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속의 그림자들



   어제 꺾은 데이지는 다섯 줄기. 다음 마디에서 열두 줄기로 갈라졌지. 어쩌면 열세 줄기, 이파리와 구분할 수 없는 미묘한 것까지.

   이 꽃송이의 꽃잎은 그새 시든 것까지 서른네 개. 그나마 온전했던 꽃송이는 두어 개 남짓. 나머지는 바스러진 것, 벌레 먹은 것, 모공만 남은 것……

   (또 뭘 기억하지?)

   아직도 그 창문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손으로 막기에는 너무 낮고 희미한 웃음. 내가 떨어뜨린 웃음을 그 웃음의 메아리와 구분하지 못해서 너는 아프다, 혹은 아프도록 웃는다.

   이제 소리 내지 말아야지. 웃는다.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넣고 깨문다. 웃는다. 틀어막는다. 웃는다. 차라리, 파묻는다. 몇 개의 굳은 비유, 성긴 의문, 섬망으로…… 웃음을 지으려면, 소리 없이 혼자 웃음을 쌓으려면 얼마큼 긴 입꼬리가, 지렛대가 필요한가.

   (또 뭘 셀 수 있지?)

   창에 다가설수록 많은 얼굴이 웃음에 꿰뚫린다. 두 마디, 네 마디, 여덟 마디…… 그래도 길어서 몇 번이고 웃음을 잘라낸다. 너는 몸을 떨며 나를 노려본다. 나는 손으로 한기를, 내 그늘을 가려준다. 그러나 펼칠 손가락이 모자라다. 갑자기 바닥이, 온몸이 떨려온다. 아무것도 세지 못하겠다. 얼굴도, 데이지도, 너도.

   더는 악보가 필요 없었다. 마디와 깜빡임, 물기가 필요 없었다. 연상에 따른 변명이. 단락에 따른 침묵이.





   그늘 속의 그림자들



   손과 손가락 사이. 데이지 다섯 송이, 혹은 다섯 줄기 데이지 묶음. 무엇에 닿기도 전에 피부는 좌표를 밀어올린다. 손은 그곳을 긁고 파헤친다. 들어가려고, 혹은 꺼내오려고.

   허옇게 살이 튼 창문을 죽은 나뭇가지가 긁고 있다.

   너는 나에 임박해 있다.

   (또 뭘 낳았지?)

   눈을 발에 가까이. 개가 땅에 코를 가져다 대듯이. 새의 심장, 연거푸 같은 발등에 떨어지는 빗방울.

   밤을 길렀다. 눈 속에. 날아가지도 잠들지도 못하는 밤을 잡아넣었지. 차라리, 가까운 별을 낳으라고.

   벽 없는 방, 폭설, 맨발. 스위치를 찾아 헤맸지. 그러다 발치에 잠든 밤을 으깨버렸지. 발바닥에서 알전구가 터지고 이파리가 잠시 파닥였고 따뜻해졌다가, 금세 싸늘해졌지. 이렇게 눈 내리는 바닥에서 나는 기쁘다, 홀로 끔찍하게 환하다.

   (또 뭘 꺾었지?)

   어제 꾸린 배낭을 열며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나를 여는 손이 내 것이 아니어서 우리는 놀란다.

   어깨에 모르는 입술이 날아와 앉는다. 입술은 모르는 이름들로 둥지를 엮고 알을 낳는다. 새벽에 깨고 나온 내 얼굴을 안쪽부터 파내고 귀부터 다시 빚는다. 몸보다 헐벗은 얼굴을. 바로 덮고 자기에 눈꺼풀은 너무 차다.

   새벽, 커튼, 맨발. 거꾸로 내걸린 한 다발 마른 웃음. 내 표현의 끝에 매달린 네 시선의 시작. 아직 남아있던 한 꺼풀의 수증기. 깜빡임과 함께, 새장 안에서 새장을 들고 날아오르는 검은 새. 우리 혼자, 아무도 모르게.

이설빈

시집 『울타리의 노래』가 있다.

2022/01/25
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