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
5회 광화문 콜트콜텍 농성장을 그리다
매주 수요일, 나는 그림 그릴 도구를 챙겨서 광화문 콜트콜텍 농성장에 간다. 2015년 가을부터 시작된 나의 일상이다.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나는 이 일을 잘 챙기고 있다. 농성장에 가면 아무도 없는 날이 요즘 들어 자주 있으나 조금 지나면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콜텍 해고 노동자들이다. 다른 약속을 마치고 서둘러 돌아오는 모습이다.
나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그림 도구들을 꺼내 바닥에 잘 정렬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아저씨들의 모습을 슬쩍 관찰하다가 그림 그릴 대상을 어렵게 결정한다. 그림이 잘 풀리면 말없이 계속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절반의 날은 “아, 망했어.”라는 말이 절로 밖으로 새어나오고 붓을 쥔 손은 쓸데없이 분주해진다. 더 늦은 밤이 되면 서둘러 그림을 마친다. 다시 그림 도구들을 잘 정렬해 가방에 넣는다.
그러고는 농성장의 가장 빛 밝은 자리에 둘러앉아 보드게임을 시작한다. 2012년 부평 콜트 공장 농성장에서부터 시작된 우리의 놀이다. 7년째 우리는 같은 보드게임을 하고 있는데 지루한 기색을 찾을 수 없다. 모두가 승리를 골고루 나눠 가지는 날엔 게임을 마치며 덕담을 나눈다. 누군가 승리를 독식하는 날엔 그 승자의 야비함을 강조하며 게임을 마친다.
끝이 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아저씨들은 항상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나는 항상 “얼른 들어가 쉬세요.”라고 말한다. 너무 추운 겨울엔 이 추위에 잠이 올까, 너무 더운 여름엔 어떻게 이 더위에 잠을 자나 걱정을 하지만 매번 돌아오는 말은 “익숙해, 걱정마.”라는 대답이다.
농성을 시작한지 12년째다. 인천 콜트 기타 공장, 대전 콜텍 기타 공장은 사실상 같은 회사인데, 두 공장 모두 2008년에 돌연 문을 닫고 인도네시아와 중국으로 공장을 옮겨갔다. 경영상 어려움을 이유로 근무하던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한 것인데, 당시 콜트콜텍은 기타 생산량 세계 3위에, 대표이사는 국내 부자 순위 120위에 들었으며, 공장은 부채도 없었다고 한다.
해고 노동자들은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오랜 법정투쟁 끝에 콜트 노동자들은 부당해고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콜트 노동자들이 법원에서 승소하는 날, 콜텍 노동자들은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 위기’를 이유로 정당한 해고라는 판결을 받았다. 법정은 동일한 사안을 두고 다른 결론을 내렸다. 결국 회사와 협상의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콜트 노동자들은 협상하지 않았다. 콜트 노동자가 협상을 하면 콜텍 노동자들은 회사로부터 완전히 패배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대전 콜텍 공장의 지회장 아저씨는 컴퓨터를 잘 다룬다는 이유로 선출되었다. 한 아저씨는 다른 농성자들에게 밥을 해주기 위해서 대전을 떠나는 상경 농성단에 합류했다. 또다른 아저씨는 상경 농성을 피하고 싶어서 농성 후원 사업 쪽을 택했는데 결국, 후원 사업의 대표로 상경 농성장에 합류하게 되었다. 또다른 한 명은 그나마 젊으니까 일을 잘 하지 않겠냐며 노조 사무장이 되어 상경했다.
이들은 서울로 가면 사람들이 억울함을 더 잘 들어주지 않을까 해서 대전을 떠나왔다고 했다. 모두가 갈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4인을 대표로 보냈다. 남은 사람들은 생계 투쟁(일자리를 구해서 투쟁 기금을 모으는 투쟁 방식)을 하기로 했다. 대표단 4인은 인천 콜트 공장 농성장과 합류를 했다. 한강의 송전탑에 올라 단식 농성을 하기도 했다. 서울 본사 앞에서 시위를 했고 법원 앞에서 아침마다 일인 시위를 했다. 그러다가 노래하는 밴드를 만들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2012년 내가 처음으로 인천 콜트 공장을 찾아갔을 때 공장 마당에는 대전에서 막 올라온 콜텍 노동자 4명과 콜트 노동자 3명이 농성 중이었다. 설비를 모두 옮긴 텅 빈 공장에서 나는 작업실을 만들어 그림을 그렸다. 넓은 마당에는 이불이 빨랫줄에 널려 있고 밥이며 찌개 끓이는 냄새가 났다. 가끔씩 아저씨들은 밴드 연습을 했다. 놀랄 만큼 실력이 없었지만 언젠가 좋아지겠지 생각했다. 활동가들과 종교인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종종 놀러왔다. 다른 농성장의 노동자들도 자주 놀러왔다. 마당의 한낮은 굉장히 조용했고 밤이 되면 항상 시끌벅적했다. 여러 인디밴드 가수들이 찾아와 연대 공연을 했다. 어떤 날은 그 가수들의 팬클럽까지 왔고 그러면 마당은 발 디딜 데 없이 비좁아졌다. 누군가는 커피를 만들고 누군가는 고기를 구웠다. 새벽엔 술 먹고 싸우는 소리와 노래하는 소리가 섞여 내 작업실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모두가 돌아가 다시 조용해진 새벽엔 기타 연습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나는 마당으로 나가 식은 고기를 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이때가 농성한지 5년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종종 이런 질문들을 했었다. “어쩌다 이렇게 강경하게 오래……?”
어떤 아저씨는 길어야 3년일 거라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길어졌다고 했고, 어떤 아저씨는 남들이 농성에서 빠져나갈 때 같이 그만뒀어야 했는데 그 타이밍을 놓쳐서 여기 있는 거라 했다. 의외의 대답이라 웃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인천 콜트 공장의 지회장 아저씨는 항상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셨다. 구부정하고 느릿한 걸음으로 홀로 바쁜 일정을 보내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종종 내 작업실에 들러 나와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평소와 다른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가방에서 온갖 서류들을 꺼내서 콜트콜텍 복직 투쟁을 깨알같이 자세히 설명했다. 나는 어려운 전문용어에 금세 지쳤고 이제 그만하시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아저씨는 알아채지 못했다. 몇 달 후에는 나의 기억력을 지적하며 “제발 했던 말은 기억 좀 하라.”고 말하셨다. 억울한 나는 제발 그만하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인천 콜트의 한 아저씨는 항상 빨간 모자에 빨간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이유는 사람들 눈에 잘 띄기 위해서 라고 했다. 손이 매우 특이했다. 양손 모두 손가락 하나씩이 없었는데 일하다 기계에 잘린 거라고 했다. 사장이 공장 폐업을 말했을 때 너무 화가 나서 공장 마당에서 시너를 끼얹고 분신을 시도했었다. 그래서 손가락이 하나씩 없는 두 손은 피부가 얇아 조금만 일을 해도 금세 피부가 벗겨졌다. 그 손으로 매일 농성장 물을 떠 날라 매일 손이 까졌다. 인천 콜트의 다른 아저씨는 이 빨간 모자 아저씨를 항상 감시했다. “재는 미쳤어. 진짜로.”라고 속삭이며 또다시 분신을 할까봐 마당 그늘에 앉아 빨간 모자 아저씨의 행동을 항상 주시했다. 그 둘은 자주 싸웠다. 그러면 콜트의 지회장 아저씨는 내가 그 모습을 볼까 부끄러워 그 둘을 동시에 꾸짖었다. 마당의 세 남자는 낯을 가리는 아버지와 철없는 두 아들 같았다.
*
2012년 콜트 공장에서의 기억을 꺼내자면 사실 끝이 없다. 우리 모두가 공장에서 쫓겨나고 공장이 철거되어 사라지기 전까지 머물렀던 여러 기억들이 많다. 농담을 주고받고, 그래서 실없이 웃고, 속내를 꺼내고, 서로에게 정성으로 대하려는,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한 각자의 노력들을 기억한다. 사장이 버리고 떠난 빈 공장은 해고 노동자들의 집이었고 예술가의 작업실이었으며 여러 연대자들과 나누는 환대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해 머물렀던 사람들에게 그 곳은 그냥 우리들의 공장이었다. 나는 그 우정이 소중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는 ‘그 시절 기억들이 모두 공평하게 좋았을까’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시절을 좋은 기억으로 표현했던 말들이 부끄러웠다. 나는 아저씨들 개인의 시간이 어떠한지를 모른다. 농성 천막에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을 때, 각자 집에 돌아가 가족을 만날 때, 다시 농성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마음일지 어떤 말들이 오가는지 모른다. 그래서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무게를 잘 모른다. 미래를 두고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모른다. 미래를 기대할 수 없을 때 사람이 얼마나 절망하는지 잘 모른다. 이건 대화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한 아저씨가 말했다. 3일 동안 선산에 누워 있다가 나무에 목을 매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고. 힘이 하나도 없어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누워만 있었는데 다람쥐가 물을 떠나줘서 그 물을 먹고 살아 내려왔다고 하셨다.
“왜 선산인 거예요?”
“아무 산에서 죽으면 나를 못 찾을까봐. 선산이면 누군가 성묘 왔다가 나를 찾을 수도 있으니까.”
“다람쥐가 정말 물을 떠다줬어요? 두 발로 서서? 손으로 바쳐서?”
“응, 정말이야. 그런 옛말이 있어. 산에 가면 다람쥐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다고.”
“거짓말이죠?”
정면을 직시하는 질문은 애써 피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어서 그랬다.
그동안 누구누구는 이혼을 했다. 누구누구는 자살을 시도했다. 누구누구는 빚이 너무 많아졌다. 누구누구는 다른 비정규직 일을 찾아 갔다. 마음이 망가져 마음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몸이 망가져 병원을 다녔다. 깜짝 놀랄만한 이런 상황들은 마치 일상이었던 것처럼 이미 지나간 일이 된 듯 담담하고 작은 목소리로 후일담처럼 전해졌다.
그리고 이제 남은 사람들은 서로가 대화하기를 멈췄다. 긴 농성에서는 대화가 서로에게 칼이 될 수 있어서 그러는 듯하다. 공장 마당이 있었다면 좀더 버틸 만했을까 하는 시시한 생각을 한다. 현실은 세상이 바뀌지 않아서 자꾸 다쳐가는데 말이다.
내일도 그림 그릴 도구를 챙겨서 농성장에 간다. 내가 어떤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간다. 목적이 흐릿해질 때는 관성으로 가는 것도 괜찮다.
나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그림 도구들을 꺼내 바닥에 잘 정렬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아저씨들의 모습을 슬쩍 관찰하다가 그림 그릴 대상을 어렵게 결정한다. 그림이 잘 풀리면 말없이 계속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절반의 날은 “아, 망했어.”라는 말이 절로 밖으로 새어나오고 붓을 쥔 손은 쓸데없이 분주해진다. 더 늦은 밤이 되면 서둘러 그림을 마친다. 다시 그림 도구들을 잘 정렬해 가방에 넣는다.
그러고는 농성장의 가장 빛 밝은 자리에 둘러앉아 보드게임을 시작한다. 2012년 부평 콜트 공장 농성장에서부터 시작된 우리의 놀이다. 7년째 우리는 같은 보드게임을 하고 있는데 지루한 기색을 찾을 수 없다. 모두가 승리를 골고루 나눠 가지는 날엔 게임을 마치며 덕담을 나눈다. 누군가 승리를 독식하는 날엔 그 승자의 야비함을 강조하며 게임을 마친다.
끝이 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아저씨들은 항상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나는 항상 “얼른 들어가 쉬세요.”라고 말한다. 너무 추운 겨울엔 이 추위에 잠이 올까, 너무 더운 여름엔 어떻게 이 더위에 잠을 자나 걱정을 하지만 매번 돌아오는 말은 “익숙해, 걱정마.”라는 대답이다.
농성을 시작한지 12년째다. 인천 콜트 기타 공장, 대전 콜텍 기타 공장은 사실상 같은 회사인데, 두 공장 모두 2008년에 돌연 문을 닫고 인도네시아와 중국으로 공장을 옮겨갔다. 경영상 어려움을 이유로 근무하던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한 것인데, 당시 콜트콜텍은 기타 생산량 세계 3위에, 대표이사는 국내 부자 순위 120위에 들었으며, 공장은 부채도 없었다고 한다.
해고 노동자들은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오랜 법정투쟁 끝에 콜트 노동자들은 부당해고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콜트 노동자들이 법원에서 승소하는 날, 콜텍 노동자들은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 위기’를 이유로 정당한 해고라는 판결을 받았다. 법정은 동일한 사안을 두고 다른 결론을 내렸다. 결국 회사와 협상의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콜트 노동자들은 협상하지 않았다. 콜트 노동자가 협상을 하면 콜텍 노동자들은 회사로부터 완전히 패배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전 콜텍 공장의 지회장 아저씨는 컴퓨터를 잘 다룬다는 이유로 선출되었다. 한 아저씨는 다른 농성자들에게 밥을 해주기 위해서 대전을 떠나는 상경 농성단에 합류했다. 또다른 아저씨는 상경 농성을 피하고 싶어서 농성 후원 사업 쪽을 택했는데 결국, 후원 사업의 대표로 상경 농성장에 합류하게 되었다. 또다른 한 명은 그나마 젊으니까 일을 잘 하지 않겠냐며 노조 사무장이 되어 상경했다.
이들은 서울로 가면 사람들이 억울함을 더 잘 들어주지 않을까 해서 대전을 떠나왔다고 했다. 모두가 갈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4인을 대표로 보냈다. 남은 사람들은 생계 투쟁(일자리를 구해서 투쟁 기금을 모으는 투쟁 방식)을 하기로 했다. 대표단 4인은 인천 콜트 공장 농성장과 합류를 했다. 한강의 송전탑에 올라 단식 농성을 하기도 했다. 서울 본사 앞에서 시위를 했고 법원 앞에서 아침마다 일인 시위를 했다. 그러다가 노래하는 밴드를 만들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2012년 내가 처음으로 인천 콜트 공장을 찾아갔을 때 공장 마당에는 대전에서 막 올라온 콜텍 노동자 4명과 콜트 노동자 3명이 농성 중이었다. 설비를 모두 옮긴 텅 빈 공장에서 나는 작업실을 만들어 그림을 그렸다. 넓은 마당에는 이불이 빨랫줄에 널려 있고 밥이며 찌개 끓이는 냄새가 났다. 가끔씩 아저씨들은 밴드 연습을 했다. 놀랄 만큼 실력이 없었지만 언젠가 좋아지겠지 생각했다. 활동가들과 종교인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종종 놀러왔다. 다른 농성장의 노동자들도 자주 놀러왔다. 마당의 한낮은 굉장히 조용했고 밤이 되면 항상 시끌벅적했다. 여러 인디밴드 가수들이 찾아와 연대 공연을 했다. 어떤 날은 그 가수들의 팬클럽까지 왔고 그러면 마당은 발 디딜 데 없이 비좁아졌다. 누군가는 커피를 만들고 누군가는 고기를 구웠다. 새벽엔 술 먹고 싸우는 소리와 노래하는 소리가 섞여 내 작업실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모두가 돌아가 다시 조용해진 새벽엔 기타 연습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나는 마당으로 나가 식은 고기를 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이때가 농성한지 5년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종종 이런 질문들을 했었다. “어쩌다 이렇게 강경하게 오래……?”
어떤 아저씨는 길어야 3년일 거라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길어졌다고 했고, 어떤 아저씨는 남들이 농성에서 빠져나갈 때 같이 그만뒀어야 했는데 그 타이밍을 놓쳐서 여기 있는 거라 했다. 의외의 대답이라 웃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인천 콜트 공장의 지회장 아저씨는 항상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셨다. 구부정하고 느릿한 걸음으로 홀로 바쁜 일정을 보내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종종 내 작업실에 들러 나와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평소와 다른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가방에서 온갖 서류들을 꺼내서 콜트콜텍 복직 투쟁을 깨알같이 자세히 설명했다. 나는 어려운 전문용어에 금세 지쳤고 이제 그만하시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아저씨는 알아채지 못했다. 몇 달 후에는 나의 기억력을 지적하며 “제발 했던 말은 기억 좀 하라.”고 말하셨다. 억울한 나는 제발 그만하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인천 콜트의 한 아저씨는 항상 빨간 모자에 빨간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이유는 사람들 눈에 잘 띄기 위해서 라고 했다. 손이 매우 특이했다. 양손 모두 손가락 하나씩이 없었는데 일하다 기계에 잘린 거라고 했다. 사장이 공장 폐업을 말했을 때 너무 화가 나서 공장 마당에서 시너를 끼얹고 분신을 시도했었다. 그래서 손가락이 하나씩 없는 두 손은 피부가 얇아 조금만 일을 해도 금세 피부가 벗겨졌다. 그 손으로 매일 농성장 물을 떠 날라 매일 손이 까졌다. 인천 콜트의 다른 아저씨는 이 빨간 모자 아저씨를 항상 감시했다. “재는 미쳤어. 진짜로.”라고 속삭이며 또다시 분신을 할까봐 마당 그늘에 앉아 빨간 모자 아저씨의 행동을 항상 주시했다. 그 둘은 자주 싸웠다. 그러면 콜트의 지회장 아저씨는 내가 그 모습을 볼까 부끄러워 그 둘을 동시에 꾸짖었다. 마당의 세 남자는 낯을 가리는 아버지와 철없는 두 아들 같았다.
2012년 콜트 공장에서의 기억을 꺼내자면 사실 끝이 없다. 우리 모두가 공장에서 쫓겨나고 공장이 철거되어 사라지기 전까지 머물렀던 여러 기억들이 많다. 농담을 주고받고, 그래서 실없이 웃고, 속내를 꺼내고, 서로에게 정성으로 대하려는,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한 각자의 노력들을 기억한다. 사장이 버리고 떠난 빈 공장은 해고 노동자들의 집이었고 예술가의 작업실이었으며 여러 연대자들과 나누는 환대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해 머물렀던 사람들에게 그 곳은 그냥 우리들의 공장이었다. 나는 그 우정이 소중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는 ‘그 시절 기억들이 모두 공평하게 좋았을까’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시절을 좋은 기억으로 표현했던 말들이 부끄러웠다. 나는 아저씨들 개인의 시간이 어떠한지를 모른다. 농성 천막에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을 때, 각자 집에 돌아가 가족을 만날 때, 다시 농성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마음일지 어떤 말들이 오가는지 모른다. 그래서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무게를 잘 모른다. 미래를 두고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모른다. 미래를 기대할 수 없을 때 사람이 얼마나 절망하는지 잘 모른다. 이건 대화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한 아저씨가 말했다. 3일 동안 선산에 누워 있다가 나무에 목을 매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고. 힘이 하나도 없어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누워만 있었는데 다람쥐가 물을 떠나줘서 그 물을 먹고 살아 내려왔다고 하셨다.
“왜 선산인 거예요?”
“아무 산에서 죽으면 나를 못 찾을까봐. 선산이면 누군가 성묘 왔다가 나를 찾을 수도 있으니까.”
“다람쥐가 정말 물을 떠다줬어요? 두 발로 서서? 손으로 바쳐서?”
“응, 정말이야. 그런 옛말이 있어. 산에 가면 다람쥐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다고.”
“거짓말이죠?”
정면을 직시하는 질문은 애써 피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어서 그랬다.
그동안 누구누구는 이혼을 했다. 누구누구는 자살을 시도했다. 누구누구는 빚이 너무 많아졌다. 누구누구는 다른 비정규직 일을 찾아 갔다. 마음이 망가져 마음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몸이 망가져 병원을 다녔다. 깜짝 놀랄만한 이런 상황들은 마치 일상이었던 것처럼 이미 지나간 일이 된 듯 담담하고 작은 목소리로 후일담처럼 전해졌다.
그리고 이제 남은 사람들은 서로가 대화하기를 멈췄다. 긴 농성에서는 대화가 서로에게 칼이 될 수 있어서 그러는 듯하다. 공장 마당이 있었다면 좀더 버틸 만했을까 하는 시시한 생각을 한다. 현실은 세상이 바뀌지 않아서 자꾸 다쳐가는데 말이다.
내일도 그림 그릴 도구를 챙겨서 농성장에 간다. 내가 어떤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간다. 목적이 흐릿해질 때는 관성으로 가는 것도 괜찮다.
전진경
2012년 인천 콜트공장에 점거예술을 하며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과 연대를 시작했다.
회화와 드로잉을 그리는 예술가이며 주로 사회적 현장을 담는 그림을 그린다.
2015년부터 지금까지 매주 수요일 농성장을 찾아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과의 연대의 경험을 담아 『빈 공장의 기타소리』라는 그림책을 만들었다.
2018/10/30
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