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료, 생산수단, 생산물

‘판도’ 코너의 성격상 문학비평을 일종의 실무로 다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쓸모없음’이 그 정의의 일부이기도 한, 그래서 화폐의 셈법에 저항 가능한 몇 안되는 영역 중 하나라는(김현) ‘신성한 문학’을 두고 즉각 서류와 계산과 시스템을 떠올리게 하는 ‘실무’라니! 적지 않은 독자들이, 특히 비평가가 되려고 하거나 선망해온 독자들이 의아해하거나 불쾌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글을 쓰려고 다시 생각해보니, 문학이 여전히 누리고 있(다)는 얼마간의 근거 없는 신비주의와 아우라를 걷어내고 나면, 세상의 모든 실천이나 노동이 그렇듯 문학비평도 실무임에는 틀림이 없다. 유물론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루이 알튀세르라는 프랑스의 유물론 철학자에 따를 때, 모든 실무(‘일’ ‘노동’ ‘실천’ 등으로 옮겨도 무방하다)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공정을 거친다. 재료(자연이 주지만 무한하지는 않은) → 작업(생산수단 + 노동력) → 생산물(가치). 물론 먹고 사는 문제가 우선일 터이니 가장 규정적인 실무는 경제적 실천이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실천들도 존재하는데 이데올로기적 실천, 철학적 실천, 이론적 실천, 정치적 실천 등이 그것들이다. 알튀세르가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저 도식은 문학적 실천에도 적용이 가능해 보인다.
  알튀세르의 도식을 적용할 때 문학, 특히 창작은 이런 공정을 거치는 실무다. 현실(사실과 이데올로기들과 이전 작품들의 아카이브) → 언어(각종의 문학적 기교들과 상상력) → 작품(상품). 창작적 실무의 ‘재료’는 현실과 문학적 전통인데, 다종 다기한 사건들과 그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담론들, 그리고 이전에 쓰인 작품들의 아카이브가 미리 마련해놓은 관습과 규칙 등이 그 요소들이다. ‘생산수단’은 물론 작가가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습득한 문학적 기교들, 그리고 그 기교들을 일정한 형태로 통어하는 상상력이다. 그와 같은 실무 작업 끝에 ‘생산물’로서의 한 편의 시, 한 편의 소설이 탄생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상품’이자 ‘이데올로기적 상징형식’의 형태로……
  바로 여기서부터 창작과 구별되는 문학비평의 실무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비평적 실천의 재료가 바로 저렇게 탄생한 ‘작품/상품’이기 때문이다. 작품(재료) → 개념적 도구들(생산수단) → 해석(생산물). 이것이 도식적으로 그려본 문학비평의 실무 공정이다. 재료로서의 작품, 거기에 작동되는 개념적 도구들, 그리고 그로부터 산출되는 새롭거나 구태의연한 해석들…… 가령 내 등단작의 공정은 이랬다. 최윤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재료) → 정신분석과 페미니즘 이론의 여러 개념들(생산수단과 노동) → 「세겹의 저주」(산물로서의 해석). 그러니까 문학비평이란 작품(들)에 대한 해석을 산출하는 실무인데, 이때 해석의 우열에 대한 기준은 새로움, 적절함, 엄밀함 등이 된다.
  해석의 우열이라고 했거니와 그 우열은 누가 가리는가? 한국에서는 독특하게도 ‘등단’이라는 제도가 그 역할을 한다. 문학비평에 있어 등단이란 먼저 등단한, 즉 재료로서의 작품을 능숙하게 다룰 만한 이론적 훈련과 감식안을 갖추고 있다고 검증받은 일련의 비평가들 앞에서 치르는 시험과 같다. 그렇다면 문학이론과 문학비평은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재료의 차이로 구분이 가능할 듯하다. 즉 문학비평은 (주로) 작품을 재료로 삼는다. 반면 문학이론은 개별 작품보다는 (주로) ‘문학 일반’ 즉 ‘문학’(분명 19세기에 프랑스에서 등장한)이라는 추상화된 ‘개념’을 재료로 삼는다. 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론적 개념을 작동시켜 새로운 개념을 산출하는 것이 문학이론의 실무다.
  물론 이론은 역사적으로 변천한다. 한때 새로웠던 이론적 개념들이 내던져지고(가령 신비평 이론가들의 고리타분하고 케케묵은 개념들), 새내기 이론들(정신분석, 해체론, 페미니즘, 신유물론 등)이 주류로 부상하는 일은 문학이론의 역사에서 흔하다. 현실의 변화는 이론의 변화를 추동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신진비평가에게 등단이란 그러므로 저와 같은 이론과 개념들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가, 그리고 한국문학이 산출한 재료들에 그 개념들을 잘 적용할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기존 비평가들의 평가에서 합격점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한 비평가의 생애주기가 시작된다.


비평가의 생애주기

생애주기 1단계, 우선은 열심히, 그리고 많이 읽게 된다. 주관적으로는 비평 행위에 대한 (얼마간의 환상이 가미된) 습작기의 동경이 아직 식기 전이기 때문이고, 객관적으로는 많이 읽어야 쓸거리가 많아지기 때문이다(내 경우 한 해에 소설 400편을 읽었다고 떠들며 다니던 기억이 있다. 과장은 아니었지만 아주 오래전 일이다). 게다가 많이 읽어야 최근의 동향과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냉혹하지만) 비평가의 생애주기를 시작하자마자 마감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등단 후 문학장의 호명(속되게, 혹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원고 청탁)이 잦을수록 비평가의 생애주기는 길어지고, 호명이 끊어지면 생애주기가 짧아진다. 물론 이때의 호명 기준 역시 그가 현재 문학장에서 유의미한 비평적 해석들을 내놓고 있는지의 여부이다.
  그렇다면 작품만 읽어서는 곤란하다. 작품은 문학비평이라는 실무에 있어 재료에 불과하다고 했으니, 다양한 재료의 확보만큼 생산수단의 습득과 개발도 필요하다. 비평가의 노동은 바로 그 생산수단, 그러니까 흔히 말하곤 하는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는 개념들의 구사 그 자체일 테니까 말이다(‘라뗀 말이야’, 프로이트 정신분석, 해체, 마르크스주의의 제사조, 푸코 등을 미친 듯이 읽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도 낡아 보인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 철학, 사회학, 역사학, 신화학, 인류학, 심리학, 심지어 자연과학 등의 난해한 책들을 가장 많이 (그래서 건성건성일 때가 많지만) 읽는 이들이 문학비평가란 통설에는 일리가 없지 않은 듯도 하다.

생애주기 2단계, 잦은 호명은 이제 실무적인 노고를 부른다. 이 노고는 말 그대로 실무적인데 이른바 ‘신인 비평가’에게 주어지는 일이 어떤 정형화된 틀 속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각종 문예지들이(그마저 줄어들고 있다. 내가 가까스로 비평가의 생애주기를 이어가는 동안 《세계의문학》 《외국문학》 《작가세계》 《문학판》 《21세기문학》 《문예중앙》, 그리고도 더 많은 문예지들이 폐간했다) 의뢰하는 작품과 작가 선별 작업이 그것이다. 매 시기 쏟아지는 작품들 중 옥석을 가리고, 묻혀 있던 보물을 발굴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런저런 문학상의 후보 자격을 주는 일 등이 그 실무의 내용이다. 이쯤에서 끼어들곤 하는 반론이 이른바 ‘문학권력 비판론’인데, 그런 식으로 문예지를 가진 유력 출판사들이 비평가들을 길들이고 젊은 작가들을 추려 상품화한다는 것이 그 비판의 요지다. (그러나 나로서는 권력이라는 어마어마한 단어가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든 오늘날의 한국문학 앞에 붙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고, 근대 이후 문학이 애초에 제도로서 존재하는 바에야 스스로는 제도 바깥에서 문학이라는 제도를 비웃고 질타하겠다는 의도 자체가 어떤 유효성이 있는지도 이해가 잘 안된다.) 그런 비판을 감당해야 하는 스트레스뿐 아니라 애초에 단평이나 리뷰로 시작한 공식적 글쓰기가 점점 비중 있는 기획이나 특집글로 그 폭과 깊이를 더해 가야 할 때 받는 스트레스가 점점 누적된다. 혹은 역으로 많은 에너지를 생겨나게 하고 발산하게 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좋은 시절이다(‘라뗀 말이야’ 2000년대 중후반이 그런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좋은 시절을 잘 버티다보면 문예지의 편집동인이나 편집위원으로 자리를 잡는 일도 생긴다. 혹자는 그런 자리를 두고 문단 권력의 정점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만약 그게 권력이라면 생각보다 누릴 것이 보상이 별로 없는 권력이란 점은 확언해두어야겠다(나는 《문예중앙》 《문학과사회》 《문학들》 편집 동인을 짧게는 수년부터 길게는 20년째 해봤으니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보상에 반비례해 보람은 적지 않다. 동시대 문학장에 대해 자신의 문학관에 따라 담론을 통해 개입하고 그럼으로써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모든 비평가의 소망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문학에 대한 열정이 한 여름밤의 폭죽처럼 터진다. 하지만, 토론하고 기획하고 청탁하고 심사하는 와중에 세월은 가고, 비평가는 이제 자신이 바로 문학장의 피시험자가 아닌 시험자란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날이 기필코 온다. ‘라뗀 말이야’를 연발하기 시작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 잦아지면 그는 이제 ‘중견’이 된 것이다.

생애주기 3단계, 청탁이 줄어든다. 혹자는 위로 삼아 부탁드리기 어려워서일 거라고도 하지만, 중견이 된 비평가는 뭐랄까 얼마간 ‘실존적’인 불안을 감추기 힘들다. ‘현장 비평가’란 말 앞에서 자주 쩝쩝거리게 되고, 종종 자조적으로 ‘뒷방 늙은이’란 말을 연발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유물론적으로 말해 그에게 예전만큼의 신체적 글읽기/쓰기 능력이 남아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눈과 허리, 그리고 지구력과 집중력은 그의 나이에 정비례해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습득했고 휘둘렀던 무기들이 녹슬었거나 최소한 녹슨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무기란 물론 그가 사용하던 생산수단들, 그러니까 개념들이다. 가령 새로 등장한 ‘객체지향존재론’의 유행에 맞서 자본주의하에서 객체란 오로지 상품이거나 잠재적 상품으로만 존재한다는 오래된 ‘비판 이론’을 고수하는 것은 어딘가 고집스럽게 여겨진다. 브뤼노 라투르의 ‘비판이론은 대중문화에 흡수당했다’라는 명제에 맞서 푸코의 ‘파레시아’를 꺼내 놓는 것도 어딘가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그것은 마치 한때 (내 경우) 배수아의 소설 속 인물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기어코 밝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중견 이상 이성애주의 남성 비평가들’에 맞서, 동성애도 이성애와 ‘동일한 사랑’이라고 주장해야 했던 비평가가, ‘정체성 정치’란 새로운 개념 장치 앞에서 겪을 수밖에 없게 되는 난감함과 같은 것이다.


실무 바깥으로

비평가의 노년, 그러나 아직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그에 대해서는 그저 상상해 볼 도리밖에 없다. 명사나 인플루언서를 욕심내는 이도 있겠다. 가령 예술원이나 학술원 회원 같은(나는 관심 없다). 급박한 현장 비평은 접고 긴 호흡의 ‘연구’를 시작하는 이도 있겠다. 그러니까 비평적 실천에서 이론적 실천으로의 이행(그러기엔 나는 진득하질 못하다). 아니라면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와 같은 멋진 자전을 쓰는 것도 매력적이겠다(나로서는 그저 의도만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하게 되든, 비평가가 노년에 이르러서는 ‘실무’로부터 해방될 것이란 점은 확실한데, 그것은 무척 고무적이다.
  그러니까 소설에 밑줄을 긋고 인용 부분을 따고 마감일을 걱정하고 청탁을 기다리는 동시에 피하는 그런저런 일들로부터 해방된 삶 말이다. 읽고 싶은 것을 읽고 쓰고 싶은 것만 쓰고, 그도 저도 아니라면 생애주기 내내 차곡차곡, 죽을 때까지 읽어도 다 못 읽을 만큼 쌓여 버린 그 많은 책을, 느릿느릿 읽기‘만’ 하는 그런 노년의 삶이 주어진다면 비평가는 생애 내내 행복했다고 할 만하지 않을까? (비평가랍시고 술 담배에 절어버린 내게 그런 노년이 주어질지는 모르겠다.)

김형중

문학평론가, 조선대 교수. 2000년 『문학동네』 신인문학상 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계간 《문학과사회》 《문예중앙》 편집동인으로 활동했고 계간 《문학들》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 『시절과 형식』 등이 있다. 소천비평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했다.

2024/09/04
6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