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꼴찌다. 자전거를 타면 내가 늘 맨 뒤다. 난 멀어져가는 솔아의 등을 바라봤다. 솔아는 치사하다. 처음 출발할 때는 내게 핸디캡을 준다고 늦게 출발해놓고, 숨이 차오르기 시작할 때쯤 기세 좋게 날 앞지른다. 저만치 앞에는 미지가 있겠지. 항상 그랬지만 겪을 때마다 짜증이 치솟았다.
    “최고급 자전거니까 이번에는 우리 유현이가 일등일 거야.”
    독일에서 만들어졌다던 자전거를 계산하면서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전거 가격과 속도는 아무 상관이 없나보다. 미지는 빛바랜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자전거를 타고도 제일 빠르니까. 왜 매번 나만 꼴찌야? 안장에서 엉덩이를 들어올려 페달을 힘주어 밟았다. 종아리가 당겼지만 간신히 솔아 옆에 따라붙을 수 있었다. 새하얀 자전거에 탄 솔아는 나를 보며 밉살맞게 웃었다.
    “넌 자전거 타기에 재능이 없나봐.”
    “그게 아니라 유현이가 새 자전거에 익숙하지 않은 거겠지.”
    어느새 내 옆으로 온 미지가 자전거를 멈추며 말했다. 오래된 타이어가 도로 위에 미끄러지며 끼이익, 하고 비명을 질렀다. 이 소리 때문일까. 미지가 내 편을 들어주는데도 기쁘지 않았다. 솔아도 자전거를 세웠다. 난 그 둘을 앞지른 뒤에야 자전거를 세웠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일등이었다. 목덜미에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나뭇잎들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울었다.
    “건포도 먹고 싶다.”
    바람 소리를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그건 분명 미지의 목소리였다. 나는 미지를 바라보았다. 솔아도 미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지는 우리의 시선을 피했지만 귀가 발개져 있었다. 먼 곳을 쳐다보던 미지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건포도 먹고 싶다.”
    우리가 붙어지낸지도 일 년이 넘었다. 동생이 네 명이나 있는 미지는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절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건포도가 먹고 싶다니. 솔아가 물었다.
    “건포도? 웬 건포도?”
    “그냥 생각나서. 꼭 먹고 싶은 건 아니지만.”
    미지가 얼버무렸다. 내리깐 두 눈이 쓸쓸해 보였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솔아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미지는 자전거에 올라탔다.
    “아니야, 괜히 말했나봐. 신경 쓰지 마.”
    구부러진 미지의 등이 멀어졌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솔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5학년이 타기엔 너무 작고 낮은 미지의 자전거만 바라봤다. 기세 좋게 앞서나가던 미지의 자전거가 갑자기 휘청, 했다. 솔아가 비명을 질렀다.
    “김미지!”
    우리는 얼른 자전거를 타고 달려갔다. 미지의 오른쪽 무릎에서 건포도처럼 검붉은 피가 흘렀다.
    “돌부리에 걸렸어.”
    미지는 금방 일어났지만 오른쪽 다리를 절었다. 솔아가 얼른 팔을 잡았다. 솔아에게 기댄 채 미지는 자전거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이 자전거는 못 쓰겠다.”
    내가 말했다. 낡은 자전거는 두 동강이 났다. 뒤쪽 바퀴가 힘없이 팽글팽글 돌아갔다. 미지의 손때가 묻은 핸들은 완전히 거꾸로 돌아가 있었고, 미지의 운동화를 닳게 만들었던 페달은 아예 몸체에서 빠져나가 있었다. 미지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깨끗이 타서 동생들 물려주라고 엄마가 그랬는데……”
    미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미지가 울음을 터트릴까봐 더럭 겁이 났다.
    “미지야, 그러지 말고 건포도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그래도 돼?”
    코를 훌쩍이며 미지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집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팔아. 내가 봤어. 얼른 갔다 오자.”
    “그래, 가자! 거기서 반창고랑 약도 사면 되겠네! 전부 유현이가 산대!”
    솔아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살짝 짜증이 났지만, 미지가 웃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 앞 편의점에는 건포도가 없었다. 솔아가 나를 돌아보며 짜증을 냈다.
    “야, 여기 있다며?”
    속에서 욱, 하는 마음이 일었다. 나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지금은 안 파나보지.”
    무릎에 반창고를 붙이던 미지가 우리 둘을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난 안 먹어도 괜찮은데. 나 때문에 싸우면 안 되는데.”
    “싸우는 거 아냐.”
    솔아와 나는 서로를 노려보며 동시에 대답했다. ‘싸우는 거 아니다’는 솔아와 나만이 쓸 수 있는 주문이다. 성격이 반대인 우리는 일 년 동안 싸웠고, 싸우면서 이 주문을 생각해냈다. 서로 기분이 상했을 때 이렇게 말하면 크게 싸우진 않았다. 또 중간에 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미지도 ‘싸우는 거 아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느 정도 안심했다. 난 슬그머니 솔아의 눈을 피했다. 머리카락만큼 새까만 솔아의 눈동자에게 또 지고 말았다.
    “건포도 어디 가면 팔지? 시장? 마트?”
    내 물음에 솔아가 대답했다.
    “요 앞 사거리에 있는 동네 마트에서 팔았던 거 같다.”
    난 말없이 벤치에 앉아 있던 미지의 팔을 잡아서 일으켜세웠다. 그 모습을 보던 솔아는 홱 돌아서더니 앞서 걷기 시작했다. 솔아가 말한 마트는 대형 마트보단 작았지만 편의점보다는 컸다. 엄마는 그곳에서 냄비와 프라이팬을 사온 적도 있었다. 냄비와 프라이팬까지 파는 곳인데 건포도는 당연히 팔겠지. 하지만 건포도는 없었다. 마트를 나오면서 미지가 말했다.
    “나 안 먹어도 괜찮아.”
    분명히 보았다. 미지는 건포도가 아닌 것들로 가득찬 선반을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건 다 있었다. 초코크림과 땅콩버터가 반씩 발라져 있는 쿠키도 있었다. 설탕을 뿌려 말린 코코넛도 있었다. 마시멜로우가 듬뿍 들어가 있는 코코아가루도 있었다. 그런데 건포도가 없었다.
    “그냥 인터넷에서 사라, 미지야. 거기서 사는 게 더 싸고 양도 많을 거야.”
    내가 말하자 솔아도 거들었다.
    “맞아. 우리 엄마도 이번에 인터넷으로 비행기에서 주는 꿀땅콩 엄청 샀어. 엄마가 아빠랑 신혼여행 갔을 때 먹었던 건데, 너무너무 먹고 싶어도 어디서 파는지 몰라서 항공사에 전화까지 하고 그랬대. 근데 인터넷에서 찾으니까 나온다구, 엄마가 진짜 좋아했어.”
    “그 꿀땅콩 나도 먹어봤어! 진짜 맛있어.”
    솔아와 나는 언제 싸웠냐는 듯이 꿀땅콩 이야기로 떠들었다. 우리의 얘기를 듣고만 있던 미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인터넷에서 그런 거 어떻게 사?”
    “어떻게 사냐니. 그냥 인터넷 창에 검색해서 나오면, 엄마 카드로.”
    난 얼른 솔아의 어깨를 쳤다. 솔아가 입을 다물었다. 미지의 얼굴이 어두웠다. 건포도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보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건포도를 사서 미지의 손에 쥐어줘야만 했다.
    “그럼 더 큰 대형 마트에 갈래? 근데 거기 가려면 좀 걸어야 해.”
    내 말에 미지는 고개를 숙였다. 미지의 무릎에는 펭귄 캐릭터가 그려진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그러지 말고 자전거를 타. 미지가 내 뒤에 앉으면 돼. 유현이 네 자전거가 더 넓긴 하지만, 안 그래도 느린데 미지까지 타면 더 느려질걸.”
    솔아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미지가 화내지 말란 듯이 내 손을 꼭 쥐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생각했다. 미지를 봐서라도 솔아랑 싸우지 말자.

    대형 마트에도 건포도는 팔지 않았다. 허전해진 우리는 지하 1층의 시식 코너를 전부 돌았다. 치킨너깃을 먹는데 건포도 생각만 났다. 비엔나소시지를 먹어도 건포도 생각뿐이었다. 이쑤시개를 하나씩 물고 마트를 나서는데, 솔아가 중얼거렸다.
    “아, 짜증나.”
    고개를 푹 숙인 미지가 빠르게 걸어갔다. 마음속으로 싸우지 말자고 한번 더 중얼거린 뒤 물었다.
    “뭐가 그렇게 짜증나는데?”
    “가는 곳마다 건포도가 없잖아. 이게 뭐냐? 하루 종일 힘들게 돌아다니기만 했네. 김미지는 오늘 먹고 싶다고 그러고.”
    솔아는 앞서 걷고 있는 미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너는 짜증도 안 나냐? 먹고 싶단 애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기만 하고. 내가 건포도 먹고 싶다고 그랬어?”
    “말 함부로 하지 마.”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
    솔아의 목소리가 커졌다. 미지가 우뚝 멈춰 서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때문에 너희 둘이 그럴 필요 없어. 미안해. 내가 말하지 말걸 그랬나봐. 먼저 갈게.”
    미지의 손목을 내가 잡아챘다.
    “김미지, 너도 유솔아한테 뭐라고 말 좀 해. 매번 저러는데 화도 안 나냐?”
    미지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만 흔들었다.
    “아냐, 얘들아. 나 때문에 싸우지 마, 정말.”
    “우리 안 싸운다니까!”
    솔아와 나는 동시에 미지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미지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금방이라도 뺨 위로 주룩주룩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걸 보니 나는 미지를 울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미지는 한번 울기 시작하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었다. 셋이서 슬픈 가족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미지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미지는 지나가던 사람이 놀라서 119에 신고할 정도로 울었다. 그렇지만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안 싸운다고 말할 때마다 오히려 화가 쌓이는 것 같았다.
    “착각하지 마! 너 때문에 싸우는 거 아니니까!”
    분노에 찬 솔아가 발을 구르면서 고함을 질렀다. 더 큰 소리를 내서 솔아를 눌러야 했다. 솔아를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 난 그만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해버렸다.
    “맞아, 다 건포도 때문이야!”
    “엥?”
    솔아가 맥 빠진 소리를 냈다. 미지도 나를 바라보았다. 미지의 눈에 가득 들어차 있던 눈물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여기서 굽히면 지는 거다. 난 솔아와 미지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건포도 때문이라고!”
    “마, 맞아! 유현이 말이 맞아! 이게 다 건포도 때문이라고!”
    갑자기 솔아가 펄쩍 뛰며 내 목에 팔을 감으며 말했다.
    “네가 먹고 싶어하는데 없는 건포도가 나빠!”
    미지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나는 미지의 왼쪽 손을 잡았다. 오른쪽 손은 솔아가 잡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미지는 소리를 질렀다.
    “그래! 이게 다 건포도 때문이야!”
    우리는 서로를 보며 깔깔거리고 웃다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마트를 향해서, 편의점을 향해서 소리쳤다.
    “건포도가 잘못했어!”
    “건포도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건포도가 책임져야 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자 가슴이 개운해졌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소리쳤다.
    “진짜 건포도 꼭 찾고 말 거야!”
    지나가던 아줌마가 우리에게 시끄럽다고 꾸짖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도망쳤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솔아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 앞에는 미지의 머리칼이 찰랑대고 있었다. 익숙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우리집.”
    솔아가 갑자기 멈춰 섰다. 솔아의 목에 내 코가 부딪쳤다.
    “아야! 무슨 일이야?”
    돌아보는 솔아의 얼굴에 목련꽃 같은 웃음이 피어 있었다.
    "우리집! 아까 내가, 엄마가 비행기 꿀땅콩 잔뜩 샀다고 그랬잖아. 그때 외국 시리얼도 같이 샀었거든! 방금 생각났는데, 거기에 건포도가 엄청 많았어! 건포도 너무 많다고 내가 막 짜증냈었는데 왜 지금 기억났지? 빨리 가자, 빨리!“
    솔아는 아까보다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솔아가 미지를 제치고 달리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솔아 뒤를 내가 따랐다. 미지가 맨 끝에서 헐떡이며 쫓아왔다.
    “같이 가!”
    솔아와 미지 사이에 껴 있으려니 꼭 앞에서는 솔아가 끌어주고 뒤에서는 미지가 밀어주는 것만 같았다. 문득 자전거 경주에서 늘 꼴찌인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지와 솔아의 뒤를 봐주고 있는 거니까.

    솔아가 식탁 위에 유리그릇을 세 개 놓았다.
    “건포도만 골라내자. 나머지는 너랑 내가 먹으면 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시리얼 봉지 안을 들여다보았다. 솔아의 말대로 건포도가 가득차 있었다. 시리얼을 모두 골라내어 나와 솔아 앞에 놓인 그릇에 넣고 남아 있는 건포도를 미지 앞에 놓인 그릇에 부었다. 건포도가 산처럼 쌓였다. 난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꺼냈다.
    “미지야, 먼저 먹어.”
    미지가 건포도 한 알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나와 솔아는 미지가 건포도를 씹는 것을 보고 나서 그릇에 우유를 부었다.
    “너네가 우리 엄마 같다.”
    미지가 흐흥, 하는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다지 웃긴 농담은 아니었는데 왠지 나도 따라 웃었다. 옆에서 솔아도 웃고 있었다. 하지만 웃음은 금방 꺼졌다. 이상하게도 내 눈에 자꾸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미지도 안 울었는데 내가 울면 안 돼. 나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숨을 세게 내쉬어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 고개를 숙였다. 곁눈질로 솔아를 보았다. 솔아는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목을 뒤로 꺾고 있었다. 미지가 꿀꺽, 하고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숟가락을 든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유 속에 잠긴 시리얼이 흐물흐물해지고 있는데. 흐물흐물해진 시리얼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건데.
    우리는 그렇게 울음을 참으며 탁자에 앉아 있었다. 퇴근한 솔아네 엄마가 들어올 때까지.

백설희

성장소설 혹은 청춘소설을 좋아해서 많이 읽었으나, 여자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성장소설이나 청춘소설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문예창작과에 진학했다.
여자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모험을 하고, 여러 일을 겪으면서 성장하여 그들만의 우정을 쌓는 동화를 무척 좋아한다. 「건포도가 먹고 싶어」 역시 그런 마음에서 나온 작품이다. 특히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묘사를 통해 여자아이들의 승부욕과 활동성을 보여주려 했다. 건강하게 뛰노는 여자아이들의 수만큼 여자아이들이 활약하는 동화가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홈베이킹을 하다가 건포도가 필요했는데, 집 앞 슈퍼는 물론이고 큰 길에 있는 마트에도 건포도가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건포도를 찾아 헤매는 작은 모험이 재밌어서 메모를 해두었고, 거기에 나의 과거 모습과 친구들을 하나씩 밀어넣어서 쿠키를 굽듯 「건포도가 먹고 싶어」를 만들었다.
여전히 여자아이들에게 운동장은 주어지지 않고 있다. 「건포도가 먹고 싶어」에서처럼 현실의 많은 여자아이들이 몸을 이용해서 뛰어놀았으면 한다.

2017/12/26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