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저녁 더운 이마에 어린 바람을 좋아한다. 아스팔트에 어렸던 열기가 빠르게 사라진다. 대신 커피 빛깔 저녁이 세상에 어린다. 유독 바람이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다. 세상 곳곳에서 오늘 태어난 아이들, 막 이 세상에 어린 갓난아이들을 생각한다.
   구두점처럼 빈틈없이 꽉 쥐어진 둥근 주먹. 쉽게 펴지지 않을 정도로, 손바닥 속으로 빨려들듯 모아쥐고 있는 작은 손가락들. 그 센 힘을 장하게도 견디고 있는 너무 작고 가는 손가락들. 한 뼘의 팔과 다리 또한 몸통에 빈틈없이 붙이고 있다. 갓난아이는 앞으로 평생 꺼내 쓸 울음을 작은 몸속에 꾹꾹 욱여넣듯 울고 또 운다. 갓난아이는 먼 미래의 공간처럼 머나먼 하늘에서부터 날아와 세상이라는 창에 막 어려서 울고 있는 커다란 빗방울 같다. 비가 온다. 나는 막 태어난 딸을 차마 손대지 못하고 눈으로 다독인다. 비 오는 소리가, 괜찮아 반가워 괜찮아 반가워라고 하는 것 같다.
   창문에 달라붙은 둥근 빗방울처럼 세상의 표면에 어린 존재들. 막 태어난 아이의 몸은 빗방울처럼 동그랗고 흩어질 듯 연약하다. 그러나 제 몸보다 훨씬 큰 울음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듯, 아이는 어른보다 훨씬 큰 힘을 내부에서 감당하고 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며 아이는 조금씩 팔과 다리를 몸통에서 떼어 기고 걷고 손짓한다. 눈앞의 무엇이든 손가락을 펴 붙잡는다. 그런 아이를 보면, 내가 ‘어렸을 때’를 떠올리게 된다.
   어렸을 때, 정작 나는 내가 어린 것이 마뜩잖은 순간이 많았다. 어린 시절을 보낸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각자의 여러 경우에 그랬을 것이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어서 어른이 되지 못해 조바심치던 순간이 거의 누구에게나 있다. 나의 경우는 어린 나 혼자 어찌할 수 없는 순간 그러니까 어른들의 허락이나 결정만을 마냥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그랬다. 엄마에게 수개월간 아무리 졸라도 사주지 않던 장난감을 내 몫으로 받아 고이 모아둔 세뱃돈으로 생일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선물’로 사면서 왠지 고개를 갸웃했던, 지금은 그립고 소소한 추억들이 나도 있다.

   어린 것은, 불완전한 것이고 철없고 연약한 그 존재 자체로 어른들을 불안하게 하며, 잘 키워 그 ‘어림’으로부터 어서 벗어나게 해야 하는 미혹한 상태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린 시절을 벗어나 되는 어른이라는 것이 나는 생각보다 좋지 않다.
   나는 ‘어리다’라는 말 자체가 좋다. 실제하지만 손을 대면 좀처럼 잡을 수 없고 심지어 사라져버릴 것 같은 말.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어리는 웃음. 창문에 어리는 달빛. 그런 것들을 나 역시 좋아한다. 우주까지는 거론할 것도 없이, 이 지구의 시간으로만 말하더라도 우리는, 잠시 지구상에 ‘어리다’ 서서히 ‘어른’거리는 그림자처럼 사라진다. 우리는 모두 누구나 처음엔 지구라는 창에 ‘어린’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 중에 가장 생생하게 어린 사람을 ‘어린이’라고 부르나보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지구라는 창에 그나마 잠시 어리던 우리는,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면서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되는 것은, 어른대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 말 그대로 우리는 지구상에 ‘어른대는’ 존재가 된다. 잠시나마 입가에 어렸던 웃음처럼, 눈가에 어렸던 슬픔처럼 그나마 실체가 있는 아름다웠던 순간은 가고, 그저 부산한 거리 곳곳 어디에도 깃들지 못하고 어른대는 유령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어른이 된 우리는, 어린이들에 비하면 고작 그들의 그림자 같은 존재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지구의 시간에 어른대는 어른은 허수이자 점점 허상에 가까워지는 존재다. 그나마 아직 세상에 어려 있는 어린이만이 상수이자 실제다. 문제는, ‘허상’이 ‘실제’를 훼손하는 일들이 지구상에는 셀 수 없이 많다. ‘실제’의 생존이 ‘허상’에 의해 무책임하게 결정되고, 폭력에 노출되며 적지 않은 경우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된다. 매년, 매 계절 누구나 잠시만 생각해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얼마 전에 어린이가 희생된 참혹한 사건’들은 잦고 또 지속적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시간 어른대는 존재더라도, 한순간이라도 그 사람을 생각하는 누군가의 얼굴에 아련한 표정으로 어린다면 그 순간만은 그도 ‘어린 이’다. 부모들에게 자식은 늘 어린 존재이듯.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다. 여전히 지금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린 이다. 나무에 어린 바람 같이, 기도하는 사람의 두 손에 어린 바람 같이, 어린 이다. 누구나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어린 이가 되고 싶다. 지금 내 얼굴에 따뜻한 표정으로 어린 기억 속의 사랑했던 그 사람. 그 사람의 눈가에 입가에, 나도 가끔이라도 어리는 이가 되고 싶다.
   세상의 모든 어린 것들은 무해하다. 내 곁에 어린 것들이 나는 매일 매 순간 그립다. 세상에, 어느새 자란 어린아이가 막 낮잠에서 깨 내게로 두 팔 벌리고 웃으며 걸어온다. 새삼스레 깨닫는다. 지금 내게는, 내게 어린 아이가 있다. 내게 평생 어릴 아이가 있다. 나는 어린아이가 좋다. 그리고 나는 어린아이를 번쩍 안고 창문을 열었을 때, 우리 둘 얼굴에 어린 햇볕을 바람을 새와 곤충들의 울음소리를 좋아한다.


김중일

여태 시만 겨우 쓰다가 조금 더 힘내서 에세이도 쓰기 시작한 사람.

2020/09/29
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