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장 뜨겁게 논란이 된 단어를 꼽아야 한다면 아마 많은 사람이 ‘캔슬 컬처’를 선택할 것이다. 나 역시 서너 가지 단어를 떠올려보다가 아마도 이 단어를 고를 것 같다. “주로 저명인을 대상으로 과거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행동이나 발언을 고발하고 거기에 비판이 쇄도함으로써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를 잃게 만드는 현상이나 운동.”
  그러나 한편으론 캔슬 컬처라는 단어가 뻔하고 지루하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이, 혹은 대중이 이러는 게 하루 이틀 일인가. 살아오면서 ‘보이콧’이라는 단어를 아마 천 번은 넘게 들었을 거고, 지금 생각나는 보이콧 운동만 ‘안티 조선일보’를 포함해서 열 개가 넘는다. 본질은 결국 같지 않나.
  하지만, 보이콧은 보이콧이고 캔슬 컬처는 캔슬 컬처다. 교집합도 있지만 여집합도 있다. 시대와 세대에 따른 독자적인 특성 또한 존재한다. 힙합 역사를 돌이켜보면 집단이나 무리를 지칭하는 단어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계속 변해왔다. 어떨 땐 ‘클랜’이 유행이었고 어떨 땐 ‘스쿼드’가 지배적이었다. 2010년대 이후에는 ‘갱’이라고 지칭해왔다. 그리고 이 개념들은 모두 비슷하면서도 저마다 조금씩 성질이 달랐다. 캔슬 컬처의 역사적 맥락 역시 이와 비슷할 것이다. 우리는 캔슬 컬처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2015년, 송민호의 경우

캔슬 컬처와 힙합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보니 문득 10여 년 전의 사건이 떠오른다. 래퍼 송민호의 가사 논란이다. 지난 2015년, 송민호는 엠넷의 방송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서 부른 자신의 랩 가사로 인해 큰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MINO 딸내미 저격 /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 이 구절에 대한 당시 대중의 비판과 사회 분위기는 한국힙합의 여성혐오 논란과 관련해 가장 상징적이었던 순간으로 아마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물론 난 힙합을 사랑한다. 힙합을 좋아하고 아낀 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났다. 힙합을 생각하며 내가 떠올리는 단어는 진실함, 자기자신, 긍정적 기운, 늘 위로 향하는 방향성, 더 나아지려는 노력, 야망과 포부, 내 고유의 방식대로 사고하기, ‘리스펙트’ 등이다. 힙합은 지금껏 많은 사람을 구원했고 지금도 수많은 이의 삶을 개선하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힙합은 어떤 면에서는 균형과 조정, 더 나아가 자성이 필요한 음악이기도 했다. 바로 힙합이 표현의 자유를 소수자와 약자를 공격하는 데에 사용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예술로서 힙합이 지닌 고유한 멋과 매력이 보존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힙합이라는 예술보다 더 크고 중요한 보편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고, 힙합 역시 이 가치에 기여하는 쪽으로 진보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가치란 차별이나 억압, 혐오가 아니라 평등과 인권, 사랑이다.
  그 후 송민호가 음악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지금은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중이다). 물론 그가 지속적으로 그 사건에 관해 반추하고 자성해왔기 때문에 하는 말이기도 하다. 만약 그가 그 사건 때문에 음악활동을 그만두게 되거나 그에 준하는 일이 발생했다면 나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차원이 달라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정을 해보자. 송민호가 지금, 2024년에 저 가사를 썼다면? 아니, 정정한다. 꼭 저 가사가 아니라도 사람들을 거슬리게 하는 어떤 가사를 쓰거나 발언을 했다면?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겠지만 곧바로 캔슬 컬처에 휘말렸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모르긴 몰라도 9년 전보다 더 거대하고 더 근본적인 위협에 직면하지 않았을까.


2010년과 2021년, 에미넴의 경우

에미넴은 최근 몇 년 간의 힙합과 캔슬 컬처의 관계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중 하나다. 지난 2021년 그는 캔슬 컬처와 관련해 뜨거운 논쟁에 휘말렸다. 사건의 발단은 한 틱톡 유저가 에미넴의 노래 <Love the Way You Lie>의 가사 일부를 문제삼은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If she ever tries to fucking leave again, I’ma tie her to the bed and set this house on fire (그녀가 다시 날 떠나려고 시도한다면, 그녀를 침대에 묶어놓고 집에 불을 지를 거야)
과격하다. 폭력적인 표현이 맞다. 이 구절이 문제가 됐고 금세 #canceleminem 운동이 시작됐다. 틱톡에서 이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은 최소 몇백 만개가 넘었다. Z세대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이 에미넴을 캔슬하는 데에 동참했다. 그들은 마치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에미넴이 뭔데? 걔가 뭘 이뤘든 우린 아무 관심 없어. 에미넴은 이런 수준 이하의 가사나 쓰는 래퍼일 뿐이야. 에미넴을 지우는 게 정의의 실현이야!”
  하지만 이 사건엔 몇 가지 생각할 포인트가 존재한다. 첫번째로 이 노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스토리’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름답고 우아한 관계만이 아닌, 때로는 남루하고 처절해지기까지 하는 남녀관계를 스토리텔링 한 노래라는 점이다. 저 구절이 도덕적으로 올바르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현실에서 저렇게 행동한다면 당연히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파국으로 향해갈 때 저 정도 수준까지의 분노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인간이고, 그 감정의 상태를 예술 안에서 표현한 것이 바로 저 구절이다. 노래는 이 맥락 속에서 이해되고 또 판단되어야 한다. 힙합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 인간 감정의 다채로움과 이면, 그리고 어두운 부분까지 풍부하게 담아온 장르다. 그래서 누군가는 힙합을 불편해했지만 누군가는 힙합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음악이라고 상찬해왔다. 에미넴의 이 노래는 힙합의 이러한 성격을 떠올리게 한다.
  두번째 포인트는 이 노래에 리한나가 피쳐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노래의 후렴을 불렀다. 리한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는 가수 크리스 브라운과 공개연애를 했지만, 2009년 크리스 브라운의 주먹에 맞아 멍든 얼굴이 전 세계에 공개됐다. 그런 그가, 자신의 실제 경험과 상당 부분 겹쳐지는 내용의 노래에 참여한 것이다.
  리한나는 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이 노래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에미넴과 저는 이 노래가 담고 있는 상황 및 관계와 관련해 공통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 경험은 진짜 그 자체죠. 우리는 이 노래를 함께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이 노래를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느꼈어요. 에미넴은 실제로 가정폭력을 이겨내고 그 고리를 끊어낸 인물이에요. 그것에 관해 에미넴이 가지고 있는 통찰은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에요. 때문에 이 노래는 매우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고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죠.”
  그러자 리포터는 이런 민감한 주제를 공개적으로 노래하는 것에 관해 우려하진 않았냐고 다시 물었고 리한나가 대답했다. “전혀요. 에미넴은 최상급의 아티스트고 에미넴이 이 노래를 저에게 보내왔을 땐 당연히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단순히 제가 이 노래 속 관계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저에게 참여를 제안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죠. 이 노래는 정말로 깊은 노래예요. 가사가 정말 깊고 아름답고 격렬하죠.”
  리한나의 이 인터뷰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Love the Way You Lie>는 현실에서 폭력을 겪고 이겨낸 두 아티스트가 그 경험과 통찰을 원천삼아 만들어낸 깊은 음악이자 예술작품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폭력의 피해자가 취할 수 있는 태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누군가는 어떠한 순간에도 폭력을 가까이하지 않고 언급조차 않는 삶을 살아갈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예술작품을 창작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예술작품은 그 폭력을 그대로 드러낼 수도, 조금만 드러낼 수도, 아니면 폭력을 물리치자는 캠페인 메시지를 담을 수도 있다. #canceleminem 운동은 이런 디테일을 얼마나 살펴봤던 걸까.
  이제 마지막 포인트다. 간단하다. <Love the Way You Lie>의 발매일은 2021년이 아니라 2010년이었다는 점이다. 11년이나 지났으니 그냥 넘어가자거나, 과거의 일이니 문제 삼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대신에 11년 전의 시대적 정황과 사회적 공기는 어떠했는지, 11년 전에 사람들은 이 노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11년 전의 기준과 현재의 기준을 어떻게 조화시켜서 균형을 맞출 건지에 대해서도 고민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canceleminem 운동은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캔슬 컬처의 선의나 순기능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러나 섬세함과 균형이 결여된 채 돌진하는 정의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


오바마와 트럼프 시대를 지나며, 카니예 웨스트의 경우

앞서 에미넴을 가리켜 최근 몇 년 간의 힙합과 캔슬 컬처의 관계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사실 ‘넘버원’은 따로 있다. 최근 몇 년 간의 힙합과 캔슬 컬처의 관계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1위, 바로 카니예 웨스트다. 카니예 웨스트와 캔슬 컬처의 관계는 몇 가지 쟁점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카니예 웨스트의 트럼프 지지 선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미국의 힙합 커뮤니티와 버락 오바마의 관계에 대해 먼저 말할 필요가 있다.
  버락 오바마는 2009년부터 2017년까지 8년간 미국 대통령으로 일한 후 퇴임한 인물이다. 그에 대해 여러 맥락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힙합 저널리스트라는 직함을 쓰는 나의 입장에서도 오바마는 충분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힙합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만의 억지가 아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를 힙합 대통령으로 불러왔다. 힙합을 좋아하고, 힙합이 지지하며, 힙합의 위상을 높인 대통령. 그리고 여기에는 힙합이 만들어낸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도 추가해야 한다.
  오바마가 치른 두 번의 선거에서 미국의 힙합 커뮤니티는 그를 거국적으로 지지했다. 아프리카계 아메리칸이라는 그의 인종 정체성은 힙합 커뮤니티 사람들로 하여금 오바마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들었다. 힙합은 단순히 음악만이 아니다. 힙합은 음악인 동시에 문화이고 운동이며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래퍼 나스는 <Black President>라는 노래를 오바마에게 바쳤다. 래퍼 영지지 또한 <My President>라는 노래에서 “나의 다음 대통령은 흑인일 것”이라고 외쳤다. 또한 윌아이엠이 오바마의 연설에 영감을 받아 제작한 뮤직비디오 <Yes, We Can>, 제이지가 전개한 ‘Respect My Vote’ 캠페인, 디디의 ‘Vote or Die’ 운동 등 힙합 커뮤니티의 막강한 지원이 없었다면 미국 역사 233년 만의 첫 흑인 대통령 당선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재임하는 동안 오바마는 그 어떤 대통령보다 힙합과 가까이 지냈다. 그가 공개하는 플레이리스트는 늘 힙합이 주도적이었다. 많은 래퍼가 8년간 수시로 백악관을 드나들기도 했다. 또 오바마는 제이지의 노래 <Dirt Off Your Shoulder>를 염두에 두고 연설 중 ‘어깨를 터는’ 제스처를 취하며 놀라움을 안겼다. 2013년 백악관 출입기자단 만찬 때 디제이칼리드의 <All I Do Is Win>을 입장음악으로 삼은 파격 역시 잊을 수 없다. 그중에서도 2012년에 개최된 ‘메이드 인 아메리카’ 페스티벌은 오바마의 ‘힙합 모먼트’ 중 절정이었다. 제이지의 공연 중 대형 스크린을 통해 갑자기 등장한 오바마는 이렇게 말했다. 위험한 빈민가 밑바닥에서 빈손으로 시작해 정상에 오른 제이지의 삶, 즉 힙합 특유의 셀프메이드 서사를 미국의 대통령이 미국의 정신으로 추켜세우는 광경이라.
“제게 미국의 정신이란 당신이 누구든, 어떻게 생겼든, 어디에서 왔든, 당신이 시도한다면 이룰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이지가 바로 이걸 해낸 사람입니다. 그는 어떠한 힘과 특혜 없이 시작했지만 열심히 일했고, 실수에서 배웠으며, 포기하길 거부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이드 인 아메리카’입니다.”
사람들은 1992년 빌 클린턴의 대통령 당선을 흔히 베이비부머 세대의 승리이자 1960년대 로큰롤 세대의 전폭적인 지지의 결과라고 해석한다. 빌 클린턴에게 ‘록 제너레이션’이 있었다면 버락 오바마에게는 힙합 제너레이션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힙합 커뮤니티는 오바마가 퇴임한 후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한다, 제이지와 비욘세가 앞장섰고 이는 어찌 보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힙합 커뮤니티의 이 전통(?)을 거부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카니예 웨스트였다. 그는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후폭풍은 거셌다. 그동안 음악을 함께해온 많은 흑인 동료 아티스트가 그를 ‘손절’했다. 힙합 커뮤니티, 나아가 흑인사회의 거센 비난이 따랐음은 물론이다. 흑인이 어떻게,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이 트럼프를 지지할 수 있는지 그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니예 웨스트가 캔슬 당한 이유는 사실 트럼프 지지 선언 말고도 많다. “노예제도? 그게 400여 년이나 지속됐다는 것은…… 마치 흑인들이 그걸 ‘선택’했다는 것처럼 들려.” 카니예 웨스트가 한 말이다. 그리고 몇 가지 거대한 발언들이 더 있다. 유대인에 대한 공격적인 발언들, 나치를 일부 옹호하는 발언 등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그는 히틀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히틀러에게도 좋은 점은 있어요. (중략) 히틀러는 고속도로를 발명했고, 내가 뮤지션으로서 사용하고 있는 마이크를 발명하기도 했어요. 히틀러도 잘한 게 있을 텐데 그런 얘기는 사람들 앞에서 꺼낼 수도 없는 게 현실이고, 난 그런 것에 질려버렸어요. 그런 식으로 낙인찍는 것에 질려버렸다고요. 모든 인간은 적어도 하나쯤은 가치 있는 일을 하기 마련입니다. 심지어 히틀러도요.” 여기에 그의 굉장한 변덕과 감정기복으로 인한 기행들이 더해지면 비로소 완성된다. 카니예 웨스트를 캔슬할 정당한 이유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카니예 웨스트의 몇몇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 노예제도, 유대인 등에 관한 그의 발언은 확실히 극단적이거나 부정확하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세간에서 주장해온 것처럼 그가 정신에 병을 앓고 있는 광인이기에 이런 행보를 보인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그의 몇몇 인터뷰를 찾아보면 그가 맨정신의 멀쩡한 사람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런 말을 하면 캔슬당할까봐 걱정되긴 하지만 그의 몇몇 논리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도 있었다. 예를 들어 대통령 선거 과정을 통해 ‘불가능에서 기적을 일군’ 트럼프의 성취에 영감을 받았고 이것이 힙합의 셀프메이드 서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는 말, 노예제가 폐지된 게 언제인데 ‘흑인 역사의 달’ 같은 기념일이 오히려 현재를 사는 흑인들의 정신을 노예화하고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말, 흑인이어도 트럼프를 지지할 수 있는데 모두와 다른 나의 생각을 드러내는 순간 그 자체로 사회적 매장을 당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는 말 등이 내가 카니예 웨스트의 인터뷰를 보고 흥미로웠던 순간들이다.
  카니예 웨스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의 상황은 비정상적이다. 그래서 그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더 강력하고 자극적인 언행을 이어왔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콘서트에 래퍼 다베이비와 뮤지션 마릴린맨슨을 초대해 무대에 세운 적이 있다. 당시 다베이비는 동성애 혐오 발언(후에 사과함)으로 캔슬당하고 있었고 마릴린 맨슨 역시 성폭행 혐의를 받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던 찰나였다. 말하자면 당시 미국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 둘을 일부러 자신의 앨범 [Donda]에 참여시킨 후 콘서트 무대에도 세운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 행위는 범죄를 옹호하거나 조장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실수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받아야 할 지탄의 수위와 범위는 어디까지가 합당한가’에 대한 고민을 남긴다. 당시 세상에서 가장 매섭게 캔슬당하고 있던 두 인물을, (추측하건대) 캔슬 컬처에 저항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의 콘서트 무대에 세운 카니예 웨스트의 행동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이것은 어리석은 행동인가, 조폭식 의리인가, 아니면 혁명가의 진정한 용기인가.

카니예 웨스트의 인터뷰를 보다 보면 그가 인종, 젠더, 정체성 정치가 음악에 반영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그리고 정의라는 명분을 내세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그가 시종일관 저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는 모두가 자유롭게 사고할 때 세상이 건강해지고, 자유롭게 사고하기 위해서는 고정관념과 피해의식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카니예 웨스트가 어떤 가치들을 중요시하는지, 그리고 그 가치들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 때 비로소 그의 언행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의 말에 동의하거나 공감을 하진 못하더라도 그의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를 그제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돌이켜 보면 카니예 웨스트가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처음으로 말했을 때, 사람들이 해야 했던 것은 언팔로우를 하거나 비난 댓글을 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에게 질문을 하고, 대화와 토론을 이어가며 소통을 시도했어야 했다. 카니예 웨스트는 2024년, 올해 초 발표한 새 앨범 [Vultures 1]이 몇몇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1위를 차지하자 이렇게 말했다. “승리했다, 승리했어, 승리했도다. 1등이야, 전 세계에서. 솔직히 말하면 두 달 동안 파산 상태였는데 정말…… 그래도 살아남았지. 캔슬 컬처를 지나 살아남았어. 다시 1등으로 복귀했다는 거야.” 애초에 그가 이런 카타르시스를 느낄 필요가 없는 세계를 구축하는 게 우리의 할 일이 아니었을까. 그를 싫어하거나 그의 주장에 반대한다는 것이, 그를 캔슬할 자격을 주는 건 아니었을 텐데.

김봉현

힙합 저널리스트.

2024/10/16
6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