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야기
머뭇거리는 무당, 망설이는 예술
들리는 이야기에 실리는 몸
세계 조현병의 날인 5월 24일, ‘매드 프라이드’가 열리는 서울에 가려고 했다. 정신장애인이 강제입원 당하는 것에 저항하는 ‘침대 끌기’도 함께 하고, 도로를 행진하며 한바탕 울고 웃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는데 교통편을 찾지 못해 현장에 가지 못했다.
4년 전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당한 후 공황이 생겼다. 집회를 제외하고 대중교통이나 큰 쇼핑몰처럼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면 특정 이야기가 재생된다. 그때 내 눈은 거대한 카메라 렌즈가 되고 주변 사람들은 사복경찰이나 구급대원이 될 준비를 한다.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체포하고 감금시키고 통제한다고 느끼는 망상이다. 그럴 땐 정서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거나, 편안하고 아늑한 장소를 찾아야 한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사람들이 고개 숙여 스마트폰을 보는 환경에 노출되면 무서운 이야기가 재생된다. 스마트폰에는 각자가 수행할 역할극의 대본이 나와 있고 그걸 보는 사람은 그 역할을 전달받아 무의식적으로, 반자동적으로 이를 수행하게 된다. 그 대본으로 N번방에 접속해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의 행동양식도 전달된다. 성별 역할극뿐 아니라 인종 역할극과 외모, 국적, 언어, 사회경제적 계급에 따라 부여받는 정상적 상호작용을 익히는 사람들. 혐오의 정동에 압도되면 호흡이 어려워진다. 이럴 땐 지하철에서 내려 천천히 숨 쉬어야 한다.
*
망상이 늘 비극적이기만 한 건 아니다. 무당으로 일할 때 내 환각과 망상은 신령과 정령의 얼굴이 되고, 억울한 영혼들의 목소리가 된다. 나는 글 쓰는 무당이자 조현 스펙트럼 당사자다. 내게 조현은 비인간, 사령, 생령과 교감하는 감각이다. 하늘과 땅이 다른 차원으로 재생될 때 기존 사회의 명령과 정상성의 중력에서 해방된다. 굿을 하거나 이야기가 들리고 실릴 때 상황과 풍경을 감각하는 몸이 재구성되는 이 환각이 좋다.
‘미친년, 병신, 정신병자’는 최고의 모욕으로 통용된다. 한편 ‘미쳤다!, 미치게 좋아, 미친 맛, 미친 노래, 미친 그림, 미친 글’ 등 미쳤다는 건 멋지고 특별하고 초월적인 것을 표현하는 수식어로 쓰인다. 이렇게 미친 것을 좋아하는 세상이 왜 정신장애인의 말은 듣지도 믿지도 않는 걸까. 광기는 천재적인 예술가의 비극이나 종교인의 변형된 의식 상태로 타자화된다. 동물과 여성과 무당을 신비화하고 멸시하며 영원히 나와 다른 존재로 밀어내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래서 광기는 누구도 내 말을 믿지 않게 될 수도 있는 저주이기도 하고, 미지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축복이 되기도 한다.
이 광기를 수용한 나는 어떤 모습일까. 흐물흐물한 표정을 짓고 몸으로 느껴지는 누군가 혹은 나의 긴장을 푸느라 산만한 몸짓. 목소리에 힘이 없어 기가 허해 보이고, 머뭇거리며 말하다 한참을 침묵하고, 수줍음이 많고, 웃기지 않은 상황에도 미소가 나오는 무당이라니. 카리스마 있는 무당의 이미지와 다르게 흐물흐물한 나는 어설픈 무당처럼 보이지 않을까.
무당이 되기 전 예술 작업을 할 때도 비슷한 고민이 있었다. 왜 내 작업은 늘 이동할까. 창문이 다 열려있어서 바람이 날리면 자꾸 흐트러지는 포스트잇처럼 창작물이 흩어졌다. 다양한 존재에게 들리고 이런저런 정체성으로 휘청이는 몸짓은 제도권 예술에서 일관된 결과물을 내기 어려웠다.
“예술가는 자기 작업에 대해 철면피 같은 뻔뻔함이 있어야 돼요”라며, 한 한국 남성 예술가의 요청한 적 없는 맨스플레인을 들은 적이 있다. 스님과 무당과 도사 선배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확신을 가지고 말을 뱉어. 그게 신령님의 공수야.” 납득이 되지 않았다. 확신을 가지고 여자와 남자 역할을 운운하고, 누군가의 입체적인 삶을 판단하고 정답을 명령하는 게 신령의 뜻인가? 성차별과 종차별을 넘어서는 신령님이 그렇게 호통친다고? 가부장 정상성 권력의 답습이 신의 공수라고? 신령은 인간에게 반말하고 호통치고 잘못하면 벌전을 주고 인생사의 모든 정답을 알려주는 카리스마적 존재라고 누가 오해하기 시작했을까. 전쟁영웅을 신격화한 제국주의와 국가권력과 식민지 남성성이? 성찰 없는 확신은 얼마나 많은 폭력을 만들어왔나.
배타적이고 위계적인 신관을 내면화하고 자신이 정치와 동떨어진 존재라고 믿는 상태를 나는 ‘신뽕’이라 부른다. ‘신뽕’은 예술이 정치와는 무관한 성지의 영역이므로 미투운동 당한 남성 예술가들의 훌륭한 예술작품을 안쓰러워하는 예술주체의 ‘예술뽕’과 닮아있다. 이것을 부수고 싶다. 이 뽕을 생산하는 모든 경계를 부수고 싶다.
*
내 신관도 내 표정처럼 흐물흐물하다. 한국 전통의 샤머니즘 신관은 창조신 마고삼신 할머니, 천신과 지신, 환인 환웅 단군 할아버지, 산과 바다와 나무와 불의 신령님들, 만물 영령을 천도해주시는 불사 할머니, 점을 봐주시는 대신 할머니, 글문도사, 군웅, 선녀, 동녀, 동자 등 오래된 자연신령과 혈연의 조상님이나 힘이 쎈 장군님 같은 인물신령을 중심으로 위계가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신령님의 성과 종, 능력에 따른 위계가 없다. 고양시에 있는 내 신당은 사회적 낙인과 영적 벌전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가는 칼리신을 모시기에 칼리신당이라고 부르지만, 만물 신령을 모신다. 힌두교, 도교, 기독교, 불교의 신령과 비인간 동물, 자연 정령 식물, 균사체, 미생물, 외계생명체, 종이, 책상, 쌀, 비남성 작가들의 영령과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 SF 판타지 소설의 캐릭터를 포함하는 만물 신령님들을 마주하는 대로 모시는 나는 짬뽕 무당이다. 이런 애니미즘적 세계관에서 정상성에서 밀려난 존재가 자신의 신성을 느끼도록 안내하고 연대하는 실천사상이 샤머니즘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내 신당은 밀려난 사령, 생령들의 퓨전 뷔페식당이기도 하고 만물 영령이 다녀가는 게스트하우스이기도하다.
퀴어 페미니즘, 비거니즘, 장애학의 주요 퇴마 의제인 정상성의 망령을 포착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성차별과 종차별의 먼지가 낀 창문으로 하늘을 바라봤다면, 나 역시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칼 자르듯 나누고, 정치적 변화와 영적 각성을 구분하고, 굿판에 소의 사체를 올리고 인간의 수명 연장을 비는 ‘정상적인’ 무당의 역할을 수행했을지 모른다.
다행히 나에겐 촉수가 있다. 조현은 다른 존재들과 연결된 촉수다. 만물과 연결된 이 촉수는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으로 만물을 다스리는 기존 질서는 정상성을 무시하는 광기를 통제해야 한다. 그래서 나보다 약한 존재에게 광기를 배설하라며 종차별과 성차별을 부추긴다. 이 혐오와 학살을 멈추라며 울분을 토하고 발작하는 광인과 활동가들을 통제한다. 일상적인 혐오와 학대는 모르는 체하다가, 정당한 분노와 변화의 에너지가 튀어나오면 감금시킨다. 정신병자, 미친년, 관심병 환자, 반동 불순분자로 낙인찍히기 싫으면 겁 없이 세상을 바꾸려고 나대지 말라고 한다. 또다시 갇히기 싫으면 입 닫으라고. 안 미친 척하라고 한다.
*
이렇게 ‘미신’을 믿는 ‘비이성’적인 무당인 내가 조현 스펙트럼이 있다고 밝히는 건 또 다른 용기가 필요했다. 왜일까. 영원히 독방에 갇힐 것 같아 두려웠다. 정신장애인은 귀신과 동물과 죽어서도 여자로 타자화되는 ‘○○녀’처럼, 예의를 갖추지 않고 존중하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로 다뤄지는 걸 많이 목격했다. 내가 정신장애인이라고 커밍아웃하는 것은 퀴어 페미니스트이고 무당이고 비건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비이성적이고 극단적이라서 누군가의 지도, 통제, 훈육, 조언이 필요한 존재라고 판단되는 걸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나이스한 상호작용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고 지레짐작되고, 걱정과 수정과 성장이 필요한 존재로 판단되고, 요청한 적 없는 조언을 듣고 그것을 거부해도 계속 같은 말을 듣는 것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정상성을 수행하라는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영영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고 독방에 갇힐 거라는 악몽을 들고나오는 일이기도 했다.
조현 스펙트럼이 있는 손님이 신당을 찾은 적이 있다. 손님은 다른 점집에서 빙의가 되었으니 퇴마해야 한다고 했다며, 빙의굿을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손님은 만물의 신성을 감각하고 그 신령들과 표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교감하는 분이었다. 선형적이지 않은 시간을 살고, 다차원적으로 공간을 느껴서 성 정체성뿐 아니라 종 정체성도 유동적이었다. 정상의 언어로 담을 수 없는 이런 감각을 세상과 연결해주는 세계관을 샤머니즘에서는 신관이라 부른다. 손님은 신관이 정리가 안 되어 혼란스러운 거였다. 나는 손님에게 신관을 정리할 수 있는 비거니즘과 퀴어페미니즘, 장애학과 관련된 책, 글쓰기와 일상을 돌보는 루틴(만물에 대한 기도의례)을 안내해드렸다. 손님은 빙의굿을 하지 않고도 자신만의 리듬으로 일상을 돌보고 쓰고 사랑하며 지내고 있다.
빙의자(귀신에 빙의된 사람)는 정신장애인과 비슷한 방식으로 무속신앙에서 퇴마 대상이 된다. 많은 무당이 빙의자를 진단할 때 정상성에 기준을 둔다. 정상의 언어에 지치고 밀려난 이들이 점집을 찾는다. 하지만 점집에서도 ‘정상’의 기준으로 빙의자를 진단하고 ‘정상’으로 돌아오는 퇴마굿, 빙의굿을 하곤 한다. 하지만 퇴마해야 하는 것은 종교보다 오래된 ‘미신’인 가부장의 성별이분법과 인간을 다른 존재보다 우월하다고 인식하는 종차별적 세계관이다. 그 정상성의 망령을 닦아내는 게 천도의 시작이고 끝이다. 정상성에 밀려나 낙인찍힌 존재가 자신의 신성을 발견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정상성의 망령을 내쫓는 과정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옛날부터 동네에서 ‘좀 이상한’ 이들이 스스로의 서사를 창조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주고, 마을공동체와 우주적 연결감을 각성하며 함께 살아가도록 돕는 의식이 신내림 의식이었다. 나에게도 그랬다.
퇴마가 필요한 망령은 존재한다. 정상성의 얼굴을 한 망령귀는 타자를 고쳐야 할 무엇으로 보는 가부장의 표정을 짓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로 성폭력 피해자들의 정당한 울분을 퇴마가 필요한 악령에 씌인 것으로 해석하고 폭력적인 의식을 행했다. 정신분석을 하는 ‘아버지’의 얼굴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히스테리 환자로 규정하고 폭력적인 실험을 이어왔다. 중세시대 ‘마녀’에게 악마의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가부장 망령이 그랬던 것처럼. 한이 쌓이고 쌓인다.
이런 폭력의 구조에서 한을 만들어내는 정상성의 망령을 퇴마하고 정화하는 게 무당의 일 아닌가. 정신질환 분류에 성 정체성 혼란과 동성애가 삭제된 것을 성소수자 운동의 진보라고 느낄 수 있지만, 여전히 정신장애로 분류된 존재는 시설에 감금되고 수치심을 내면화한다. 화병이나 무병(신병)은 정신장애가 아니라고 선 긋는 모습이 슬픈 이유다. “우리는 정신장애가 아니”라고 외치는 인정투쟁을 넘어, 독방과 시설에 갇힌 존재들이 한을 풀고 다 같이 해방되어야 하지 않을까.
*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 기억하든 기억하지 않든 모두가 누군가의 비명에 들린 채 살아간다. 욕망하다 죽고 저항하다 죽은 비남성 영가들, 수치심과 죄책감을 끌어안고 사라져간 환향녀, 성노동자, 창녀, 꽃뱀이라 불리던 영가들, 히스테리 환자나 악령이라고 판단되어 실험당하다 죽은, 미쳐보일까봐 웅크리고 있는 영가들, 죽어서도 구제 불가능한 자살령이라고 낙인찍히는 자살한 영가들, 기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울음소리를 내는 정신장애인과 비인간 동물 영가들, 축산업과 어업으로 학살되는 것에 저항하다 죽은 영령들, 살처분으로 압사당하는 돼지와 소와 오리와 닭 영령들에게 들린다.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하지 않고 있는 나와 세상을 견딜 수가 없는 분노가 밖으로 튀어나올 때 강한 틱이 온다. 입 양쪽 근육이 수축되어 미소 짓는 표정이 된다. 눈이 제멋대로 크게 깜빡거린다. 모두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몸의 의례다. 눈 깜빡임은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정상성에 대한 저항이고, 눈에 깃든 영혼을 지키려는 반사작용이다. 글을 쓰다가 분노가 복받치면 엉덩이 근육이 움찔거린다.
글을 쓸 때는 틱이 줄어든다. 들리는 이야기는 근육을 수축하는 행위 대신 손가락 끝에 실려서 글이 된다. 몸에 실린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며 천도되는 안전한 자리는 여기 이곳. 모든 이야기를 듣고 들리는, 쓰고 실리는 시간이다.
*
내 주변의 많은 비남성 작가들도 정신질환이 있다고 진단받는다. 아침에 일어나 약을 먹고, 자기 전 약을 먹으면서도 기꺼이 추운 귀신에게 들리며 쓴다. 정상성의 망령이 득실거리는 오늘을 점거하고 멍하니 멈추면서. 그들에게 들리는 이야기는 나에게도 실린다. 고래의 주파수처럼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공명하고, 가는 지느러미로 물결을 만든다.
4년 전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당한 후 공황이 생겼다. 집회를 제외하고 대중교통이나 큰 쇼핑몰처럼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면 특정 이야기가 재생된다. 그때 내 눈은 거대한 카메라 렌즈가 되고 주변 사람들은 사복경찰이나 구급대원이 될 준비를 한다.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체포하고 감금시키고 통제한다고 느끼는 망상이다. 그럴 땐 정서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거나, 편안하고 아늑한 장소를 찾아야 한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사람들이 고개 숙여 스마트폰을 보는 환경에 노출되면 무서운 이야기가 재생된다. 스마트폰에는 각자가 수행할 역할극의 대본이 나와 있고 그걸 보는 사람은 그 역할을 전달받아 무의식적으로, 반자동적으로 이를 수행하게 된다. 그 대본으로 N번방에 접속해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의 행동양식도 전달된다. 성별 역할극뿐 아니라 인종 역할극과 외모, 국적, 언어, 사회경제적 계급에 따라 부여받는 정상적 상호작용을 익히는 사람들. 혐오의 정동에 압도되면 호흡이 어려워진다. 이럴 땐 지하철에서 내려 천천히 숨 쉬어야 한다.
‘미친년, 병신, 정신병자’는 최고의 모욕으로 통용된다. 한편 ‘미쳤다!, 미치게 좋아, 미친 맛, 미친 노래, 미친 그림, 미친 글’ 등 미쳤다는 건 멋지고 특별하고 초월적인 것을 표현하는 수식어로 쓰인다. 이렇게 미친 것을 좋아하는 세상이 왜 정신장애인의 말은 듣지도 믿지도 않는 걸까. 광기는 천재적인 예술가의 비극이나 종교인의 변형된 의식 상태로 타자화된다. 동물과 여성과 무당을 신비화하고 멸시하며 영원히 나와 다른 존재로 밀어내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래서 광기는 누구도 내 말을 믿지 않게 될 수도 있는 저주이기도 하고, 미지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축복이 되기도 한다.
이 광기를 수용한 나는 어떤 모습일까. 흐물흐물한 표정을 짓고 몸으로 느껴지는 누군가 혹은 나의 긴장을 푸느라 산만한 몸짓. 목소리에 힘이 없어 기가 허해 보이고, 머뭇거리며 말하다 한참을 침묵하고, 수줍음이 많고, 웃기지 않은 상황에도 미소가 나오는 무당이라니. 카리스마 있는 무당의 이미지와 다르게 흐물흐물한 나는 어설픈 무당처럼 보이지 않을까.
무당이 되기 전 예술 작업을 할 때도 비슷한 고민이 있었다. 왜 내 작업은 늘 이동할까. 창문이 다 열려있어서 바람이 날리면 자꾸 흐트러지는 포스트잇처럼 창작물이 흩어졌다. 다양한 존재에게 들리고 이런저런 정체성으로 휘청이는 몸짓은 제도권 예술에서 일관된 결과물을 내기 어려웠다.
“예술가는 자기 작업에 대해 철면피 같은 뻔뻔함이 있어야 돼요”라며, 한 한국 남성 예술가의 요청한 적 없는 맨스플레인을 들은 적이 있다. 스님과 무당과 도사 선배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확신을 가지고 말을 뱉어. 그게 신령님의 공수야.” 납득이 되지 않았다. 확신을 가지고 여자와 남자 역할을 운운하고, 누군가의 입체적인 삶을 판단하고 정답을 명령하는 게 신령의 뜻인가? 성차별과 종차별을 넘어서는 신령님이 그렇게 호통친다고? 가부장 정상성 권력의 답습이 신의 공수라고? 신령은 인간에게 반말하고 호통치고 잘못하면 벌전을 주고 인생사의 모든 정답을 알려주는 카리스마적 존재라고 누가 오해하기 시작했을까. 전쟁영웅을 신격화한 제국주의와 국가권력과 식민지 남성성이? 성찰 없는 확신은 얼마나 많은 폭력을 만들어왔나.
배타적이고 위계적인 신관을 내면화하고 자신이 정치와 동떨어진 존재라고 믿는 상태를 나는 ‘신뽕’이라 부른다. ‘신뽕’은 예술이 정치와는 무관한 성지의 영역이므로 미투운동 당한 남성 예술가들의 훌륭한 예술작품을 안쓰러워하는 예술주체의 ‘예술뽕’과 닮아있다. 이것을 부수고 싶다. 이 뽕을 생산하는 모든 경계를 부수고 싶다.
퀴어 페미니즘, 비거니즘, 장애학의 주요 퇴마 의제인 정상성의 망령을 포착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성차별과 종차별의 먼지가 낀 창문으로 하늘을 바라봤다면, 나 역시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칼 자르듯 나누고, 정치적 변화와 영적 각성을 구분하고, 굿판에 소의 사체를 올리고 인간의 수명 연장을 비는 ‘정상적인’ 무당의 역할을 수행했을지 모른다.
다행히 나에겐 촉수가 있다. 조현은 다른 존재들과 연결된 촉수다. 만물과 연결된 이 촉수는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으로 만물을 다스리는 기존 질서는 정상성을 무시하는 광기를 통제해야 한다. 그래서 나보다 약한 존재에게 광기를 배설하라며 종차별과 성차별을 부추긴다. 이 혐오와 학살을 멈추라며 울분을 토하고 발작하는 광인과 활동가들을 통제한다. 일상적인 혐오와 학대는 모르는 체하다가, 정당한 분노와 변화의 에너지가 튀어나오면 감금시킨다. 정신병자, 미친년, 관심병 환자, 반동 불순분자로 낙인찍히기 싫으면 겁 없이 세상을 바꾸려고 나대지 말라고 한다. 또다시 갇히기 싫으면 입 닫으라고. 안 미친 척하라고 한다.
조현 스펙트럼이 있는 손님이 신당을 찾은 적이 있다. 손님은 다른 점집에서 빙의가 되었으니 퇴마해야 한다고 했다며, 빙의굿을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손님은 만물의 신성을 감각하고 그 신령들과 표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교감하는 분이었다. 선형적이지 않은 시간을 살고, 다차원적으로 공간을 느껴서 성 정체성뿐 아니라 종 정체성도 유동적이었다. 정상의 언어로 담을 수 없는 이런 감각을 세상과 연결해주는 세계관을 샤머니즘에서는 신관이라 부른다. 손님은 신관이 정리가 안 되어 혼란스러운 거였다. 나는 손님에게 신관을 정리할 수 있는 비거니즘과 퀴어페미니즘, 장애학과 관련된 책, 글쓰기와 일상을 돌보는 루틴(만물에 대한 기도의례)을 안내해드렸다. 손님은 빙의굿을 하지 않고도 자신만의 리듬으로 일상을 돌보고 쓰고 사랑하며 지내고 있다.
빙의자(귀신에 빙의된 사람)는 정신장애인과 비슷한 방식으로 무속신앙에서 퇴마 대상이 된다. 많은 무당이 빙의자를 진단할 때 정상성에 기준을 둔다. 정상의 언어에 지치고 밀려난 이들이 점집을 찾는다. 하지만 점집에서도 ‘정상’의 기준으로 빙의자를 진단하고 ‘정상’으로 돌아오는 퇴마굿, 빙의굿을 하곤 한다. 하지만 퇴마해야 하는 것은 종교보다 오래된 ‘미신’인 가부장의 성별이분법과 인간을 다른 존재보다 우월하다고 인식하는 종차별적 세계관이다. 그 정상성의 망령을 닦아내는 게 천도의 시작이고 끝이다. 정상성에 밀려나 낙인찍힌 존재가 자신의 신성을 발견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정상성의 망령을 내쫓는 과정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옛날부터 동네에서 ‘좀 이상한’ 이들이 스스로의 서사를 창조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주고, 마을공동체와 우주적 연결감을 각성하며 함께 살아가도록 돕는 의식이 신내림 의식이었다. 나에게도 그랬다.
퇴마가 필요한 망령은 존재한다. 정상성의 얼굴을 한 망령귀는 타자를 고쳐야 할 무엇으로 보는 가부장의 표정을 짓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로 성폭력 피해자들의 정당한 울분을 퇴마가 필요한 악령에 씌인 것으로 해석하고 폭력적인 의식을 행했다. 정신분석을 하는 ‘아버지’의 얼굴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히스테리 환자로 규정하고 폭력적인 실험을 이어왔다. 중세시대 ‘마녀’에게 악마의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가부장 망령이 그랬던 것처럼. 한이 쌓이고 쌓인다.
이런 폭력의 구조에서 한을 만들어내는 정상성의 망령을 퇴마하고 정화하는 게 무당의 일 아닌가. 정신질환 분류에 성 정체성 혼란과 동성애가 삭제된 것을 성소수자 운동의 진보라고 느낄 수 있지만, 여전히 정신장애로 분류된 존재는 시설에 감금되고 수치심을 내면화한다. 화병이나 무병(신병)은 정신장애가 아니라고 선 긋는 모습이 슬픈 이유다. “우리는 정신장애가 아니”라고 외치는 인정투쟁을 넘어, 독방과 시설에 갇힌 존재들이 한을 풀고 다 같이 해방되어야 하지 않을까.
글을 쓸 때는 틱이 줄어든다. 들리는 이야기는 근육을 수축하는 행위 대신 손가락 끝에 실려서 글이 된다. 몸에 실린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며 천도되는 안전한 자리는 여기 이곳. 모든 이야기를 듣고 들리는, 쓰고 실리는 시간이다.
홍칼리
글쓰는 무당. 억울함에 잘 들려서 들리는 이야기를 글로 옮긴다. 수치심을 씻기는 씻김굿하는 마음으로 책 『붉은 선』을 썼다. 억울한 귀신을 귀신으로 타자화하는 퇴마가 아닌, 정상성의 망령을 정화하는 마음으로 『신령님이 보고 계셔』를 썼다. 사회적 변화와 영적 각성을 분리하는 경계가 허물어지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책『무당을 만나러 갑니다』를 썼다. 정상성에 기반을 둔 길흉화복의 점사와 운세를 넘어서려고 노력중이다.
사람들에게 공유하는 글을 쓰기까지 오래된 컴퓨터처럼 부팅 시간이 길다. 빈 종이에 이야기를 가로막는 말들을 뱉어낸다. 명령과 조언과 판단과 평가들. 그런 것을 빨리 치우려면 주술과 선언이 효과적이다. ‘오늘도 내 몸을 통과하는 기도 소리를 수용합니다. 신령은 종차별과 성차별을 불태웁니다. 퀴어 페미니스트 비건 지향 무당. 만물일체유정영성…… 정직하게 슬픔을 느끼는 이들의 광기는 이곳에 모여 신명이 되고.’ 그러면 그들은 내게 들린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2024/12/04
7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