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까마귀 여행자
송이는 ‘얌얌얌 분식점’ 앞에서 친구를 기다립니다. 목을 길게 빼고, 까치발을 들고, 양손에 소떡소떡을 하나씩 들었습니다.
학교 교문 밖으로 나오는 하은이가 보입니다. 하은이는 수지랑 팔짱을 끼고 활짝 웃습니다. 웃음은 샛노란 은행잎만큼이나 눈부십니다.
“하은아, 안녕!”
송이는 냉큼 인사를 합니다.
“어? 송이네……”
하은이가 뚱한 표정으로 알은체를 합니다.
“하은아, 소떡소떡 먹을래?”
송이는 하은이가 좋아하는 소떡소떡을 내밉니다.
“하은이는 나랑 구름이 산책시키러 갈 거야.”
수지가 끼어들더니 하은이 팔을 끌어당깁니다. 구름이는 하얗고 뽀글뽀글한 털을 가진 귀여운 강아지입니다.
“나도 구름이 보고 싶은데, 같이 가도 돼?”
“안 돼. 오늘은 둘이서만 가기로 했어.”
“우리 먼저 갈게.”
수지랑 하은이가 손을 맞잡고는 달아나듯이 가버립니다.
송이는 터덜터덜 걷다가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습니다. 버스를 타려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앉고 싶었습니다. 양손에 소떡소떡을 쥐고 하은이랑 수지가 맞잡은 손을 떠올립니다. 둘은 팔목에 같은 모양 팔찌를 하고 있었는데, 그건 송이가 하은이랑 하고 싶었던 우정 팔찌입니다.
송이는 속상해서 눈물이 납니다. 그때, 그림자 하나가 바닥에 드리웁니다.
“송이야, 괜찮아?”
짝 미지입니다. 송이는 미지가 모두 본 것 같아서 창피합니다. 아는 척하는 미지가 얄밉습니다.
“뭘? 아무 일도 없는데.”
송이 입에서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옵니다.
“그게, 나는, 그냥, 네가 속상해 보여서. 음, 미안해. 갈게, 안녕.”
미지가 우물쭈물하다가 돌아섭니다.
송이는 괜히 미지에게 화를 낸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미지는 조용하고 말이 느리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보다 생각이 많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정합니다. 손에 든 소떡소떡을 보자, 미지랑 나눠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 미지야. 잠깐만……”
송이가 미지를 부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미지가 돌아보더니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듭니다. 얼떨결에 송이도 손을 흔듭니다.
미지가 가고, 송이는 또 혼자입니다. 혼자서 소떡소떡을 먹기는 정말 싫었습니다.
그때입니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옵니다. 은행나무 가지가 사납게 흔들리고, 노란 잎들이 날아오릅니다. 꼬마와 손잡고 걷던 엄마가 몸을 구부리며 꼬마를 감쌉니다. 하얀 비닐봉지가 횡단보도를 껑충껑충 건너갑니다. 까마귀 한 마리가 바람에 휘청이더니 아래로 고꾸라집니다.
“으앗!”
송이는 그만 눈을 질끈 감습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서 실눈을 뜨고 길을 봅니다. 어디에도 까마귀는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 봤나? 그래도 다행이다.”
휴,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정류장 구석에 웅크린 그림자가 움직입니다. 송이는 놀라서 소떡소떡 하나를 떨어뜨립니다.
“흐음, 정말 맛있는 냄새야!”
그림자가 잽싸게 소떡소떡을 물고 구석으로 갑니다.
“까, 까마귀?”
눈을 깜박이고 봐도 까마귀가 틀림없습니다. 까마귀는 소떡소떡을 쪼아먹기 바쁩니다. 송이는 무서워서 도망치려고 일어섭니다.
“그 소떡소떡 안 먹을 거면 나 줄래요?”
까마귀가 어느새 다 먹고는 애처로운 눈길로 송이를 봅니다.
“공짜로 달라는 건 아니에요. 값은 충분히 치를게요.”
뒷걸음질치던 송이는 귀가 솔깃합니다.
“저는 특별한 여행자랍니다. 과거라면 어디든, 원하는 시간을 여행할 수 있어요. 지금 막 여행을 다녀왔더니 배가 고파서요.”
까마귀는 소떡소떡에 눈을 떼지 못합니다.
“진짜로 시간 여행을 한다고요?”
송이는 사실 되돌리고 싶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도 시간 여행을 하게 해줘요. 그럼 이걸 줄게요.”
“음, 좋아요. 대신 딱 한 번만이에요.”
까마귀가 승낙하자, 송이는 얼른 소떡소떡을 줘버립니다.
까마귀는 남김없이 싹싹 먹고는 펄럭 날아오릅니다.
“잠, 잠깐만!”
송이는 소떡소떡만 먹고 내빼는 까마귀를 잡으려고 손을 뻗습니다. 차라락, 손가락부터 팔까지 까만 깃털이 돋아납니다. 온몸이 깃털로 덮이고, 노란 부리가 생깁니다. 한순간에 까마귀로 변해서 하늘을 날아갑니다.
“한눈팔지 말고 잘 따라와요.”
앞서가던 까마귀가 소리치고는 구름 안으로 사라집니다. 송이 까마귀는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뒤쫓아갑니다. 눈앞이 하얗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돌아가고 싶은 시간을 떠올려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 순간 송이 머릿속에 지난 수요일이 떠오릅니다.
송이와 하은이는 새 학기에 첫 짝이 되고 계속 단짝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여름방학이 지나고, 하은이와 수지가 부쩍 친해졌습니다. 둘에서 셋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셋은 같은 노래를 좋아하고, 같은 게임을 하고, 같이 화장실을 가고,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수요일에는 학교를 마치고 같이 얌얌얌 분식점에 갔습니다. 하은이가 소떡소떡을 골랐고, 수지도 소떡소떡을 골랐습니다. 언제나 하은이가 좋아하는 간식을 따라 골랐지만, 그날따라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슬쩍 하은이 눈치를 보고는 매운 떡볶이를 골랐습니다. 그러자 하은이가 입을 삐죽거렸고 수지도 똑같이 따라 했습니다. 송이는 그때로 돌아가 매운 떡볶이가 아니라 소떡소떡을 고르고 싶었습니다.
눈앞이 파랗습니다. 어느새 구름 밖으로 나왔습니다. 까마귀는 미끄러지듯 공기를 타고 내려갑니다. 날개를 크게 퍼덕이며 바닥으로 내려앉습니다. 송이 까마귀도 뒤따라 내려옵니다.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는 다시 송이로 변신합니다.
송이는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아무리 봐도 방금 앉아 있던 버스정류장이랑 똑같습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귀한 시간 여행을 날려버릴 거예요? 빨리 얌얌얌 분식점으로 가세요. 꺄악!”
까마귀가 날개를 파닥거립니다.
송이는 정신이 번쩍 듭니다. 엉덩이에 묻은 낙엽을 털지도 않고 달려갑니다. 교문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송이가 보입니다. 그러니까 수요일의 송이 말입니다. 조금만 있으면 하은이와 수지가 청소 당번을 마치고 나옵니다.
송이는 수요일의 송이에게 달려가서 ‘매운 떡볶이 말고 소떡소떡 골라. 네가 먹고 싶은 간식 말고 하은이가 먹고 싶은 간식을 골라. 무조건 똑같이 따라 해’라고 하려고 생각합니다.
“시간 여행자는 절대로 자기 자신과 만나면 안 돼요.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곧장 원래 시간으로 돌아와버리니까요.”
언제 따라왔는지, 담벼락 위에서 까마귀가 비밀이라도 말하듯 속삭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쪽지를 보낼까요? 지금 그럴 시간이 없는데……”
송이는 발을 동동거리다가 눈을 반짝입니다.
“앗, 좋은 생각이 났어요. 내가 친구들이랑 있을 동안 송이를 다른 곳으로 가게 해줘요.”
“아,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한 가지 소원만 약속했으니까요.”
“그런 게 어딨어요. 소떡소떡은 두 개나 먹었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죠? 하나는 흘린 거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맞다! 까마귀님 때문에 놀라서 흘린 거잖아요. 그러니 제발 도와줘요. 이러다 친구들이 오겠어요.”
“알았어요, 알았어. 정말 이번 한 번만이에요.”
까마귀는 새초롬하게 말하고는 날아오릅니다. 수요일의 송이 뒤로 사뿐 날아가서 가방에 걸린 인형을 낚아챕니다.
수요일의 송이만큼이나 송이도 깜짝 놀랍니다. 인형은 송이랑 하은이가 둘만 단짝 친구였을 때, 함께 고른 꼬마별 인형입니다. 꼬마별은 송이랑 하은이의 우정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송이가 말릴 틈도 없이 까마귀는 꼬마별을 가지고 도망칩니다. 수요일의 송이는 소리를 지르며 까마귀를 쫓아갑니다. 저만치 앞에서 꼬마별이 툭 떨어집니다. 수요일의 송이가 달려가면 까마귀는 다시 인형을 잡아채어 도망칩니다. 수요일의 송이와 까마귀가 점점 멀어집니다.
“송이 너, 왜 여기 있어? 교문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잖아.”
“너 찾는다고 시간이 조금밖에 안 남았어. 빨리 학원도 가야 하는데.”
하은이와 수지가 송이를 보자마자 불평을 쏟아냅니다.
송이는 친구들을 보자 반가운 마음 대신 억울한 마음이 듭니다. 수요일의 송이가 청소 당번인 둘을 한참이나 기다렸다는 걸 아니까요. 혹시나 길이 어긋날까봐 화장실 가고 싶은 것도, 배고픈 것도, 심심한 것도 꾹 참았으니까요.
“너 계속 꾸물거릴 거야? 빨리 와!”
하은이와 수지가 얌얌얌 분식점 쪽으로 가며 툴툴거립니다.
‘송이야, 기다려줘서 고마워.’
‘혼자 심심했지. 미안해.’
송이는 속상해할 수요일의 송이를 위해 속삭입니다. 친구들 대신 사과를 합니다.
얌얌얌 분식점 아주머니가 소떡소떡 세 개를 집어올립니다.
“너도 소떡소떡이지? 내가 대신 주문해줘서 고맙지?”
하은이가 선심 쓰듯 말합니다.
송이는 ‘고마워’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옆에서 수지가 왜 그러냐는 듯 송이 팔을 툭 칩니다. 이제 ‘고마워’라고 말하고, 소떡소떡을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됩니다.
교문 앞에서 혼자 기다리던 수요일의 송이가 떠오릅니다. 달리기 일등을 하고 신났을 때, 땀냄새난다는 핀잔을 듣던 화요일의 송이가 떠오릅니다. 교실에서 우산을 가져오는 동안 친구들이 가버려서 슬펐던 월요일의 송이가 떠오릅니다. 여름방학에 꼬마별을 잃어버린 하은이보다 더 속상해하던 송이가 떠오릅니다.
“아주머니, 소떡소떡 하나 빼주세요. 저는 매운 떡볶이 먹을래요.”
송이는 하은이가 아니라 송이가 좋아하는 간식을 주문합니다. 그때와 똑같이 하은이가 입을 삐죽거렸고, 옆에서 수지도 따라 합니다. 이제 서로 서먹해졌다가 멀어지고, 셋이 둘이 되고, 송이만 혼자가 되겠지요.
셋이서 조금 걷다가, 하은이와 수지가 학원에 늦었다며 가버립니다. 송이는 터덜터덜 걸어서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습니다. 까마귀가 정류장 구석에 내려앉아서 숨을 헐떡입니다.
“그렇게 빠르게 달리는 아이는 처음이에요. 게다가 얼마나 씩씩한지 끝까지 쫓아오지 뭐예요.”
까마귀는 머리를 절레절레 젓다가, 떡볶이 컵을 보고 머리를 갸웃합니다.
“음, 소떡소떡을 사려던 게 아니었나요? ”
“그러려고 했는데, 또 매운 떡볶이를 샀어요.”
송이는 싱긋 웃으며 대답합니다. 떡볶이를 콕 찍어서 입에 쏙 넣습니다. 매콤하고 달콤합니다. 송이도 수요일의 송이도 딱 좋아하는 맛입니다.
송이가 떡볶이를 다 먹자, 까마귀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릅니다.
“자, 따라와요. 한눈팔면 안 되는 거 알죠?”
깃털로 덮이고 노란 부리가 생긴 송이 까마귀도 날아오릅니다. 까마귀가 구름 안으로 사라지고 송이 까마귀도 뒤따릅니다. 눈앞이 하얗습니다. 곧 구름 밖으로 나옵니다.
파랬던 하늘이 온통 까맣습니다. 별이 하나둘 반짝입니다. 깜박깜박, 수없이 많은 별이 사라지고 생겨납니다. 까만 밤하늘이 아름답습니다.
까마귀는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갑니다. 송이 까마귀도 미끄러지듯 따라갑니다. 불이 켜진 버스정류장에 사뿐 내려앉습니다. 깃털과 뾰족한 부리가 사라지고, 송이 까마귀는 송이가 됩니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꼬마별이……”
까마귀가 머뭇머뭇 사과합니다. 송이가 얼른 가방에 달린 꼬마별을 봅니다. 시간 여행을 다녀오기 전에는 멀쩡했던 꼬마별에 얼룩이 묻고 모서리 한 군데가 깨어졌습니다. 송이 마음 모서리도 깨어진 듯 쓰리고 아픕니다.
“괜찮아요. 날 도와주려다가 그런 거잖아요. 까마귀님, 고마워요.”
“다정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까마귀가 쑥스러워하며 말합니다. 송이는 문득 짝 미지가 떠오릅니다. ‘송이야, 괜찮아?’라고 걱정하던 목소리가 들립니다. 송이도 마음속으로 ‘미지야, 다정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하고 말합니다.
“그럼, 난 이만 갈게요. 안녕.”
까마귀가 인사를 하고 푸드덕 날아오릅니다.
“까마귀님, 잘 가요. 안녕!”
송이도 인사를 하며 팔을 힘차게 흔듭니다.
학교 교문 밖으로 나오는 하은이가 보입니다. 하은이는 수지랑 팔짱을 끼고 활짝 웃습니다. 웃음은 샛노란 은행잎만큼이나 눈부십니다.
“하은아, 안녕!”
송이는 냉큼 인사를 합니다.
“어? 송이네……”
하은이가 뚱한 표정으로 알은체를 합니다.
“하은아, 소떡소떡 먹을래?”
송이는 하은이가 좋아하는 소떡소떡을 내밉니다.
“하은이는 나랑 구름이 산책시키러 갈 거야.”
수지가 끼어들더니 하은이 팔을 끌어당깁니다. 구름이는 하얗고 뽀글뽀글한 털을 가진 귀여운 강아지입니다.
“나도 구름이 보고 싶은데, 같이 가도 돼?”
“안 돼. 오늘은 둘이서만 가기로 했어.”
“우리 먼저 갈게.”
수지랑 하은이가 손을 맞잡고는 달아나듯이 가버립니다.
송이는 터덜터덜 걷다가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습니다. 버스를 타려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앉고 싶었습니다. 양손에 소떡소떡을 쥐고 하은이랑 수지가 맞잡은 손을 떠올립니다. 둘은 팔목에 같은 모양 팔찌를 하고 있었는데, 그건 송이가 하은이랑 하고 싶었던 우정 팔찌입니다.
송이는 속상해서 눈물이 납니다. 그때, 그림자 하나가 바닥에 드리웁니다.
“송이야, 괜찮아?”
짝 미지입니다. 송이는 미지가 모두 본 것 같아서 창피합니다. 아는 척하는 미지가 얄밉습니다.
“뭘? 아무 일도 없는데.”
송이 입에서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옵니다.
“그게, 나는, 그냥, 네가 속상해 보여서. 음, 미안해. 갈게, 안녕.”
미지가 우물쭈물하다가 돌아섭니다.
송이는 괜히 미지에게 화를 낸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미지는 조용하고 말이 느리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보다 생각이 많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정합니다. 손에 든 소떡소떡을 보자, 미지랑 나눠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 미지야. 잠깐만……”
송이가 미지를 부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미지가 돌아보더니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듭니다. 얼떨결에 송이도 손을 흔듭니다.
미지가 가고, 송이는 또 혼자입니다. 혼자서 소떡소떡을 먹기는 정말 싫었습니다.
그때입니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옵니다. 은행나무 가지가 사납게 흔들리고, 노란 잎들이 날아오릅니다. 꼬마와 손잡고 걷던 엄마가 몸을 구부리며 꼬마를 감쌉니다. 하얀 비닐봉지가 횡단보도를 껑충껑충 건너갑니다. 까마귀 한 마리가 바람에 휘청이더니 아래로 고꾸라집니다.
“으앗!”
송이는 그만 눈을 질끈 감습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서 실눈을 뜨고 길을 봅니다. 어디에도 까마귀는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 봤나? 그래도 다행이다.”
휴,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정류장 구석에 웅크린 그림자가 움직입니다. 송이는 놀라서 소떡소떡 하나를 떨어뜨립니다.
“흐음, 정말 맛있는 냄새야!”
그림자가 잽싸게 소떡소떡을 물고 구석으로 갑니다.
“까, 까마귀?”
눈을 깜박이고 봐도 까마귀가 틀림없습니다. 까마귀는 소떡소떡을 쪼아먹기 바쁩니다. 송이는 무서워서 도망치려고 일어섭니다.
“그 소떡소떡 안 먹을 거면 나 줄래요?”
까마귀가 어느새 다 먹고는 애처로운 눈길로 송이를 봅니다.
“공짜로 달라는 건 아니에요. 값은 충분히 치를게요.”
뒷걸음질치던 송이는 귀가 솔깃합니다.
“저는 특별한 여행자랍니다. 과거라면 어디든, 원하는 시간을 여행할 수 있어요. 지금 막 여행을 다녀왔더니 배가 고파서요.”
까마귀는 소떡소떡에 눈을 떼지 못합니다.
“진짜로 시간 여행을 한다고요?”
송이는 사실 되돌리고 싶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도 시간 여행을 하게 해줘요. 그럼 이걸 줄게요.”
“음, 좋아요. 대신 딱 한 번만이에요.”
까마귀가 승낙하자, 송이는 얼른 소떡소떡을 줘버립니다.
까마귀는 남김없이 싹싹 먹고는 펄럭 날아오릅니다.
“잠, 잠깐만!”
송이는 소떡소떡만 먹고 내빼는 까마귀를 잡으려고 손을 뻗습니다. 차라락, 손가락부터 팔까지 까만 깃털이 돋아납니다. 온몸이 깃털로 덮이고, 노란 부리가 생깁니다. 한순간에 까마귀로 변해서 하늘을 날아갑니다.
“한눈팔지 말고 잘 따라와요.”
앞서가던 까마귀가 소리치고는 구름 안으로 사라집니다. 송이 까마귀는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뒤쫓아갑니다. 눈앞이 하얗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돌아가고 싶은 시간을 떠올려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 순간 송이 머릿속에 지난 수요일이 떠오릅니다.
송이와 하은이는 새 학기에 첫 짝이 되고 계속 단짝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여름방학이 지나고, 하은이와 수지가 부쩍 친해졌습니다. 둘에서 셋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셋은 같은 노래를 좋아하고, 같은 게임을 하고, 같이 화장실을 가고,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수요일에는 학교를 마치고 같이 얌얌얌 분식점에 갔습니다. 하은이가 소떡소떡을 골랐고, 수지도 소떡소떡을 골랐습니다. 언제나 하은이가 좋아하는 간식을 따라 골랐지만, 그날따라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슬쩍 하은이 눈치를 보고는 매운 떡볶이를 골랐습니다. 그러자 하은이가 입을 삐죽거렸고 수지도 똑같이 따라 했습니다. 송이는 그때로 돌아가 매운 떡볶이가 아니라 소떡소떡을 고르고 싶었습니다.
눈앞이 파랗습니다. 어느새 구름 밖으로 나왔습니다. 까마귀는 미끄러지듯 공기를 타고 내려갑니다. 날개를 크게 퍼덕이며 바닥으로 내려앉습니다. 송이 까마귀도 뒤따라 내려옵니다.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는 다시 송이로 변신합니다.
송이는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아무리 봐도 방금 앉아 있던 버스정류장이랑 똑같습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귀한 시간 여행을 날려버릴 거예요? 빨리 얌얌얌 분식점으로 가세요. 꺄악!”
까마귀가 날개를 파닥거립니다.
송이는 정신이 번쩍 듭니다. 엉덩이에 묻은 낙엽을 털지도 않고 달려갑니다. 교문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송이가 보입니다. 그러니까 수요일의 송이 말입니다. 조금만 있으면 하은이와 수지가 청소 당번을 마치고 나옵니다.
송이는 수요일의 송이에게 달려가서 ‘매운 떡볶이 말고 소떡소떡 골라. 네가 먹고 싶은 간식 말고 하은이가 먹고 싶은 간식을 골라. 무조건 똑같이 따라 해’라고 하려고 생각합니다.
“시간 여행자는 절대로 자기 자신과 만나면 안 돼요.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곧장 원래 시간으로 돌아와버리니까요.”
언제 따라왔는지, 담벼락 위에서 까마귀가 비밀이라도 말하듯 속삭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쪽지를 보낼까요? 지금 그럴 시간이 없는데……”
송이는 발을 동동거리다가 눈을 반짝입니다.
“앗, 좋은 생각이 났어요. 내가 친구들이랑 있을 동안 송이를 다른 곳으로 가게 해줘요.”
“아,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한 가지 소원만 약속했으니까요.”
“그런 게 어딨어요. 소떡소떡은 두 개나 먹었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죠? 하나는 흘린 거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맞다! 까마귀님 때문에 놀라서 흘린 거잖아요. 그러니 제발 도와줘요. 이러다 친구들이 오겠어요.”
“알았어요, 알았어. 정말 이번 한 번만이에요.”
까마귀는 새초롬하게 말하고는 날아오릅니다. 수요일의 송이 뒤로 사뿐 날아가서 가방에 걸린 인형을 낚아챕니다.
수요일의 송이만큼이나 송이도 깜짝 놀랍니다. 인형은 송이랑 하은이가 둘만 단짝 친구였을 때, 함께 고른 꼬마별 인형입니다. 꼬마별은 송이랑 하은이의 우정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송이가 말릴 틈도 없이 까마귀는 꼬마별을 가지고 도망칩니다. 수요일의 송이는 소리를 지르며 까마귀를 쫓아갑니다. 저만치 앞에서 꼬마별이 툭 떨어집니다. 수요일의 송이가 달려가면 까마귀는 다시 인형을 잡아채어 도망칩니다. 수요일의 송이와 까마귀가 점점 멀어집니다.
“송이 너, 왜 여기 있어? 교문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잖아.”
“너 찾는다고 시간이 조금밖에 안 남았어. 빨리 학원도 가야 하는데.”
하은이와 수지가 송이를 보자마자 불평을 쏟아냅니다.
송이는 친구들을 보자 반가운 마음 대신 억울한 마음이 듭니다. 수요일의 송이가 청소 당번인 둘을 한참이나 기다렸다는 걸 아니까요. 혹시나 길이 어긋날까봐 화장실 가고 싶은 것도, 배고픈 것도, 심심한 것도 꾹 참았으니까요.
“너 계속 꾸물거릴 거야? 빨리 와!”
하은이와 수지가 얌얌얌 분식점 쪽으로 가며 툴툴거립니다.
‘송이야, 기다려줘서 고마워.’
‘혼자 심심했지. 미안해.’
송이는 속상해할 수요일의 송이를 위해 속삭입니다. 친구들 대신 사과를 합니다.
얌얌얌 분식점 아주머니가 소떡소떡 세 개를 집어올립니다.
“너도 소떡소떡이지? 내가 대신 주문해줘서 고맙지?”
하은이가 선심 쓰듯 말합니다.
송이는 ‘고마워’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옆에서 수지가 왜 그러냐는 듯 송이 팔을 툭 칩니다. 이제 ‘고마워’라고 말하고, 소떡소떡을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됩니다.
교문 앞에서 혼자 기다리던 수요일의 송이가 떠오릅니다. 달리기 일등을 하고 신났을 때, 땀냄새난다는 핀잔을 듣던 화요일의 송이가 떠오릅니다. 교실에서 우산을 가져오는 동안 친구들이 가버려서 슬펐던 월요일의 송이가 떠오릅니다. 여름방학에 꼬마별을 잃어버린 하은이보다 더 속상해하던 송이가 떠오릅니다.
“아주머니, 소떡소떡 하나 빼주세요. 저는 매운 떡볶이 먹을래요.”
송이는 하은이가 아니라 송이가 좋아하는 간식을 주문합니다. 그때와 똑같이 하은이가 입을 삐죽거렸고, 옆에서 수지도 따라 합니다. 이제 서로 서먹해졌다가 멀어지고, 셋이 둘이 되고, 송이만 혼자가 되겠지요.
셋이서 조금 걷다가, 하은이와 수지가 학원에 늦었다며 가버립니다. 송이는 터덜터덜 걸어서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습니다. 까마귀가 정류장 구석에 내려앉아서 숨을 헐떡입니다.
“그렇게 빠르게 달리는 아이는 처음이에요. 게다가 얼마나 씩씩한지 끝까지 쫓아오지 뭐예요.”
까마귀는 머리를 절레절레 젓다가, 떡볶이 컵을 보고 머리를 갸웃합니다.
“음, 소떡소떡을 사려던 게 아니었나요? ”
“그러려고 했는데, 또 매운 떡볶이를 샀어요.”
송이는 싱긋 웃으며 대답합니다. 떡볶이를 콕 찍어서 입에 쏙 넣습니다. 매콤하고 달콤합니다. 송이도 수요일의 송이도 딱 좋아하는 맛입니다.
송이가 떡볶이를 다 먹자, 까마귀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릅니다.
“자, 따라와요. 한눈팔면 안 되는 거 알죠?”
깃털로 덮이고 노란 부리가 생긴 송이 까마귀도 날아오릅니다. 까마귀가 구름 안으로 사라지고 송이 까마귀도 뒤따릅니다. 눈앞이 하얗습니다. 곧 구름 밖으로 나옵니다.
파랬던 하늘이 온통 까맣습니다. 별이 하나둘 반짝입니다. 깜박깜박, 수없이 많은 별이 사라지고 생겨납니다. 까만 밤하늘이 아름답습니다.
까마귀는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갑니다. 송이 까마귀도 미끄러지듯 따라갑니다. 불이 켜진 버스정류장에 사뿐 내려앉습니다. 깃털과 뾰족한 부리가 사라지고, 송이 까마귀는 송이가 됩니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꼬마별이……”
까마귀가 머뭇머뭇 사과합니다. 송이가 얼른 가방에 달린 꼬마별을 봅니다. 시간 여행을 다녀오기 전에는 멀쩡했던 꼬마별에 얼룩이 묻고 모서리 한 군데가 깨어졌습니다. 송이 마음 모서리도 깨어진 듯 쓰리고 아픕니다.
“괜찮아요. 날 도와주려다가 그런 거잖아요. 까마귀님, 고마워요.”
“다정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까마귀가 쑥스러워하며 말합니다. 송이는 문득 짝 미지가 떠오릅니다. ‘송이야, 괜찮아?’라고 걱정하던 목소리가 들립니다. 송이도 마음속으로 ‘미지야, 다정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하고 말합니다.
“그럼, 난 이만 갈게요. 안녕.”
까마귀가 인사를 하고 푸드덕 날아오릅니다.
“까마귀님, 잘 가요. 안녕!”
송이도 인사를 하며 팔을 힘차게 흔듭니다.
윤경
숲이 보이는 책상에서 글을 씁니다. 동화책 『달 도둑 두두 씨 이야기』 『숲속의 꼴깍꼴깍 파티』가 있습니다.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뛰다가 무릎이 깨진 날이었어요. 결국 버스는 놓치고 버스정류장에 혼자 앉았는데 갑자기 돌개바람이 불더니 동화 안의 장면이 펼쳐졌어요. 진짜로 눈앞에서요.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길 위로 까마귀가 바람에 휘청였고, 저는 놀라서 그만 눈을 감아버렸죠. 다시 눈을 떴을 땐,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요. 아마 그 까마귀는 제 마음으로 날아들어왔나봐요. 그래서 이 이야기가 시작됐으니까요. ^^
2024/12/04
7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