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을 닫고 검은색 봉투를 조심스레 열었다. 노란색과 하늘색 끈이 종이 막대에 둘둘 감겨 있었다. 문구점에 빨간색 끈이 없어서 아쉬웠지만 이대로도 괜찮다. 유리가 두번째로 좋아하는 게 노란색이니까.
  각인 팔찌는 우리끼리의 증표다. 두 개의 색깔 끈을 엮어 만드는 건데, 서로가 각인된 메이트나 다름없다는 표시다. 진짜 각인을 겪은 것도, 마음의 목소리가 들리는 메이트가 된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요즘 각인 팔찌를 하고 다니는 애들이 많아서 인기 있는 색깔은 거의 품절이었다.
  유튜브에 팔찌 만드는 법을 검색했다. 영상으로 볼 땐 쉬워 보였는데 막상 끈을 엮으니 모양이 잘 잡히지 않았다. 한참을 끙끙대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나도 모르게 끈을 몸으로 가렸다.
  “미안. 노크했는데.”
  노마가 황급히 뒤돌았다. 괜히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 같았다. 노마는 나가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참외 가져왔는데. 엄마가 시아 너랑 같이 먹으래.”
  예쁘게 잘린 참외가 쟁반에 담겨 있었다. 나는 쟁반을 책상 위에 두고 침대로 올라갔다. 노마가 쭈뼛거리다 내 의자에 앉았다. 나는 곁눈질로 노마를 훔쳐보았다. 작년보다 훨씬 키가 자라 있었다. 피부도 더 까맸다.
  “이제 아주 온 거야?”
  노마가 컥컥대더니 재빨리 참외를 마저 삼켰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였다.
  노마는 지금 내 두번째 엄마가 된 주나 엄마의 아들이다. 주나 엄마는 원래 우리 집 앞, 102호에 노마와 아저씨랑 함께 살았다. 내가 세 살 때쯤 아저씨가 제주도로 도망쳐버렸지만 말이다. 주나 엄마는 노마를 데리고 우리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다 결국 우리랑 살림을 합쳐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우리 엄마를 강희 엄마라고 불렀다.
  그렇게 노마는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엄마들을 따돌리고 우리끼리만 놀러 나가기도 했다. 아이 둘과 엄마 둘의 조합은 완벽했다. 강희 엄마와 주나 엄마가 각인을 하고 메이트가 되면서부터는 엄마끼리 싸우는 일도 훨씬 줄어들었다. ‘내가 주나 만나려고 시아 아빠랑 각인이 안 된 거야.’ 강희 엄마는 입버릇처럼 맨날 이렇게 말했다.
  노마가 아저씨가 있는 제주도로 떠난 건 여덟 살 무렵이었다. 일 년만 살다 온다고 갑자기 떠나고서는 한참을 안 왔다. 가끔 101호로 돌아와 얼굴을 비추긴 했지만 며칠 자고 가는 게 고작이었다. 열두 살이 되는 지금까지 그랬다. 이번엔 짐까지 싸들고 왔지만, 또 언제 갈지 모른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노마를 뒤로 하고 마저 팔찌를 만들었다. 참외를 우걱거리던 노마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야?”
  “각인 팔찌 만들잖아.”
  나도 모르게 말이 퉁명스럽게 나갔다. 노마는 각인 팔찌가 뭐냐고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노마를 쳐다보았다. 각인 팔찌를 모르는 열두 살이 존재한다니. 노마는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각인 대신 하는 거야. 메이트나 마찬가지라는 표시.”
  노마가 신기하다는 듯이 팔찌를 살폈다. 그런 게 있구나, 하고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는데 순간 짜증이 확 치밀었다.
  “진짜 메이트가 있는 분은 모르시겠지.”

각인은 시간이 쌓여 만들어지는 현상이다. 두 사람이 오랜 시간을 공유하며 서로를 잘 알게 되면, 어느 순간 갑자기 그 일이 벌어진다. 각인이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말이 다르다. 눈동자 속에서 아주 밝은 빛이 번쩍거리는 걸 보았다고도 하고, 잠시 몸이 붕 떠올랐다는 사람도 있다. 강희 엄마와 주나 엄마는 각인 때 동시에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유치원에서 만든 종이 카네이션을 엄마들에게 준 날이었다. 감동의 눈물은 아니었다. 이게 어떻게 카네이션 모양이냐고 웃다가 울었으니까.) 그렇지만 확실한 건, 각인 증상 이후로 다들 메이트의 속마음이 머릿속에서 들리기 시작했다는 거다.
  보통은 십 년, 이십 년의 시간을 겪고 나서야 메이트가 될 수 있었다. 노마에게 어떻게 메이트가 생겨버렸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노마의 메이트는 제주도에서 만난 여자애랬다. 주나 엄마가 이름도 알려줬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노마가 내 앞에서는 메이트 이야기를 안 해서 그렇다.
  노마가 처음 내게 메이트가 생겼다고 말했을 때, 나는 노마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는 고작 아홉 살이었다. 제주도에 간 지도 이 년밖에 지나지 않았었다. 나는 노마가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다고 믿었다. 주나 엄마가 제주도에 내려가서 그 모습을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진짜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나는 노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엄마들은 내 짝사랑이 끝났다고 놀렸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그애를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냥 노마에게 나보다 더 친한 친구가 생겼다는 게 싫었을 뿐이다. 그건 우리가 멀어진다는 뜻이니까. 오래전부터 나는 언젠가 내게 메이트가 생긴다면 그건 노마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예쁘게 땋은 팔찌 두 개를 포장지로 감쌌다. 팔찌 끄트머리에 단 참이 찰랑거렸다. 금속 하트 두 개에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시아의 S와 유리의 Y. 포장지 모서리를 잘 접고 마스킹테이프를 붙였다. 강희 엄마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더 꾸물거리면 늦는다는 뜻이다. 나는 팔찌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현관에 놓여 있던 커다란 신발 두 개가 없었다.
  “노마가 너 한참 기다린 건 알아?”
  강희 엄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노마가 새로운 학교로 처음 등교하는 날이었다. 옆 학교니까 데려다주라고,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던 엄마들의 모습이 그제야 떠올랐다.
  “알아서 잘하겠지.”
  오늘 중요한 건 노마가 아니다. 나는 우주슈퍼를 향해 힘껏 뛰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주머니에서 포장지가 기분 좋게 바스락거렸다.
  나와 유리는 아침마다 우주슈퍼에서 만나서 함께 학교에 간다. 서로의 집에서 곧장 걸으면 우주슈퍼 갈림길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슈퍼에 조금 일찍 도착한 사람은 바나나우유 두 개를 사고 기다린다. 이건 초등학교 4학년부터 시작된 의식이다.
  유리와는 4학년이 시작된 첫날 만났다. 옆자리 짝꿍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함께하지 않은 날이 없다. 유리와 내가 단짝이라는 건 우리 학교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우주슈퍼 앞에 유리가 먼저 와 있었다. 날 발견한 유리가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유리의 손에는 바나나우유가 없었다. 1교시 시작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슈퍼로 들어가려는데 유리가 나를 붙잡았다.
  “제이가 빨리 오래.”
  유리는 잔뜩 들떠 있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지, 제이가 꼭 봐야 하는 영상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유리가 내 손을 잡고 달렸다. 주머니에서 자꾸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 제이다. 제이는 올해 반이 바뀌면서 만난 아이다. 처음에는 쉬는 시간에 말을 거는 것 정도였는데 어느새 유리와 나랑 같이 다니는 친구가 되었다. 다들 셋은 좀 위험하다고 하지만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제이와 유리가 점점 친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게 제이에게 미운 마음이 생겼다. 평소에 먹지 않던 바나나우유를 요즘 따라 먹기 시작한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반 아이들이 교탁 앞에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제이도 거기에 있었다. 제이가 종종걸음으로 오더니 유리를 데리고 교탁으로 갔다. 나도 잽싸게 가방을 내려놓고 유리에게 팔짱을 꼈다.
  아이들이 보고 있는 건 아이돌 엘린의 라이브 소통 영상이었다. 엘린은 작년부터 유리와 내가 좋아하기 시작한 아이돌이다. 별달리 특별한 점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와 나이가 같아서 그런지 괜히 응원하게 되었다. 예전엔 몇 개 없는 무대 영상을 열심히 찾아보곤 했는데, 지금은 온 세상이 엘린으로 가득했다.
  영상은 녹화본이었다. 반장이 우리가 온 걸 보더니 영상을 다시 처음부터 재생했다. 팬들이 남긴 댓글을 읽던 엘린이 빙긋 웃었다.
  ‘전 메이트가 있어요.’
  영상을 보던 아이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마셨다.

“당연히 거짓말이지.”
  제이가 바나나우유를 단숨에 마셔버리더니 말했다. 매점에서 간식을 사먹던 아이들 몇몇이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제이는 목소리를 낮췄다.
  “열두 살이 메이트가 있을 확률은 0.1퍼센트에 불과하다고.”
  유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유리를 돌아보았다. 유리는 엘린의 데뷔 팬이었다. 엘린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년부터 나한테 영업한 게 유리였다. 제이는 엘린이 지금까지 했던 말들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데뷔 때부터 다른 유명한 아이돌이랑 친하다고 말했던 것도, 연습생 생활을 오래 했으면서 꿈이 아이돌이 아닌 의사였다고 말했던 것도 이상하다고 했다. 유리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제이가 엘린을 허세로 가득 찬 사람으로 만드는 동안 나는 바나나우유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시아 넌 어떻게 생각해?”
  나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아닌 건 아닌 거다.
  “내 친구도 메이트 있어. 걘 더 빨리 각인했는걸.”
  제이가 눈을 치켜떴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아무튼 이상하다는 거지.”
  제이는 헛기침을 하더니 자리를 정리했다. 때마침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마지막 수업이 끝날 때까지 제이는 내게 한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가 다음 교시가 시작되면 뒤늦게 교실에 나타났다. 유리도 제이가 신경 쓰이는지 제이의 자리를 자꾸만 돌아보았다. 나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하교 종소리가 울렸다. 가방을 챙기고 일어서려는데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사서 선생님이 나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내가 우리 반 도서부 부장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유리가 내 어깨를 토닥였다.
  “기다릴게.”
  나는 하는 수 없이 가방을 내려놓았다. 나가려다 말고 주머니에서 조심스레 팔찌를 빼 책상 서랍에 넣었다.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복도로 나설 때 제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언뜻 본 것 같기도 했다.
  사서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왔을 때, 교실은 불이 다 꺼져 있었다. 남아 있는 건 내 책가방뿐이었다. 휴대폰을 켜자 유리의 메시지가 보였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것 같아서 먼저 간다는 거였다. 기다린다고 했으면서. 속이 상했지만 나는 하는 수 없이 혼자 교실을 나섰다. 집에 가는 내내 단체카톡방은 조용했다.
  “시아 왔니?”
  주나 엄마가 고개를 쭉 빼고 내게 눈인사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주나 엄마의 손은 쉬지 않고 움직이며 마늘을 깠다. 나는 신발을 대충 벗어던지고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소파에 앉아 있던 노마가 어색하게 인사를 했지만 못 본 척 눈을 감았다. 지금은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그때 휴대폰 알림음이 울렸다. 나는 재빨리 휴대폰을 확인했다. 유리였다. 단체카톡방이 아닌 개인 메시지였다.
  ‘시아야, 정말 미안한데…… 혹시 오늘 제이랑 이거 같이 봐도 될까? 오늘이 마지막 상영일이래서. 너 싫으면 안 갈게!’
  숨이 턱 막혔다. 그건 내가 지난달부터 보고 싶다고 말했던 애니메이션 영화였다. 지금까지 둘이 같이 놀고 있다는 것도 속상한데, 좋아하는 영화까지 뺏기는 건 더 속상했다. 나는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여기서 보러 가지 말라고 할 순 없었다. 내가 이런 일로 화가 난 걸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면 유리도 마음이 아플 게 분명했다. 난 이런 것쯤은 쿨하게 넘어가주는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다.
  ‘괜찮아. 난 다음에 보면 되지. 재밌게 보고 와!’
  나는 휴대폰 화면을 껐다. 바닥에 뒤집어놓고 다시 열어보지 않았다. 그래도 자꾸만 영화 생각이 났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주나 엄마가 마늘 껍질이 붙은 손을 탈탈 털더니 내 볼을 꼬집었다.
  “아 마늘 냄새!”
  주나 엄마가 내게 카드를 쥐여줬다. 아들딸이 집 안에서 휴대폰만 붙들고 퍼져만 있으니 자기 속이 다 답답하다고 했다. 말은 시원한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라고 했지만, 노마와 다시 친해져보라는 의미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았다.
  아이스크림 할인점으로 향하는 내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어제는 잘만 말을 걸던 노마였는데 오늘은 자꾸 내 눈치만 봤다. 이런 기분은 오늘 학교에서 겪은 것만으로 충분했다.
  “학교는 어땠어?”
  노마는 그냥 그렇지 뭐, 하고 얼버무렸다. 답답했다. 어릴 땐 조잘조잘 시끄럽게 떠들던 애가 어쩌다 이런 과묵한 아저씨가 됐는지 모르겠다. 나는 유리 생각이나 하기로 했다. 내일 아침에는 선물을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넣었다. 손끝에 딱딱한 카드가 만져졌다. 그제야 나는 유리에게 줄 팔찌를 책상 서랍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유리에게 각인 팔찌를 주면 이 이상한 마음이 잠잠해질까? 어쩌면 제이는 그런 건 그냥 팔찌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유리도 그러면 어떡하지. 나는 언젠가 유리와 진짜 각인을 하게 될 날을 떠올렸다. 고등학생? 스무 살? 둘 다 너무 멀었다.
  “메이트 속마음은 어떻게 들려?”
  노마는 곰곰이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그냥 들려. 네 목소리처럼.”
  내 모든 속마음이 들린다고 생각하니 순간 소름이 돋았다. 유리가 제이에 대한 내 마음까지는 몰랐으면 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노마가 웃었다. 모든 게 들리는 건 아니라고 했다.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부분만, 그 애가 들려주고 싶어 하는 부분만 들린댔다.
  “지금은 뭐래?”
  노마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몰라. 요즘은 잘 안 들어봐서.”
  주나 엄마가 노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노마와 메이트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거였다. 메이트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서로의 마음을 매일 들을 수 있는데. 내가 유리 메이트였다면 당장이라도 유리 마음을 들여다봤을 거다.
  노마가 구슬 아이스크림 두 개를 꺼내고 유리문을 닫았다. 나는 옆 칸 유리문을 열고 월드콘을 꺼냈다.
  “넌 아직도 그런 거 먹어?”
  노마는 어, 어, 하다가 구슬 아이스크림을 도로 집어넣었다. 대신 월드콘을 하나 더 꺼냈다. 구슬 아이스크림은 내가 좋아하던 게 맞았다. 이미 오 년이나 지났다는 게 문제였다.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길 끝에서 여자애 셋이 손을 꼭 붙잡고 걸어왔다. 중간에 버스 정류장이 나타나 길이 좁아져도 서로 몸을 딱 붙일 뿐 절대 손을 놓지는 않았다. 자전거 한 대가 휘청이며 간신히 아이들을 피해 지나갔다. 우리와 점점 가까워졌지만 아이들은 누구 하나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오른쪽 끝에 선 아이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애는 머뭇거리다가 시선을 돌렸다. 결국 노마가 비틀거리다 차도로 밀려났다. 노마는 머쓱한 듯 머리를 훌훌 털었다. 그러고는 깔깔거리며 멀어지는 아이들을 흘끗 돌아보았다.
  “잠깐 비켜주면 될 텐데.”
  “세 명이잖아.”
  노마가 그게 왜, 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한 명은 떨어져 걸어야 되니까.”
  “계속 그러라는 것도 아니고, 딱 한 번인데?”
  노마는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커다란 박스를 든 사람이 우리 옆을 비집고 지나갔다. 노마가 내 팔을 자기 쪽으로 잡아끌었다.
  “그게 한 번일 것 같아? 이렇게 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노마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두 번만 반복돼도 끝나는 거라고.”
  먼저 손을 놓고 뒤로 빠진 애는 비켜주는 사람이 된다. 한 걸음 뒤에서 혼자 걷는 사람이 된다. 좌석이 두 개씩 붙어 있는 놀이기구에서 뒷자리에 타는 사람이 되는 거다. 노마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나는 노마에게 더 설명해주지 않았다. 노마는 진짜 각인을 했으니까.
  돌아가는 내내 우리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앞서 걸어가는 커다란 노마가 낯설게 느껴졌다. 같이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농담을 주고받던 작은 노마는 이제 영영 사라져버린 걸지도 모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월드콘 하나를 챙겨 방에 들어갔다. 앞에서 누군가 서성이는 게 느껴졌지만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다.

*

나는 학교에 가자마자 팔찌부터 확인했다. 팔찌는 책상 서랍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몰래 꺼내 살피려는데 마스킹테이프가 툭 뜯어졌다. 누가 떼었다 다시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너덜거렸다. 나는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순간 제이와 눈이 마주쳤다. 제이는 금세 고개를 돌렸다.
  뭔가 이상했다. 1교시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들렀다가 유리 자리로 갔는데, 유리와 제이가 무언가 신나게 말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아무것도 아니라며 말을 돌렸다. 2교시 쉬는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3교시까지는 참았다. 입술을 꾹꾹 눌러가며 참았다.
  일은 점심시간에 터졌다. 오늘의 메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역국이었다.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제이가 말했다.
  “난 결말이 이해가 안 가. 왜 둘이 결혼해?”
  “그러니까. 마법으로 좋아하게 만든 건가?”
  유리가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내 눈치를 살폈다. 난 그게 뭔지 단박에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건 어제 본 영화 얘기였다. 나는 식판을 내려다보았다. 미역국을 입안 가득 머금었다. 목에 무언가 걸린 듯 미역국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유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난 네가 봐도 된다고 해서……”
  나는 미역국을 꼭꼭 씹어 삼켰다.
  “내가 얼마나 기대한 영환지 알면서.”
  나는 이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판을 반납하러 가는 길에 마음이 수백 번도 더 바뀌었다. 결말을 말해버렸다는 것에 화가 치밀다가도 그런 마음 하나 참지 못하고 쏘아붙인 내가 미웠다. 요즘 따라 자꾸 말이 제멋대로 나왔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유리 옆자리에 다시 앉았다. 나는 다음 수업 이야기를 꺼냈다. 내 명랑한 목소리에 유리가 씁쓸하게 웃었다.
  수업이 다 끝나고 유리랑 제이와 함께 교문을 나섰다. 오늘은 수요일, 유리가 나를 집에 데려다주는 날이었다.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내가 유리를 데려다준다. 집 방향이 다른 우리가 더 오래 함께 있기 위해 찾아낸 방법이었다. 우주슈퍼 갈림길에서 제이가 학원으로 가고 나면 그때부턴 유리와 나만의 시간이었다. 나는 팔찌를 주머니에 제대로 넣었는지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점심시간의 일 때문에 아직은 조금 어색했지만 각인 팔찌를 주면 금방 다시 괜찮아질 게 분명했다.
  금세 우주슈퍼가 나왔다. 제이가 유리 팔에 팔짱을 꼈다. 오늘은 바로 집으로 간다고 했다. 제이는 유리와 집 방향이 같았다.
  “시아 잘 가!”
  유리가 머뭇거리더니 제이와 같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 수요일인데.”
  내 말에 제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가는 길이 같잖아.”
  목이 꽉 메었다. 도무지 미소가 나오질 않았다. 유리가 팔짱을 풀고 다가오더니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나 오늘 너한테 줄 거 있었단 말이야.”
  목소리가 자꾸만 기어들어갔다. 제이가 팔짱을 끼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주면 되잖아. 왜 내가 보는 앞에서는 못 줘?”
  “네가 자꾸 눈치 없이 끼어드니까 그렇지!”
  순간 거리가 조용해졌다. 풀벌레들도 다 같이 숨을 멈춰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제이가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말은 제대로 해. 네가 날 밀어내는 거잖아.”
  “내가 언제?”
  내가 맞받아치자 제이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둘이서만 각인 팔찌도 만들었으면서.”
  너덜거리던 마스킹테이프가 떠올랐다. 그걸 본 게 제이일 줄은 몰랐다. 왜 남의 물건을 훔쳐보냐고 말하기도 전에 제이가 입을 열었다.
  “유리가 네 진짜 메이트도 아니잖아.”
  머리가 멍했다. 나는 눈물을 꾹 참고 말했다.
  “그래도 나랑 제일 친해.”
  제이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싶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너 집착 쩐다. 난 유리랑 친해지면 안 돼?”
  나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꼭 내가 웹소설 속에 나오는 ‘집착 여주’가 된 것 같았다. 나도 알았다. 친하다는 건 별다른 무기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친하니까 서운한 것도 사실이었다.
  “거 봐. 너도 할 말 없으면서.”
  그때였다. 내내 운동화만 쳐다보던 유리가 뒷걸음질 치더니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제이와 내가 동시에 유리를 불렀지만 유리는 계속해서 달렸다. 거긴 우리 집 방향도, 유리와 제이네 집 방향도 아니었다. 유리를 뒤쫓아 뛰던 우리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유리는 금세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혀 모르는 동네였다. 우주슈퍼는 보이지도 않았다. 학교 반대편으로 넘어온 것 같았다. 제이가 딸꾹질을 하더니 울기 시작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그 말에 나도 목 끝까지 차올랐던 울음이 터져나왔다.

지도를 찾아봐도 길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오래 달린 것 같지 않은데 주변에는 낯선 건물뿐이었다. 제이도 나처럼 길치인 줄은 몰랐다. 지칠 대로 지쳐 걷는데 눈앞에 편의점이 보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간판이 꼭 구세주 같았다.
  편의점 문을 열자 종소리가 딸랑거렸다. 제이가 마지못해 따라 들어왔다. 나는 바나나우유를 계산대에 올렸다. 아침에 주나 엄마 카드를 챙겨 나온 게 신의 한 수였다. 그때 제이가 계산대 위에 슥 무언가를 들이밀었다. 나와 똑같은 바나나우유였다.
  “나 지갑 안 가져왔어.”
  제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편의점 앞에 쪼그려 앉아 바나나우유를 마셨다. 제이가 한동안 빈 바나나우유 통을 달그락거리더니 말했다.
  “말해줄 거 있어.”
  “나도. 너부터 해.”
  “……나 바나나우유 원래 안 먹어.”
  “그럼 왜 샀어?”
  “너랑 유리가 좋아하잖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잔뜩 부은 눈으로 그런 말을 하는 제이가 왠지 귀여워 보였다. 제이가 날 툭 쳤다. 할 말이 뭐냐고 물었다.
  “유리랑 나는 엘린 좋아해.”
  제이 얼굴이 새빨개졌다. 제이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했다. 나도 미안하다고 했다. 제이가 자기가 더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그것보다 훨씬 더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는 괜히 머쓱해져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잠시 뒤 제이가 유리에게 전화를 걸어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다. 다행히 유리는 신호 세 번 만에 전화를 받았다. 우리는 편의점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이야기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제이에게 좋아하는 색이 뭔지 물었다. 제이는 연두색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 나중에야 안 거지만, 끈 세 개를 엮는 건 두 개보다 훨씬 쉬웠다.

다음 날 아침, 우주슈퍼 앞에는 제이가 서 있었다. 저 멀리서 유리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힘차게 우주슈퍼 문을 열었다.
  “뭐 먹을래?”
  순간 눈앞에서 파직, 하고 불꽃이 튀었다. 우리는 동시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유리와 제이, 나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눈동자 속에 담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이 터져나왔다. 제이가 셋을 셌다.
  “셋, 둘, 하나!”
  우리는 다 같이 입을 열었다.
  “바나나우유!”

채은랑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를 씁니다. 「사라지지 않아」로 제9회 한낙원과학소설상 대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청소년소설 『사라지지 않아』(공저)를 출간했습니다. 창작동인 고양이손과 ≠(inequality)의 멤버입니다. 어린이, 청소년 독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빛나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요.

저는 언제나 셋이 무서웠던 것 같아요. 세 명 중 한 명이 될 때마다 늘 마음속에 아주 뜨거운 아이스크림을 담고 살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셋, 둘, 혹은 하나인 모두에게 이 이야기가 조금은 다정한 이야기로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의 메이트니까요.
언젠가 노마의 이야기도 들려드릴 기회가 왔으면 좋겠네요! 마지막으로 어느 초여름날 함께 아이스크림을 들고 좁은 길을 걸어준 친구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바나나우유를 바칩니다.

2024/07/03
6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