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패턴이 익숙해지고 있다. 폭로 → 공유 → 옹호/비판 → 반박 → 재반박 → 구매/불매 → 존속/퇴출. 이것은 취소 문화나 철회 문화라고 번역되곤 하는 캔슬 컬처의 흔한 전개 과정이다. 어떤 일을 문제화하고 해결하려는 의지는 특정한 시대적 맥락 안에서 이러한 구조를 지니게 되었다. 나는 때로 우리가 이 구조 바깥에서 공론화를 고민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 같다고 느낀다. 사건,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감정을 단일한 해답과 경로를 통해 빠르게 처리하는 구조에서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구성할 역량을 잃어간다. 문제와 해결에 대한 다른 상상이 필요하다. 나는 음모론이라는 틀로 캔슬 컬처를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은 캔슬 컬처를 비난하고 폐기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를 돌아보고, 조금 다른 해결책을 찾아보기 위한 하나의 시도다.


음모론의 마음

사회학자 전상진은 『음모론의 시대』에서 음모론이 지금 시대만의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이 왜 지금 시대에 가장 지배적인 정치 전략이자 이야기의 형식이 되었는지 보여준다. 음모론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믿음 체계이자 이야기의 구조라는 점에서 아주 오래된 장르다. 신이 차지했던 최종적인 설명의 자리를 음모론에서는 사람이 차지한다는 점에서 음모론은 근대적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고 설명해야 한다는 합리적 이성의 강박 안에서 만들어지고, 사진이나 동영상과 같은 시각 자료를 다루는 기술과 그러한 자료들을 삽시간에 온 사방으로 유통하는 인터넷 네트워크와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의 연결 안에서 집단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음모론은 최첨단의 서사 구조이기도 하다.
  음모론은 낙인으로 기능하지만, 그것은 절반의 이야기일 뿐이다. 음모론은 극도로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시대에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들로 뒤덮인 세상을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절박한 시도이자, 좋거나 옳다고 믿는 것을 사람들에게 관철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치열한 고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음모론은 또한 “올바른 질문에 대한 잘못된 답변”이다.1) 음모론 그 자체는 정답이 될 수 없지만, 음모론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음모론은 우리가 매일같이 마주하는 캔슬 컬처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틀이다. 캔슬 컬처는 문제를 제기하고, 불의를 설명하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하나의 집단적 움직임이지만, 자주 잘못된 답변을 내놓는다. 캔슬 컬처는 그 자체로 정답이 될 수 없지만, 이것이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문법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캔슬 컬처를 완전히 벗어난 비판의 방식을 생각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올바른 질문에 대한 잘못된 대답

지금 한국에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캔슬 컬처는 최근 두드러진 무해한 사람에 대한 갈망과 관련되어 있고, 이 갈망은 또한 위험에 대한 감각 안에서 생겨난 안전에 대한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서울리뷰오브북스》 창간호에 쓴 「무해의 시대」에서 “안전한 사회에 대한 꿈”이 2000년대부터 꾸준히 발생해 온 생화학적 위험, 국가적 참사, 의료 사고, 제도적 폭력, 성폭력, 어린이에 대한 폭력, 노동자에 대한 폭력 등의 연쇄를 통해 형성된 “안전을 향한 욕망”에서 이어진 ‘무해한 사회’에 대한 지향과 관련된다고 말했다.2) 이러한 시대상은 구체적인 영역이나 사례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데, 캔슬 컬처는 그중에서도 정치와 문화 영역에서의 안전과 무해함을 추구하는 집단적 행동의 한 사례다.
  언제나 느끼고 있지만 명확하게 설명해낼 수 없는 위험이 사람들의 인식을 잠식한 결과가 음모론이라고 할 때, 캔슬 컬처는 또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지 알 수 없다는 불안이 사람들의 인식에 파고든 결과다.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정치인이나 문화예술인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이 계속 밝혀지면서 불안과 불신이 강해지고, 판단의 속도는 빨라졌다. 이는 다시금 인터넷 네트워크와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 등에 의해 가속되어 발생하는 모든 사안에 대한 실시간의 속단을 요청한다. 위험은 인격화되고, 무해한 사회는 무해한 사람들의 집합으로 상상된다. 안전한 문화를 해친다고 여겨지는 인물이나 기업, 혹은 예술 작품에 대한 캔슬이 한번 불붙으면, 인물이나 기업의 과거 행적 혹은 예술 작품과 관련된 모든 디테일이, 타당성과는 큰 관련이 없을 때조차도, 캔슬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삽시간에 동원된다. 빠르게 규정된 정답으로 모든 것이 수렴하면서 ‘무해한 나’와 ‘유해한 너’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무해한 사회를 향한 절박한 꿈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마음, 가속된 인식 체계와 결합할 때 캔슬 컬처라는 이름의 ‘지목하고 추방하는’ 음모론으로 굴절된다.
  음모론처럼 캔슬 컬처가 “올바른 질문에 대한 잘못된 답변”인 이유도 여기 있다. 음모론처럼 캔슬 컬처 또한 자주 “구조가 중요한 역할을 할 가능성, 우리 자신이 공모자일 가능성, 문제 제기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3) 하지만 음모론이 무언가를 침묵시킬 수도, 강요된 침묵을 깰 수도 있는 도구의 이름이듯, 캔슬 컬처 또한 그렇다. 캔슬 컬처라는 전략이 안전을 위한 적절한 해답이 아니라면, 우리는 캔슬 컬처에 담긴 위험과 안전에 대한 감각을 붙들면서, 어떻게 더 나은 대답을 찾아나갈 수 있을까?


사람에서 이야기로

캔슬 컬처는 그것이 개개인에 대한 빠른 폭력이라는 점에서 공론장의 위기를 일으킨 주범으로 비판받아왔다. 그러나 문화예술계에서 캔슬의 대상은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학교폭력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폭로한 이들과 폭로당한 아이돌 아티스트 사이의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고, 법적인 판단조차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 아티스트의 음악을 계속 들어도 되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게 된다. 어떤 이들이 그 아티스트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에는 단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동안 사랑해온 그 사람의 음악이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작가의 언행에 대한 문제 제기나 폭로가 이루어졌을 때 그 작가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에는 그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와 거기서 느낀 감정들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작품을 만든 게 저딴 인간이라니’와 같은 반응에서 나타나는 것은 실망과 억울함이다. 작품을 통해 작가에게 가졌던 기대가 좌절되고, 그 작품으로부터 받던 좋은 느낌을 작가에게 빼앗긴 것. 잘못은 작가가 했는데 피해는 독자인 내가 받게 되는 것에 대한 분노. 여기에 작가의 문제를 폭로한 이가 겪은 고통에 대한 분노가 섞인다. 진실 공방에서 느끼는 피로와 혼란도 더해진다. 마음이 동요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우리는 두 선택지를 마주한다. 작가와 작품을 하나로 묶어서 캔슬한다. 아니면 나 자신이 이 작품과, 그리고 이 작품을 둘러싼 사건들에 어떻게 얽혀 있는지 돌아본다. 전자는 쉽지만 독자의 역량과 역할을 좁은 영역에 한정한다. 후자는 어렵지만 작품을 중심에 두고 독자와 작가 사이에 존재하는 견고한 위계에 질문을 던진다.
  작품은 완성된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계속해서 구성되는 과정 중에 있는 하나의 이야기다. 하나의 작품에 대한 우리의 감상은 수많은 다른 사람과 사물들, 그리고 이야기들의 영향 안에서 만들어진다. 작품의 경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람들은 작품에 관련된 새로운 정보를 얻을 때마다, 혹은 다른 사람이 쓴 감상이나 비평을 읽거나, 혹은 관련된 영상을 볼 때마다 자신의 감상을 재고하고 발전시키고, 이를 인터넷에 남긴다. 다양한 해석은 그 자체로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이렇게 이야기에 대한 경험과 해석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의미가 존재를 구성한다고 할 때, 감상과 비평은 작품에 대한 존재론적 개입이 될 수 있다. 독자들이 작품을 빠르게 폐기하는 대신 자신이 사랑한 이야기를 집단적으로 다시 쓸 때, 독자들은 그 작품과 그것을 둘러싼 사건들이 기억되는 방식과 거기서 뻗어나갈 이야기들에 대해 구성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실제로 잘못을 저질렀거나 석연치 않은 구석들이 있는 작가에게 남은 애정이 아니다. 이제는 그 작가만의 것이 아닌 이야기에 대한 사랑이다. 이것은 이야기에 제기된 문제들을 외면할 수도, 이야기를 폐기할 수도 없는 이들이 작가의 권위를 흔들고 훼손하면서 저자성을 분산시키는 실천으로서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영원한 수수께끼

감상과 비평이 그 자체로 작품의 일부가 되는 대표적인 현장은 케이팝 세계관 콘텐츠다. 뮤직비디오나 노래 가사부터 아티스트들의 성격이나 관계에 이르기까지, 팬들은 모든 것을 단서 삼아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수많은 단서는 얼기설기 연결된다. 음모론과 여러 면에서 비슷한 서사 구조를 지닌 세계관 콘텐츠는 개방성의 측면에서 음모론적 구조를 벗어난다. 새로운 단서가 발견될 때마다 세계관은 갱신되고, 각기 다른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들이 댓글 창에서, 소셜 미디어에서, 혹은 동영상 플랫폼에서 서로 부딪치면서 이야기는 또다시 갱신된다. 이 사람들은 ‘다른 정답’의 가능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각자의 답을 찾아나가면서도 자신들이 다루는 것이 영원한 수수께끼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이야기는 특정한 뮤직비디오나 한 곡으로 완성되지 않고, 댓글, 반응 영상, 소셜 미디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게시된 무수한 글들, 이들 사이를 연결하는 플랫폼과 알고리즘이 이루는 유동하는 네트워크 안에서 영원한 미완성의 상태로 머무른다. 작품과 비평, 창작자와 소비자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다. 이야기의 가치와 저자성은 그 네트워크 전체에 분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영 결말이 나지 않는 수수께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완결되지 않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태도다. 그것은 정답에도, 오답에도, 둘 모두의 부재에도 배신감을 느끼거나 실망하지 않고, 그저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아직 정답은 못 찾았지만 어쩌면 풀릴지도 모른다는 느낌, 어쩌면 답에 가까워진 것 같다는 느낌, 그러나 다른 설명과 다른 해답을 발견해도 그것에 놀라고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것은 지금 캔슬 컬처를 가속하는 바로 그 네트워크에서 발명되고 있는 창작으로서의 비평의 한 방식이다. 어쩌면 있을지 모를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며 수수께끼를 영원한 것으로 보존하고, 그 수수께끼와 함께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여기에 있다.
  음모론은 모든 단서를 자신의 결론으로 빨아들인다. 각 단서의 구체성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해결되지 않은 연결고리들을 단숨에 넘겨짚고 결론으로 내달린다. 수수께끼는 사라진다. 확신에 찬 캔슬 컬처가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모든 진상을 알고 있으며 그래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수수께끼는 없다는 이 믿음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오지만, 빠르게 문제를 처리함으로써 정작 그 문제가 어떤 구조 안에서 발생했는지, 우리는 거기에 얼마나 연루되어 있는지, 애초에 우리가 던진 질문은 적절했는지와 같은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외면한다. 그렇게 우리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할 수 있는 다양한 실천에 대한 상상력을 차단한다.
  논란의 한복판에서 무엇이 옳은지 계속 고민하는 이들로부터 음모론을 공론장의 가능성으로 전환할 수 있는 힘을 찾을 수 있다. 이 힘은 수수께끼는 없다는 믿음을 흔들어 놓는다. 정답조차 수수께끼로 되돌린다. 나는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고자 한다. 사랑은 폭력과 환대가 섞인 무수한 수수께끼를 마주할 수밖에 없게 하는 하나의 조건이다. 사랑을 지속하려면 영영 닿을 수 없는 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당신이 결국에는 수수께끼일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마음. 그래서 나의 가설보다 당신에게서 던져지는 새로운 단서와 질문들을 우선시하는 마음. 그래서 사랑은 영원한 수수께끼이며, 어떤 수수께끼를 영원히 붙드는 것 또한 사랑이다. 우리는 영원한 수수께끼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설명 체계로서의 음모론 대신 질문 체계로서의 사랑. 음모론의 시대에 사랑은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아리송한 질문들을 되살리는 힘이어야 한다.

안희제

논픽션 작가이자 문화연구자로서 대중문화 안으로부터 가능한 정치를 고민한다. 멀찍이서 서로의 선을 바라보는 ‘안전한’ 관계보다, 서로의 영역에 침투하고 거절당하고 다시 다가가면서 적정 거리를 조정하고 찾아나가는 ‘위험한’ 관계가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발판이라고 믿는다. 『망설이는 사랑』 『난치의 상상력』 등을 썼고, 시사IN과 문화일보 등에서 칼럼을 썼다.

청탁을 받고 글을 마감하기까지도 적지 않은 사건들이 있었다. 캔슬 컬처의 문법이 공고해지고 있는 것 같아서 우려되면서도, 그 안에도 다양한 고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희망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으니 폐기하자는 이야기는 쉽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질척거리고 내 뜻대로 안 되는 감정이자 실천으로서의 사랑을 변화의 힘으로 삼고 싶었다. 작품에 대한 독자의 사랑은 저자의 사랑보다 클 때가 많다. 세상에 나온 이상, 이야기는 독점될 수 없다. 감상과 비평은 작품에 침투한다. 사랑으로 이야기를 탈환하자.

2024/10/02
69호

1
전상진, 『음모론의 시대』, 문학과지성사, 2014, 217쪽.
2
김홍중, 「무해의 시대」, 《서울리뷰오브북스》 1호, 2021, 22-35쪽.
3
전상진, 같은 책, 217-2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