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정문 앞에 서니 발목에 모래주머니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발끝을 보면서 걸었다.
   누군가 내 가방을 톡톡 쳤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육상부 윤혜성 맞아? 소년체전 시 대표로 뽑혔는데 걸음이 왜 이리 느려?”
   육상 선생님이 말을 걸었다. 나는 억지로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건물 안에 들어섰다. 내 발걸음은 더 느려졌다. 교실까지 일부러 빙빙 돌아서 가기로 결심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늦추고 싶었다.
   교장실 앞을 지나게 되었다. 교장실이 있는 복도에는 초상화가 주르륵 걸려있다. 그동안 학교를 거쳐 온 교장 선생님들의 초상화이다. 초상화를 하나씩 자세히 보면서 걸었다. 네 번째 초상화에 눈길을 돌렸다. 교장 선생님들 중에서 얼굴이 가장 크고, 눈, 코, 입은 가장 작았다.
   고개를 돌리는데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다시 초상화를 보니, 작은 입이 움직였다. 액자 위에 벌레가 붙은 것 같아서 가까이 가서 보았다. 작은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그림이 작아서 잘못 보았겠지.’
   문득 육상부 친구가 말해준 초상화 괴담이 떠올랐다. 설마? 몸을 돌리고 걸음을 빨리하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무섭지만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똑바로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작은 입이 양옆으로 쭉 늘어졌다가 오므라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머리카락이 한 올씩 팽팽하게 당겨졌다.
   ‘지금 담력 테스트를 받는다고 생각하자. 테스트일 뿐이니까 별거 아니야.’
   나는 입술을 깨물고 초상화 앞에 똑바로 섰다.
   “너 지금 움직였지?”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작은 입에서 말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크, 보았구나. 그런데 왜 반말이지? 비록 죽었지만 난 교장 선생님인데.”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이 속도라면 올림픽 금메달감이다.
   교실에 들어갔다.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 몇몇이 나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민지가 내 눈을 보면서 입을 삐죽였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그 일은 정말 아주 작은 일이었다. 체육복을 갈아입을 때였다. 육상부인 나는 체육복을 노려보기만 해도 갈아입을 수 있다. 보통 때처럼 재빨리 체육복을 갈아입고 교실 문을 열었다. 다른 여자아이들은 다 갈아입지 못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급한 마음에 문을 열다가 그만 문을 활짝 열었다.
   “아악, 뭐야. 안 돼.”
   “으악, 나 가려줘.”
   여자아이들이 큰소리를 쳤다. 나는 얼른 문을 닫았다.
   문을 닫을 때 나를 보던 민지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민지는 눈으로 나에게 말했다.
   '너 잘 걸렸어.'
   그게 그렇게 잘못한 일일까? 그건 정말 실수이다. 내가 다른 아이와 말을 하면 어김없이 민지가 보고 있다. 쉬는 시간이 지나면 그 아이는 나와 말을 하지 않는다. 민지는 내가 왜 미운 걸까. 혹시 화이트데이에 성민이가 나에게 사탕을 주어서 인걸까. 민지가 성민이를 짝사랑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민지는 날 차갑게 대했고, 그 후에 내가 교실 문을 여는 실수를 하고, 나는 우리 반 공식 왕따가 되었다.
   1교시는 국어 시간이다. 오늘은 소년체전 준비 때문에 3교시까지만 수업을 듣고 육상 훈련을 받는다. 마음이 홀가분했다. 국어 수업이 끝나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자리에 돌아오니 가방이 묵직해 보였다. 가방을 여니 빈 캔, 종잇조각, 휴짓조각이 가득했다. 고개를 돌리니 아이들이 나를 보다가 딴청을 피웠다. 민지와 민지의 짝, 윤아가 나를 보고 한쪽 입꼬리만 올리면서 씩 웃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2교시 수학 수업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이 하는 말이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아까 가방 거꾸로 세우고 민지의 머리 위에 쓰레기를 부어버릴 걸. 한참 떨다 보니 수업이 끝났다.
   나는 침을 한 번 넘겼다. 심장이 방망이질을 했다.
   “야! 정민지! 좀 보자.”
   나는 민지 앞에 섰다. 민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나 너 따위랑 말할 시간 없는데.”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뭐? 너 따위? 내 가방에 쓰레기, 네 짓이지?”
   민지가 까르르 웃었다.
   “하하. 넌 가방에 쓰레기를 넣어 가지고 다니니? 야, 내가 네 가방에 쓰레기 넣는 거 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민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교탁 앞에 섰다.
   “얘들아! 여기서 내가 윤혜성 가방에 쓰레기 넣는 거 본 사람 있으면 손들어볼래.”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했다가 웅성웅성해졌다.
   “짜증 나는 윤혜성, 미친 거 아냐?”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넣지, 누가 가방에 넣냐?”
   “혜성아, 육상 수업 안 받니? 얼른 가라. 진짜 꼴 보기 싫어.”
   눈물이 고였지만 눈을 깜빡이지 않고 꾹 참았다. 수업 종이 울렸다. 여전히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육상 수업이 시작되니 잊을 수 있었다. 육상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려다가 교실 책상에 이어폰을 두고 온 게 생각났다. 그냥 가려니 왠지 찜찜해서 교실로 향했다. 교실에 돌아서 가는 게 버릇이 되어서 빙 돌아서 걸었다.
   교장실 앞을 지나는데 초상화가 말을 했던 게 확 떠올랐다. 아까는 무서웠는데 지금은 담담했다. 왕따 당하는 것보다 무서운 게 더 있을까. 초상화에 귀신이 붙어서 말을 하는 걸까? 귀신이 정말 있다면 민지를 죽도록 괴롭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신에게 민지에게 붙으라고 부추기고 싶었다. 나는 네 번째 초상화 앞에 섰다.
   “교장 선생님인지 초상화 귀신인지 모르겠지만 귀신님! 저, 우리 반에 민지가. 으흑. 엉엉.”
   울음이 터졌다. 입에 담기도 싫은 이름, ‘민지’를 입에 올리니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실컷 울어라. 다 울고 난 다음에 천천히 말해.”
   초상화가 말을 했다. 텅 빈 복도에 하루를 마무리하는 햇빛이 스며들었다. 들썩이던 내 어깨가 차분해졌다.
   나는 우리 반 왕따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엄마, 아빠에게 말하면 당장 학교에 찾아와서 민지의 뺨을 때릴 것이다. 육상부 친구들에게 말하려니 너무 창피했다.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자니 어쩐지 고자질을 하는 비겁한 아이가 되는 것 같았다. 어영부영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가방에 쓰레기까지 보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초상화 앞에서 다 말했다. 내가 왜 왕따를 당하는지, 내가 당한 괴롭힘, 그때마다 내가 느낌 감정을 아주 자세하게 말이다.
   “……제일 처음에는 신발 안에 돌멩이가 있었어요. 화장실에 갔다 오면 제 공책에 제 욕이 쓰여 있었고요. 화장실 안에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누군가 문을 밀고 있어서 종이 울리고 나간 적도 있어요. 다 민지 패거리 짓이에요. 오늘은 제 가방에 쓰레기가 가득 담겨 있었고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얼마나 힘들었니? 그 아이들 정말 못됐구나.”
   또다시 눈물이 나왔다. 초상화에서 다시 목소리가 나왔다.
   “내 소개가 늦었네. 나는 우리 학교 네 번째 교장이었단다. 이제 교장이라기보다는 초상화 귀신이 맞는 말이겠지. 초상화 귀신은 좀 그렇고, 초상화 할아버지라고 부르렴. 비록 죽었지만 학교를 떠나기가 싫더구나. 그래서 이렇게 초상화에 머무르면서 아이들을 지켜보지. 가끔 답답해서 혼잣말을 하는데 하필 네가 그때 지나갔어.”
   나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전 별로 잘못한 게 없어요. 민지가 너무 싫고 미워요. 민지가 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너를 도와주고 싶구나. 이 학교에서 나를 아는 학생은 너밖에 없으니까 도와줄게. 네가 원하는 것은 복수니?”
   나는 잠깐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민지가 대장이 되어서 나를 따돌린 것이다. 나는 아까 민지에게 쓰레기를 붓고 때리고 싶었다. 그럼 다른 아이들이 똘똘 뭉쳐서 날 괴롭힐 것이다. 1대 100으로 싸운다고 해도 이기고 싶었다. 나는 주먹을 쥐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민지를 때려주고 싶어요.”
   초상화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주마. 내일 아침 1교시 전에 이리로 와라. 네가 이 초상화 안에 들어오면, 내가 네가 되어서 민지를 때려줄게.”
   초상화 할아버지와의 약속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떨리는 마음으로 초상화 앞에 섰다.
   “네 왼손을 내 초상화 오른쪽 끝에 대거라. 그리고 크게 숨을 들어 마셨다가 내쉬어라. 나는 너와 함께 숨을 쉴 거야. 숨이 밖으로 나갈 때 내 영혼이 네 몸에 들어갈 거야.”
   팔이 후들거렸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면서 왼손을 초상화 오른쪽 끝에 댔다. 차가웠다. 숨을 내쉬는데 내 몸에서 바람이 휙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내 눈앞에 복도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고개를 숙이니 할아버지 몸이 어깨까지만 보였다. 나는 어깨까지 그려진 초상화가 되었다. 잠깐 팔에 소름이 돋았지만 금세 가라앉았다. 조금 갑갑하고 어색하지만 민지가 당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통쾌했다.
   “혜성아, 내가 한 방에 처리하고 올게.”
   내 모습을 한 초상화 할아버지가 엄지를 올렸다.
   나는 복도에 지나가는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가만히 있으려니 지루했다. 머리를 쑥 내밀고 힘을 주니 그림 안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종잇장처럼 납작해져서 둥둥 떠다녔다.
   쉬는 시간 종이 울렸다. 나는 급히 우리 반에 갔다. 교실에는 들어가지 않고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내 자리에 앉은 내가 보였다. 민지는 쪽지를 펼쳐보고 있었다. 민지가 나를, 그러니까 초상화 할아버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초상화 할아버지와 몸을 바꾸었는데도 마음이 쾅 내려앉았다. 민지가 본 쪽지는 초상화 할아버지가 보낸 것일 것이다.
   수업이 끝났다. 예상대로 초상화 할아버지가 민지를 보고 손가락질을 했다. 민지가 윤아와 다른 아이들 다섯 명을 데리고 교실 밖에 나왔다. 1대 6이라. 역시 비열한 민지다. 초상화 할아버지도 나왔다. 초상화 할아버지는 나를 보고 움찔했다. 초상화 할아버지는 몸을 돌리고 나에게 말했다.
   “네가 있으면 위험해. 초상화로 돌아가서 기다려.”
   위험해진다는 말에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초상화에 들어가서 초상화 할아버지가 꼭 이기길 빌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초상화 할아버지, 그러니까 내 모습이 보였다. 이럴 수가. 내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색이 시뻘겠다.
   “으음, 보다시피. 싸움은 졌어. 1대 6으로 싸우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오랜만에 몸을 쓰니 힘들구나. 하지만……”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아버지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이게 뭐예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숙였다가 말했다.
   “내가 노력했다는 것만 알아주라. 져서 하는 말은 아닌데 너 스스로 이겨야지 남이 대신 싸워주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럼 민지랑 똑같은 아이가 되는 거잖아. 일단 몸부터 다시 바꾸고 나머지를 말해줄게. 자―.”
   나는 다시 내 몸에 들어갔다. 보지는 못했지만 아까 있었던 일이 짐작이 갔다. 민지까지 여섯 명이 날 공격해서 나는 한 대도 때려보지 못하고 맞은 것이다. 초상화 할아버지에게 내 생각이 맞냐고 물으니 맞다고 했다. 나는 교실로 걸어갔다.
   “할 말 남았다고 했잖아. 사람 말을 아니 귀신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초상화 할아버지가 나를 불렀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초상화 할아버지는 조금도 도움을 되지 못했다. 도리어 얻어맞기만 했다. 더 이상 당할 수 없다. 내 몸 안에 있는 시한폭탄이 터졌다.
   교실에 들어가니 민지가 가방을 메고 있었다.
   “야, 정민지! 다시 한 판 붙자. 비겁하게 1대 6 말고 정정당당하게 1대 1로 싸우자. 너 내가 무섭니? 왜 혼자서는 못 싸워?”
   민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아이들이 몰려왔다. 민지가 여왕벌처럼 아이들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팔을 휘저었다.
   “그래. 가자.”
   나는 민지의 뒤를 따라갔다. 머릿속으로 어딜 때릴지 생각했다. 민지가 먼저 등나무 벤치 옆 개구멍에 몸을 들이밀었다. 개구멍은 뚫린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이들만 아는 곳이다.
   민지와 나는 공터에 서서 서로 마주 보았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둘을 빤히 보면서 지나갔다. 나는 눈 흰자위가 보일 거라고 짐작하면서 민지를 노려보았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민지가 움찔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발로 민지의 무릎을 찼다. 민지가 옆으로 휘청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민지의 옆구리를 밀었다. 민지가 휘청대다가 내 머리채를 잡았다.
   “앗, 따가워.”
   민지가 한쪽 발로 내 발을 밟았다. 나는 다른 쪽 다리를 뻗어서 민지의 배에 날렸다. 민지가 소리를 지르면서 배를 움켜쥐었다. 나는 재빨리 민지의 멱살을 잡았다. 민지가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수없이 속으로 물어보았던 말을 하고 싶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민지에게 말했다.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그동안 왜……”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민지가 다시 팔을 뻗었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거머리 같았다. 나는 온 힘을 다해서 민지의 손을 막았다. 민지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얼굴에도 힘이 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민지가 입을 움츠리고, 고개를 숙였다. 세상에, 민지가 이런 행동을 하다니. 놀랐지만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그동안 민지에게 당한 일들이 영화처럼 눈앞을 스쳤다.
   나는 손을 떨면서 민지의 얼굴에 주먹을 뻗었다. 내 주먹이 민지 얼굴에 닿기 바로 직전이었다. 휘리릭, 휘리릭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너희 둘 무슨 짓이니?”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였다. 나와 민지는 서로 떨어졌다. 민지가 가방을 들고 멀리 달려갔다. 나는 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을 수 있었다. 힘이 빠진 민지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윤혜성, 너 뭐 하는 거니?”
   호루라기를 불고 다가온 사람은 놀랍게도 육상 선생님이었다. 나는 육상 선생님에게 모든 걸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괜히 말했다가 초상화 할아버지와 겪은 일처럼 일이 꼬일 것만 같았다.
   “죄송해요. 친구랑 다퉜어요.”
   선생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차라리 속이 편했다. 말이 없던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마. 대신 선생님이랑 아이스크림을 먹자.”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선생님을 따라갔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괴로울 때면 달달한 음식이 위장을 위로해주지. 먹어라.”
   달콤하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입안에 녹았다. 선생님은 아이스크림이 녹는데도 먹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은 네 나이만 할 때 병이 있었단다. 지금도 그 병이 있지. 죽을병은 아니야. 나는 초등학교 때 그 병이 있다는 게 너무 창피했어. 근데 그걸 어떤 아이가 알게 되었지. 그 아이가 그걸 가지고 놀려서 난 그 아이를 흠씬 때려주었단다. 그 아이는 내 비밀을 다른 아이들에게 소문내고 나를 따돌렸지……”
   선생님은 왕따 당한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었다. 힘들었는데 혼자 버티었다고 말해주었다.
   “혼자 버틴 게 잘한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 너처럼 정면 돌파를 한 것도 마찬가지고. 네가 치고받고 싸운 걸 야단칠 마음도, 잘했다고 말해줄 마음도 없다. 모든 일에 딱 맞는 정답은 없는 거니까. 다만 확실한 건 여러 명이 한 명을 왕따 시키는 일은 아주 비겁한 짓이야. 또한 이 일로 남을 계속 미워하는 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지.”
   역시 어른을 속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아까 민지와 싸우는 걸 보고 내가 왕따인 걸 알게 된 것이다. 문득 내일이 걱정되었다. 민지가 나를 더 괴롭히면 어떡하지. 선생님이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해라. 내일 힘든 일이 생기면 나에게 오렴. 선생님이 도와줄게.”
   육상 선생님의 말이 큰 힘이 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초상화 할아버지보다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다음날이었다. 어김없이 초상화가 걸린 복도를 지났다. 육상 선생님이 서 있었다. 네 번째 초상화 앞에 서 있었다. 어라? 초상화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육상 선생님과 몸을 바꾸자는 건가? 그럼 또 사고만 칠 텐데. 나는 선생님을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네 번째 초상화 보지 마세요. 어, 뭐더라. 초상화 괴담 들었는데 초상화가 움직이는 걸 보면 나쁜 일만 계속 생긴대요.”
   나는 일부러 초상화 괴담을 지어냈다. 선생님이 나를 보고 씩 웃었다.
   “그래. 알겠다. 그나저나 어제 선생님이 한 말 알지? 무슨 일 있으면 선생님에게 말하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교실로 향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제 민지의 힘없는 얼굴을 떠올리면서 교실에 들어갔다. 민지가 날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왠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자리에 앉았는데 앞에 앉은 아이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놀라운 일은 또 일어났다. 민지의 짝, 윤아가 나에게 걸어왔다.
   “혜성아, 수학 숙제했니? 나 좀 보여줄래?”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왔다 갔다 했다. 내 공책을 찢으려는 속셈인 걸까. 어찌할 바를 몰라 가만히 있는데 윤아가 다시 말했다.
   “그동안 미안했어.”
   나는 화들짝 놀라 윤아의 얼굴을 살폈다. 윤아가 고개를 떨구고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정말로 미안해.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앞에 앉은 아이도 뒤를 돌아보더니 윤아와 똑같은 말을 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 아이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민지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초상화 할아버지와 싸웠던 아이들 다섯 명이 내 옆에 다가와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도대체 어찌 된 거지? 문득 어제 초상화 할아버지가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뿌리치고 온 생각이 났다. 나는 쉬는 시간만을 기다렸다.
   종이 울리자마자 교장실 복도로 달려갔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초상화 할아버지를 불렀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그러게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하니. 사람 말을 아니 귀신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그래. 1대 6으로 싸워서 졌지. 나는 맞으면서도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단다. 내가 왜 왕따를 당해야 하냐고. 네가 나에게 말한 내용을 아주 자세하게 말했지. 감정을 실어서 말이다. 내가 비록 몸싸움은 못하지만, 말싸움은 날 이겨낼 자가 없지. 난 지금까지 말싸움을 져본 적이 한 번도 없단다. 민지 빼고 아무도 말을 못하고 고개만 숙이더구나. 화가 난 민지가 아이들을 노려보았어. 그때 알 수 있었지. 민지 편을 든 아이들이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그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어.”
   2교시 수업 종이 울려서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2교시가 시작되면서 두 가지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하나는 내가 왕따에서 벗어났고, 또 하나는 우리 학교에 초상화 괴담이 퍼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초상화 괴담을 말할 때마다 다 거짓이라고 말해주었다. 초상화 이야기가 나오면 초상화 할아버지가 생각나고, 왕따 당한 일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후로 네 번째 초상화 앞에 가보았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왕따에서 벗어났지만 민지와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다. 나와 민지가 같은 모둠이나 짝이 되면 반 아이들이 바꾸어준다. 우리는 서로를 피한다. 신기한 건 나는 민지를 죽을 때까지 미워할 줄 알았는데 지금은 밉지가 않다. 민지와 있었던 일을 다 잊고 싶을 뿐이다. 언젠가 민지와도 화해하는 날이 올까? 아직은 그 날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김채현

어릴 적부터 방안에서 책만 읽어대던 경험이 활자로 튀어나오는 작업이 마냥 신기해요. 어른도, 어린이도 세상살이가 쉽지 않지만 모두에게 이겨낼 힘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 힘 중에 동화의 힘이 크고 넉넉하다는 걸 보여주려고 해요. 그래서 오늘도 글을 쓴답니다.

2018/06/26
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