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쨍쨍 미세먼지 매우 좋음.
   점심시간이 되자 운동장이 아이들로 꽉 찼다. 유치원 4세반부터 6학년까지, 아이들이란 아이들은 몽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5학년 2반만 빼고.
   5학년 2반 아이들은 아무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냥 다들 꼼짝도 않고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물론 단체로 낮잠을 자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다 같이 아픈 것도 아니다. 누가 못 나가게 막고 있어서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창문을 넘어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5학년 2반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저마다 뭔가 화난 얼굴, 뭔가 걱정스러운 얼굴, 뭔가 슬픈 얼굴, 뭔가 귀찮은 얼굴이다. 어쨌거나 모두 먹구름 낀 어두침침한 얼굴인 건 확실했다.
   길고 긴 침묵을 깬 것은 지환이였다.
   책상에 엎어져 있던 지환이가 굼뜨게 몸을 일으켰다. 지환이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수학 익힘책을 쳐다보며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5교시에 수학인데…… 익힘책 숙제해야 하는데…… 완전…… 하기 싫다.”
   다시 얼마간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후, 짝인 환영이가 부스스 일어났다. 환영이는 맥없이 지환이를 바라보다가 역시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꺼 수학 익힘책 보여줄까?”
   갑자기 지환이의 반쯤 감긴 눈이 반짝 떠졌다. 환영이는 반에서 수학을 제일 잘한다.
   “진짜?”
   환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환이의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돌아왔다. 지환이는 환영이 책상 위에 놓은 수학 익힘책을 향해 잽싸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환영이가 그 손을 탁 쳐냈다.
   “단, 내 일기 써주면.”
   지환이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뭐? 됐어. 일기 쓰기가 더 싫어.”
   지환이가 실망한 표정으로 책상에 엎드리려던 참이었다. 앞에 앉아 있던 영민이가 쓰윽 일어났다.
   “내가 일기 써줄까?”
   “진짜?”
   영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민이는 얼마 전 박물관 글짓기 대회에서 입선을 했다. 반에서 상을 탄 애는 영민이 밖에 없다. 지환이는 굽실거리며, 왕에게 장계를 올리듯 환영이의 일기장을 두 손으로 받쳐 영민이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영민이는 에헴, 점잖게 헛기침을 하더니 일기장을 다시 지환이 쪽으로 밀었다.
   “단, 내 책 도서관에 반납해주면.”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환이가 서둘러 말했다.
   “알았어. 내가 빨랑 반납하고 올게.”
   영민이가 다시 헛기침을 하고는 덧붙였다.
   “근데, 내 책 20일 연체된 거야. 반납하러 가면 사서 선생님한테 혼날 거야. 나인 척 하고 대신 혼나주는 것까지 포함이야.”
   지환이는 멈칫했다. 사서 선생님은 학교에서 제일 무섭다. 연체된 책은 꼭 직접 반납하고 직접 혼나는 것이 도서관의 룰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대신 반납한 게 발각되면 그 즉시 대출정지를 먹는다. 지환이는 고개를 저으며 기운 없이 대답했다.
   “사서 선생님이 내 얼굴 알아. 보나마나 대출정지 각이야.”
   지환이는 책을 자주 연체해서 도서관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다.
   영민이 옆에 앉아있던 민재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내가 반납해 줄까?”
   “진짜?”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민재는 도서관에 거의 안 간다. 사서 선생님이 민재의 얼굴을 잘 모를 수도 있다. 지환이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민재를 바라보았다. 민재는 팔짱을 끼더니 말을 이었다.
   “단, 변신 표창 하나 접어주면.”
   지환이의 어깨에서 기운이 쭉 빠졌다. 지환이는 종이접기가 꽝이다. 변신 표창같이 고난이도 종이접기는 꿈도 못 꾼다.
   맞은 편 분단에 앉아있던 재은이가 소리도 없이 일어났다.
   “내가 접어줄까?”
   지환이는 좋아서 당장 ‘진짜?’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일단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재은이를 쳐다보았다.
   “물론 원하는 게 있겠지?”
   재은이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우유 대신 마셔주면.”
   지환이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지환이는 우유를 마시면 늘 배탈이 난다.
   교실 뒷문 쪽에 앉아있던 은우가 벌떡 일어났다.
   “내가 마셔줄까?”
   은우는 이미 4학년 때 우유 빨리 먹기에서 교내 신기록을 세웠다. 그때 세운 3초라는 기록은 지금껏 누구한테도 감히 도전받은 적이 없다. 은우 자신만이 그 기록을 다시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은우라면 우유 두어 개 더 마시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지환이는 은우가 그걸 그냥 해주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조건을 내걸지도. 문제는 그걸 들어줄 수 없을 거라는 사실까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 팔찌 찾아주면.”
   은우는 오전 내내 “내 팔찌!”를 외치며 반을 온통 뒤집고 돌아다녔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팔찌라고 했다. 나무 중에서도 초대박 희귀템 나무이기 때문에 그걸 끼고 있으면 행운이 찾아오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생난리를 쳤는데도 못 찾은 걸 지환이가 찾아 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창가에 앉아있던 우주가 흐느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찾아줄까?”
   우주는 4차원이라는 말을 최고의 칭찬이라고 생각하는 오리지널 4차원이다. 우주는 언제나처럼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환이는 또 무슨 4차원 얘기가 나올까 잔뜩 긴장했다. 우주는 입을 몇 번 쩝쩝하더니 뭔가 생각난 얼굴로 말했다.
   “……내 이빨 대신 닦아주면.”
   아이들 중에 몇몇이 “웩!” “미쳤냐?” 소리를 질렀다. 지환이는 우주의 조건은 어느 누구도 들어줄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호가 픽, 콧방귀를 뀌며 일어났다.
   “까짓거 내가 닦아줄 수 있어. 주베이비의 몽키 사인만 받아준다면야.”
   우주 이를 닦아줄 사람이 생겼다는 반가움도 잠시, 주호는 다시금 근심에 휩싸였다. 주베이비는 요즘 잘나가는 아이돌 그룹이다. 몽키는 주베이비의 리더로, 멤버 중 제일 인기가 많다. 이 닦아주는 게 하기 싫긴 해도 할 수는 있는 일이라면, 몽키 사인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걸 해낼 수 있다는 아이가 나타났다. 호연이가 몽키 사인을 받을 수 있는 꿀 정보를 안다고 호언장담하며 일어난 것이다. 물론 조건은 있었다. 집에서 고양이를 키울 수 있게 도와주어야 그 정보를 공개한다고 했다. 지환이에게는 해결하기 막막한 일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걸 해줄 수 있는 아이가 또 나타났다.
   연서는 호연이가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게 만들어주는 대신, 당장 사이다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서진이는 연서에게 사이다를 주는 대신, 옆 반 여자애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진아는 옆 반 여자애한테 서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주는 대신, 수업시간에 안 자고 싶다고 했다. 아윤이는 수업시간에 안 자게 해주는 대신, 호신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나름 순조로운 편이었다. 주짓수 학원을 다니던 윤수가 호신술을 가르쳐주는 조건으로 바라는 걸 말하기 전까지는.
   “나는 전쟁 걱정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세계가 평화로웠으면 좋겠어.”
   “헐……”
   지환이를 비롯한 5학년 2반 아이들 모두 말문이 막혔다. 세계 평화라니. 그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라면 더욱 더.
   반 아이들은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서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5학년 2반 교실 안에는 무거운 정적만 가득했다. 아이들의 얼굴 위로 다시 먹구름이 몰려오고 어두침침한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도로 책상에 엎드리려고 허리를 숙이는 아이도 보였다.
   그때, 수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수지는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었던 마지막 아이였다.
   “그거 내가 해줄까?”
   “뭐?”
   5학년 2반 아이들 눈이 모두 동그래졌다. 다들 입만 헤 벌리고 수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해 보느라 애썼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지환이였다.
   “무슨 수로 세계를 평화롭게 만든다는 거야?”
   수지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내가 직접 한다는 건 아니야. 신께 부탁하는 거지.”
   지환이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신이 그 부탁을 들어준다고 어떻게 장담하는데?”
   수지는 진지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설명했다.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꼭 들어주실 거야. 나는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주일학교에도 절대 안 빠지거든. 그리고 성경책에도 기도한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말이 있어.”
   수지의 표정과 말투에는 왠지 믿음이 가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수지의 당당함에 압도당한 아이들은 그렇다면 신이 기도를 들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단번에 설득당한 건 지환이도 마찬가지였다. 지환이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물론 그냥 해주겠다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냥 해주겠다는 건 아니지. 나도 마음이 가벼워야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지 않겠어?”
   지환이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수지를 바라보았다. 이제 5학년 2반에 남은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또다시 지환이가 들어 줄 수 없는 조건을 댄다면 완벽하게 끝장이었다. 교실에 긴장감이 흘렀다.
   수지는 가방을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냈다. 수학 익힘책이었다.
   “내 숙제가 완벽한지 확인하고 싶어. 지난번에는 한 개 틀려서 너무 짜증났거든.”
   지환이 눈이 동그래졌다.
   “뭐? 소원이 겨우 그거야?”
   지환이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외치자 수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지환이는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 정도라면 내가 해줄 수 있어. 이리 줘.”
   수지가 수학 익힘책을 건네주었다. 지환이는 수지가 쓴 답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연습장에 문제를 다시 풀었다. 한참 끙끙거리던 지환이는 가까스로 숙제 확인을 마쳤다. 수지의 숙제는 완벽했다.
   “틀린 거 없어.”
   수지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진짜?”
   지환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진짜. 맹세.”
   수지가 빙그레 웃더니 곧 경건한 표정으로 의자 위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어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하나님 아버지여,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갑자기 시급한 문제가 생겨 이렇게 간청 드립니다……”
   수지의 기도를 듣고 있던 윤수도 의자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는 함께 간절히 기도했다. 세계 각국의 전쟁이 멈추고 평화가 찾아오게 해달라는, 꽤 긴 기도가 끝나자 항상 근심 걱정에 싸여있던 윤수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윤수는 호신술을 배우고 싶어 했던 아윤이를 교실 뒤편으로 나오게 했다. 교실 뒤편에는 애들이 보드 게임할 때 쓰는 퍼즐 매트가 깔려있었다. 윤수는 호신술로 쓸 수 있는 주짓수 기술을 아윤이에게 알려주었다.
   “깃초크하고 마운트암바만 제대로 할 줄 알면 게임 끝이야.”
   아윤이는 제법 잘 따라 했다. 특히, 옷깃으로 상대의 목을 조르는 깃초크를 잘했다.
   윤수에게 칭찬까지 받고 난 아윤이는 사뭇 당당해진 모습이었다.
   아윤이는 수업 시간마다 졸아서 혼나는 진아에게 잠 깨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잠 깨는 데는 손바닥 전기가 최고야.”
   아윤이는 진아의 손가락 마디를 쭉쭉 뽑고, 손바닥을 쫙쫙 때리고, 피가 통하지 않도록 손목을 꽉 쥐었다가 슬그머니 놓았다. 피가 통하지 않아서 노래졌던 진아의 손바닥에 붉은 핏기가 돌아왔다. 진아는 진짜로 손바닥에 전기가 온다면서 잠이 확 깬다고 좋아했다.
   진아는 당장 서진이가 짝사랑하는 여자애가 있는 1반으로 달려갔다. 1분 30초 후, 진아가 교실 앞문으로 뛰어 들어왔다. 진아는 너무 빨리 뛰어오느라 숨이 차서 말을 제대로 못했다.
   “헉헉, 서진아, 헉헉. 걔, 개도 너 좋대!”
   상사병에 걸려 퀭하던 서진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서진이가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진이는 사이다가 마시고 싶다고 했던 연서에게 말했다.
   “사이다, 내가 직접 만들어 줄게!”
   과학 동아리 회장인 서진이는 과학실에서 식용 소다, 구연산, 설탕을 얻어왔다. 그러고는 능숙한 솜씨로 재료를 섞었다. 잠시 후, 거품이 뽀글뽀글 올라오는 사이다가 완성되었다. 살짝 맛을 본 연서는 조금만 더 시원하면 파는 사이다랑 똑같을 것 같다면서 시원하게 쭉 들이켰다.
   점심 얹혔던 게 쑥 내려간 연서는 손짓으로 호연이를 불렀다. 연서는 호연이에게 고양이를 키울 수 있는 비법을 전수해주었다.
   “동물을 키우는데 있어서 제일 큰 장벽은 엄마야. 엄마가 제일 걱정하는 게 뭔지 아니? 바로 청결이야. 고양이 키울 때 고양이 화장실, 고양이털 청소는 니가 책임진다고 하면 엄마가 일단 반 쯤 넘어 올걸? 그리고……”
   연서는 자기도 그렇게 해서 고양이를 키우게 되었다면서 자세한 성공담을 풀어놓았다. 호연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서의 말을 수첩에 열심히 받아 적었다. 덕분에 호연이는 엄마 설득 10단계 작전을 완성했다.
   계획을 다 짠 호연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주호에게 아이돌 사인을 받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호연이는 선생님에게 내지 않고 몰래 감춰두었던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호연이는 자기가 구독하는 유튜브 채널에 접속했다.
   “자, 봐봐. 여기 몽키 사인 이벤트 보이지?”
   주호가 스마트폰에 얼굴을 들이대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연이는 몽키 사인 이벤트에 응모의 댓글을 달아주었다. 호연이의 말에 의하면 호연이는 그 채널에 댓글을 자주 남겨서 운영자랑 꽤 친해졌기 때문에 이벤트에 당첨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주호는 감격해서 호연이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했다.
   주호는 벌써 싸인을 받은 사람처럼 싱글벙글 웃으며 우주 옆으로 걸어갔다. 우주는 아까 이를 닦아 달라고 했었다. 다들 어떻게 할지 흥미진진하다는 눈빛으로 주호와 우주를 지켜보았다. 주호가 우주를 보며 씨익 웃었다.
   “우리 집 똘방이 이빨은 맨날 내가 닦아주거든.”
   주호는 일단 우주를 끌로 수돗가로 갔다. 그리고는 강아지 이빨 닦이는 기술을 발휘해서 우주의 이를 박박 닦여 왔다. 우주는 이가 완전 뽀득거린다면서 신기해했다.
   우주는 상쾌한 표정으로 팔찌를 잃어버린 은우에게 갔다. 은우는 침울한 표정으로 벼락 맞은 대추나무 팔찌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설명했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네가 간 장소와 시간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우주는 갑자기 명탐정 코난으로 변신을 했다. 그리고는 간간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잠시 후, 우주는 재활용 쓰레기통 근처에서 뒹굴던 팔찌를 찾아냈다. 팔찌 색깔이 거무죽죽해서 마룻바닥과 비슷해 눈에 잘 띄지 않았던 거였다. 은우는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까지 글썽였다.
   은우는 팔찌를 끼운 손을 재은이에게 쑥 내밀었다. 재은이는 은우의 손을 말똥말똥 쳐다보기만 했다.
   “줘. 우유.”
   은우는 재은이가 건네 준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은우는 2초만에 우유를 비웠다. 아이들이 “우아아!” 함성을 질렀다. 우유 빨리 먹기 자체 신기록을 깬 은우의 뒤통수에서 후광이 비쳤다. 재은이는 은우를 존경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재은이는 우유를 없애버려 후련하다는 얼굴로 사물함에서 색종이 뭉치를 가져왔다. 그러고는 민재에게 물었다.
   “변신 표창 색깔 골라. 두 가지.”
   민재는 노란색과 파란색을 골랐다. 재은이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변신 표창을 뚝딱 만들어냈다. 변신 표창은 바람개비 모양이 되었다가 육각형 링 모양으로도 척척 변신했다. 재은이는 변신 표창 모양이 절대 틀어지지 않도록 자기만의 노하우를 담았다고 자랑했다. 변신 표창을 받은 민재는 펄쩍펄쩍 뒤며 좋아했다.
   에너지가 충전된 민재는 영민이의 책을 안고 도서실로 쌩 뛰어갔다. 민재는 깊이 뉘우치는 표정으로 사서 선생님에게 용서를 빌었다.
   “선생님,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읽고 또 읽고 또또 읽고 또또또 읽다 보니 너무 오래 연체됐어요. 진심,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사서 선생님은 책이 재미있어서 그랬다는 말에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서 앞으로는 책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일단 반납을 하고 다시 빌리라고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20일을 연체되면 20분 혼이 나야 정상인데, 민재는 기적적으로 5분 만에 돌아왔다. 영민이는 연체된 책 반납 문제가 해결되자 앓던 이가 빠진 표정이었다.
   신이 난 영민이는 환영이 책상에서 일기장을 휙 가져갔다. 그러고는 중간에 한 번도 머뭇거리지 않고 일기를 끝까지 슥슥슥 써 내려갔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고 이를 닦았다. 학교에 가서 1교시에는 국어를 했다. 2교시에는 수학을 했다. 3교시에는 체육을 했다. 4교시에는 과학을 했다. 점심 급식으로 짜장밥, 달걀국, 핫도그, 단무지를 먹었다. 5-6교시에는 미술을 했다. 학교 끝나고 학원을 갔다 온 다음에 저녁밥을 먹었다. 그리고 숙제하고 이 닦고 잤다.”
   환영이는 영민이가 써 준 일기를 읽고 감탄을 했다. 어제 자기가 보낸 하루랑 완전히 똑같아서 선생님에게 절대 들키지 않을 것 같다는 거였다.
   환영이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지환이에게 수학 익힘책을 건네주었다. 지환이는 더할 나위 없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수학 익힘책을 받아들었다.
   지환이는 수학 문제 답을 베끼기 시작했다. 빛의 속도로 답을 베끼던 지환이가 문득 연필을 멈췄다. 지환이가 환영이를 향해 말했다.
   “야, 이 문제 답 틀린 것 같은데.”
   “어떤 거?”
    “이거. 14아니고 16이야.”
   “그럴 리가?”
   “아니야. 아까 수지 꺼 확인할 때 풀어봤는데 16이 맞았어.”
   수학왕 환영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책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연필을 꺼내 다시 계산하기 시작했다.
   “어, 맞네. 16.”
   “그치?”
   “어. 내가 실수했어.”
   환영이는 뒷통수를 득득 긁더니 자기 답을 고쳤다. 지환이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는 나머지 답을 마저 베꼈다. 숙제 베끼기는 순식간에 끝났다. 지환이는 귀찮은 수학 숙제를 쉽게 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서 헤벌쭉 웃었다.
   “와, 답만 베끼니까 숙제하기 대박 쉽다. 히히히.”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은 아직 20분이나 남아있었다. 도둑잡기를 하고 놀면 경찰이 15번은 바뀔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야, 나가서 좀비놀이 하자.”
   “그럴까?”
   다른 아이들도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부산하게 일어섰다.
   “우리도 나가서 홍콩얼음땡 하자!”
   “좋아!”
   “누구 축구공 있는 사람?”
   5학년 2반 아이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운동장으로 우당탕 뛰어나갔다.
   밖은 여전히 햇볕 쨍쨍 미세먼지 매우 좋음이었다.    <끝>

천효정

저는 아이들이 너무 어른 말을 잘 들어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른이 가르쳐준 바른길로만 걷는 아이는 정작 그 길이 왜 바른길인지 모를 수도 있거든요. 정말 하고 싶다면 시도해 보는 권리, 너무 하기 싫다면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어른에게나 어린이에게나 똑같이 주어져야 한다고도 생각해요. 조금 버르장머리 없는 게 생각 없는 인형처럼 사는 것보다는 보다는 낫잖아요. 어린이의 미래가 아닌 어린이의 현재를 위한 글을 쓰자는 게 제 얄팍한 글쓰기 목표입니다.

2019/05/28
1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