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래는 이어폰을 자꾸 만지작거렸다. 핸드폰에 다운로드한 영어 듣기 문제를 듣고 있지만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나래는 핸드폰의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그래도 소리만 왕왕거릴 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안 들리지?’
   나래는 이어폰을 귀에서 확 뺐다. 그러고는 가방을 뒤져 다른 이어폰을 찾았다. 이어폰 세 개가 한데 엉켜 있었다. 나래가 엉킨 이어폰 줄을 푸는데 아이들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야, 미연이는 어쩌고 혼자 와?”
   “어, 미연이 안 왔어? 미연이 학원 갔다고 그러던데.”
   “시험 치기 싫어서 땡땡이치는 거 아냐?”
   “왜 땡땡이를 쳐? 미연이가 저번 시험에서 상 받았잖아.”
   나래는 이어폰을 바꿔 귀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곧 영어 듣기 능력평가를 치지만 듣기 공부를 하는 아이는 나래뿐이었다.
   나래가 다니는 학원에서는 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학기에 두 번 영어 듣기 능력평가를 친다. 원장 선생님이 시험을 잘 친 아이들에게 특별히 상장과 상품권을 주었다.
   나래는 저번 영어 듣기 능력평가를 망쳤다. 시험 점수가 나오던 날 선생님이 나래를 불렀다.
   “나래야, 무슨 일 있니? 필기시험은 만점 받는 애가 듣기시험은 반도 못 맞혔잖니.”
   나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한마디 덧붙였다.
   “다들 반 이상은 맞혔는데.”
   나래는 자기가 학원에서 꼴찌 한 것을 알았다.
   집에 돌아오자 엄마가 잔뜩 벼르고 있었다.
   “김나래, 너 듣기시험 반도 못 맞혔다면서. 미연이 엄마는 미연이가 만점 받았다고 자랑을 하던데. 도대체 뭐가 문제야?”
   “엄마, 귀가 이상한가 봐.”
   “뭐? 뭔 헛소리야. 열심히 안 하니까 그렇지.”
   엄마는 기가 막힌다는 듯 나래를 보았다.
   나래는 이를 악물었다. 너무 비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날부터 나래는 열심히 영어 듣기 공부를 했다.
   드르륵. 강의실 문이 열리더니 선생님이 얼굴을 내밀었다.
   “얘들아, 안녕?”
   나래는 귀에서 이어폰을 빼서 핸드폰과 함께 가방에 넣었다. 선생님 손에는 늘 보던 교재가 아닌 시험지 뭉치가 들려 있었다. 선생님은 시험지를 교탁 위에 올려놓고 아이들을 보았다.
   “다 왔지?”
   “선생님, 미연이 안 왔어요.”
   “어?”
   모두 시선이 미연이 자리로 향했다.
   “미연이가 웬일이지?”
   선생님은 걱정스러운 듯이 빈자리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간 됐으니까 연필과 지우개만 빼고 다 집어넣어.”
   여기저기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래는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괜찮아.’
   소변이 마려운 것처럼 몸이 배배 꼬였다.
   ‘이번에는 공부도 열심히 했고 요령도 익혔으니까. ……괜찮아.’
   시험지가 앞에서 넘어왔다. 나래는 시험지를 받기가 무섭게 문제를 훑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듣기 시험에도 나름 요령이 있었다. 시험지를 나눠주고 듣기를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있다. 그 시간을 백분 활용하는 것이다. 그냥 멍하니 있지 말고 시험지를 보면서 묻는 요지가 뭔지 체크해 둔다. 그러면 질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들을 수 있고 문제를 읽다가 듣기를 놓치는 일도 줄일 수 있다.
   나래가 시험지를 보면서 중요한 부분에 체크할 때였다. 창가 미연이 자리가 눈에 띄었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에 빈자리가 새하얗다.
   “찍……”
   ‘윽.’
   나래는 귀를 틀어막았다.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듯한 잡음이 들렸다. 손톱으로 칠판을 긁었을 때처럼 듣기 싫은 소리였다.
   “으악, 이게 뭐야?”
   “방송 사고다.”
   “그럼, 시험 안 보는 거야?”
   아이들이 소란을 피웠다.
   “쉿 조용히.”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던 선생님도 당황한 듯이 스피커를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잡음이 사라지고 듣기 평가 시작을 알렸다.
   “초등학교 6학년 영어 듣기 능력평가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문제는 한 번씩만 들려드리니 잘 듣고 지시에 따라 물음에 답하시기 바랍니다.”
   나래는 얼른 연필을 잡고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1번. 다음을 듣고 토요일의 날씨로 가장 적절한 것을 고르시오.”
   ‘다른 건 집중해서 들을 필요 없어. 토요일 날씨만 잘 들으면 돼.’
   나래는 중점적으로 들어야 할 부분을 속으로 되뇌었다.
   “On Saturday and Sunday……”
   ‘여기야.’
   나래는 귀를 쫑긋 세웠다.
   “It will be sunny.”
   나래는 맑음 그림이 있는 2번에 체크했다.
   “3번. 대화를 듣고 두 사람이 만날 시각을 고르시오.”
   ‘만날 시각을 잘 들어야 해.’
   “Let's meet at 4:30.”
   순조로웠다. 답을 몰라 허둥대는 일 없이 바로바로 답을 적었다.
   ‘역시.’
   나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무작정 잘 들으려고 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요령을 익혀 효율적으로 들어야 하는데 말이다.
   “4번……”
   이제부터 문장이 조금씩 길어진다. 나래는 더욱 귀를 쫑긋 세웠다.
   “다음을 듣고 여자의 직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을 고르시오.”
   ‘여자의 직업이야.’
   그런데 뭔가가 꺼림칙했다. 잘 들으려고 할수록 더 그런 것 같았다. 마치 먹구름이 몰려들 듯 뭔가가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나래는 애써 그런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9번. 대화를 듣고 신디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르시오.”
   ‘신디에게 무슨 일…… 무슨 일……’
   나래는 속으로 문제의 질문을 되뇌었다.
   “How are you doing? 찍……”
   나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퍽.”
   또 이상한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둔탁하게 치는 소리도 들렸다. 나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험지에 코를 박은 채 문제를 듣고 있었다.
   ‘뭐, 뭐야?’
   나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찍…… 퍽……”
   몸이 뻣뻣하게 굳어 왔다. 마치 혼자만 뚝 떨어져 있는 듯 주위가 점점 멀어졌다.
   나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잡음이 사라지고 다시 방송이 들렸다. 다음 문제로 넘어갈 때 나오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하, 한 문제 놓쳤잖아.’
   나래는 아무 답이나 찍은 다음 이제부터 잘 듣자고 마음을 다독였다. 그런데 연필 쥔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10번……”
   연필을 세게 잡아서인지 손에 땀이 축축이 배어났다. 나래는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대화를 듣고 폴이 무엇을 도와달라고 하는지 고르시오.”
   ‘폴이 도와…… 도……’
   나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차가운 바람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아냐.’
   나래는 찜찜한 기분을 떨쳐 버리려고 도리질을 했다.
   “Can you help me, please? 찌직……”
   또 방송 대신 잡음이 들렸다. 잡음은 점점 더 심해졌다.
   “도…… 와줘……”
   잡음 사이로 다른 말소리도 섞여 들렸다.
   ‘으악.’
   나래는 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소용없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문제를 듣고 있었다. 나래는 손가락으로 귀를 세게 눌렀다.
   ‘이러다 시험 망치는 거 아냐?’
   나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시험을 잘 치려고 애쓴 게 물거품이 될 것 같아 속이 상했다.
   “11번. 대화를 듣고 진의 취미가 무엇인지 고르시오. Let me introduce myself in English.”
   방송이 들렸지만 나래는 가슴이 답답했다. 더 이상 집중적으로 들을 부분을 생각하지 않았다. 연필을 쥐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시험지만 노려보고 있었다. 또다시 방송이 들리지 않을까 봐 신경이 온통 귀에만 쏠렸다. 속이 울렁였다.
   "My name is……. 찌지직……”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중요한 부분에서 방송이 들리지 않았다. 이제 잡음은 신경을 마구 긁어대고 있었다.
   “……나래야”
   나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래는 목을 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하얀 햇살이 비치는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햇살에 자리가 어른거렸다. 순간 나래 눈이 커졌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웅크리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도…… 와줘”
   미연이었다.
   “나래야, 도와줘.”
   ‘앗.’
   나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래는 학원에 갔다. 평소에는 집에 들렀다가 가지만 오늘은 영어 듣기 능력평가가 있는 날이라 그냥 갔다. 집에 가면 엄마가 시험을 잘 치라고 은근히 압박을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넉넉한 편이라 나래는 영어를 들으면서 가려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런데 이어폰이 고장 났는지 지지직거렸다.
   “찍……”
   급기야 찢어지는 잡음이 났다.
   ‘윽.’
   나래는 이어폰을 귀에서 뺐다. 그러고는 다른 이어폰을 가방에서 꺼내 바꾸었다. 그때였다. 공원 가에 몰려 있는 언니들이 보였다.
   언니들은 모두 같은 곳에서 수선한 듯 몸에 딱 붙는 교복을 입고 신발 뒤축을 꺾어 신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교복이 낯익었다. 나래가 다니는 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는 중학교 교복이었다.
   ‘뭘 하는 거지?’
   나래 눈길이 자꾸 그쪽으로 갔다.
   언니들 어깨너머로 미연이가 보였다. 미연이는 언니들에게 에워싸여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야, 오늘까지 돈 가져오라고 했어, 안 했어?”
   대장으로 보이는 언니가 미연이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어쭈, 이게 내 말 씹냐?”
   언니가 손을 번쩍 쳐들자 미연이가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몸을 움츠렸다.
   나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 같아 가슴이 쿵쾅거렸다. 나래는 언니들 눈에 띄기 전에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미연이 목소리가 들렸다. 힘겹게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도…… 와줘.”
   나래는 흠칫 놀랐다.
   “나래야, 도와줘.”
   미연이가 나래 이름을 불렀다. 나래는 간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뭐야?”
   자기를 향한 언니들 시선이 느껴졌다. 나래는 숨이 턱 막혔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도 저렇게 될 것이다. 나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은 척 발길을 옮겼다.
   “나래야, 도와줘. 나래야.”
   미연이가 애타게 나래를 불렀다. 나래는 그 자리를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뛰어가면 이상해 보일 것 같아 평소대로 걸었다. 걸음을 내딛는데 다리가 자꾸 후들거렸다.
   “이게 어디 소리를 질러.”
   퍽. 둔탁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나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야, 화장실로 끌고 와.”
   “자,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나래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더 이상 주변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그, 그냥 갈걸.’
   나래는 괜스레 화가 났다.
   ‘못 들었어. 못 들었어.’
   아니, 듣고도 못 들은 척했다. 자기도 언니들에게 미운털이 박힐까 봐 무서웠고 귀찮은 일에 휘말려 들기도 싫었다.
   ‘미연이 괜찮을까? 아, 아냐. 별거 아냐. 내가 때린 것도 아니잖아. 그래, 맞아. 다 그 언니들이 나쁜 거야.’
   나래는 애써 그렇게 마음을 달래고 잊었다.
   눈을 깜박이자 다시 새하얀 햇살이 비치는 빈자리가 보였다.
   “16번. 다음을 듣고……. 찌지지직……”
   이제 방송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나래야, 도와줘. 나래야……”
   겁에 질린 미연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래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데 소리가 계속 들렸다. 점점 더 크게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나래야, 도와줘. 나래야, 도와줘. 나래야……”
   ‘으악.’
   나래는 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모두 놀란 눈으로 나래를 보았다.
   “뭐야?”
   “에이, 시끄러워서 못 들었잖아.”
   아이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시험 중이잖니.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조용히 손을 들어야지.”
   선생님이 나래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 나래가 꼼짝도 않은 채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었다.
   “나래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선생님이 나래에게 다가왔다. 나래는 그제야 선생님을 보았다. 걱정스러운 선생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 저…… 할 말이 있어요.”
   나래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상으로 초등학교 6학년 영어 듣기 능력평가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그때 영어 듣기 능력평가가 끝났다.

임윤

일상 속 장막 걷기, 일상 속 수수께끼 풀기를 좋아한다. 만화 관련 일을 하다가 동화의 매력에 빠져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어린이들이 기존의 틀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운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라며, 오래 어린이 벗이 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2018/09/25
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