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는 억울했다.
    혼자 상담실에 앉아 있는 것도 억울했고, 4시가 넘었는데 상담 교사가 오지 않는 것도 억울했다. 째깍째깍 시계 바늘 소리에 찔리며 앉아 있자니 잘못 짠 여드름처럼 짜증이 부풀어올랐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지, 언제 맞을지 몇 대를 맞아야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기하는 게 더 견디기 힘든 법이다.
    차라리 몇 대 맞아서 끝나는 일이면 좋겠다고 민수는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 측도, 채은이도 그걸 바라지 않았다.
    ‘멍청한 놈. 대충 사과하면 끝나는데 왜 버티고 난리냐.’
    창식이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민수의 몸이 뜨거워졌다.
    ‘이게 다 누구 탓인데.’
    민수는 창식이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눈에 힘을 줬다. 정작 창식이 앞에서는 눈을 피하는 주제에. 솔직히 민수는 일이 이렇게 된 게 창식이 탓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게 창식이 탓은 아니지만 창식이 탓이 크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민수 자신보다는 창식이의 잘못이 훨씬 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창식이는 “잘못했다”는 말을 아주 쉽게 했다.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깊이 뉘우치고 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말을 잘도 했다. 창식이만 그런 게 아니라 민규도, 지석이도 그랬다. 쉽게 잘못했다는 말을 한 아이들은 쉽게 용서받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민수만 상담실에 남겨졌다.
    버티려고 했던 건 아니다. 민수도 말을 하고 싶었다. 정말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고. 자기 마음도 지옥이라고.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목구멍에 검은 안개가 꽉 들어찬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민수는 억울했다.

    상담실 문이 드르륵 콰당, 요란하게 열렸다.
    “미안,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상담 교사는 숨을 헉헉대며 자리에 앉았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손으로 연신 이마의 땀을 훔치고 코끝에 걸린 안경을 올리는 모습이 꼴사나웠다. 그보다 민수의 마음을 상하게 한 건 상담 교사가 입은 새하얀 블라우스였다. 이채은처럼 얼굴이 희고 몸이 가는 사람이 살이 비치는 블라우스를 입은 걸 보면 보고 또 보고 싶지만, 복도가 쿵쿵 울리게 뛰어오는 아줌마가 이런 옷을 입은 걸 보면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나는 것이다.
    “오늘 상담이 있다는 걸 깜빡했어.”
    개인 상담을 하겠다고 한 건 내가 아니라 선생님이잖아,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민수는 쓴 말을 삼키는 데 아주 익숙했으므로 어렵지 않게 그 말을 삼켰다. 하지만 상담 교사는 민수가 뱉지도 않는 말을 듣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기다리게 해서 진짜 미안해. 네가 상담을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내가 하겠다고 한 건데…… 너와의 상담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그런 건 진짜 아니야. 내가 요즘 진짜 일이 정말 많거든. 너무 정신이 없어. 그렇다고 해도 너를 기다리게 한 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지. 미안해. 나 기다리는 동안 마음이 어땠어? 선생님이 언제 올까, 안 오는 건 아닐까, 불안했어?”
    “아니요, 억울했어요.”라고 민수는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담 교사가 유창하게 말을 하면 할수록 민수는 더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모래성 뺏기 놀이를 할 때 상대방이 모래를 왕창 가져가버리면 모래 몇 알을 긁어오는 것도 조심스러워지는 법이다. 대화도 그와 비슷하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상담 교사는 민수가 말을 해야 하는 이유를 계속 말했다. 그러면 민수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거 언제 마쳐요?” 정도가 남았고, 상담 교사는 기운이 빠진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민수 입장에선 입을 열어도, 입을 열지 않아도 나쁜 일들이 계속 벌어졌다.
    그 밤 이후, 모든 것이 엉망으로 꼬이기만 할 뿐이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채은이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 민수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파렴치한 아이는 전학을 보내버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채은이는 창식이, 민규, 지석이의 사과도 받지 않았다. 사과를 했지만 사과를 받지 않아서 그 사과는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민수만 전학을 보낼 수도, 네 아이 모두를 전학 보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상담 교사는 자신이 민수의 개인 상담을 맡겠다고 나섰다. 학교에서는 ‘시간을 벌었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 채은이의 마음이 누그러질 거란 기대도 있는 것 같았다.
    상담 교사는 학교 측의 입장에는 관심이 없었다. 개인 상담을 진행하겠다고 한 것은 민수의 마음이 궁금해서였다.
    ‘민수는 왜 사과하지 않는 거지?’
    하지만 개인 상담에서도 민수는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았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민수가 마음을 여는 기미가 없어서 상담 교사는 초조했다.
    민수가 일부러 자기 마음을 숨기는 것이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자기 마음을 설명하고 싶었다. 자신이 얼마나 그날 밤, 수학여행 두번째 날로 돌아가고 싶은지.
    하지만 십삼 년을 살아온 경험으로 볼 때 한번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민수는 잘 알고 있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잊는 것뿐이다. 혼자만의 껍데기 속에 들어가 그 순간을 까맣게 잊고 싶은데 자꾸 쿡쿡 찔러대니, 민수는 자꾸만 몸을 웅크리는 것이다.

    “네가 지난 상담 때 그랬잖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건 민수가 한 말이 아니다.
    “채은이를 아프게 하고 싶었니?”라는 교사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란 말이지?”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사실이었다.
    솔직히 민수는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상상 못했다. 아니, 그건 사실이 아니다. 채은이와 입 맞추는 상상을 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니까. 어둑한 교실에서, 해가 진 공원에서, 채은이의 아파트 뒤쪽 놀이터에서, 민수 자기 침대에서…… 너무 자주 상상해서 그런지 꿈도 여러 번 꾸었다. 너무 자주 떠올려서 그런지 이미 벌어진 일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어쩌면 채은이도 자기와 같은 상상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창식이가 “김민수, 너 이채은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지?”라고 했을 때 “뭐래”라고 말한 건 채은이의 마음이 자기와 같은지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귀자고 한 건 아니지만 채은이도 민수의 마음을 눈치챈 것 같았고 민수가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래서 창식이가 “웃기시네. 너 이채은이랑 했냐?”라고 놀렸을 때, 그러지도 못할 거면서 녀석을 발로 걷어차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건, 감히 채은이에 대해 그렇게 말한 것이 화가 나서였는지, 채은이랑 뭘 좀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이 바보 같아서였는지 민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창식이가 “걔랑 키스하게 해 줘?”라고 말했을 때 몸이 뜨거워진 이유는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채은이의 빨갛고 따뜻한 입술이 턱 밑까지 온 것 같아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현실이 될 줄은 민수는 몰랐다.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상담 교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민수는 움찔했다. 이렇게 대놓고 물어본 사람은 없었다. 민수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담 교사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근데 사과하지 않는 이유가 뭐야?”
    민수는 엄마가 이렇게 물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엄마는 민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학교에 불려 와서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허리 숙여 사죄했지만 집에 가면 죽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민수는 차라리 엄마가 화를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형에게 그랬듯이 등짝을 두들겨 패며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면 민수는 “걔를 너무 좋아해서 그랬다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는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바람이 난 아버지가 집을 나간 건 아버지 잘못이지만, 멋대로 학교를 그만둔 형이 집을 나간 건 엄마 탓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기둥 두 개가 홀연 사라진 집이 제대로 서기 어려운 건 당연했다. 엄마는 민수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민수는 엄마에게 자기의 진심 같은 걸 말할 수 없었다. 하긴 좋아하는 여자애를 어떻게 대해야 하냐고 엄마에게 묻는 초등학교 6학년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건 애들끼리 알아서 해야 했다.
    수학여행 둘째 날, 창식이는 10시까지 숙소 뒤뜰로 나오라고 했다. 설마 했는데 거기에 채은이가 있었다. 채은이는 민수가 자기를 불러냈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둘은 수풀이 우거져 잘 보이지 않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어두웠고 조용했다. 민수는 살그머니 옆에 앉은 채은이의 손을 잡았다. 채은이는 손을 빼지 않았다. 민수는 조금 더 채은이 쪽으로 몸을 붙였다. 싫다면 채은이가 몸을 뺄 거라고 생각했다. 채은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민수의 심장을 북채로 둥둥둥 치는 것 같았다. 머리까지 둥둥둥 울려왔다. 민수는 드라마에서 본 대로, 머릿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 그려본 대로 채은이의 얼굴을 잡고 살며시 입술을 갖다댔다. 띵,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첫 키스를 하면 종소리가 들린다던데, 그 소리가 진짜였나. 아니었다. 불행히도 그건, 창식이 무리가 몰래 숨어 동영상을 찍는 소리였다. 그걸 알면서도 민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채은이의 어깨는 보기보다 연약했고, 채은이의 입술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러웠다. 조금만, 조금만 더 채은이랑 가까이 있고 싶었다. 채은이도 그걸 원한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랬다.
    정말 그랬을까?

    “누가 있나봐.”
    채은이가 몸을 빼며 말했다.
    “봐봐. 저기 불빛 같은 게 있어.”
    채은이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몸을 웅크렸다.
    민수가 휙 돌아보고 말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다음부터는 기억 창고에 불이 꺼진 것처럼, 모든 장면이 어둡고 희미하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채은이가 가겠다고 했고, 민수가 채은이의 팔을 잡아서 벤치에 앉혔는데…… 민수가 다시 입을 맞춘 게 먼저인지 누군가 민수의 뒤통수를 잡아 누른 게 먼저인지 모르겠다. 민수가 기억나는 건 그 순간 자기 마음뿐이었다.
    가만히 있어. 나는 너를 해치려는 게 아니야.
    너를.
    좋아해서 그런 거야.
    하지만 채은이는 민수의 마음을 모르는 듯 자꾸만 민수를 밀어냈고 민수는……
    민수는 억울했다. 자기 마음 같지 않은 상황이 억울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려서 억울했다. 무슨 말을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민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한 건데 상담 교사는 민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채은이에게 미안하지 않아?”
    처음으로 민수는 상담 교사의 눈을 똑바로 봤다. 자꾸만 고치 속으로 숨으려는 민수를 세상으로 끄집어내려는 듯, 상담 교사의 눈빛에는 단호한 힘이 서려 있었다.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는데, 잘못했다는 말로는 자기 마음을 다 설명할 수 없어서 그런 거다. 민수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이 까끌까끌했다.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고 싶었다.
    상담 교사도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민수. 너 한 번이라도, 채은이 마음을 생각해본 적 있어?”

    채은이의…… 마음?

    민수는 채은이가 자기를 좋아해주길 바랬다. 창식이가 속여서 불러낸 거지만 그날 밤 그 자리에 나온 걸 보면 자기를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민수가 손을 잡았을 때도, 어깨를 잡았을 때도, 입술……을 댔을 때도 채은이는 피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채은이도, 원했던 거다!
    그 순간, 민수는 자기 몸 밑에서 버둥거리던 채은이의 다리가 떠올랐다. 채은이가 발버둥칠 수록 더 세게 채은이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있어. 제발. 너를 아프게 하려는 게 아니야.
    맹세코 그렇게 아프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민수가 씨윽씨윽 숨을 거칠게 몰아쉬자 상담 교사는 가만히 민수를 기다려주었다. 대답을 재촉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버려두거나 놔준 것도 아니었다. 구름 뒤에 가려진 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듯, 그날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민수의 귀에는 채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 마. 하지 마. 그만 해.”
    민수는 귀를 막았다. 처음에는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지만 채은이는 분명히 말했다. 하지 말라고. 그만하라고. 하지만 민수는 그만두지 않았다. 창식이가 “여자들은 싫다고 말은 해도 속으론 다 좋아해”라고 말했을 때는 “뭐래” 하면서 눈을 흘겼었는데, 채은이와 맞닿아 있는 그 순간에는 그 말이 진실이길 바랬다. 그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
    민수는 알고 있었다. 채은이는 좋은데 싫다고 한 게 아니다. 정말로 싫어서 싫다고 한 거다. 그만하라고 한 거다. 채은이는 울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 했다. 그런데도 민수는 멈추지 않았다. 채은이의 눈물을 모르는 체 했다.
    왜?
    왜 그랬을까?
    민수 자신도 그게 너무 궁금했다. 왜 그때 멈추지 않았지?
    왜냐하면,
    채은이가 너무 좋았으니까.

    민수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상담 교사가 물었다.
    “채은이 참 예쁘지?”
    민수가 화들짝 놀라서 상담 교사를 봤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흘깃 보고는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민수 네가 채은이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맞니?”
    민수가 대답하지 않았지만 상담 교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네가 처음부터 다른 애들이랑 짜고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다른 애들, 동영상 찍은 애, 단체 카톡방에 그걸 올린 애, 채은이에 대해 나쁘게 소문낸 애들은 다들 채은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지. 근데 너만 사과를 하지 않았어. 그래서 생각해봤지. 왜 김민수는 사과하지 않을까.”
    어설픈 탐정 흉내를 내는 게 우스워 보여야 하는데, 민수는 마음이 이상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못 들은 척 도망쳐야 하는데 그 어느 때보다 상담 교사의 이야기에 집중이 됐다. 그걸 아는 것처럼 상담 교사가 민수를 보며 눈으로 말했다.
    ‘너도 답답하지? 그치?’
    사과하라고 닦달하던 담임선생님, 아무 말 없이 외면하는 엄마, 미친 변태라고 욕하는 채은이 친구들, 괜히 일을 크게 벌인다고 욕하는 창식이 무리…… 어느 누구도 민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상담 교사는 달랐다. 민수의 마음을 알고 싶어했다. 자꾸 민수의 마음을 두드렸다. 덕분에 민수의 목구멍을 꽉 틀어막고 있던 억울함이 조금 옅어졌다. 그 사이로 자그마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예전부터 ……이채은을 …많이 …좋아했……”
    상담 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채은이를 많이 좋아했구나.”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민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민수는 울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꽉 줬다. 상담 교사는 슬그머니 각 티슈를 민수 앞에 놓아주었다.
    “채은이를 많이 좋아했는데 채은이를 아프게 해서…… 많이 힘들겠구나.”
    흐흑 소리와 함께 눈물의 둑이 터졌다. 어디에 이 많은 눈물이 고여 있었을까 의아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눈물이 쏟아졌다. 민수는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민수는 혼자가 아니었다. 상담 교사는 가만히 민수의 눈물을 바라봐주었다. 작은 방에서 몸을 웅크리고 혼자 흘리는 눈물은 우물과 같아서 자칫 빠져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이해해주는 사람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강물처럼 흘러가기 마련이다.

    울 만큼 울고 난 뒤 민수는 어쩐지 멋쩍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손에 쥔 휴지를 배배 꼰 다음 양쪽 끝을 묶어 띠를 만드는 동안에도 상담 교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속이 좀 시원해?”
    그런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말하기 전보다 나은 것 같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민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채은이에게 너를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말해야 하나? 너도 나를 조금은 좋아하지 않았냐고 말해야 하냐? 내가 정말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야 하나? 여전히 민수는 혼란스러웠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랑 가까이 있고 싶고, 둘만 있고 싶지.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고, 손도 잡고 싶고, 입도 맞추고 싶고.”
    민수는 상담 교사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이 생길 수는 있지만 너희는 아직 어리니까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된다, 나중에 커서 몸과 마음이 준비가 되면 그때 하라는 설교를 늘어놓겠지, 짐작했다.
    아니, 민수가 틀렸다. 그것도 완전.
    “열세 살이 어린앤가 뭐. 알 거 다 아는 나이지. 나도 그때 처음 했어, 키스.”
    상담 교사는 담담하게 민수를 바라봤다. 그게 뭐 대수냐는 듯이. 허둥대는 건 민수 쪽이었다. 지금까지 어떤 여자 어른도 열세 살에 첫 키스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으므로 민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설마 뽀뽀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진짜 키스를 말하는 거야. 알지? 나는 그애가 정말 좋았어. 근데 그애도 내가 좋다는 거야! 이럴 수가! 만세!”
    상담 교사는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볼이 발그레해졌다.
    “좋아하니까 같이 있고 싶고, 둘만 있고 싶고, 손도 잡고 싶고 그랬지. 그애도 그걸 원하는 것 같았어. 분명 같은 마음인데, 만나면 늘 가만히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먼저 뽀뽀를 했어. 그애도 그걸 원했지. 그게 중요한 거야. 서로가 원하는 거. 무슨 말인지 알겠니?”
    민수는 말하고 싶었다. 나도 그래요. 채은이를 정말 많이 좋아했어요. 그리고 채은이도 나를…… 상담 교사는 민수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누군가를 정말 좋아하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걸 해주고 싶지. 내가 좋은 걸 같이 하고 싶고. 당연한 거잖아.”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내 마음도 정말 그랬다고요.
    “근데 민수야.”
    갑자기 상담 교사의 표정이 깊어졌다.
    “정말 좋아한다면 상대방을 아프게 하면 안 되지. 안 그래?”
    잠시 말랑해졌던 민수의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민수는 자기도 모르게 심장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네가 원하지 않는데, 누가 네 몸을 막 만진다고 생각해봐. 그건 너도 싫지? 상대가 나를 하찮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잖아.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당하나 싶고, 내 자신이 완전 보잘것없이 느껴지지. 그런 기분은 웬만해선 지워지지 않잖아.”
    창식이가 자기 몸을 함부로 만질 때, 하지 말라고 해도 장난인데 왜 그러냐며 계속할 때 느꼈던 기분이 떠올랐다. 창식이보다 덩치가 작고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마치 창식이의 장난감이 된 것같이 느꼈던 순간들. 하지만 민수 자신이 채은이의 몸을 만졌을 때, 채은이가 그런 기분을 느꼈을 거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누군가 자기를 번쩍 들어 아주 깊은 물속에 던져 넣은 것 같았다. 충격에 온몸이 아팠다. 민수는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았다. 머리가 멍해지고 소리가 웅웅 울렸다. 저만치에서 상담 교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 않아. 특히나 상대방을 믿었다면 더더욱. 왜냐면, 그 믿음을 짓밟힌 거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민수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가장 밑바닥에 닿자 아주 어두운 공간이 있었다. 무슨 소리지? 누군가 흐느끼고 있었다. 채은이의 울음소리였다. 고개를 흔들어도 눈을 감아도 울음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민수가 거칠게 고개를 흔들며 눈물을 흘리자 상담 교사는 민수의 손을 꼭 잡아줬다.
    여기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듯이, 민수는 그 손을 꽉 마주잡았다.
    민수는 더이상 억울하지 않았다.

    *

    민수는 채은이에게 당장 사과하지 않았다. 자기 마음을 전할 방법을 찾고 싶다고 했다. 민수가 찾은 방법은 손 편지였다. 그건 창식이나 민규, 지석이가 휘갈겨 쓴 반성문과 달랐다. 편지를 쓰기 위해 민수는 몇날 며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했다. 자기 마음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는 동안 채은이는 옆에 있는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다가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처럼 멀어졌다. 어떤 날은 여전히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웠고, 어떤 날은 채은이가 자기를 죽을 때까지 미워할 것 같은 느낌에 괴로웠다. 그럼에도 민수는 사과를 포기하지 않았다.

    꾸깃꾸깃한 민수의 편지는 채은이에게 전해졌다. 채은이는 그 편지를 당장 열어보지 않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그러다 보름달이 뜬 어느 날 밤, 심호흡을 크게 하고 편지를 읽어내렸다. 한 번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올랐지만 채은이는 울지 않았다. 민수에게 편지를 잘 봤다거나 괜찮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수의 사과가 진짜 사과라는 걸 민수도 알고, 채은이도 알았다.
    그것은 민수에게도, 채은이에게도 아주 중요했다.
    기회가 된다면 그것이 왜 그리 중요한지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한 가지만 미리 말해두자면, 이 일을 계기로 김민수는 사과왕이 되었다.


이록

무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철학과 사회학, 그리고 문예창작을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어려서는 애늙은이로, 나이 들어서는 어른아이로 살아서 어른, 아이가 별다르지 않다는 걸 압니다. 녹색을 좋아하고, 많은 것을 기록하며 살고 있습니다.

2017/12/26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