”
  “나도 그 생각했는데. 어디서 샀냐고 물어볼까?”
  나는 당장이라도 큰 소리로 대답하고 싶었어요. 교문 앞에서 주운 모자라고요. 마음에 들면 한번 써보게 해주겠다고요!
  “아니야. 지금 자는 것 같아. 방해하지 말자.”
  순식간에 온몸에 힘이 빠졌어요. 마치 비누 거품이 되어 의자 밑으로 미끄러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잠시 후 우리 반 버스는 대공원에 도착했어요. 나는 이번에도 제일 마지막에 내렸어요.
  “얘들아! 그렇게 뛰어다니면 위험해.”
  담임 선생님이 소리치는데도 아이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녔어요.
  원래는 대공원에 도착하면 아이들에게 먼저 말을 걸 생각이었어요. 선생님이 얼마나 질문을 많이 했는지, 내가 모자를 얼마나 열심히 빨았는지 말이에요. 이 모자가 원래 먼지 가득한 회색빛 모자였다고 하면 애들은 뭐라고 할까요? 내가 한 시간 동안이나 쭈그려 앉아 모자를 빨았다고 하면 다들 놀랄지도 몰라요. 물론 회색 때를 지울 때 힘을 다 쓰느라 비누 거품을 대충 헹구기는 했지만요.
  그런데 나는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어요. 아이들에게 나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어요.
  지금 대공원에서 신나지 않은 사람은 선생님과 나. 딱 둘뿐인 것 같았어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어요. 하지만 첫날부터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 꾹 참았어요. 다행히 모자가 눈을 가려주어서 들키지는 않을 것 같았어요.
  “비 온다!”
  저 멀리에 있던 아이가 소리쳤어요. 아이들은 허공에 손바닥을 쭉 내밀었어요. 손바닥 위로 빗방울이 톡 하고 떨어졌어요.
  “진짜네. 우산 있는 사람?”
  아이들이 가방에서 휴대용 우산을 꺼냈어요. 우산을 가져온 애가 별로 없어서 몇 명씩 나누어 써야 했어요. 아이들이 삼삼오오 우산을 찾아 떠났어요.
  ‘나도 우산 없는데……’
  주변을 둘러보았어요.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낄 수 있는 곳은 없는 것 같았어요. 이미 아이들이 다 차지해버렸으니까요.
  “금방 멈추겠지? 오늘 비 온다는 말 없었으니까.”
  우산이 없는 선생님과 나는 하는 수 없이 비가 멈출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요. 다행히 나는 모자를 쓰고 있어서 머리카락이 젖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요?
  비가 멈추기는커녕 더 많이 내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새끼손톱만큼 작았던 빗방울은 어느새 엄지발톱만큼이나 커졌어요. 슬슬 모자도 젖어서 축축한 게 느껴졌어요.
  더이상 비를 맞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 비를 맞으니 점점 추워져서 감기에 걸릴 것 같았거든요. 몸이 오들오들 떨렸어요. 나는 커다란 나무 그늘로 뛰어가려고 했어요.
  그때였어요.
  “어? 전학생 모자 좀 봐!”
  비 오는 걸 처음 발견했던 아이가 내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그러자 반 아이들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어요. 아이들의 눈이 점점 커졌어요. 입이 벌어지는 애도 있었어요.
  나는 궁금한 마음에 손을 뻗어 모자를 만져보았어요.
  ‘이게 뭐지?’
  동글하고 말랑한 느낌. 무척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었어요. 차가운 빗방울과는 사뭇 달랐어요. 느낌은 점점 더 또렷해졌어요.
  이윽고 눈앞에 엄청나게 큰 거품이 떠다니기 시작했어요. 모자와 똑같이 보라색이었고 모자와 똑같이 비누 냄새가 났어요. 빗방울이 모자에 떨어질 때마다 내 몸보다 큰 거품이 생겨났어요.
  보글보글, 아주 큰 거품이 피어오르고
  방울방울, 아주 큰 거품이 떠다녔어요.
  코끼리만큼 거대해진 거품은 어느새 주변을 가득 채웠어요.
  땅에도, 하늘에도, 나무 사이의 나뭇가지 사이에도 거품이 떠다녔어요. 사방이 거품이었어요. 거품은 터지고 다시 생겨나길 반복했어요.
  나는 이제 거품에 완전히 둘러싸였어요. 나는 커다란 거품을 타고 둥둥 떠다녔어요.
  이상하게도 점점 마음이 편해졌어요. 거품은 아주 포근했고, 또 따뜻했으니까요. 엄마 아빠가 안아주는 느낌과도 비슷했어요. 이사를 오고 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기분이었어요.
  더이상 혼자 있는 것 같지 않았어요. 아주 오래도록 거품 속에 있고 싶었지요.
  나는 한참 동안이나 눈을 감고 거품을 느꼈어요. 그리고 잠시 눈을 떴을 땐……
  “전학생! 아니, 정우람! 우리도 끼워줘!”
  친구들이 웃으며 달려오고 있었어요.
  내 모자에서 피어난 보랏빛 거품이 어느새 친구들과 선생님 주변까지 퍼지고 있었어요. 온 세상이 포근해 보였어요.

소휘

「최장순 할머니 찾아요!」로 2020 대산대학문학상 동화 부문을 수상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2월 책읽는곰 제1회 어린이책 공모전을 통해 첫 책 『투명 고양이 또또』를 출간했으며 《비유》 발표는 두번째입니다. 32호에 단편동화 「4반에 웃긴 애」를 발표했습니다.

몇 년 전,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봤어요. 빨래하고 헹구는 걸 깜빡한 신발을 신고 나갔다가 자꾸만 거품이 생겨서 곤란했다는 이야기였죠. 그분께 이 이야기가 닿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제게 더 많은 이야기들이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음…… 제가 직접 가는 방법도 있겠네요!

2024/10/02
6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