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소설가의 영화, 추락 혹은 도약
이처럼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는 영화가 결말을 향해 나아갈수록 텍스트에 유리하게 전개되며, 거역할 수 없는 논리적 요구를 따라 마지막 순간에 이미지는 스크린으로부터 물러난다. 브레송이 도달한 지점에서, 이미지는 사라짐으로써만 더 많이 말할 수 있다. 관객은 하얀 스크린 위의 빛을 유일하게 가능한 표현으로 삼는 저 의미의 밤으로 점차 끌려든다. (…) 말라르메의 하얀 페이지나 랭보의 침묵이 언어의 지고한 상태였던 것처럼, 여기서 아무런 이미지도 없이 문학으로 환원된 스크린은 여기서 영화적 리얼리즘의 승리를 표시하고 있다.
20세기에 나온 영화비평 가운데 영화와 문학이 맺는 모호한 관계를 가장 예민하게 해부하는 텍스트라 할 만한 「〈시골 사제의 일기〉와 로베르 브레송의 문체론」에서 앙드레 바쟁이 남긴 해석이다. 바쟁은 프랑스의 영화감독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1951)의 결말을 묘사하며 “아무런 이미지도 없이 문학으로 환원된 스크린”을 성취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병에 걸린 젊은 사제 앙브리쿠르의 마지막 시간을 주시한다. 일기장과 연필을 손에 쥘 수도 없을 만큼 쇠약해진 사제는 작은 침대를 벗어나 열린 창문 앞으로 향한다. 하지만 사제는 창밖을 바라보는 대신 등을 돌리고 의자에 앉아 추위에 떠는 어린아이처럼 허름한 담요로 몸을 감싼다. 사제는 골똘히 허공을 바라본다. 카메라는 그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지만, 사제가 바라보는 대상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신 그의 표정에서 화면을 암전한다. 다시 스크린이 열리면 텅 빈 백색 배경의 화면 가운데 검은 십자가만이 제시되고, 사제가 작은 방 안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는 편지 내용이 낭독된다. 이미지는 감춰지고 목소리는 장악한다. 기묘하게도 바쟁은 이미지가 기화되고 소설의 텍스트가 영화의 자리를 차지하는 이 마지막 장면이 영화적 리얼리즘의 승리를 표시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결론이다.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영화의 시각적 기능(이미지)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텍스트로만 환원되는 순간이 왜 영화적 리얼리즘의 승리를 표시한다는 걸까?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의 리얼리즘’이란 카메라에 포착된 이미지의 표상을 매개로 세계의 입체적이고 모호한 진실을 보존하는 양식을 가리키지 않던가? 그런데 왜 바쟁은 이미지가 소실되는 순간에서 영화적 리얼리즘의 흔적을 발견한 것일까? 게다가 이 장면의 연출자인 로베르 브레송은 (이따금 문학을 원작으로 삼으면서도) 문학 텍스트의 성질과 영화만의 속성을 확고하게 구분하는 방법론을 견고하게 고수했고, 연극과 문학의 관습적 수단을 그대로 수용하는 유형의 영화를 ‘시네마’로 규정한 뒤 이와 구별되는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영화를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언어로 옹호했던 감독이다.
영화가 단순한 세계의 복제나 재현이 아니라 독립적인 세계의 재구성으로 향해야 한다는 브레송의 믿음은 리얼리즘이 아니라 모던 시네마의 전형적인 계율에 속한다.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노트』에서 브레송은 영화적 재현의 논리를 두고 이렇게 적는다. “우리가 재현에 빠지고 싶지 않다면, 파편화는 불가피하다. 존재와 사물들을 분리시킬 수 있는 부분들로 볼 것. 이 부분들을 고립시킬 것. 이들에게 새로운 의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부분들을 독립적으로 만들 것.” 이 단호한 전언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브레송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카메라의 기계적 시각에 철저히 저항한다. 영화는 현실의 단면을 복사한 것이 아니라 촬영된 현실을 초과하는 구성된 세계다. 영화의 숏은 그 자체로 특정한 가치를 간직하거나 자족적인 의미를 형성해선 안 된다. 브레송은 “영상(숏) 하나에 절대적 가치는 없다”라고 단언하면서 이미지의 가치는 무엇보다 교환가치에 있다고 규정한다. 브레송의 이미지는 특정한 가치 체계에 속하지 않는다. 영화가 운영하는 것은 절대적 가치가 부여되지 않는 중립적인 교환의 사물들이다.
브레송은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섞어놓으면 참된 것 때문에 거짓된 것이 두드러져 보이고, 거짓된 것 때문에 참된 것을 믿지 못하게 된다.”라고 말한다.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소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를 각색한 〈시골 사제의 일기〉는 브레송적 관점에서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뒤섞인 과도기적 작품이다. 이 영화에는 전문 배우와 브레송이 추구한 비전문 배우(모델)가 공존하고, 시네마토그래프의 속성과 문학의 문장이 뒤얽히며, 무엇보다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중립적 이미지와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생산하는 문학적 언어가 충돌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브레송 영화에 기록된 영화적 리얼리즘이란 이 충돌로부터 나온다.
〈시골 사제의 일기〉는 카메라가 재현하는 세계의 리얼리티가 아니라 한 편의 영화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협상의 리얼리티를 노출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그럴듯한 연속적 시공간의 장면들로 제시되지만, 이 과정에는 영화와 문학이 나누는 교묘한 접속과 긴장이 드러나버린다. 바쟁의 관점에서 〈시골 사제의 일기〉는 문학의 언어를 전면에 내세우고 오직 문학적 텍스트에만 결부된 시각까지도 영화의 표상으로 삼는 영화다. 달리 말해 영화의 철저한 물러남을 통해 영화와 문학이 형성하는 이질적인 관계를 시청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브레송이 성취한 영화적 리얼리즘의 한 부분이다. 이 영화의 결말에서 외양상으로 영화는 물러나고 사라진다. 그러나 스크린에 텍스트를 완벽하게 수용하고 그것의 언어와 물질성을 영화에 끌어들이는 것은 온전한 영화적 역량이다. 〈시골 사제의 일기〉는 소설의 존재를 영화 속에 융해한다기보다 영화의 겉면에 남겨진 소설의 기호를 부각하는 편을 선택한다.
영화의 미장센은 연속적인 시공간 위에 규칙적으로 구성된 시청각적 기호로 이루어진다. 〈시골 사제의 일기〉의 결말 직전의 신(Scene)은 사제와 침대와 노트와 연필과 창문과 의자가 연쇄적으로 펼쳐지는 시각적 기호들의 결정체다. 하지만 이 결정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충분치 않다. 그가 왜 침대에서 일어나는지, 그가 왜 창문을 바라보는 대신 등을 돌려 의자에 앉는지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사제가 의자에 앉아 바라보는 대상은 빈칸으로 남겨진다. 그 비워진 정보의 자리는 편지의 텍스트가 채우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질서는 비워지고, 그곳에 문학의 역설은 여기서 발생한다. 영화사에서 브레송만큼 영화 매체만의 고유한 표현과 논리에 집착하던 감독은 없다. 그러나 연출자의 견고한 의지와는 무관하게 브레송은 “거역할 수 없는 논리적 요구를 따라” 이미지가 스크린에서 완벽하게 물러나고 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을 연출하고 말았다. 여기엔 단순히 한 명의 영화감독이 직면하고 있는 곤경을 넘어선 영화와 문학,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근본적인 모순이 새겨져 있다.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를 최초로 상영하던 날에 이 장치에 매혹된 마술사 조르주 멜리에스는 뤼미에르에게 영사기를 구매하고 싶다는 제안을 건넨다. 뤼미에르 형제는 멜리에스의 제안을 일축하며 영화는 “미래가 없는 발명품”이라는 유명한 단언을 남긴다. 그 창조주로부터 미래가 없다는 예언을 듣는 사생아로 태어난 영화는 그러나 소란스러운 오락이나 어수선한 볼거리로 남는 대신 주변에 존재하는 양식을 탐욕스럽게 삼켜대기 시작했다. 그 탐욕스러운 수용의 대상은 무엇보다 문학이었다. 서커스나 시각적 놀이기구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던 영화는 빠른 속도로 문학의 관습을 흡수했다. 스토리와 내러티브, 인물의 내면과 감정, 대사와 내레이션, 사건과 행동…… 문학의 관습은 순식간에 영화의 양식을 물들였다.
문학적 양식을 겉면에 두른 영화는 문학을 배제한 채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쩌면 문학의 외형을 알리바이 삼아 영화의 잠재된 가능성을 조금씩 확장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왔다고 말해야 모른다. 고전기 영화를 통과하고 모던 시네마의 영토를 넓혀가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영화는 문학과 분리 불가능한 관계를 맺는다. 영화를 하나의 눈(렌즈)과 세 개의 다리(삼각대)로 이루어진 장애인의 신체에 빗댄 고다르의 표현처럼, 영화는 독립적으로 발을 디디고 선 단독적 개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매체의 침입이 맞닿아 있는 불완전한 평면이다.
하지만 영화는 불안정하므로 다른 매체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었다. D.W 그리피스가 클로즈업과 교차편집이라는 영화 언어를 성공적으로 구축한 것은, 작가 토마스 버크의 원작 시나리오(〈흩어진 꽃잎〉)와 토마스 딕슨 주니어의 소설(〈국가의 탄생〉)을 각색한 데서 기반을 둔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은 칼 마르크스의 ‘대본’에 따라 『자본』을 영화화하기로 하면서 몽타주의 이상으로 향하는 이 궁극적 프로젝트에 “제임스 조이스가 나의 목적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메모했다. 장 르누아르는 20세기의 발명품인 영화로 19세기의 인간들을 묘사하기 위해 귀스타브 플로베르(〈마담 보바리〉)와 에밀 졸라(〈인간 야수〉)의 텍스트를 빌려왔다. 오손 웰스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서사적 원형으로 채택했다(〈맥베스〉 〈오셀로〉 〈심야의 종소리〉), 영화 역사상 최고의 영화로 손꼽히는 앨프리도 히치콕의 〈현기증〉은 프랑스 소설 『죽은 자들 사이에서』를 원작으로 한다. 또다른 역사상 최고의 영화로 선정된 〈잔느 딜망〉의 연출자 샹탈 아커만은 그 자신이 소설을 쓰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현대영화의 출발점으로 거론되는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소설가인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각본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고, 장 뤽 고다르의 <경멸>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동명 원작 소설을 파괴적으로 재구성한 작업이다. 숱한 문학 텍스트의 극적인 상황을 잘라내고 오직 문장만을 낭독하는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영화는 말할 것도 없다. 영화는 문학을 남김없이 끌어들임으로써 문학의 영향권에서 이탈한 언어를 산출한다.
로베르 브레송은 이 불가피한 연루와 결탁의 연대기에 가장 예민한 자국을 남긴 사례다. 그는 조심스럽지만 끈질기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를 탐색했다. 『죄와 벌』을 재구성한 〈소매치기〉, 『백야』를 원작으로 삼는 〈몽상가의 나흘 밤〉. 소설을 소개하는 기능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다고 말한 바 있지만, 브레송의 영화는 분명히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이를 이미지와 사운드의 독자적인 형식으로 재구성하려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온순한 여인〉의 한 장면은 이 재구성의 비밀을 미세하게 비춘다.
〈온순한 여인〉은 전당포를 운영하는 남자와 결혼한 여인의 자살로 시작하고 끝난다. 영화는 같은 상황을 처음과 끝에 반복해서 보여준다. 여인은 2층에서 추락해서 죽는다. 도입부에서 카메라는 여인이 두르고 있던 스카프가 하늘에 흩날리고, 난간에 있던 탁자가 쓰러지는 모습을 포착한다. 여인은 추락해서 시체로 발견된다. 하지만 왜 그녀가 자살을 선택했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소설을 각색한 일반적인 영화라면 남은 시간 동안 그녀가 자살한 이유를 설명하고 선택의 당위를 인과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온순한 여인〉은 반대의 길로 향한다. 브레송은 연기를 부정하고 자동성과 습관만을 남겨둔 ‘모델’을 구체화하면서 인물의 심리적인 동기와 설명을 삭제하고, 행위만을 고스란히 남겨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자살을 이해시키는 원인과 결과로 형성되지만, 브레송의 영화는 단절과 파편화로 끊긴다, 〈온순한 여인〉은 사제의 죽음을 설명하는 문학적 텍스트가 달라붙지 않은 〈시골 사제의 일기〉다.
그러므로 결말에 도착해서 여인의 자살이 반복되지만, 그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남편과 화해한 여인이 왜 자살에 이르렀는지 카메라는 확증할 수 없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조각난 미장센의 파편들을 붙잡아볼 뿐이다. 자살 직전의 여인을 묘사해보자. 거의 모든 장면이 남편의 회상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남편의 기억이 개입할 수 없는 유일한 순간이다. 그녀는 탁자에 놓인 성상(聖像)을 쓰다듬고 있다. 늙은 하녀가 문을 열고 다가오자 포옹을 나누며 남편과 화해해서 행복하다는 말을 건넨다. 하녀가 방을 나가자 옷장에서 스카프를 꺼내 두르고 침대에 앉는다.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리자 몸을 일으켜 문을 열고 창밖으로 향하는 듯 하더니 다시 침대로 돌아온다. 문밖에서 지켜보던 하녀가 사라지면 여인은 탁자 앞으로 걸어가 거울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미소 짓는다.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으로 나간다. 창밖에 선 여인의 얼굴이 화면 가득 채워진다. 그리고 도입부에서 지켜본 여인의 자살이 발생한다.
그녀는 언제 자살을 결심한 것일까? 남편과 화해에 이르러 행복하다고 말하고, 스카프를 두르고, 침대에 앉아 거울을 보며 미소 짓던 여인은 왜 추락을 선택하는 걸까? 영화의 시청각적 기호는 심리적 동기부여가 부재한 인물의 내면을 파악하는 데 무기력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여인은 자살 직전에 성상을 손에 쥐고 있었다. 반대로 브레송의 영화 속 여인의 죽음은 서사적 문맥(남편과의 갈등)으로도, 종교적 문맥(탁자 안의 성화)으로도, 내면적 문맥(거울 앞에 마주한 얼굴)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여인의 자살과 직접적으로 접속하는 것은 오직 창문 앞에 선 그녀의 클로즈업된 얼굴이다. 브레송은 자살하는 여인의 결정과 연결된 모든 문맥을 차단하고 단 하나의 근거에만 연결 짓는다. 그것은 영화(숏)의 문맥이다. 이해 불가능한 여인의 죽음은, 그러나 영화의 연속된 숏 안에서 분명히 묘사되었다.
클로즈업으로 잡힌 여인의 얼굴이 자살하는 신체로 연결된다. 그런데 영화를 지켜보는 우리는 그 자살에 어떤 원인도 설명할 수 없다. 브레송은 다른 매체를 동원해 영화의 빈칸을 채우는 대신, 영화와 문학 사이에 있는 깊은 심연을 영화에 인용한다. 우리는 여인의 얼굴을 지켜보지만, 그녀가 무엇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결심하는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브레송은 여인의 죽음과 연결된 모든 문맥을 차단하고, 영화의 무능력을 직시하게 한다. 영화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인물을 관측하고 행동을 묘사하는 일련의 과정을 매개로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라는 경험 자체가 해체되고 만다. 브레송에게 있어 영화는 인물과 행위의 인과율을 설득하는 매개가 아니라 그 인물과 행위를 생경하게 되돌아보는 장치다.
로베르 브레송에 깊은 존경과 친밀감을 느끼는 또다른 영화감독의 ‘소설가의 영화’를 말할 차례다. 그 감독은 홍상수이며, 그의 스물일곱번째 영화인 〈소설가의 영화〉이다. 홍상수는 여러 차례 젊은 시절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에 담긴 함축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고(이 책의 첫 문단인 “내 안에 축적된 오류와 거짓에서 벗어날 것.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들을 인지하고, 이들을 확보할 것”은 홍상수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전언이다), 〈시골 사제의 일기〉를 보고 난 뒤에 서사 중심의 내러티브 영화나 서사적 관습을 해체하는 아방가르드 실험영화만이 아닌 또다른 방식의 영화 만들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견고한 공식과 문학적 기반을 토대로 텍스트와의 긴장을 형성한 브레송과는 다르게 홍상수는 문학과의 연관성을 소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완성된 시나리오를 폐기하고 당일 작성되는 간략한 줄글로 촬영을 진행한다. 홍상수의 영화는 의지적인 텍스트라기보다는 미끄러지는 우연과 접속되는 말의 활동이다. 그의 방법론과 유사한 시도를 초현실주의 문학의 작법에서 찾을 수도 있을 테지만, 유사성은 방법일 뿐 그들의 결과물에서 오지 않는다.
또다른 이유는 그의 첫번째 영화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시도하는 부정에서 온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홍상수의 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소설을 원작(구효서의 「낯선 여름」)으로 삼는 작품이고, 소설가가 주인공인 영화다. 그런데 정작 만들어진 영화에서 구효서의 원작 소설은 거의 형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반영되지 않았고, 주인공인 소설가 효섭은 낯선 타인의 침입에 살해당하고 만다. 소설은 사라지고, 소설가는 난데없이 죽는다(홍상수 영화에서의 문학의 죽음은 〈강변호텔〉의 시인 영환의 죽음으로 되풀이된다). 홍상수는 소설의 외형을 해체하면서 영화의 영토를 구체화했고, 그 구체화된 장소에서 소설가를 살해했다.
〈소설가의 영화〉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25년 만에 홍상수 영화에 소설가 주인공이 되돌아온 영화다. 살해당한 소설가는 이 위협적인 장소에 무심코 돌아온다. 그런데 〈소설가의 영화〉의 준희(이혜영)는 소설 쓰기를 중단한 작가다. 일터에 나가고 집에 돌아오는 노동자의 하루를 관찰함으로써 사회주의와 자본의 관계를 포착하려던 에이젠슈테인의 구상처럼, 〈소설가의 영화〉는 소설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의 하루를 통해 글쓰기와 영화가 맺는 관계를 낯설게 되비춘다. 글쓰기를 멈춘 준희는 새로운 소설을 쓰는 대신 하루 동안 서로 다른 사람들을 마주치면서 그들에게서 특정한 규칙을 배운다. 준희는 마치 어린아이나 외국인처럼 모든 곳에서 익숙지 않은 규칙과 질서를 배운다. 아름다운 책은 반드시 어떤 종류의 외국어로 쓰여 있다는 프루스트의 말처럼, 〈소설가의 영화〉에는 익숙지 않은 방법에 입문하는 몸짓의 아름다움이 있다.
헌책방에서 준희는 책방 직원에게 수어를 배운다. 준희가 몇 마디 문장을 말하면 책방 직원은 수어로 전달한다. 준희가 말한 문장을 책방 직원이 수어로 표현하고 준희는 직원이 보여준 수어를 그대로 흉내낸다. 준희는 우연히 마주친 영화감독에게 카메라 렌즈 작동법을 배운다. 렌즈를 조정하고 초점을 맞추는 행위를 통해 그녀는 닫힌 공간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다. 열악한 카메라를 사용한 탓에 노출을 과다하게 열어둔 이 영화의 화면은 창밖의 외부가 백색으로 닫힌 것처럼 보이고, 인물들은 투명한 감옥에 고립된 수인(囚人)들처럼 보인다. 유폐된 무대에서 탈출하는 것은 언어와 시각을 조정하는 절차로부터, 내부를 외부로 재구성하는 몸짓에서 산출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준희는 활동을 중단한 배우인 길수(김민희)와 단편영화를 찍으려고 한다. 영화에서 살해당했던 소설가는, 영화를 연출하려는 소설가로 되돌아온다. 그는 언어와 시각을 배우고 마침내 그것을 길수라는 배우를 향해 투사한다. 그들은 하루나 이틀 걸리는 짧은 영화를 만들자는 작은 약속을 공유한 뒤, 대화를 나누고 공원을 둘러보고 술을 마신다. 홍상수 영화에서 약속은 언제나 지연되거나 부정되었고, 약속을 나누는 인물들은 한 번도 미래로 향하지 못한 채 현재형의 시간에 유폐되어 있었다. 언제나 같은 하루를 반복하는 〈북촌방향〉의 성준(유준상)은 어느 골목에서 여인의 카메라에 찍힌다. 그는 카메라 앞에 멈춰 선다. 카메라는 그를 멈추게 한다. 홍상수의 영화는 미래로 향하는 시간이 차단된 폐쇄적 장치다. 어떤 근거도 확신도 없는 준희의 약속은 시인 만수의 말대로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놀랍게도 준희가 연출하고 길수가 출연하는 그들의 영화는 완성되었다. 길수는 극장에 찾아와 준희가 완성한 영화를 스크린으로 본다. 그런데 〈소설가의 영화〉 안에 담긴 ‘소설가의 영화’는 영화처럼 느껴지지 않는 조악한 영상이다. 그 영상 속에서 김민희는 모친으로 추정되는 중년의 여인과 꽃을 꺾고 노래를 부르고 공원을 돌아다닌다. 〈소설가의 영화〉에는 한 편의 영화가 있고,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른 한 편의 영상이 상영된다. 소설가가 완성한 영화를 빌려, 홍상수는 영화의 균질한 외형을 일그러트린다.
조악한 외양의 홈비디오 영상이 스크린에 솟아올라 우리가 알고 있던 영화와 나란히 배열되는 순간, 영화는 기존의 것과 다른 규칙의 유희가 된다. 길수가 감상하던 영화가 끝나고 나면 출연한 배우들과 감독을 알리는 엔딩크레딧이 떠오른다. 영화는 이 순간 끝나버린다. 하지만 〈소설가의 영화〉는 끝나버린 영화와 무관하다는 듯 다음 장면으로 이어진다. 길수는 극장문을 열고 나온다. 어째서인지 ‘소설가의 영화’를 완성한 준희는 보이지 않는다. 제작을 도와준 조카도 없다. 그녀가 영화관의 문을 열고 나오자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세계가 다른 형태로 뒤바뀐다. 극장 직원은 옥상에 담배를 피우러 갔을 거라고 말하지만,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알람까지 설정한 준희가 왜 돌아오지 않는지 파악할 수 없다. 영화의 카메라는 불투명하게 변형된 세계를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온순한 여인〉의 여인이 닫힌 공간에서 추락한다면, 〈소설가의 영화〉의 준희는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도약한다. 두리번거리던 길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면 화면엔 무엇도 남지 않는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서사에서 살해당하던 소설가는 이 장면에 이르러 시각적 존재 자체가 소멸돼버리고, 영화는 그 소멸이라는 사건을 보여줄 수도 없다. 카메라는 그렇게 현실의 단면을 기록하는 역량을 발휘하면서, 변형된 현실의 규칙을 포착할 수 없는 무능력에 직면한다. 영화는 하나의 현실을 그 어떤 형태의 현실과도 접속할 수 있다. 이 장소에서 일반적인 의미의 영화는 사라지고 또한 소설(가)도 사라진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소설가의 영화’를 지켜볼 뿐이다.
김병규
영화평론가. 2018년 Filo 신인평론가에 선정되고 씨네21 영화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평론을 쓰기 시작했다. 만든 영화로 단편 <늦은 산책>(2023), <오후>(2024)가 있다.
2024/12/04
7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