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헬퍼
럭키슈퍼가 문을 닫았다. 어느 날 전 품목 할인이라는 종이가 차양에 붙어 있었다. 종이 하나에 한 글자씩 ‘전’ ‘품’ ‘목’ ‘할’ ‘인’. 철제로 된 매대가 앙상하게 비어가더니 갑자기 철거가 시작되었다. 럭키슈퍼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주인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교대로 계산대를 지켰는데 그분들은, 내 기억으로는, 옛날 옛적부터 노인이었다. 계산대는 그들이 늙어간 하나의 작은 우주이자 성곽이었다. 신문, 십자말풀이, 뜨개질, 그 밖에 여러 가지 소일거리들. 구석에 놓인 작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은 항상 틀어져 있었다. 할머니는 낮은 의자에 가장 안전하게 앉아 있다가 계산할 때 비닐장갑을 꼈다. 세균으로부터 자신의 손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어찌나 오래 썼는지 비닐장갑은 닳아서 거의 반투명했다. 그 장갑을 낄 때만 할머니는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뗐다. 나는 할머니와 눈을 맞춰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일하는 시간에만 럭키슈퍼에 갔다.
럭키슈퍼 내부는 좁고 어둡고 혼란스러웠다. 물건들은 젠가처럼 쌓여 있었고, 떨어질까봐 조심조심 걸어야 했다. 떨어진 물건을 다시 어디 둬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철거가 끝나자 그 비좁던 가게가 엄청나게 넓어 보였다. 한 젊은 남자가 그 공간을 기운차게 쓸고 닦았다. 인부들이 며칠 공사를 하는가 싶더니 가게는 어느새 환하게 탈바꿈했다. 작은 테라스와 난간도 설치되었다. 나무 데크로 된 테라스에 파라솔을 단 플라스틱 테이블을 두었고 한쪽에는 화분들이 놓였다. 화분 리본에 부자 되라는 둥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둥 여러 축원의 말들이 적혀 있었다. 테라스를 빙 둘러싼 난간은 새로 단 간판과 마찬가지로 보라색이었다. 그렇게 럭키슈퍼는 CU가 되었다.
장수막걸리 두 병을 카운터에 올려놓자 젊은 사장이 내 얼굴을 봤다. 그제야 럭키슈퍼 할머니가 얼마나 무심했었는지 실감되었다. 내가 그분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도. 할머니는 왜 가게를 접었을까? 지금은 뭐 하며 지내실까? 그 퉁명스러운 할머니는 물건이 얼마인지 알려주지 않았고 어서 오라거나 잘 가라고 인사하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의 목소리도 몰랐다. 반면 이 의욕적인 사장은 손님에게 관심이 많아 보였다. 계산대 앞에 선 나는 상품을 구경하는 척 짐짓 시선을 피했다.
“신분증 보여주세요.” 사장이 말했다. 그러고는 잠재 고객을 잃고 싶지 않은지 웃으며 싹싹하게 덧붙였다. “어려 보이시네요.”
“놓고 왔어요.”
성인이어도 신분증이 없으면 술을 구입할 수 없다고, 사장이 양해를 구했다. 굽신거리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약간 쩔쩔매는 태도였다. 난처하게 한 것 같아 괜히 죄송스러웠다. 내가 죄송해하자 사장은 더 죄송해했다. 그러자 더욱 죄송해졌다…… 나는 사장님께 다음을 기약했다. 막걸리를 다시 냉장고에 넣고 편의점에서 나왔다.
사장이 없는 시간을 파악하려 몇 번 더 들렀다. 야간이나 새벽에 가면 될 것 같았다. 알바들은, 시간대에 따라 다르지만, 주로 어린 동남아시아 여자들이었다. 서툴긴 해도 한국말은 할 줄 알았다. 그들은 어눌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신분증.”
지나가는 어른에게 부탁해보기로 했다. 말을 걸면 ‘도를 아십니까’로 오해하고 손사래를 치거나, 깍쟁이처럼 아예 무시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걸음을 멈추는 마음씨 좋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혹시 막걸리 좀 사다주실 수 있나요?” 하고 부탁하면 언짢아하고 화를 냈다. 드물게 훈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호가 물었다.
“돈을 조금만 더 줬으면 좋겠어.”
강호를 이해시키려면 럭키슈퍼가 망한 사정부터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그애는 별로 들을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귀찮다는 듯 “아 몰라. 알았어”라고만 했다. 원래는 하루에 오천원이었는데, 만원으로 올려주겠다고 했다. “대신 두 탕 뛰어라.”
나는 강호가 인상해준 돈으로 어른에게 부탁할 것이다. “장수막걸리 두 병만 사다주세요. 잔돈은 가지셔도 돼요.” 공손하게 만원을 내밀 것이다.
십중팔구는 그 돈을 받을 것이다.
어쨌거나 럭키슈퍼가 망하는 바람에 그날 나는 하루에 두 번 일해야 했다. 럭키슈퍼 할머니가 원망스러웠다. 왜 가게를 닫아서.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던데……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라도 나 때문에 할머니가 제명보다 일찍 돌아가실까봐, 황급히 원망하는 마음을 철회했다. 나는 할머니가 건강하게 오래 사시길 바랐다. 할아버지도.
“너 때문에 나까지 뭔 고생이야.” 강호가 말했다.
“미안.”
“오늘 바쁠 테니까 서두르자.”
우리는 롯데리아 앞에 서 있었다. 처음 와보는 동네였지만, 롯데리아는 어디에나 있어서 참 편리한 만남 장소였다. 강호가 자기 핸드폰으로 채팅방을 만들었다. 1초 만에 쪽지가 쏟아졌다. 그들과 대화하던 강호가 잘하라고 당부하며 골목으로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곧 헬퍼가 나타났다. 늘 그렇듯 아저씨와 할아버지 중간쯤의 나이였고 굉장히 약골로 보였다. 오래 투병한 사람처럼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한쪽 옆머리를 길러 다른 쪽으로 보낸 모습이었다. 초록색 피케 셔츠는 깃을 세웠고 양복바지에 찬 벨트 버클이 엄청나게 화려하고 컸다. 그리고 수상쩍게 축 늘어진 배낭을 메고 있었다. “떨이님?” 그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확인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다짐했다.
모텔에 들어서자 헬퍼가 희고 너른 침대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무거워 보여 걱정스러웠는데 그제야 안심되었다. 그가 배낭을 열고 소주를 꺼냈다. 다섯 병이나 되었다. 인원수에 비해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싶었다. 저걸 다 먹으면 그는 죽을지도 몰랐다. 먹태나 육포처럼 주로 아저씨들이 선호하는 안주도 침대에 준비되었다. 그는 찻잔에 술을 콸콸 따르더니 당연스레 내게 건넸다. “한잔해.” 그러고는 뒤늦게 물었다. “반말해도 되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몇 살이냐고 물었다. 나는 열여섯 살이라고 조금 낮춰 불렀다. 헬퍼들은 고딩보다 중딩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딩보다 초딩을. 아무리 요즘 애들이 성숙하다 해도 이제 초등학생이라고 우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는 헬퍼들에게는 너무 나이가 많았고, CU 사장님에게는 너무 어렸다. 애석한 일이었다. 다행히 그는 열여섯으로 만족했는지 함박웃음을 지었다. 다시금 술을 권했다.
“술 못 마셔요.”
그는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약간 혼란스러운 듯했다. 마침내 그는 마음을 다잡은 것 같았다. “그래도 한잔해.” 긴장도 풀 겸, 이라고 변명하듯 덧붙였는데 막상 긴장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인 것 같았다.
“싫어.”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 권했던 잔을 자기 입가로 가져갔다. 새 부리처럼 입술을 뾰족하게 만들어서는 마치 뜨거운 국물을 마시듯이 후루룩 빨아들였다. “집은 왜 나왔니?”
“그냥.”
“남자랑 많이 해봤니?” 그가 뭔가 이상한 손동작을 하면서 비열하게 웃었다. 그제야 앞니 하나가 없는 게 보였다. “그거 좋아해?” 자기가 묻는 말을 듣고 자기가 상기되는 듯했다. “빠는 거 좋아해?”
“아니.”
적적해졌는지 그가 텔레비전을 틀었다. 노인들에게는 텔레비전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는가 보았다. 그는 베개에 기대 누워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한참 딴청을 피웠다. 나를 힐끔거리더니 이리 오라는 듯 침대를 툭툭 두들겼다. 나는 고개를 젓고 둘러댔다. “부끄러워요.” 그러자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그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까봐 무서웠다. 남자는, 아무리 곧 죽기 직전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언제나 나보다 힘이 셌다.
“가시내.” 그가 살짝 토라진 듯 투덜거렸다. “기껏 왔더니만.”
안 돼, 안 돼, 하고 나는 어떤 생각을 물리치려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이미 내 머릿속을 지배한 뒤였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절박하게. 그러나 물으면 실망할 것이기에 꾹 참았다.
‘도와준다며.’
계속 속으면, 속는 사람이 나쁜 거라고 했다.
쾅쾅쾅쾅 문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놀라 얼어붙은 헬퍼를 나는 안심시켰다. “뭐지? 제가 나가볼게요.” 문을 열자 강호가 윙크하더니 나를 밀치고 무지막지하게 쳐들어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을 하며 이 슬프고 늙은 남자를 겁주었다.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나까지 무서울 지경이었다. 강호는 190센티미터가 넘었고 십자인대 수술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도 꿈나무였다. 수술 후에는 미친놈처럼 막장 짓을 하고 다녔는데, 무슨 조직에 들어간 뒤로 조금 얌전해졌다. 형님 형님 하며 몰려다니는 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대한민국의 어떤 남자를 데려와도 이길 것 같은데도 강호는 헬퍼를 신중히 골랐다. 지기 싫어서, 라고 강호는 말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러니까 가출 여중생 ‘떨이’는 채팅으로 남자의 나이와 몸무게를 묻고, 어떤 특이 취향에 의해 늙은 말라깽이를 선택했다. 이 헬퍼는 산꼭대기에서부터 굴러떨어지고 있는 바위 앞의 메추리알이었다……
헬퍼는 이런저런 변명을 했다. 내가 자기를 꼬셨다고 했다. 가출했다고 하니 불쌍해서 도와주려 했을 뿐인데 내가 그를 유혹해서 모텔까지 이끌었다고 했다. 헬퍼는 자기와 채팅한 ‘떨이’가 강호라는 걸 모르는 듯했다.
“예예, 어르신.” 강호가 핸드폰으로 우리를 사진 찍었다. 그러니까, 헬퍼와 나를 말이다. 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 연사 촬영하는 소리가 모텔방을 메웠다. 헬퍼는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나는 좀 멋쩍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브이를 했다. 평소에도 나는 사진 찍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왜 이래!” 정신을 차린, 아니 정신을 놓은 헬퍼가 역정을 냈다. 목소리 톤이 높아 거의 앙탈 부리는 것처럼 들렸다.
“아저씨 와이프랑 자식들한테 보내려고.” 강호가 말했다. 초장에 앗은 헬퍼의 전화기로 연락처 목록을 뒤지면서.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강호는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헬퍼를 협박했었다. 강호가 너무 무서운 나머지 차라리 자수를 택한 헬퍼 이후로 방법을 바꾸었다. 강호는 대체로 멍청하지만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비상했다. 가족을 건드는 편이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한참 목록을 뒤지던 강호가 마침내 어떤 전화번호를 불렀다.
“‘여보 내가 잘할게’ 뒤에 하트. 이거 와이프 이름 맞아? 뭐 이따위로 저장해놨어.”
“아니야.” 헬퍼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와이프 아니야.”
“뭐?”
강호가 노려보자 그제야 헬퍼는 바른대로 말했다. “다른 애야…… 다른 가출한……”
헬퍼는 강호에게 꽤 두둑한 돈을 건넸다. ATM에서 돈이 인출되자마자 강호는 헬퍼의 마음이 바뀔세라 지폐 다발을 거의 뺏다시피 건네받았다. 본질적으로 뺏는 것이 맞긴 했다. 강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지폐를 셌다. 100. 마지막 만원권을 딱밤 때리듯 쳤다. 버릇, 아니면 세리머니였다. 강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헬퍼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 일했더니 배고프다.”
강호는 롯데리아에 들어가 불고기버거 세트와 새우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계산은 현금으로 했다. 거스름돈을 받자 강호가 내게 오천원을 줬다. “나머지는 이따 줄게.”
“응?”
“만원 필요하다며. 두 탕 뛰어야지.” 강호가 미간을 구겼다. “설마 한꺼번에 받고 튈 생각이었냐?”
주문한 햄버거가 나왔다. 강호가 트레이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자리를 잡았다. 나도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강호가 불고기버거를 세 입 만에 끝내는 모습을 지켜봤다. 원체 작기도 했지만 강호 손에 들려 있으니 마카롱 같았다. 강호는 새우버거를 또 세 입 만에 먹어 치웠다. “이 집 새우버거 잘해.” 그러고는 감자튀김을 쏟더니 야구공처럼 뭉쳐서 베어먹었다. 그런 다음 제로콜라를 몇 모금 만에 다 마셨다. 그러니까 강호는 햄버거 두 세트를, 먹어보겠냐는 말 한마디도 없이 자기 혼자 다 처먹었다.
“얘 왜 아직 안 갔어?” 내 옆에 어떤 여자가 앉으며 물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학교 밖에서 윤슬을 마주친 게 오랜만이기 때문이었다. 설마 나는 윤슬을 학교 안에만 사는 NPC 같은 존재라고 여겼던 걸까? 이런 낯선 동네에서 만나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윤슬은 영어학원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단어 퀴즈를 봤는데 한 개 틀렸니 어쨌니 팔자 좋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너네 사귀어?” 윤슬은 그렇게 묻고는 뭐가 웃긴지 발을 굴러대며 저 혼자 깔깔거렸다.
“오늘부터 두 탕 뛰어야 된다고 했잖아.” 강호가 말했다. “뭐 먹을래?”
“입맛 없어.” 그러면서도 윤슬은 고개를 빼 메뉴를 봤다.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
“뺄 데가 어딨다고.” 그렇게 말하고 강호는 키오스크로 가서 주문을 했다. 기다리는 동안 밖에 나가 담배를 두 대 연달아 피웠다. 담배를 끌 때는 지폐 마지막 장을 셀 때처럼 중지로 탁 튕겨서 껐다. 불똥이 엄청 멀리까지 날아갔다. 흡연하면서 강호는 누군가와 계속 통화를 했다. 이따금 안쪽을 주시했는데 윤슬을 보는지 나를 보는지 알 수 없었다. 강호는 음식이 나오자마자 전화를 끊고 가게로 들어왔다. 한 손에 트레이를 들고 휘파람을 불며 자리로 왔다.
“아, 나 생선 안 먹는다고.” 윤슬이 새우버거를 보더니 짜증을 냈다. “왜 물어보지도 않고 시켜.”
“생선 아니고 새우잖아.”
“새우가 생선이지. 또라이냐?”
둘은 한동안 새우가 생선인지 아닌지를 두고 옥신각신했다. 그 다툼은 인신공격으로까지 이어졌다. 햄버거가 식을까봐, 그러면 비려질까봐 걱정되었다. 강호를 제압하는 것으로 싸움이 일단락되자 윤슬은 흡족한 표정으로 햄버거 포장지를 벗겼다. 햄버거 탑을 분해한 다음 플라스틱 포크로 채소를 찍어 먹었다. 그리고 패티를 나이프로 썰어 먹었다. 그리고 빵도 조각냈는데 그건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거의 난도질을 해놓았다. 감자튀김은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저탄고지인지 혈당 다이어트인지의 일환인 듯했다. 나는 염치 불고하고 윤슬이 남긴 빵 쪼가리와 감자를 뺏어 먹었다. 이건 원래 손으로 먹는 음식인데, 식기를 사용한 사람 앞이라 그런지 미개인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잔반을 처리하는 것에 윤슬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저 팔짱 끼고 지켜보기만 했다.
“왜 두 탕 뛰는데?” 내가 다 먹자 기다렸다는 듯 윤슬이 물었다. 물론 이 질문은 강호를 향한 것이었다. 중학교 때 이후로 윤슬은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에서도 서로 아는 척하지 않았다. 윤슬은 내게 몇 년째 토라져 있었다. 혹은 화나 있었다. 혹은 복수 중이었다.
고백하건대 중학교 때 나는 윤슬을 조금 따돌렸다. 괴롭히지는 않았다. 때린 적도 없었다. 다만 내 절친이 윤슬을 모질게 대했을 때, 나는 묵인했다. 윤슬은 상처받았고 그건 합당한 감정이었다. 나는 그때의 일을 후회했다. 우리는 같은 고등학교가 되었고 언제부턴가 윤슬은 좀 달라지는 것 같았다. 강호와 만난 후부터일 거라고, 나는 짐작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무슨 심경의 변화를 겪은 것만은 분명하다. 어느 날 윤슬은 내게 학교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그게 윤슬이 나를 용서한다는 뜻인 줄 알았기에, 기쁘고 고마웠다. 윤슬은 강호에게 나를 소개시켰다. 친구라고. 그렇지만 나에게 강호를 소개하지는 않았다. 그가 누군지. 친구인지, 애인인지, 그냥 아는 사람인지. 그렇게 윤슬은 강호에게 나를 팔아넘겼다. 강호가 십자인대 수술을 받고 재활하던, 윤슬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의 ‘미친놈’ 시절에.
강호는 헬퍼를 갈취하는 데 나를 사용했다. 처음에, 내가 무슨 일을 한 것인지 깨닫고 난 직후에, 나는 강호에게 완강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강호의 핸드폰에는 모텔방 침대에서 헬퍼와 함께 찍힌 내 사진이 있었다. 강호는 학교에 뿌릴 거라고 협박했다. 그게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헬퍼에게 당할 때까지 나를 놔둘 수도 있었지만 자기가 쳐들어가 구해준 덕으로 내가 순결을 잃지 않았으니 고마워해야 한다고 강호는 말했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인지 내게 돈을, 오천원을 줬고, 그건 호된 채찍질 뒤에 주는 한 조각의 당근이었다. 돈이 궁했던 나에게는 그 오천원이 소중했다. 나는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나는……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였다. 이제 나는 더이상 억울하지 않았다. 나는 과거에 잘못을 했고, 윤슬이 부디 화를 풀길 바랄 뿐이었다. 윤슬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날 강호는 비로소 나를 놓아줄 터였다. 그애의 핸드폰 갤러리에 저장되어 있는 수천 장의 사진과 함께.
“지갑 사달라며.” 강호가 말했다. “미우미운가 뭔가.”
윤슬이 정색을 했다. “아직도 못 샀다고? 그 얘길 한 게 언젠데.”
둘의 대화로 유추해보건대, 윤슬은 ‘미우미우’라는 브랜드에서 나온 딸기우유색 반지갑을 사야 했다. 친구들이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지갑은 한두 푼이 아니었다. 내가 매일같이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몰래 윤슬이 말한 물건을 검색해보았다. 정말 다들 이걸 가지고 있나?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지갑은 어마어마하게 비쌌지만 아까 헬퍼에게서 뜯어낸 돈보다는 훨씬 쌌다. 잘하면 세 개도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그래서 얼마 벌었는데.” 윤슬이 바가지를 긁는 아내처럼 따졌다. “얼마 더 벌어야 하는데.”
“아 얼마 못 벌었어. 요새 불경기잖아. 다들 어려워……”
“그니까 얼마!”
“십만원밖에 못 벌었어.” 그렇게 거짓말하면서도, 강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눈짓으로 내게 도와달라거나 공모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강호는 내가 잠자코 있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가 맞았다.
불현듯 나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알고 나면 너무 당연해서, 왜 몰랐는지 절대 알 수 없는 사실을. 내가 하루에 두 번이나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내게 만원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강호에게 돈이 더 필요해서였다. 그리고 강호는 내가 돈을 더 달라고 말할 날을 기다렸다.
현장의 사고는 대개 피로에서 비롯된다.
강호는 헬퍼에게 나이와 체중을 묻는 것을 깜빡하는 실수를 했다. 강호와 윤슬이 골목의 어둠 뒤로 자취를 감춘 뒤, 오늘의 두번째 헬퍼가 나타났다. 롯데리아 앞에 서 있던 나는 그가 온 것을 그림자가 지는 것으로 알아챘다. “떨이.” 그의 목소리는 하느님의 음성처럼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려왔다.
강호만큼, 아니 강호보다 더 건장한 이십대 남성이었다. 그는 챙이 긴 볼캡을 푹 눌러쓰고 있었다. 모자챙에 가려져 눈이 보이지 않았다. 엄청나게 굵은 목에 비해 턱은 좁고 뾰족했는데 거기 수염이 푸르스름하게 자라 있었다. 주먹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워커는 흙투성이였다.
아까 갔던 무인 모텔에 재방문하면서 나는 강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엔 주의하라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객실 호수를 타이핑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핸드폰이 내 손 안에서 사라져 있었다.
“누구야?” 내 핸드폰을 들고 헬퍼가 물었다. 나직이 말했는데도 귀에다 소리를 지른 것처럼 커다랗게 들렸다.
“그게……” 머리가 하얘졌다. 혀가 굳어져서 말이 잘 안 나왔다. “강호. 서강호.”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죄송해요.”
그는 내 눈을 응시하며 핸드폰 전원을 종료했다. 그리고 모텔방 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했다.
한참 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강호가 나를 찾아냈다. 헬퍼가 문을 닫지 않고 나간 모양이었다. 아니면 대실 시간이 끝났는지도 몰랐다. 청소부가 문을 열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그저 조용히 나갔던 것 같기도 했다. 강호는 숨을 몰아쉬며 뛰어 들어왔다. 문을 등지고 있었지만, 소리뿐이었지만, 강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침대에 모로 누워 있는 내 어깨를 강호가 뒤에서 붙잡고 흔들어댔다. “야. 괜찮아?”
괜찮았었는데, 강호 때문에 어깨가 아팠다.
“죽었냐?” 떨리는 목소리로 강호가 물었다. 그애는 내 코 밑에 자기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자는 거야? 아무리 피곤해도……” 그리고 듣기 힘들 정도로 심한 욕을 퍼부어댔는데 자기한테 하는 건지 나한테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몇 호인지 답을 안 해. 전화도 안 받고. 배터리 나간 거야?”
“응.”
“걱정했잖아.” 우는 것 같았다. “씨발……”
“미안.”
“너는 이런 때도 미안하다는 소리가 나오냐?” 강호는 내게 미안해했다. 말은 안 해도 그냥 느낄 수 있었다. 이따위로나마, 함께한 시간이 길었으니까. 이 아이는 표현을 그런 식으로밖에 못했다. 어떤 감정을 느껴도 짜증밖에는 못 냈다.
“응.” 나는 몸을 일으켰고, 옷을 좀 추슬렀다. “미안.”
“차 끊겼겠다. 데려다줄게.”
“괜찮아.” 대신에 나는 강호에게 다른 걸 부탁했다. 그가 들어주건 말건 상관없이 언제나, 언제나 하는 부탁이었다. 오늘이라고 달라야 할 이유도 없었다. “윤슬이한테 그때 미안했다고 전해줄래?”
불의의 사고로 두번째 헬퍼에게서는 돈을 뜯어내지 못했지만, 강호는 내게 얼마를 챙겨주려 했다. 그런데 얼마를 줄 것인가, 그게 강호에게는 중요한 문제인 듯했다. 내게 떼줄 몫을 헤아리며 무지하게 번뇌하는 기색이었다. 마침내 강호는 적정 금액을 이끌어냈다. 오늘 번 돈의 거의 반이었다. 계산해보니 하루도 쉬지 않고 세 달을 넘게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물론 나는 받지 않았다. 도저히 받을 수가 없었다. “얼른 미우미우 사줘야지.” 물론 이건 농담이었지, 강호를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경악하게 만들려던 말은 아니었다.
강호는 자기 머리를 벅벅 긁더니 그럼 택시라도 불러주겠다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집까지 좀 걷고 싶었다. 두세 시간만 걸으면 되었다. 강호는 또 짜증을 냈다. “아 어쩌라고!”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나는 강호를 안심시켜야 했다. 진짜로 걷고 싶다고. 너한테 시위하는 거 아니라고.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멍청한 강호는 겨우 내 말을 이해했고, 아니 이해가 안 되면 외우기라도 했고, 손을 흔들어 자기가 탈 택시를 불렀다.
“강호야.” 내 부름에 강호가 택시 문고리를 잡은 채 뒤를 돌았다. 나는 말했다. “나머지 오천원 줘.”
그렇게 나는 오천원권 두 장을 쥐고 귀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땀 흘려 번 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람, 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좋을 것 같았다. 걷다보니 기분이 상쾌해져 콧노래가 나왔다. 파워워킹으로 힘차게 걸었더니 두 시간 이십오 분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다리를 건널 때는 해가 떠올랐다. 한강이 복숭앗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관성을 포기하고 걸음을 잠시 쉬었다. 난간을 붙들고 한강 물을 바라봤다. 예쁘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길에는 어른들이 넘쳐났다. 출근하느라 바빠 보이는 게 문제긴 했지만. 나는 가장 부지런한 사람을 물색했다. 직장으로 향할 사람이 아니라 이곳에 직장이 있어서 온 사람. 이를테면 메가커피 앞에서 테이크아웃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 곧 그녀가 주문한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나왔다. 나는 여성을 따라 걸었다. 다행히 방향이 같았다. 구 럭키슈퍼, 현 CU 앞에서 그녀를 불러 세웠다.
나는 그 어른 여자에게 공손하게 만원을 내밀었다. “장수막걸리 두 병만 사다주세요. 잔돈은 가지셔도 돼요.”
그녀는 1초의 고민도 없이, 신속히 만원을 건네받았다.
정말이지 긴 하루였다. 나는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까 두번째로 방문한 무인 모텔에서 잠깐 기절하듯 눈을 붙이긴 했지만…… 잔 건지 기절한 건지 사실 좀 헷갈리는 부분도 있었다. 막걸리 두 병을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나는 빌라 계단을 올랐다. 봉투도 좀 사주지, 20원밖에 안 하는데. 다음에는 어른에게 봉투까지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하루하루 나아지는 삶. 그건 그렇고 5층에 있는 집까지 계단으로 올라가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다 왔다고 생각했건만 아직도 2층이었다. 나는 피곤했고 다리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무겁게 느껴졌다. 참 오늘 주말 아닌데, 금요일인데, 오늘이 하루 뒤였으면 좋았을 텐데, 학교 가야 하네, 학교 가서 밥 먹어야 하는데, 밥 먹으려면 학교 가야 하는데, 언제 가, 그런 생각을 하다 계단에 앉아 까무룩 졸았다. 아물아물 우리 집 현관문이 보였다. 녹이 슨 문에 광고 전단지가 어지러이 붙어 있었다. 아무도 외출을 안 했거나, 했어도 떼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망할 집구석. 그래도 우리 집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거의 다 왔구나.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학교는 언제 가지. 그리고 단잠에 빠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언제 다 살지.
하늘이 내 소원을 들어줬는지 눈을 떠보니 오늘은 내일이었다. 토요일이었다. 물론 나는 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직 나는 잠들었을 때 자세 그대로 계단에 앉아 있었다. 막걸리 두 병이 저 밑에 굴러떨어져 있었다. 나는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생각해야 했다. 막걸리를 사들고 집에 가다가 잠들었다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했다. 거기서부터 역산해야 했다. 기억이 서서히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어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머리는 푸딩처럼 둔했지만 벌써부터 마음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걸 잊을 만큼 몸이 더 아팠다. 내 몸은 한 자세로 굳은 상태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비명이 나올 것처럼 욱신거렸다. 나는 천천히, 아주 조금씩 몸을 움직여 깨웠다.
“엄마.” 현관문을 열자마자 나는 어린애처럼 외쳤다. “엄마.”
나는 현관에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때 오늘이 토요일인 걸 알았다. 놀라 기절할 뻔했는데, 힘이 없어서인지 기절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목요일에 집에서 나와서 토요일에 귀가한 것이었다.
“엄마.” 나는 거의 기어갔다.
거실 소파에 누워 있던 엄마가 느릿느릿 눈을 떴다. 엄마는 졸려 보였다. 지금 일어나서 그런 게 아니라 기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었다. 엄마는 더 야위어 있었다. 잘 건조된 미라 같았다. 강호가 심혈을 기울여 고르는 헬퍼들도 엄마에 비하면 돼지였다. 엄마는 내가 없는 사흘 동안 아무것도 안 먹은 게 분명했다.
“스.” 어찌나 굶었는지 엄마는 ‘술’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미안. 너무 늦었지.” 계단참에서 멎어 있는 막걸리병을 생각하자 아득해졌다. 그것들은 내가 들기엔 너무 무겁고 버거웠다. “밑에 있어. 가져올게. 조금만 쉬고.”
“스.”
“미안. 좀만 쉬고 갖다줄게.” 나는 소파에 엎드려 다시 잠들었다. 엄마가 앙상한 손으로 내 머리를 만졌는데, 쓰다듬는 건지 깨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깨우는 것이기를 바랐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다 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핸드폰을 봤다. 다행히 시간이 많이 경과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에너지를 짜내는 듯했다. 나를 보고, 눈알을 굴려서,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봤다. 한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 콧등을 타고 다른 쪽 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도 엄마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엄마의 시선이 닿은 곳을 보았다. 원래는 엄마와 아빠가 쓰던 방이었다.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고 누우면 바로 보였다. 아빠가 건설 현장에서 실족사한 뒤로 엄마는 방 안에 아빠 물건을 다 몰아넣고, 어쩌면 마음까지 다 거기 집어넣고, 문을 폐쇄했다. 문을 닫아야 저 안에 아빠가 있다고 믿을 수 있는지도 몰랐다.
아빠를 잃은 슬픔에 엄마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밥이랑 먹었는데 나중에는 술만 마셨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 어렸다. 나는 슬펐지만, 엄마를 말려야 했다. 엄마를 구하기 위해 내 슬픔을 뒤로 미뤘다. 제발 그만 마시라고 나는 엄마에게 화를 냈다. 구슬리기도 하고, 빌기도 하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러나 엄마의 고집이 더 셌다. 황소고집, 언젠가 아빠는 엄마와 자신의 장인어른을 그렇게 놀리곤 했었다. 내가 술을 금지하자 엄마는 음식까지 끊었다. 결국엔 내가 졌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지만, 엄마는 달랐다.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는…… 우울증 환자, 알코올중독자, 자식보다 자기 슬픔을 더 사랑하는, 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년이었다. 딸의 중학교 친구가, 윤슬이, 어디서 듣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들에게 내 아빠를, 내 아빠의 시신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엄마는 영원히 알지 못할 터였다. 왜냐하면 엄마는 내 소원대로 술을 끊고, 자신의 소원대로 밥까지 끊고, 미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에게 소주 대신에 막걸리를 사다줬다. 그게 더 영양분이 많을 것 같아서였다. 럭키슈퍼에서 막걸리 두 병을 사곤 했다. 슈퍼 할머니는 아무 소리도 안 했다. 계산할 때, 비닐장갑을 낄 때만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뗄 뿐이었다. 나는 엄마를 위해 술을 샀지만, 그건 나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술 살 돈을 마련하려고 헬퍼를 만나 하루에 오천원씩 버는 일은. 그건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었다. 나는 시간을 삭제하고 싶었다. 럭키슈퍼 할아버지의 신문과 십자말풀이처럼, 할머니의 뜨개질과 텔레비전처럼, 헬퍼와의 만남은 언제 다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 내 인생의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마침내 나는 스스로를 속이는 데 성공했다. 이제부터 엄마는 내 아기고, 막걸리는 내 아기가 먹는 우유라고.
어쩌면, 다만 이런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나는 엄마가 죽음에 이를 만큼 술을 마시기를 바랐다. 어쩌면.
“스.”
“미안. 좀만 참아.” 나는 현관문을 열고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막걸리로의 여정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당은 계단이었다. 항상 느끼는바, 계단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더 힘들었다.
그렇게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가는데, 어떤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롯데리아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강호. 통화하는 내내 안쪽을 힐긋대던 강호. 강호가 이쪽을 보았고 그는 내게 무언가 눈짓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윤슬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내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때 왜 자기를 따돌린 거냐고 묻지 않았다. 다시금 우리를 바라보는 강호. 강호의 눈짓에 살짝, 내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아예 안 들키는 것도 두려워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윤슬. 빗을 꺼내려고 가방 앞주머니 지퍼를 여는 윤슬. 언뜻 보이던 딸기우유 색깔. 미우미우 반지갑.
그리고 나는 계단참에 다다라서야 깨닫는다. 이 빌라에 사는 어느 가난한 이웃이 엄마의 밥 두 병을 훔쳐 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서울 모처의 롯데리아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내가 고른 롯데리아는 엊그제의 ‘그 롯데리아’였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옳았다. ‘그 무인 모텔’에서 가장 가까운 롯데리아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장소는 당연히 그 모텔방이 될 터였다. 준비물은 념녀미가 챙겨오기로 했다. 우리는 오후 11시로 약속 시간을 정했다. 오늘이 가기 전에, 한 시간 안에. 돌아갈 차편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자유.
오늘이 디데이인 것에 념녀미는 동의했다. 정리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당일에 통보한 게 미안했지만, 하루만 지나도 용기를 잃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자정이 지난 신데렐라처럼 남루해질 수는 없었다. 더는 념녀미를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념녀미는 그동안, 내가 생에 미련을 버릴 때까지, 인내를 갖고 나를 기다려주었다. 내가 확신을 가질 때까지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얼른 끝내버리고 싶을 때가 많았을 텐데 그 아이는 나를 위해 희생했다.
념녀미는 자기 닉네임대로, 말 그대로 나를 ‘염려’했다. 그리고 나는 내 닉네임이, 비록 닉네임일 뿐일지라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 배불리 실컷 먹는 게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오픈채팅방에서 랜덤으로 붙여진 비슷한 이름에 처음에는 서로 신기해하고 재밌어했을 뿐이지만, 이제 념녀미는 내 삶에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자살팸 회원들이 둘씩, 혹은 셋씩 짝을 지어 세상을 떠날 때도 그애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애의 어른스러움을 존경했다. 그애에게 의지했다. 나는 우리가 ‘짝’이 되리라 예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개인 톡을 팠다. 우리는 ‘둘’일 터였다.
엄마에게 매일 희망하고, 매일 절망하고, 그러면서도 매일매일 오늘만, 속는 셈 치고 오늘까지만 술을 사다줄 때도, 그애는 언제나 내게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 ‘계속 속으면, 속는 사람이 나쁜 사람.’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에 채팅이 왔다. 나는 겁먹지 않으려 애썼다. 진짜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생각나는 음식이 많았다. 너무 많았다. 내게는 아직 못 먹어본 음식이, 먹어야 할 음식이 아주 많았다. 마음이 자꾸 약해지려 했다. 삶에 한 번만 더 속아볼까. 다시 속으면, 그럼 내가 나쁜 사람일까.
최대한 빨리 걸었는데도 세 시간 십 분이나 걸렸다. 다리를 건널 때 나는 한강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전구 불빛이 반짝반짝 아름다울 텐데도. 더 좋은 일이 나를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롯데리아 앞에서,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 아이를 기다렸다. 고대했다. 어떻게 생겼을까, 나보다 예쁠까, 고작 그런 걸 궁금해하면서. 이제는 고작 그런 거나 궁금해해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갔다. 핸드폰 화면 안의 시계가 22:59를 가리켰다. “떨이가 너였냐.” 흙투성이 워커가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눈에 익은 신발이었는데 어디에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냠냐미.”
그 헬퍼는 말했다.
럭키슈퍼 내부는 좁고 어둡고 혼란스러웠다. 물건들은 젠가처럼 쌓여 있었고, 떨어질까봐 조심조심 걸어야 했다. 떨어진 물건을 다시 어디 둬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철거가 끝나자 그 비좁던 가게가 엄청나게 넓어 보였다. 한 젊은 남자가 그 공간을 기운차게 쓸고 닦았다. 인부들이 며칠 공사를 하는가 싶더니 가게는 어느새 환하게 탈바꿈했다. 작은 테라스와 난간도 설치되었다. 나무 데크로 된 테라스에 파라솔을 단 플라스틱 테이블을 두었고 한쪽에는 화분들이 놓였다. 화분 리본에 부자 되라는 둥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둥 여러 축원의 말들이 적혀 있었다. 테라스를 빙 둘러싼 난간은 새로 단 간판과 마찬가지로 보라색이었다. 그렇게 럭키슈퍼는 CU가 되었다.
냠냠하는 냠냐미: 슈퍼 편의점으로 바뀜
념녀하는 념녀미: 오. 잘됐다.
념녀하는 념녀미: 오. 잘됐다.
장수막걸리 두 병을 카운터에 올려놓자 젊은 사장이 내 얼굴을 봤다. 그제야 럭키슈퍼 할머니가 얼마나 무심했었는지 실감되었다. 내가 그분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도. 할머니는 왜 가게를 접었을까? 지금은 뭐 하며 지내실까? 그 퉁명스러운 할머니는 물건이 얼마인지 알려주지 않았고 어서 오라거나 잘 가라고 인사하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의 목소리도 몰랐다. 반면 이 의욕적인 사장은 손님에게 관심이 많아 보였다. 계산대 앞에 선 나는 상품을 구경하는 척 짐짓 시선을 피했다.
“신분증 보여주세요.” 사장이 말했다. 그러고는 잠재 고객을 잃고 싶지 않은지 웃으며 싹싹하게 덧붙였다. “어려 보이시네요.”
“놓고 왔어요.”
성인이어도 신분증이 없으면 술을 구입할 수 없다고, 사장이 양해를 구했다. 굽신거리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약간 쩔쩔매는 태도였다. 난처하게 한 것 같아 괜히 죄송스러웠다. 내가 죄송해하자 사장은 더 죄송해했다. 그러자 더욱 죄송해졌다…… 나는 사장님께 다음을 기약했다. 막걸리를 다시 냉장고에 넣고 편의점에서 나왔다.
사장이 없는 시간을 파악하려 몇 번 더 들렀다. 야간이나 새벽에 가면 될 것 같았다. 알바들은, 시간대에 따라 다르지만, 주로 어린 동남아시아 여자들이었다. 서툴긴 해도 한국말은 할 줄 알았다. 그들은 어눌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신분증.”
냠냠하는 냠냐미: 망함
지나가는 어른에게 부탁해보기로 했다. 말을 걸면 ‘도를 아십니까’로 오해하고 손사래를 치거나, 깍쟁이처럼 아예 무시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걸음을 멈추는 마음씨 좋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혹시 막걸리 좀 사다주실 수 있나요?” 하고 부탁하면 언짢아하고 화를 냈다. 드물게 훈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호가 물었다.
“돈을 조금만 더 줬으면 좋겠어.”
강호를 이해시키려면 럭키슈퍼가 망한 사정부터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그애는 별로 들을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귀찮다는 듯 “아 몰라. 알았어”라고만 했다. 원래는 하루에 오천원이었는데, 만원으로 올려주겠다고 했다. “대신 두 탕 뛰어라.”
나는 강호가 인상해준 돈으로 어른에게 부탁할 것이다. “장수막걸리 두 병만 사다주세요. 잔돈은 가지셔도 돼요.” 공손하게 만원을 내밀 것이다.
십중팔구는 그 돈을 받을 것이다.
어쨌거나 럭키슈퍼가 망하는 바람에 그날 나는 하루에 두 번 일해야 했다. 럭키슈퍼 할머니가 원망스러웠다. 왜 가게를 닫아서.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던데……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라도 나 때문에 할머니가 제명보다 일찍 돌아가실까봐, 황급히 원망하는 마음을 철회했다. 나는 할머니가 건강하게 오래 사시길 바랐다. 할아버지도.
“너 때문에 나까지 뭔 고생이야.” 강호가 말했다.
“미안.”
“오늘 바쁠 테니까 서두르자.”
우리는 롯데리아 앞에 서 있었다. 처음 와보는 동네였지만, 롯데리아는 어디에나 있어서 참 편리한 만남 장소였다. 강호가 자기 핸드폰으로 채팅방을 만들었다. 1초 만에 쪽지가 쏟아졌다. 그들과 대화하던 강호가 잘하라고 당부하며 골목으로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곧 헬퍼가 나타났다. 늘 그렇듯 아저씨와 할아버지 중간쯤의 나이였고 굉장히 약골로 보였다. 오래 투병한 사람처럼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한쪽 옆머리를 길러 다른 쪽으로 보낸 모습이었다. 초록색 피케 셔츠는 깃을 세웠고 양복바지에 찬 벨트 버클이 엄청나게 화려하고 컸다. 그리고 수상쩍게 축 늘어진 배낭을 메고 있었다. “떨이님?” 그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확인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다짐했다.
모텔에 들어서자 헬퍼가 희고 너른 침대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무거워 보여 걱정스러웠는데 그제야 안심되었다. 그가 배낭을 열고 소주를 꺼냈다. 다섯 병이나 되었다. 인원수에 비해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싶었다. 저걸 다 먹으면 그는 죽을지도 몰랐다. 먹태나 육포처럼 주로 아저씨들이 선호하는 안주도 침대에 준비되었다. 그는 찻잔에 술을 콸콸 따르더니 당연스레 내게 건넸다. “한잔해.” 그러고는 뒤늦게 물었다. “반말해도 되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몇 살이냐고 물었다. 나는 열여섯 살이라고 조금 낮춰 불렀다. 헬퍼들은 고딩보다 중딩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딩보다 초딩을. 아무리 요즘 애들이 성숙하다 해도 이제 초등학생이라고 우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는 헬퍼들에게는 너무 나이가 많았고, CU 사장님에게는 너무 어렸다. 애석한 일이었다. 다행히 그는 열여섯으로 만족했는지 함박웃음을 지었다. 다시금 술을 권했다.
“술 못 마셔요.”
그는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약간 혼란스러운 듯했다. 마침내 그는 마음을 다잡은 것 같았다. “그래도 한잔해.” 긴장도 풀 겸, 이라고 변명하듯 덧붙였는데 막상 긴장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인 것 같았다.
“싫어.”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 권했던 잔을 자기 입가로 가져갔다. 새 부리처럼 입술을 뾰족하게 만들어서는 마치 뜨거운 국물을 마시듯이 후루룩 빨아들였다. “집은 왜 나왔니?”
“그냥.”
“남자랑 많이 해봤니?” 그가 뭔가 이상한 손동작을 하면서 비열하게 웃었다. 그제야 앞니 하나가 없는 게 보였다. “그거 좋아해?” 자기가 묻는 말을 듣고 자기가 상기되는 듯했다. “빠는 거 좋아해?”
“아니.”
적적해졌는지 그가 텔레비전을 틀었다. 노인들에게는 텔레비전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는가 보았다. 그는 베개에 기대 누워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한참 딴청을 피웠다. 나를 힐끔거리더니 이리 오라는 듯 침대를 툭툭 두들겼다. 나는 고개를 젓고 둘러댔다. “부끄러워요.” 그러자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그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까봐 무서웠다. 남자는, 아무리 곧 죽기 직전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언제나 나보다 힘이 셌다.
“가시내.” 그가 살짝 토라진 듯 투덜거렸다. “기껏 왔더니만.”
안 돼, 안 돼, 하고 나는 어떤 생각을 물리치려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이미 내 머릿속을 지배한 뒤였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절박하게. 그러나 물으면 실망할 것이기에 꾹 참았다.
‘도와준다며.’
계속 속으면, 속는 사람이 나쁜 거라고 했다.
념녀하는 념녀미: 뭐 해? 괜찮아?
쾅쾅쾅쾅 문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놀라 얼어붙은 헬퍼를 나는 안심시켰다. “뭐지? 제가 나가볼게요.” 문을 열자 강호가 윙크하더니 나를 밀치고 무지막지하게 쳐들어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을 하며 이 슬프고 늙은 남자를 겁주었다.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나까지 무서울 지경이었다. 강호는 190센티미터가 넘었고 십자인대 수술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도 꿈나무였다. 수술 후에는 미친놈처럼 막장 짓을 하고 다녔는데, 무슨 조직에 들어간 뒤로 조금 얌전해졌다. 형님 형님 하며 몰려다니는 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대한민국의 어떤 남자를 데려와도 이길 것 같은데도 강호는 헬퍼를 신중히 골랐다. 지기 싫어서, 라고 강호는 말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러니까 가출 여중생 ‘떨이’는 채팅으로 남자의 나이와 몸무게를 묻고, 어떤 특이 취향에 의해 늙은 말라깽이를 선택했다. 이 헬퍼는 산꼭대기에서부터 굴러떨어지고 있는 바위 앞의 메추리알이었다……
헬퍼는 이런저런 변명을 했다. 내가 자기를 꼬셨다고 했다. 가출했다고 하니 불쌍해서 도와주려 했을 뿐인데 내가 그를 유혹해서 모텔까지 이끌었다고 했다. 헬퍼는 자기와 채팅한 ‘떨이’가 강호라는 걸 모르는 듯했다.
“예예, 어르신.” 강호가 핸드폰으로 우리를 사진 찍었다. 그러니까, 헬퍼와 나를 말이다. 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 연사 촬영하는 소리가 모텔방을 메웠다. 헬퍼는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나는 좀 멋쩍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브이를 했다. 평소에도 나는 사진 찍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왜 이래!” 정신을 차린, 아니 정신을 놓은 헬퍼가 역정을 냈다. 목소리 톤이 높아 거의 앙탈 부리는 것처럼 들렸다.
“아저씨 와이프랑 자식들한테 보내려고.” 강호가 말했다. 초장에 앗은 헬퍼의 전화기로 연락처 목록을 뒤지면서.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강호는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헬퍼를 협박했었다. 강호가 너무 무서운 나머지 차라리 자수를 택한 헬퍼 이후로 방법을 바꾸었다. 강호는 대체로 멍청하지만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비상했다. 가족을 건드는 편이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한참 목록을 뒤지던 강호가 마침내 어떤 전화번호를 불렀다.
“‘여보 내가 잘할게’ 뒤에 하트. 이거 와이프 이름 맞아? 뭐 이따위로 저장해놨어.”
“아니야.” 헬퍼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와이프 아니야.”
“뭐?”
강호가 노려보자 그제야 헬퍼는 바른대로 말했다. “다른 애야…… 다른 가출한……”
헬퍼는 강호에게 꽤 두둑한 돈을 건넸다. ATM에서 돈이 인출되자마자 강호는 헬퍼의 마음이 바뀔세라 지폐 다발을 거의 뺏다시피 건네받았다. 본질적으로 뺏는 것이 맞긴 했다. 강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지폐를 셌다. 100. 마지막 만원권을 딱밤 때리듯 쳤다. 버릇, 아니면 세리머니였다. 강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헬퍼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 일했더니 배고프다.”
강호는 롯데리아에 들어가 불고기버거 세트와 새우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계산은 현금으로 했다. 거스름돈을 받자 강호가 내게 오천원을 줬다. “나머지는 이따 줄게.”
“응?”
“만원 필요하다며. 두 탕 뛰어야지.” 강호가 미간을 구겼다. “설마 한꺼번에 받고 튈 생각이었냐?”
주문한 햄버거가 나왔다. 강호가 트레이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자리를 잡았다. 나도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강호가 불고기버거를 세 입 만에 끝내는 모습을 지켜봤다. 원체 작기도 했지만 강호 손에 들려 있으니 마카롱 같았다. 강호는 새우버거를 또 세 입 만에 먹어 치웠다. “이 집 새우버거 잘해.” 그러고는 감자튀김을 쏟더니 야구공처럼 뭉쳐서 베어먹었다. 그런 다음 제로콜라를 몇 모금 만에 다 마셨다. 그러니까 강호는 햄버거 두 세트를, 먹어보겠냐는 말 한마디도 없이 자기 혼자 다 처먹었다.
“얘 왜 아직 안 갔어?” 내 옆에 어떤 여자가 앉으며 물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학교 밖에서 윤슬을 마주친 게 오랜만이기 때문이었다. 설마 나는 윤슬을 학교 안에만 사는 NPC 같은 존재라고 여겼던 걸까? 이런 낯선 동네에서 만나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윤슬은 영어학원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단어 퀴즈를 봤는데 한 개 틀렸니 어쨌니 팔자 좋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너네 사귀어?” 윤슬은 그렇게 묻고는 뭐가 웃긴지 발을 굴러대며 저 혼자 깔깔거렸다.
“오늘부터 두 탕 뛰어야 된다고 했잖아.” 강호가 말했다. “뭐 먹을래?”
“입맛 없어.” 그러면서도 윤슬은 고개를 빼 메뉴를 봤다.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
“뺄 데가 어딨다고.” 그렇게 말하고 강호는 키오스크로 가서 주문을 했다. 기다리는 동안 밖에 나가 담배를 두 대 연달아 피웠다. 담배를 끌 때는 지폐 마지막 장을 셀 때처럼 중지로 탁 튕겨서 껐다. 불똥이 엄청 멀리까지 날아갔다. 흡연하면서 강호는 누군가와 계속 통화를 했다. 이따금 안쪽을 주시했는데 윤슬을 보는지 나를 보는지 알 수 없었다. 강호는 음식이 나오자마자 전화를 끊고 가게로 들어왔다. 한 손에 트레이를 들고 휘파람을 불며 자리로 왔다.
“아, 나 생선 안 먹는다고.” 윤슬이 새우버거를 보더니 짜증을 냈다. “왜 물어보지도 않고 시켜.”
“생선 아니고 새우잖아.”
“새우가 생선이지. 또라이냐?”
둘은 한동안 새우가 생선인지 아닌지를 두고 옥신각신했다. 그 다툼은 인신공격으로까지 이어졌다. 햄버거가 식을까봐, 그러면 비려질까봐 걱정되었다. 강호를 제압하는 것으로 싸움이 일단락되자 윤슬은 흡족한 표정으로 햄버거 포장지를 벗겼다. 햄버거 탑을 분해한 다음 플라스틱 포크로 채소를 찍어 먹었다. 그리고 패티를 나이프로 썰어 먹었다. 그리고 빵도 조각냈는데 그건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거의 난도질을 해놓았다. 감자튀김은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저탄고지인지 혈당 다이어트인지의 일환인 듯했다. 나는 염치 불고하고 윤슬이 남긴 빵 쪼가리와 감자를 뺏어 먹었다. 이건 원래 손으로 먹는 음식인데, 식기를 사용한 사람 앞이라 그런지 미개인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잔반을 처리하는 것에 윤슬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저 팔짱 끼고 지켜보기만 했다.
“왜 두 탕 뛰는데?” 내가 다 먹자 기다렸다는 듯 윤슬이 물었다. 물론 이 질문은 강호를 향한 것이었다. 중학교 때 이후로 윤슬은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에서도 서로 아는 척하지 않았다. 윤슬은 내게 몇 년째 토라져 있었다. 혹은 화나 있었다. 혹은 복수 중이었다.
고백하건대 중학교 때 나는 윤슬을 조금 따돌렸다. 괴롭히지는 않았다. 때린 적도 없었다. 다만 내 절친이 윤슬을 모질게 대했을 때, 나는 묵인했다. 윤슬은 상처받았고 그건 합당한 감정이었다. 나는 그때의 일을 후회했다. 우리는 같은 고등학교가 되었고 언제부턴가 윤슬은 좀 달라지는 것 같았다. 강호와 만난 후부터일 거라고, 나는 짐작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무슨 심경의 변화를 겪은 것만은 분명하다. 어느 날 윤슬은 내게 학교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그게 윤슬이 나를 용서한다는 뜻인 줄 알았기에, 기쁘고 고마웠다. 윤슬은 강호에게 나를 소개시켰다. 친구라고. 그렇지만 나에게 강호를 소개하지는 않았다. 그가 누군지. 친구인지, 애인인지, 그냥 아는 사람인지. 그렇게 윤슬은 강호에게 나를 팔아넘겼다. 강호가 십자인대 수술을 받고 재활하던, 윤슬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의 ‘미친놈’ 시절에.
강호는 헬퍼를 갈취하는 데 나를 사용했다. 처음에, 내가 무슨 일을 한 것인지 깨닫고 난 직후에, 나는 강호에게 완강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강호의 핸드폰에는 모텔방 침대에서 헬퍼와 함께 찍힌 내 사진이 있었다. 강호는 학교에 뿌릴 거라고 협박했다. 그게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헬퍼에게 당할 때까지 나를 놔둘 수도 있었지만 자기가 쳐들어가 구해준 덕으로 내가 순결을 잃지 않았으니 고마워해야 한다고 강호는 말했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인지 내게 돈을, 오천원을 줬고, 그건 호된 채찍질 뒤에 주는 한 조각의 당근이었다. 돈이 궁했던 나에게는 그 오천원이 소중했다. 나는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나는……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였다. 이제 나는 더이상 억울하지 않았다. 나는 과거에 잘못을 했고, 윤슬이 부디 화를 풀길 바랄 뿐이었다. 윤슬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날 강호는 비로소 나를 놓아줄 터였다. 그애의 핸드폰 갤러리에 저장되어 있는 수천 장의 사진과 함께.
“지갑 사달라며.” 강호가 말했다. “미우미운가 뭔가.”
윤슬이 정색을 했다. “아직도 못 샀다고? 그 얘길 한 게 언젠데.”
둘의 대화로 유추해보건대, 윤슬은 ‘미우미우’라는 브랜드에서 나온 딸기우유색 반지갑을 사야 했다. 친구들이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지갑은 한두 푼이 아니었다. 내가 매일같이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몰래 윤슬이 말한 물건을 검색해보았다. 정말 다들 이걸 가지고 있나?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지갑은 어마어마하게 비쌌지만 아까 헬퍼에게서 뜯어낸 돈보다는 훨씬 쌌다. 잘하면 세 개도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그래서 얼마 벌었는데.” 윤슬이 바가지를 긁는 아내처럼 따졌다. “얼마 더 벌어야 하는데.”
“아 얼마 못 벌었어. 요새 불경기잖아. 다들 어려워……”
“그니까 얼마!”
“십만원밖에 못 벌었어.” 그렇게 거짓말하면서도, 강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눈짓으로 내게 도와달라거나 공모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강호는 내가 잠자코 있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가 맞았다.
불현듯 나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알고 나면 너무 당연해서, 왜 몰랐는지 절대 알 수 없는 사실을. 내가 하루에 두 번이나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내게 만원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강호에게 돈이 더 필요해서였다. 그리고 강호는 내가 돈을 더 달라고 말할 날을 기다렸다.
냠냠하는 냠냐미: 미안 알바하느라
냠냠하는 냠냐미: 근데 알바 하나 더 가야 함 흑흑
냠냠하는 냠냐미: 근데 알바 하나 더 가야 함 흑흑
현장의 사고는 대개 피로에서 비롯된다.
강호는 헬퍼에게 나이와 체중을 묻는 것을 깜빡하는 실수를 했다. 강호와 윤슬이 골목의 어둠 뒤로 자취를 감춘 뒤, 오늘의 두번째 헬퍼가 나타났다. 롯데리아 앞에 서 있던 나는 그가 온 것을 그림자가 지는 것으로 알아챘다. “떨이.” 그의 목소리는 하느님의 음성처럼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려왔다.
강호만큼, 아니 강호보다 더 건장한 이십대 남성이었다. 그는 챙이 긴 볼캡을 푹 눌러쓰고 있었다. 모자챙에 가려져 눈이 보이지 않았다. 엄청나게 굵은 목에 비해 턱은 좁고 뾰족했는데 거기 수염이 푸르스름하게 자라 있었다. 주먹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워커는 흙투성이였다.
아까 갔던 무인 모텔에 재방문하면서 나는 강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엔 주의하라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객실 호수를 타이핑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핸드폰이 내 손 안에서 사라져 있었다.
“누구야?” 내 핸드폰을 들고 헬퍼가 물었다. 나직이 말했는데도 귀에다 소리를 지른 것처럼 커다랗게 들렸다.
“그게……” 머리가 하얘졌다. 혀가 굳어져서 말이 잘 안 나왔다. “강호. 서강호.”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죄송해요.”
그는 내 눈을 응시하며 핸드폰 전원을 종료했다. 그리고 모텔방 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했다.
념녀하는 념녀미: 집에 가. 시간이 너무 늦었어.
념녀하는 념녀미: ?
념녀하는 념녀미: 무슨 일 있어?
념녀하는 념녀미: ?
념녀하는 념녀미: 무슨 일 있어?
한참 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강호가 나를 찾아냈다. 헬퍼가 문을 닫지 않고 나간 모양이었다. 아니면 대실 시간이 끝났는지도 몰랐다. 청소부가 문을 열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그저 조용히 나갔던 것 같기도 했다. 강호는 숨을 몰아쉬며 뛰어 들어왔다. 문을 등지고 있었지만, 소리뿐이었지만, 강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침대에 모로 누워 있는 내 어깨를 강호가 뒤에서 붙잡고 흔들어댔다. “야. 괜찮아?”
괜찮았었는데, 강호 때문에 어깨가 아팠다.
“죽었냐?” 떨리는 목소리로 강호가 물었다. 그애는 내 코 밑에 자기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자는 거야? 아무리 피곤해도……” 그리고 듣기 힘들 정도로 심한 욕을 퍼부어댔는데 자기한테 하는 건지 나한테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몇 호인지 답을 안 해. 전화도 안 받고. 배터리 나간 거야?”
“응.”
“걱정했잖아.” 우는 것 같았다. “씨발……”
“미안.”
“너는 이런 때도 미안하다는 소리가 나오냐?” 강호는 내게 미안해했다. 말은 안 해도 그냥 느낄 수 있었다. 이따위로나마, 함께한 시간이 길었으니까. 이 아이는 표현을 그런 식으로밖에 못했다. 어떤 감정을 느껴도 짜증밖에는 못 냈다.
“응.” 나는 몸을 일으켰고, 옷을 좀 추슬렀다. “미안.”
“차 끊겼겠다. 데려다줄게.”
“괜찮아.” 대신에 나는 강호에게 다른 걸 부탁했다. 그가 들어주건 말건 상관없이 언제나, 언제나 하는 부탁이었다. 오늘이라고 달라야 할 이유도 없었다. “윤슬이한테 그때 미안했다고 전해줄래?”
냠냠하는 냠냐미: 미안 알바하느라
냠냠하는 냠냐미: 이제 퇴근
념녀하는 념녀미: 괜찮아? 걱정했어.
냠냠하는 냠냐미: 미안
냠냠하는 냠냐미: 이제 퇴근
념녀하는 념녀미: 괜찮아? 걱정했어.
냠냠하는 냠냐미: 미안
불의의 사고로 두번째 헬퍼에게서는 돈을 뜯어내지 못했지만, 강호는 내게 얼마를 챙겨주려 했다. 그런데 얼마를 줄 것인가, 그게 강호에게는 중요한 문제인 듯했다. 내게 떼줄 몫을 헤아리며 무지하게 번뇌하는 기색이었다. 마침내 강호는 적정 금액을 이끌어냈다. 오늘 번 돈의 거의 반이었다. 계산해보니 하루도 쉬지 않고 세 달을 넘게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물론 나는 받지 않았다. 도저히 받을 수가 없었다. “얼른 미우미우 사줘야지.” 물론 이건 농담이었지, 강호를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경악하게 만들려던 말은 아니었다.
강호는 자기 머리를 벅벅 긁더니 그럼 택시라도 불러주겠다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집까지 좀 걷고 싶었다. 두세 시간만 걸으면 되었다. 강호는 또 짜증을 냈다. “아 어쩌라고!”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나는 강호를 안심시켜야 했다. 진짜로 걷고 싶다고. 너한테 시위하는 거 아니라고.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멍청한 강호는 겨우 내 말을 이해했고, 아니 이해가 안 되면 외우기라도 했고, 손을 흔들어 자기가 탈 택시를 불렀다.
“강호야.” 내 부름에 강호가 택시 문고리를 잡은 채 뒤를 돌았다. 나는 말했다. “나머지 오천원 줘.”
그렇게 나는 오천원권 두 장을 쥐고 귀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땀 흘려 번 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람, 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좋을 것 같았다. 걷다보니 기분이 상쾌해져 콧노래가 나왔다. 파워워킹으로 힘차게 걸었더니 두 시간 이십오 분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다리를 건널 때는 해가 떠올랐다. 한강이 복숭앗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관성을 포기하고 걸음을 잠시 쉬었다. 난간을 붙들고 한강 물을 바라봤다. 예쁘다……
냠냠하는 냠냐미: [사진]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길에는 어른들이 넘쳐났다. 출근하느라 바빠 보이는 게 문제긴 했지만. 나는 가장 부지런한 사람을 물색했다. 직장으로 향할 사람이 아니라 이곳에 직장이 있어서 온 사람. 이를테면 메가커피 앞에서 테이크아웃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 곧 그녀가 주문한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나왔다. 나는 여성을 따라 걸었다. 다행히 방향이 같았다. 구 럭키슈퍼, 현 CU 앞에서 그녀를 불러 세웠다.
나는 그 어른 여자에게 공손하게 만원을 내밀었다. “장수막걸리 두 병만 사다주세요. 잔돈은 가지셔도 돼요.”
그녀는 1초의 고민도 없이, 신속히 만원을 건네받았다.
정말이지 긴 하루였다. 나는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까 두번째로 방문한 무인 모텔에서 잠깐 기절하듯 눈을 붙이긴 했지만…… 잔 건지 기절한 건지 사실 좀 헷갈리는 부분도 있었다. 막걸리 두 병을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나는 빌라 계단을 올랐다. 봉투도 좀 사주지, 20원밖에 안 하는데. 다음에는 어른에게 봉투까지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하루하루 나아지는 삶. 그건 그렇고 5층에 있는 집까지 계단으로 올라가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다 왔다고 생각했건만 아직도 2층이었다. 나는 피곤했고 다리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무겁게 느껴졌다. 참 오늘 주말 아닌데, 금요일인데, 오늘이 하루 뒤였으면 좋았을 텐데, 학교 가야 하네, 학교 가서 밥 먹어야 하는데, 밥 먹으려면 학교 가야 하는데, 언제 가, 그런 생각을 하다 계단에 앉아 까무룩 졸았다. 아물아물 우리 집 현관문이 보였다. 녹이 슨 문에 광고 전단지가 어지러이 붙어 있었다. 아무도 외출을 안 했거나, 했어도 떼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망할 집구석. 그래도 우리 집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거의 다 왔구나.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학교는 언제 가지. 그리고 단잠에 빠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언제 다 살지.
하늘이 내 소원을 들어줬는지 눈을 떠보니 오늘은 내일이었다. 토요일이었다. 물론 나는 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직 나는 잠들었을 때 자세 그대로 계단에 앉아 있었다. 막걸리 두 병이 저 밑에 굴러떨어져 있었다. 나는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생각해야 했다. 막걸리를 사들고 집에 가다가 잠들었다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했다. 거기서부터 역산해야 했다. 기억이 서서히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어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머리는 푸딩처럼 둔했지만 벌써부터 마음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걸 잊을 만큼 몸이 더 아팠다. 내 몸은 한 자세로 굳은 상태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비명이 나올 것처럼 욱신거렸다. 나는 천천히, 아주 조금씩 몸을 움직여 깨웠다.
“엄마.” 현관문을 열자마자 나는 어린애처럼 외쳤다. “엄마.”
나는 현관에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때 오늘이 토요일인 걸 알았다. 놀라 기절할 뻔했는데, 힘이 없어서인지 기절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목요일에 집에서 나와서 토요일에 귀가한 것이었다.
“엄마.” 나는 거의 기어갔다.
거실 소파에 누워 있던 엄마가 느릿느릿 눈을 떴다. 엄마는 졸려 보였다. 지금 일어나서 그런 게 아니라 기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었다. 엄마는 더 야위어 있었다. 잘 건조된 미라 같았다. 강호가 심혈을 기울여 고르는 헬퍼들도 엄마에 비하면 돼지였다. 엄마는 내가 없는 사흘 동안 아무것도 안 먹은 게 분명했다.
“스.” 어찌나 굶었는지 엄마는 ‘술’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미안. 너무 늦었지.” 계단참에서 멎어 있는 막걸리병을 생각하자 아득해졌다. 그것들은 내가 들기엔 너무 무겁고 버거웠다. “밑에 있어. 가져올게. 조금만 쉬고.”
“스.”
“미안. 좀만 쉬고 갖다줄게.” 나는 소파에 엎드려 다시 잠들었다. 엄마가 앙상한 손으로 내 머리를 만졌는데, 쓰다듬는 건지 깨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깨우는 것이기를 바랐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다 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핸드폰을 봤다. 다행히 시간이 많이 경과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에너지를 짜내는 듯했다. 나를 보고, 눈알을 굴려서,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봤다. 한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 콧등을 타고 다른 쪽 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도 엄마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엄마의 시선이 닿은 곳을 보았다. 원래는 엄마와 아빠가 쓰던 방이었다.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고 누우면 바로 보였다. 아빠가 건설 현장에서 실족사한 뒤로 엄마는 방 안에 아빠 물건을 다 몰아넣고, 어쩌면 마음까지 다 거기 집어넣고, 문을 폐쇄했다. 문을 닫아야 저 안에 아빠가 있다고 믿을 수 있는지도 몰랐다.
아빠를 잃은 슬픔에 엄마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밥이랑 먹었는데 나중에는 술만 마셨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 어렸다. 나는 슬펐지만, 엄마를 말려야 했다. 엄마를 구하기 위해 내 슬픔을 뒤로 미뤘다. 제발 그만 마시라고 나는 엄마에게 화를 냈다. 구슬리기도 하고, 빌기도 하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러나 엄마의 고집이 더 셌다. 황소고집, 언젠가 아빠는 엄마와 자신의 장인어른을 그렇게 놀리곤 했었다. 내가 술을 금지하자 엄마는 음식까지 끊었다. 결국엔 내가 졌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지만, 엄마는 달랐다.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는…… 우울증 환자, 알코올중독자, 자식보다 자기 슬픔을 더 사랑하는, 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년이었다. 딸의 중학교 친구가, 윤슬이, 어디서 듣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들에게 내 아빠를, 내 아빠의 시신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엄마는 영원히 알지 못할 터였다. 왜냐하면 엄마는 내 소원대로 술을 끊고, 자신의 소원대로 밥까지 끊고, 미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에게 소주 대신에 막걸리를 사다줬다. 그게 더 영양분이 많을 것 같아서였다. 럭키슈퍼에서 막걸리 두 병을 사곤 했다. 슈퍼 할머니는 아무 소리도 안 했다. 계산할 때, 비닐장갑을 낄 때만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뗄 뿐이었다. 나는 엄마를 위해 술을 샀지만, 그건 나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술 살 돈을 마련하려고 헬퍼를 만나 하루에 오천원씩 버는 일은. 그건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었다. 나는 시간을 삭제하고 싶었다. 럭키슈퍼 할아버지의 신문과 십자말풀이처럼, 할머니의 뜨개질과 텔레비전처럼, 헬퍼와의 만남은 언제 다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 내 인생의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마침내 나는 스스로를 속이는 데 성공했다. 이제부터 엄마는 내 아기고, 막걸리는 내 아기가 먹는 우유라고.
어쩌면, 다만 이런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나는 엄마가 죽음에 이를 만큼 술을 마시기를 바랐다. 어쩌면.
“스.”
“미안. 좀만 참아.” 나는 현관문을 열고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막걸리로의 여정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당은 계단이었다. 항상 느끼는바, 계단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더 힘들었다.
그렇게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가는데, 어떤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롯데리아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강호. 통화하는 내내 안쪽을 힐긋대던 강호. 강호가 이쪽을 보았고 그는 내게 무언가 눈짓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윤슬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내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때 왜 자기를 따돌린 거냐고 묻지 않았다. 다시금 우리를 바라보는 강호. 강호의 눈짓에 살짝, 내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아예 안 들키는 것도 두려워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윤슬. 빗을 꺼내려고 가방 앞주머니 지퍼를 여는 윤슬. 언뜻 보이던 딸기우유 색깔. 미우미우 반지갑.
그리고 나는 계단참에 다다라서야 깨닫는다. 이 빌라에 사는 어느 가난한 이웃이 엄마의 밥 두 병을 훔쳐 갔다는 사실을.
냠냠하는 냠냐미: 결정함
념녀하는 념녀미: 언제로?
냠냠하는 냠냐미: 오늘
념녀하는 념녀미: 언제로?
냠냠하는 냠냐미: 오늘
우리는 서울 모처의 롯데리아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내가 고른 롯데리아는 엊그제의 ‘그 롯데리아’였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옳았다. ‘그 무인 모텔’에서 가장 가까운 롯데리아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장소는 당연히 그 모텔방이 될 터였다. 준비물은 념녀미가 챙겨오기로 했다. 우리는 오후 11시로 약속 시간을 정했다. 오늘이 가기 전에, 한 시간 안에. 돌아갈 차편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자유.
오늘이 디데이인 것에 념녀미는 동의했다. 정리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당일에 통보한 게 미안했지만, 하루만 지나도 용기를 잃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자정이 지난 신데렐라처럼 남루해질 수는 없었다. 더는 념녀미를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념녀미는 그동안, 내가 생에 미련을 버릴 때까지, 인내를 갖고 나를 기다려주었다. 내가 확신을 가질 때까지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얼른 끝내버리고 싶을 때가 많았을 텐데 그 아이는 나를 위해 희생했다.
념녀미는 자기 닉네임대로, 말 그대로 나를 ‘염려’했다. 그리고 나는 내 닉네임이, 비록 닉네임일 뿐일지라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 배불리 실컷 먹는 게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오픈채팅방에서 랜덤으로 붙여진 비슷한 이름에 처음에는 서로 신기해하고 재밌어했을 뿐이지만, 이제 념녀미는 내 삶에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자살팸 회원들이 둘씩, 혹은 셋씩 짝을 지어 세상을 떠날 때도 그애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애의 어른스러움을 존경했다. 그애에게 의지했다. 나는 우리가 ‘짝’이 되리라 예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개인 톡을 팠다. 우리는 ‘둘’일 터였다.
엄마에게 매일 희망하고, 매일 절망하고, 그러면서도 매일매일 오늘만, 속는 셈 치고 오늘까지만 술을 사다줄 때도, 그애는 언제나 내게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 ‘계속 속으면, 속는 사람이 나쁜 사람.’
념녀하는 념녀미: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거 있어?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에 채팅이 왔다. 나는 겁먹지 않으려 애썼다. 진짜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생각나는 음식이 많았다. 너무 많았다. 내게는 아직 못 먹어본 음식이, 먹어야 할 음식이 아주 많았다. 마음이 자꾸 약해지려 했다. 삶에 한 번만 더 속아볼까. 다시 속으면, 그럼 내가 나쁜 사람일까.
냠냠하는 냠냐미: 엄마 술 사느라 돈 다 씀
념녀하는 념녀미: 괜찮아. 내가 낼게.
냠냠하는 냠냐미: 새우버거
념녀하는 념녀미: 괜찮아. 내가 낼게.
냠냠하는 냠냐미: 새우버거
최대한 빨리 걸었는데도 세 시간 십 분이나 걸렸다. 다리를 건널 때 나는 한강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전구 불빛이 반짝반짝 아름다울 텐데도. 더 좋은 일이 나를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롯데리아 앞에서,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 아이를 기다렸다. 고대했다. 어떻게 생겼을까, 나보다 예쁠까, 고작 그런 걸 궁금해하면서. 이제는 고작 그런 거나 궁금해해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갔다. 핸드폰 화면 안의 시계가 22:59를 가리켰다. “떨이가 너였냐.” 흙투성이 워커가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눈에 익은 신발이었는데 어디에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냠냐미.”
그 헬퍼는 말했다.
장진영
2019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마음만 먹으면』, 장편소설 『취미는 사생활』 『치치새가 사는 숲』, 단편소설 『나의 사내연애 이야기』 등이 있다.
2024/12/04
7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