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산타 마을에 악당이 산다!
내 이름은 폴이다.
나는 도시 괴담에 등장하여 아이들을 마구 괴롭히는 악당 슬랜더맨이다. 슬랜더맨을 한 번이라도 만나본 아이라면 벌써부터 벌벌 떨 것이다.
악당인 내가 사는 곳은 하늘 위에 있는 산타 마을이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나는 산타 가족과 요정, 그리고 루돌프와 함께 어린이의 선물을 만들며 살고 있다.
내가 왜 이곳에 살게 되었는지 궁금하다면 『핼러윈 마을에 캐럴이 울리면』을 읽어보길 바란다. 이 책은 산타 아들 실버의 자서전이자 지구의 아주 중요한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덕분에 판타지 세계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슬랜더맨은 팔이 네 개이며 머리에 눈, 코, 입과 머리카락이 없다. 이 때문에 흰 달걀 머리 귀신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한다. 옷은 도시 괴담에 어울리는 검은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붉은 넥타이를 맨다. 사람이 입으면 단정한 복장이지만 슬랜더맨이 입으면 아주 오싹한 분위기를 풍긴다. 숨을 참으면 원하는 대로 몸을 줄이거나 키우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만들 때 아주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나는 보통의 슬랜더맨에겐 없는 게 있다. 바로 눈과 입이다. 실버의 특별한 능력 덕에 나는 슬랜더맨 중 유일하게 말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폴이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이쯤 되니 여러분은 더욱 궁금할 것이다. 악당이 왜 산타 마을에 사는 거지? 너무 안 어울리는 조합인데? 그렇다. 이게 바로 나의 고민이다.
사실 나는 어릴 적부터 겁이 많고 나약했다. 친구들이 악당답게 아이들을 괴롭힐 때도 나는 따라 할 수 있는 용기가 부족했다. 결국에는 슬랜더맨 마을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진정한 악당이 되기 위해 핼러윈 마을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산타 아들 실버를 만났다. 실버는 위기에 처한 산타 마을을 구하기 위해 핼러윈 마을에 온 것이었다. 나와는 목적이 완전히 달랐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크리스마스를 함께 지켜냈다. 그 공로로 내가 산타 마을에 살게 된 것이다.
숨을 참으면 팔다리가 길어지거나 주먹만큼 작아지는 내 능력은 장난감을 만드는 데 아주 쓸모 있었다. 멀리 있는 물건을 쉽게 가져오고 작은 기계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처음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일하는 게 아주 보람 있고 즐거웠다. 그러나 블로그에 올라온 악성 댓글을 보며 점점 기가 죽었다.
“이제 산타도 한물갔다. 슬랜더맨과 함께라니.”
“악당 슬랜더맨이 만든 인형은 받고 싶지 않아.”
나는 악플을 보고 깊은 상처를 받았다. 산타 마을 가족에게도 미안했다. 악당이 산타와 함께 산다니. 악당이 만든 산타 선물이라니. 그들의 말이 틀린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달라진 지금의 나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안다. 내가 한 과거의 어리석은 악당 짓을.
슬랜더맨 마을에 살 때, 나는 나쁜 짓을 많이 했다. 물론 밤에 아이들을 마주칠까봐 일부러 숨어 다녔다. 때때로 나를 보고 놀라는 아이가 있으면 손을 흔들며 안심시키려 했다. 그래도 기절하는 아이가 있었고 그때마다 어른들이 쫓아와서 내게 매질을 했다. 어찌하였든 나 때문에 아이가 다치거나 울었으니 악당이었던 것은 맞다.
사실 지금까지는 나의 변명이다. 사건은 얼마 전에 터졌다. 어쩌면 여러분은 올해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지 못할 수 있다. 단단히 마음먹고 내 글을 읽기 바란다. 참고로 난 어렵게 말하는 재주가 없어 쉽게 말하겠다. 내 글 수준이 너무 낮다고 생각한다면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이니 안심해도 좋다.
나는 여느 때처럼 길어진 팔과 다리로 요정들과 함께 장난감을 만들고 있었다. 그때 장난감 공장 기계가 웅 소리를 내며 작동을 멈췄다. 나는 평소처럼 숨을 꾹 참고 주먹만 하게 작아져서 기계 속으로 들어갔다. 작은 부품을 교체하는 일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숨을 참기가 점점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나사 하나만 갈면 될 것 같아 조금 더 버텼다. 하지만 결국 기계를 빠져나오다가 숨을 내쉬어 몸이 커지고 말았다.
사고는 순식간이었다. 커지는 내 몸에 밀린 기계가 쾅 소리를 내며 부품을 마구 튕겨냈다. 마치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근처에 있던 요정들은 간신히 피했다. 하지만 루돌프가 커다란 쇳덩이에 맞아 다리가 부러져버렸다. 다행히 요정들이 재빨리 응급치료를 했다. 나는 루돌프가 너무 걱정되고 미안해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 요정이 다가와 나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마. 시간이 지나면 루돌프는 괜찮아질 거야.”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하지만 루돌프 다리가 다 나으려면 이번 겨울이 훨씬 지나야 한단 말이야.”
그 말은 이번 크리스마스에 산타가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달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모두 내 탓이다. 나는 정말 쓸모없는 악당인가보다.
“올 크리스마스를 망친다면 난 지옥에 떨어질 거야. 지옥이 무서울까? 악플이 무서울까?”
나는 다시 미안함과 절망의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렸다.
“이럴 때 치료술사의 처방약만 있으면 루돌프가 크리스마스에 썰매를 끌 수 있을 텐데.”
요정의 말에 내 귀가 번쩍 뜨였다.
“치료술사? 내가 당장 처방약을 받아 올게.”
내가 눈물을 뚝 그치고 말하자 요정이 물었다.
“폴, 치료술사가 어디 있는지 알아?”
나는 고개를 재빠르게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 위대한 인물을 내가 알 턱이 없었다.
“아니, 몰라. 치료술사니까 마법 마을에 살지 않을까?”
나는 완전한 돌머리가 아닌 듯하여 스스로를 뿌듯해했다. 생각해보니 슬랜더맨 마을에 살 때 치료술사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슬랜더맨이 다치게 했던 아이들을 치료술사가 고쳐주는 일이 종종 있어서 동료들이 투덜거린 게 떠올랐다.
치료술사는 요정의 사촌쯤 된다고 했다. 귀가 요정처럼 뾰족하고 하얀 귀털이 수염처럼 길게 자라서 신비한 모습이라고도 했다. 나는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깜박깜박하는 버릇을 언제 고칠지 걱정이다. 요정은 내가 치료술사를 안다고 하자 반기며 물었다.
“그럼 마법 마을을 어떻게 가는지 알겠네?”
“아니, 몰라.”
요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긴, 알아도 소용없어. 몇 해 전에 마법 마을을 떠났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이상 치료약을 만들지 않는다고 했고.”
“그럼 치료술사는 찾을 수 없는 거야?”
나는 다시 기운이 빠져 주저앉았다. 아이들이 나 때문에 선물을 못 받게 될 거란 생각을 하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힘을 내어 말했다.
“내가 찾아볼게.”
“무리야. 어디로 가려고?”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잖아. 나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홍대에 가면 이것저것 소식통인 김 할아버지가 있어. 어쩌면 그 할아버지가 알지도 몰라.”
나는 지체하지 않고 손목시계의 좌표를 홍대로 맞추었다. 이 손목시계는 산타 마을에서 인간 세상으로 순간이동을 시켜준다. 산타 마을 가족임을 증명하는 특별한 시계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숨을 참고 팔과 다리를 쭈욱 늘였다. 간신히 수레 손잡이를 붙잡을 수 있었다. 나는 발에 불이 나도록 버티며 수레 속도를 늦추었다. 새로 산 구두인데 밑창이 완전히 닳아 없어질 것 같았다. 다행히 도로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수레가 멈췄다. 사람들이 내게 박수를 보냈다. 순간 나는 악플을 잊고 우쭐해졌다. 판타지 세계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전에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김 할아버지가 숨을 헉헉거리며 수레를 옆으로 돌려놓았다. 나도 숨을 헉헉거리며 몸을 원래대로 줄였다. 강아지 택이는 은인을 몰라보고 나를 향해 컹컹 짖어댔다. 배은망덕한 강아지 같으니라고.
“고맙다. 폴, 네 덕에 살았어.”
“휴, 진짜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러게 말이다. 오늘같이 행사가 많은 날은 일거리가 많거든.”
수레 위의 폐지는 하늘에 닿을 듯했다. 이렇게 많은 폐지를 깡마른 할아버지가 어떻게 밀고 다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 할아버지는 고맙다는 뜻으로 내게 아이스크림을 사준다고 했다. 나는 아이스크림이라는 말에 홀딱 넘어가서 여길 왜 왔는지 완전히 까먹어버렸다. 진짜 내 건망증은 구제불능이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말이다.
할아버지와 나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었다. 아니 옆에 있는 택이까지 셋이다. 택이는 자기 아이스크림을 재빨리 먹어 치우고는 불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눈치가 없어서 혀를 날름거리며 더욱 맛있게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차가운 날씨에도 역시 아이스크림은 맛있었다. 마지막 과자 부분까지 입안에 밀어 넣자 택이가 으르렁거리며 짖었다. 욕심 많은 강아지 같으니라고.
“너도 오늘 핼러윈 악당 모임에 참석하러 온 거냐?”
“핼러윈 악당 모임요?”
“그래. 너도 악당이잖아.”
“아 그렇죠. 악당이죠.”
나는 악당이라는 말에 마음이 상했다. 이젠 달라졌다고. 그러니 더이상 악당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내가 루돌프 다리를 다치게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도 악당이냐?”
나는 김 할아버지의 질문에 반발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뇨!”
김 할아버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물었다.
“그럼 동화 마을이나 장난감 마을 모임에 온 거구나?”
“네?”
변함없는 김 할아버지의 표정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김 할아버지는 내가 어딜 가려고 하는지 단순히 물은 것뿐이었다. 죄책감에 휩싸여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지레짐작하며 오해하다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털며 말했다.
“착한 일 열 개. 그러면 악당이라는 꼬리표 떨어지기. 뭐 이렇게 정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럼 더이상 악당이라고 안 불리고 손가락질도 안 당하잖아요.”
김 할아버지는 내 말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착한 일 몇 개가 뭐 중요하냐. 네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가 중요하지.”
“그래도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싶단 말이에요.”
“그래. 그 마음도 이해가 가는구나. 하지만 명심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지만 생각하면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단다. 네가 착한 슬랜더맨이 되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알아줄 거야.”
김 할아버지의 말은 큰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치료약을 찾아 루돌프를 낫게 한 다음엔 산타 마을을 떠날 것이다. 나 같은 악당은 산타 마을에 불필요한 존재니까.
그러고 보니 김 할아버지는 치료술사와 모습이 많이 닮았다. 뾰족한 귀하며 목까지 길게 늘어진 하얀 귀털은 내가 치료술사를 찾으러 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생각났어요. 치료술사를 찾아야 해요.”
“치료술사? 누가 다친 게냐?”
김 할아버지가 빈 아이스크림 껍질을 핥고 있는 택이를 보며 물었다.
“루돌프가 다쳤어요. 치료술사가 치료해야 올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이 선물을 받을 수 있어요.”
“이런 안됐구나.”
그때 길 건너에서 슬랜더맨 둘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낮에 모습을 보이다니 대담한 슬랜더맨이었다. 택이가 이들을 보더니 사납게 짖었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그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슬랜더맨은 귀여운 강아지라고 봐주는 법이 없다. 택이가 위험했다. 나는 슬랜더맨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택이를 말리러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두 슬랜더맨은 택이를 잡아채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놀란 김 할아버지가 일어서다가 아까 무리한 다리 때문에 그만 넘어졌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뛰어와서 김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할아버지!”
“나는 괜찮으니 택이를 부탁한다. 폴.”
순간 나는 망설였다. 택이를 찾으려면 슬랜더맨 마을에 가야 했다. 슬랜더맨 마을에 들어갔다가 잡히면 나는 무슨 벌을 받을지 모른다. 게다가 루돌프 치료가 늦어지면 치료술사를 찾아도 희망이 없을지 몰랐다. 택이 때문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내가 갈등하는 사이 김 할아버지가 애타게 나를 흔들었다.
“택이를 핼러윈 데이 재물로 바치려는 거야. 택이가 위험해!”
슬랜더맨이 택이를 어떻게 할지는 내가 더 잘 알았다. 너무 무서워서 김 할아버지에게 ‘그냥 다른 강아지를 키워보는 건 어때요?’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멍청하고 겁먹은 행동은 지금까지 한 것으로 충분했다. 나만 보면 짖는 강아지지만 이대로 못 본 체할 수는 없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구해 올 게요.”
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슬랜더맨 마을로 들어가는 판타지 결계로 뛰어갔다.
내가 도착한 곳은 허름한 창고였다. 나는 창문을 찾아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아까 본 슬랜더맨이 한가롭게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누구는 애간장이 타는데 정말 악당이었다.
그때 누군가 내 바짓가랑이를 끌어당겼다. 하마터면 놀라서 소리를 칠 뻔했다. 고개를 내려보니 목줄에 메인 택이가 내 바짓가랑이를 물고 있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며 나직이 말했다.
“택아.”
택이가 내 바짓가랑이를 뱉어내며 말했다.
“폴?”
분명 택이였다. 그런데 택이가 사람처럼 말을 했다.
“택아, 너 말을 해?”
“당연하지. 여긴 판타지 마을이잖아.”
“아, 그럼 너도 판타지 마을 출신인 거야?”
“맞아. 마법 마을에서 왔어.”
나는 반가운 나머지 택이의 볼을 내 볼에 마구 비벼댔다.
“저리 가! 누굴 애완견 취급이야.”
말을 한다고 해서 까칠한 성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택이의 목줄을 풀어주며 말했다.
“슬랜더맨이 눈치채기 전에 어서 빠져나가자.”
나는 택이와 함께 오던 길로 다시 뛰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슬랜더맨 마을의 눈은 인간 세상의 눈과 달랐다. 눈송이 하나가 눈뭉치만큼 컸다. 눈뭉치로 떨어지니 맞을 때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길에는 금세 눈이 쌓였고, 우리의 앞을 순식간에 막아버렸다.
“폴, 너 여기서 나가는 결계가 어딘지 찾을 수 있겠어?”
“걱정 마. 이래 봬도 여기가 고향이라고.”
택이는 안심한 듯 내 뒤를 바짝 따랐다. 그런데 한참을 뛰어도 눈앞에 보이는 곳은 택이가 잡혀 있던 창고였다.
“너 진짜 여기가 고향 맞아? 다시 되돌아왔잖아.”
나는 할말이 없었다.
그 사이 택이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 슬랜더맨이 저 멀리서 우리를 보고 달려오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은 나는 택이를 집어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든 계속 달리다보면 여길 빠져나갈 결계가 나올지 몰랐다. 슬랜더맨 마을에 결계가 하나밖에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보다 키가 큰 슬랜더맨이 점점 내 목덜미를 잡을 것처럼 가깝게 쫓아왔다. 이대로라면 붙잡힐 게 뻔했다.
“폴, 저쪽을 봐. 또다른 슬랜더맨이 달려오고 있어.”
택이 말대로 사방에서 슬랜더맨이 우리를 잡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결계를 찾는다고 해도 끝까지 쫓아온다면 잡힐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다음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이들이 택이뿐만 아니라 슬랜더맨의 수치로 생각하는 나를 어떻게 대할지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택아. 너 마법 마을에서 왔으면 이럴 때 쓰는 마법 같은 거 없어? 폭탄이라든가. 뭐라도 해봐.”
“그런 게 있었으면 벌써 도망갔지. 거기에 잡혀 있었겠어? 멍청하긴.”
나더러 멍청하다니. 이 강아지를 슬랜더맨에게 던져주고 혼자 빠져나갈까란 생각이 들만한 말이었다. 간신히 김 할아버지를 생각해서 꾹 참아냈다.
하지만 좋은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얼마 가지 못해 우리는 슬랜더맨 무리에 포위되고 말았다. 이들이라면 우리를 이 자리에서 발로 짓밟고도 남았다. 슬랜더맨들은 씩씩거리며 우리를 내려다봤다. 공포 그 자체였다.
모든 것이 절망스러운 순간, 산타 마을 가족들이 떠올랐다. 나로 인해 산타 마을에 대한 악플이 달릴 때도 그저 인자한 모습으로 나를 위로해주신 산타 아저씨. 나와 함께 웃으며 일을 했던 요정들. 그리고 나 때문에 다리를 다친 루돌프까지.
나도 착한 일을 하고 칭찬을 받고 싶었지만 항상 모자라고 모자랐다.
“폴, 어떻게 좀 해봐. 넌 산타 마을 가족이잖아.”
나처럼 겁을 먹은 택이가 내 손을 핥으며 끙끙댔다. ‘산타 마을 가족’. 그랬다. 나는 산타 마을 가족이었다. 산타 마을 가족만 가질 수 있는 이 순간이동 시계를 왜 생각하지 못했지? 나는 재빨리 시계의 좌표를 산타 마을로 돌렸다. 그러고는 택이를 끌어안은 채 산타 마을로 순간이동을 했다.
“폴, 웬 강아지야?”
“미안, 잠깐 다녀올게.”
나는 또다시 좌표를 홍대로 맞추고 택이와 함께 순간이동을 했다.
“폴, 정말 고맙구나.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살고 싶지 않았을 게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런데 택이를 잠깐 빌리면 안 될까요?”
“택이를?”
“네, 택이가 마법 마을에서 왔대요. 마법 마을을 어떻게 가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인간 세상에서는 말을 못 하잖아요. 치료술사를 찾으려면 택이가 필요해요.”
다행히 이번에는 내가 할 일을 까먹지 않았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김 할아버지가 크게 웃었다. 나는 이유를 몰라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법 마을엔 갈 필요가 없다.”
“네? 치료술사를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는지 할아버지가 아세요?”
김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에 작은 약병을 쥐여주었다.
“그 치료술사가 귀가 뾰족하고 귀에 흰털이 길게 났다고 했지?”
“네. 맞아요.”
“아직도 모르겠느냐?”
김 할아버지가 자신의 귀털을 만지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설마, 치료술사를 눈앞에 두고 못 알아봤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진짜 할아버지가 치료술사예요?”
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약을 가지고 가거라. 루돌프에게 먹이면 이전보다 훨씬 튼튼한 다리가 될 거다.”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할아버지를 와락 껴안고 방방 뛰었다.
“할아버지 너무 고마워요.”
“너는 또 한 번 크리스마스를 구하게 됐구나. 어때? 이래도 산타 마을을 떠날 거냐?”
김 할아버지는 내 속마음을 꿰뚫고 계셨다.
“가족은 서로 기대는 사이인 거지, 필요한 사람이 모인 게 아니란다. 그러니 너를 너무 미워하지 마라.”
“어때. 네 마음은 이제 자유로워진 게냐?”
나는 자신있게 말했다.
“네. 산타 아저씨!”
이따금 나는 행복해져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들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존재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의 미움에 주눅 들거나 없애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멋지게 어울려 지내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왜냐면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꽤 괜찮은 슬랜더맨이니까.
성요셉
드라마 OST 작사와 드라마 보조작가, 전시기획작가 등 오랜 시간 글을 써왔고, 드라마·동화·영화시나리오·웹툰스토리 등 다수의 공모전에 당선되었습니다. 비룡소 황금도깨비상 대상을 받은 장편동화 『핼러윈 마을에 캐럴이 울리면』, 천재교과서 창작동화 수상작 『미운 오리 수세미』, 자음과모음 네오픽션 장편소설 『조용한 흡혈마을』을 썼습니다.
이 동화는 『핼러윈 마을에 캐럴이 울리면』의 번외작입니다. 원작의 주인공인 실버 대신 조연이었던 악당 폴이 주인공이 되어 펼치는 이야기입니다.
산타 마을에 살게 된 악당 폴에게는 어떤 어려움이 있을까요? 어떻게 극복하고 성장해갈까요? 우리는 가끔 어리석었던 과거의 자신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과거의 나를 어떻게 대하나요?
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가 공감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폴처럼 모두가 잘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2024/12/18
7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