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왼쪽으로 휙 꺾었다. 덜그럭! 귓속에서 소리가 났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휙 꺾었다. 덜그럭! 또다시 소리가 났다. 역시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작정을 하고 고개를 사방으로 마구 흔들었다.
   덜그럭덜그럭 따르르륵 돌그락!
   “아, 시끄러워!”
   머리가 웽웽 울리는 것 같아서 잠깐 멈췄다. 돌이 들어간 걸까? 아니면 벌레가 들어간 걸까? 예전에도 귀에 벌레가 들어가서 귀에 기름을 넣고 핀셋으로 꺼낸 적이 있다. 느낌이 진짜 이상했다. 하지만 벌레가 들어갔을 땐 천둥 치는 소리가 나지 달그락거리진 않았는데.
   “엄마 나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뭐라고? 이번 달에는 정말 전기세가 너무 많이 나왔네.”
   엄마는 가계부를 보고 있었다.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밖에 공사라도 하나 보지.”
   엄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베란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도 덩달아 베란다를 봤다.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나는데. 고개를 돌리니까 또 귀에서 덜그럭! 소리가 났다.
   “원룸이라도 세우려나 보네. 안 그래도 앞에 있는 빌라 때문에 해도 안 들어오는데.”
   엄마는 다시 가계부로 눈을 돌렸다. 엄마 귀에는 공사하는 소리가 들리나 보다.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걸을 때마다 달각달각 소리가 나서 아주 귀찮았다.
   “민주야 오빠 귀에 이상한 소리가 난다?”
   민주는 얼굴을 이상하게 일그러뜨리더니 우에에에엥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얼른 민주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민주는 숨이 넘어갈듯이 울었다. 귀에 덜그럭거리는 소리도 요란해졌다. 민주는 정말 멍청하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하루에 수십 번을 울어댄다.
   엄마는 내가 외로울까 봐 민주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엄마랑 아빠는 나로는 부족해서 민주를 만든 거다. 이런 동생 같은 게 나한테 필요할 리가 있냔 말이다.
   “너 또 민주한테 무슨 짓 했어? 맨날 동생이나 괴롭히고!”
   엄마는 공룡다큐멘터리에서 봤던 메갈로돈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쫓아왔다. 나는 얼른 가방을 빼 들고 집에서 빠져나왔다. 이럴 때는 학원으로 도망치는 수밖엔 없다.

   애들은 지난주 개그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이상한 개그맨을 흉내내고 있었다. 한사람이 머리를 때리면 맞은 애가 넘어졌다가 벌떡 일어나는 거다. 저런 게 뭐가 재밌다고. 나는 옆자리에 있는 수혁이한테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했다. 수혁이는 귀찮다는 듯 뭐래? 하고는 옆에 있는 지은이 머리를 세게 때렸다. 지은이는 기절한 것처럼 넘어졌다가 벌떡 일어났다. 애들은 그걸 보고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나는 덜그럭거리는 소리랑 애들이 웃는 소리 때문에 머리가 막 아파서 책상에 엎드렸다. 아무도 내가 왜 엎드리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한참을 엎드려 있었더니 교실 문이 열리고 학원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나는 손을 들고 말했다.
   “선생님, 자꾸 귀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요.”
   “그래? 그것참 문제로구나. 어머님이 이번 달 학원비 말씀은 없으셨니?”
   “다음 달에 이번 달 몫까지 같이 내주신대요.”
   “흠, 그래.”
    선생님 얼굴이 심각해졌다.
   “선생님 제 귀에서.”
   “그것보단, 절반이라도 미리 납부해달라고 말씀드려보렴. 알다시피 두달치를 한꺼번에 낸다는 게 무리일뿐더러, 학원비라는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거든.”
   “네, 엄마한테 말씀드릴게요.”
   나는 귀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도저히 더는 선생님과 대화를 할 수 없을 것 같아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뒤에 있는 수혁이랑 지은이가 내 얘길 하면서 수군대는 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딱 50번 났다.

   엄마는 민주를 안고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살금살금 들어가서 조심조심 가방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꼭 닫았다.
   꼬르르륵
   배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다시 살금살금 발끝을 들고 주방으로 나갔다. 우리 집은 주방이 엄청 작은데 냉장고가 엄청 크다. 문을 열려면 몸을 최대한 웅크려야 한다. 엄마는 냉장고는 무조건 큰 게 좋다고 했다. 왜인지 물으니까 오래오래 많은 음식을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집엔 1년 된 송편도 있고 3년 된 돈가스도 있다.
   나는 냉장고에서 민주 이유식을 하나 꺼내먹었다. 이빨이 딱딱 부딪칠 때마다 달그락 소리가 나서 귀찮았다. 어제부터 내 세상은 엄청 시끄러운데 다른 사람들 귀에는 달그락 소리가 안 난다는 게 신기했다. 언제까지 소리가 날까? 이비인후과는 안 가도 되는 걸까?
   민주가 태어나기 전에는 내가 아프다고 하면 곧장 병원으로 데리고 갔는데, 이젠 그러지 않는다. 병원을 안 가게 된 건 좋은 일인데 또 생각보다 그렇게 좋지도 않다.
   민주는 지난주에도 병원에 가고 이번 주에 또 병원을 간다. 면역력이 없어서라고 엄마가 그랬다. 못난 내 동생은 면역력이라는 것도 없이 태어났나 보다.

   아빠가 돌아오셨다. 나는 달려가 먼지가 잔뜩 묻은 아빠의 작업복에 달라붙었다.
   “내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아빠는 내가 다리에 달라붙어 있는 건 상관하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머리가 울릴 정도로 달각거리는 소리가 심해졌다. 나는 아빠 다리를 놓고 바닥에 앉았다.
   “숙제는 다 했어?”
   아빠는 민주 방으로 가면서 내게 물었다. 나는 얼른 아빠를 쫓아가서 민주 침대에 턱을 괴고 대답했다.
   “응, 다했어. 아빠 어제부터 내 귀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
   “당신 애 안 씻겼어?”
   아빠가 인상을 쓰면서 엄마에게 물었다.
   “왜, 또.”
   엄마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민주가 에엥, 하고 울었다.
   “애가 얼마나 더러웠으면 귀에서 귀지 소리가 다 나.”
   “참네. 당신 아들이 지금 몇 살인데 엄마가 일일이 씻겨줘. 지가 다 알아서 씻을 수 있어. 오자마자 잔소리야.”
   아빠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엄마가 안 씻겨주면 네가 알아서 좀 깨끗하게 씻고 해야지. 그렇게 게으르면 커서 훌륭한 사람이 못 돼.”
   “나 씻었는데.”
   “또 아빠 말에 말대꾸한다. 나 어릴 때는 안 그랬는데 너는 말대꾸하는 아주 나쁜 버릇이 있어.”
   나는 진짜 매일매일 혼자 씻었다. 귀지도 얼마나 깨끗하게 닦는지 아빠는 모른다. 아빠 잔소리가 심해질수록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심해졌다. 나는 고개를 막 흔들었다. 머리가 아파서 그런 거다. 엄마랑 아빠는 내가 화가 나서 그러는 줄 알고 더 화가 나서 소리를 막 질렀다. 그러다가 아빠가 엄마한테 소리를 지르고 엄마도 아빠한테 소리를 질러서 엄마랑 아빠가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집에서 뛰쳐나왔다.

   놀이터에는 504호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가 504호 할머니인 건 엄마가 맨날 놀이터를 지나갈 때마다 얘기해서 아는 거다. 엄마는 504호 할머니가 치매에 걸렸다고 했다. 치매가 뭔지 물으면 인상을 찌푸리면서 그런 것까지 네가 알 필요는 없다고 했다.
   504호 할머니는 그네가 있는 맨 끝에서 시소가 있는 맨 끝까지 계속 왔다갔다 걷고 있었다.
   “할머니 뭐 하세요?”
   나는 할머니를 따라 걸으면서 물었다. 할머니는 내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쉴 곳을 찾고 있지.”
   “저기 의자가 있잖아요.”
   “내가 다니는 길에는 없잖어.”
   “옆으로 쫌만 가면 있는데요?”
   할머니는 내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다시 열심히 그네에서 시소까지 걸었다. 나는 할머니를 쫓아가서 물었다.
   “할머니 내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요.”
   할머니는 걸음을 멈추곤 놀란 얼굴로 나를 봤다.
   “너도 들리냐?”
   “네?”
   할머니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꾸 누가 모르는 이름을 불러. 사방에 아무도 없는데 자꾸 어디서 이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니까. 전부 나를 노망난 늙은이 취급을 하는데, 진짜라구.”
   “저는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라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나요.”
   “달그락?”
   “네.”
   “그건 보통 일이 아니구나.”
   504호 할머니가 정말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나는 겁이 덜컥 났다. 심지어 할머니는 걷는 것도 멈추었다.
   “도깨비라도 들어갔나.”
   “네?”
   “도깨비가 아니면 귀신이든가.”
   “귀신이요?”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할머니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니 끌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할머니에게서 등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뒤에서 말했다.
   “귓속에 뭐가 있는지 한번 물어봐라, 아무도 없으면 대답도 안 하겠지.”

   해가 지고 집에 돌아갔을 때, 엄마랑 아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TV 앞에 앉아 땅콩을 까먹고 있었다.
   “일찍 좀 다녀. 다 늦게 들어오고 그래.”
   “그래, 아빠 말이 맞다. 너는 엄마 아빠가 매번 얘기를 해도 귀담아듣질 않니.”
   “민주한테 본이 되는 오빠가 돼야지.”
   “민주가 뭘 보고 배우겠니.”
   나는 엄마 아빠를 지나쳐서 얼른 내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귀에서 딱따구리가 쪼는 것처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엄마랑 아빠는 얼마 동안 더 중얼거리다가 내가 문을 닫으니까 조용해졌다. 할머니 말을 믿는 건 아니다. 근데 뭐가 들어간 거라면 내가 가만히 있을 땐 소리가 안 나야 하지 않나?
   “흡!”
   나는 혹시나 소리가 멈출까 싶어 숨을 참았다. 밧줄로 꽁꽁 감은 것처럼 몸도 꼼짝하지 않았다.

‘따라라라라라라라락! 따라라라라라락! 따라라라라라라락!’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점점 숨만 막혔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푸하아악!”
   숨이랑 침을 다 뱉고 나는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만 더 참았으면 진짜 죽었을지도 모른다. 역시 가만히 있다고 소리가 안 나는 건 아니다.
   “아이씨!”
   나는 짜증이 나서 소리를 빽 질렀다.
   “조용히 좀 해!”
   밖에서 엄마가 고함을 쳤다. 혹시 엄마가 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까 봐 나는 얼른 책상에 학습지를 펼쳤다. 엄마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의자를 끝까지 젖혔다. 의자가 넘어질 듯 말듯 흔들거렸다.
   “야, 혹시 거기 누구 있냐?”
   504호 할머니 말을 진짜 믿는 건 아니다. 그냥 혼자 있을 땐 가끔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싶어지기도 하니까.
   달그락달그락
   “누구 있냐고, 귓속에.”
   달그락달그락
   “시끄러워 죽겠네, 진짜.”

‘죽겠네, 진짜.’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와장창 넘어졌다. 저쪽 방에 있던 민주가 에에에엥― 하고 사이렌처럼 울었다. 쿵쿵쿵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벌컥 열렸다.
   “너 당장 나와.”
   “아빠, 잘못했어요.”
   아빠는 화가 나서 코가 커지고 눈이 빨개져 있었다. 엄마도 거실에서 한숨을 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조용히 하란 얘기 못 들었어?”
   “들었어요.”
   “그런데 왜 말을 안 들어.”
   “죄송해요.”

‘죄송하긴 개뿔!’


   귓속에서 또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놀라서 “헉!”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빠가 말하는데 딴생각이야?”

‘축구 져서 괜히 분풀이하는 주제에, 웃기고 있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괜히 화풀이하는 거라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였다. 아빠는 내가 귓속의 목소리에게 대답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아빠가 너만 할 때는 이런 책상도 없고 컴퓨터도 없었어! 휴대폰도 없었고. 너는 엄마 아빠가 뭐든 해달라는 건 다 해주니까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지? 그렇게 살면 나중에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사람밖엔 안 돼.”

‘회사 갔다 와서 축구 보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제일 한심한 건 아니고?’


   나는 또 고개를 끄떡였다. 아빠가 하는 말은 하나도 안 들렸다. 귓속의 목소리가 하는 말 때문에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아서 억지로 참았다. 내가 하도 열심히 고개를 끄떡이니까 아빠는 얼마 동안 더 잔소리를 하다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축구 후반전 할 시간 됐나 보네.’


   “너 누구야?”

‘어? 들리냐?’


   목소리가 되물었다. 나는 놀라서 귀를 양손으로 찰싹찰싹 때렸다.

‘야야야! 너 뭐 해?’


   “꿈인 것 같아서.”

   나는 얼얼한 귀를 감싸 쥐며 대답했다. 목소리가 혀를 끌끌 찼다.

‘꿈은 무슨 꿈이야. 헛소리 좀 하지 마.’


   “그럼 넌 누군데? 귀신이야?”

‘넌 아직도 그런 걸 믿냐?’


   “아니, 안 믿지!”

   나는 겁쟁이처럼 보일까 봐 얼른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가 킥킥 웃었다.

‘소리를 듣고 온 거야.’


   “소리? 무슨 소리?”

‘니가 날 찾았잖아. 달그락달그락.’


   “내가 그런 거 아닌데?”

‘다들 말은 그렇게 하지.’


   “진짠데.”

‘네가 부른 게 아니라도, 난 그 소리를 듣고 왔어.’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달그락 소리가 들렸고, 민주가 울었고, 아빠한테 혼났고, 엄마 아빠가 싸웠고, 504호 할머니를 만났고, 전기세, 학원비, 원룸……, 아무리 생각해도 목소리 같은 걸 부른 적은 없다.

   “정말 귀신 아니야?”

‘귀신이면 또 어때?’


   그건 싫다. 귀신은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지옥으로 날 데리고 가려고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목소리가 귓속에서 투덜거리는 통에 아빠 잔소리를 하나도 듣지 않게 된 건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고마울 거 없어.’


   “어?"

‘네가 생각하는 건 다 들리니까 일일이 말할 필요 없어.’


   “우와, 진짜?”

‘그래, 아무튼 난 피곤해서 잘 테니까, 깨우지 마.’


   목소리도 잠을 자냐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잠자코 응, 하고 대답했다. 목소리는 내 안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면,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언제든 내가 다시 목소리를 찾으면 나타날 것이다. 어떻게 지금까지는 목소리를 모르고 살았을까? 목소리가 사라지자 귓속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달그락 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귓속의 목소리라니, 내가 생각하는 것도 다 들을 수 있다니. 나는 침대에 들어가 눈을 감았다. 오늘은 아주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새끼 봐, 저것도 못 넘는다.”
   승찬이랑 학현이 무리가 나를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나는 있는 힘껏 발을 굴렀다. 쿵! 하고 엉덩이가 뜀틀 끝에 걸렸다. 반 아이들이 전부 다 웃음을 터트렸다. 선생님은 빨리 나오라고 손을 흔들어댔다. 급하게 내려오려다 바지가 걸려서 또 넘어졌다. 아이들은 이제 배를 잡고 웃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다 멍청한 녀석들뿐이네!’


   목소리가 불쑥 귀에서 말했다. 신기하게도 그 말을 듣자 쿵쿵 뛰던 심장이 차분해졌다.

‘바보들 같으니라고. 뭐가 웃기다고 저 난리야.’


   목소리는 마치 나라도 되는 것처럼 씩씩대며 말했다. 무척 화가 난 목소리였는데도 이상하게 다정하게 들렸다.

‘일어나서 줄로 돌아가. 저 멍청이들은 신경 쓰지 말고.’


   나는 바지를 추스르고 천천히 줄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나를 비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목소리가 계속 말을 걸어주었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내가 더 이상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으니 아이들도 관심을 잃고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잘 했어. 내가 여기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정말 괜찮아졌다.

   “다 멍청한 녀석들뿐이군!”
   나는 목소리의 목소리를 흉내 내보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귓속에서 목소리가 킥킥거리면서 웃었다. 나도 키득키득 따라 웃었다. 풍선을 껴안은 것처럼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가슴이 막 시원하기도 했다.

제법 잘 따라 하는데?’


   목소리가 말했다. 내 귓속에 목소리가 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 꼭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너는 내 옆에 계속 있을 거지?”

‘그럼, 당연하지.’


   목소리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내게 와 줘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하늘에서 날 지켜보던 신이 선물로 목소리를 내게 보내준 건 아닐까? 난 여태 선물다운 선물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으니까 말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엄마가 민주를 돌보느라 내 급식비 내는 걸 잊어먹어도, 아빠가 술을 마시고 나를 다그쳐도, 선생님이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아도 이젠 별로 슬프지 않았다. 어딜 가나 목소리가 함께 있었으니까. 목소리는 내 편이니까.


   “귓속에 도깨비는 찾았냐?”
   놀이터를 지나갈 때 504호 할머니가 물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찾았어요!”

배성주

올해 7월, 유리처럼 부서질 것 같은 작은 아이가 내게로 왔다. 여린 몸의 무게가 한 세계의 무게와도 같아, 펜을 드는 손끝에도 두려움이 앞선다. 나를 닮은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쓸 수 있기를. 너를 비출 거울이 될 수 있기를. 네가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한 뼘 더 너그러워져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쓴다.

2018/08/28
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