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도 직업일까?

2011년 안양의 어느 주택에서 한 청년이 사망했다. 이웃집 문에 붙은 쌀이나 김치를 얻고자 한 메모는 바깥을 향한 그의 마지막 요청이었다. 그리고 요청의 발견은 너무 늦었다. 그는 시나리오 작가였다. 작가라는 그의 직업은 지병을 돌보거나 생계를 유지할 적정비용을 창출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 몇 개월 앞서 숨진, 1인 인디밴드로 활동하던 음악가에게도 배고픔은 일상이었다. 그의 곡 <도토리>의 노랫말은 그 면면을 짐작게 하며 그가 음원 수익을 가상 화폐로 수령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낳기도 했다. 일상으로 수긍해야만 하는 배고픔, 만연한 갑질 등은 예술인에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이런 죽음들은 세간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지금’이라는 시절이 청년에게만 매섭지도 예술가에게만 혹독하지도 않음에도 예술하는 청년들의 배고픈 죽음은 그것이 ‘자처하는 낭만’이 아님을, 그 비루함의 실체를 가시화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2012년, 예술인복지법이 시행되었다.1)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2021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예술인 개인이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연 수입은 평균 755만 원에 불과하다. 이는 3년 전 통계보다 41% 감소한 수준이며, 예술 활동으로 발생한 수입이 전혀 없는 예술인도 과반에 가까운 비율을 차지했다. 더불어 통계는 예술인 10명 중 8명은 최저생계비를 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월 100만 원도 벌지 못하는 일, 연간 755만 원도 보장되지 않는 예술은 직업으로 성립 가능한가? 직업(職業)의 사전적 의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이다. 지속성도 없고 생계의 유지도 곤란한 예술이라는 일은 여러모로 직업적 요건으로 성립되기에 무리로 보인다.
  문학의 경우, 다른 예술 활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료비’가 들지 않는다고 여겨지곤 한다. 특히 행정에서는 문학의 재료비를 상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 활동에 재료비가 들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산술적으로 타 예술 분야에 비해서는 약소한 수준일 수는 있지만 문학은 방대한 텍스트를 재료로 삼는다. 실제로 내가 하는 문학평론의 경우 적지 않은 텍스트를 요구한다. 글쓰기 노동은 제법 품이 드는 노동인데, 그 품에는 더불어 만만치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니 책상 앞에 앉아 작품을 연구하고 해석을 써 내려가는 동안에 나는 다른 일을 하러 나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내가 글을 쓰는 시간이 재료비와 함께 원고료로 환산되어야만 나는 문학평론가라는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가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원고료는 이를 셈하지 않는다. 출판사 등으로부터 건당 이루어지는 이 비정기적 노동에서는 공력이 생계비로 전환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형편에 출판업계는 열악한 사정 일색이다. 작가들은 일회성 계약의 프리랜서이지만 출판사의 운명을 공동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데, 지면(紙面)은 우리가 문학가임을 증명받는 장소이기 때문이다.2)
  故 최고은 작가가 남긴 메모에는 ‘밀린 돈’들이 곧 들어올 예정이라며 공동의 공과금을 못 내고 있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쓰여 있었다. 그렇다, 우리에겐 ‘밀린 돈’들이 제법 있다(금액이 크지는 않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형국이다). 아니, 돈은 언제나 밀려있다고 말해야 좀 더 정확할 것 같다. 우리는 예술가이지만, 예술은 우리의 직업이 될 수 없다.


예술의 공적 지원은 당연하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구지레하게 늘어놓는 것은 예술을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쉽지 않다는 구체적 언술이 지원의 필요성에 대한 그 어떤 근거보다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이 그 자체로서 긍정적 가치를 지니며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이상적 언사는 차치하고라도 당사자인 예술가들에게는 ‘살아남는’ 것이 더욱 시급하고 근본적인 문제라는 이야기다. 짐짓 예술이 고상하다는 것은 예술가의 삶과는 무관하다. 그런 고상하고 고귀한 것으로의 예술은 되레 저 ‘밀린 돈’들을 그저 멀리서 바라보게만 하는 성가신 프레임으로, 예술가를 노동자의 자리에서 떼어놓고 이런 것들을 초월하는 ‘정신 승리’를 요청하기도 하는 것이다.
  문화예술 자체의 가치가 긍정적이라는 것, 좋은 것이라는 점과 동시에 이러한 예술이 시장 경제에서 실패할 공산이 크다는 점은 예술에 대한 사회적 합의, 상식으로 통용된다. 특히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대중성으로부터 먼 예술, 즉 팔리는 일과 거리가 먼 순수, 전통 예술 분야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3) 그런데 이런 문장을 쓴 필자는 다른 지면에서 문화예술에 대한 공적 지원이 그리 자명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어, 이를 톺아봐야 할 것 같다. 그는 외부로부터 수혜하는 돈이 예술인의 내적 동기와 창의성을 저해할 가능성과 공금 사용에 따르는 증빙의 까다로움, 보조금의 오용 가능성, 예술의 과잉 생산을 이유로 공적 지원의 부정적 작용을 우려하고 있다.4) 이 의견이 다분히 행정적 측면의 논지임을 인지하면서도 행정적 관점만으로는 헤아려지지 않는 것이 예술가에 대한 공적 지원의 근거가 되는 면면일 것이기에 약간의 토를 달아보고자 한다.
  우선, 외부 유입자금이 창작 의욕을 둔감화 할지도 모른다는 기우에는 어쩐지 예술 지원금이 불로소득이라는 어감을 지울 수가 없는데, 비정기적이고 낮은 수준의 수입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액수가 큰 지원금은 그 자체로 창작 동기가 되기에 충분하다. 특히 문학의 경우 지원 시 완성된 작품을 심사에 회부하여 주된 평가 기준으로 삼기에, 되레 이 과정 자체가 문학인 간 경쟁을 심화하여 창작 수준을 상승하는 효과가 있다. 예술가가 노동자로 증명을 받기란 꽤 모호하여 업체 혹은 특정 프로젝트와 계약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프리랜서, 비정규직 혹은 많은 기간 무직의 형태를 유지하는 사정에 지원금은 그 자체로 생명줄인 게다.
  까다로운 행정 절차에 정신을 쏟는 것에 대한 우려는 사려 깊은 일이지만 (개인 간 차이는 있겠으나 타 공공 행정 업무에 비해 그리 까다로운 것도 아니라 여겨진다) 이런 염려에는 행정 절차의 간소화와 담당 부서의 세분화가 따라야지, 지원을 차단함으로써 그 고민을 삭제하는 것이 답이 될 수는 없어 보인다.
  보조금의 오용 가능성 역시 개인 창작자에게는 요원한 일이다. 단체나 운영체로의 집행은 금액과 증빙의 문제가 간단하다고만 말할 수 없겠지만 이 역시 추후 결과물의 검수와 지출 증빙을 통해 증명되어야 할 부분일 것이다. 특히 문학 지원금은 대체로 출판, 낭독회 등을 전제로 수혜되기에 오남용의 확률이 매우 희박해 보인다.
  그리고 예술품의 과잉 공급 문제다. 논자는 이 구조를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정리한다.
‘공급 과잉 → 소득 저하 → 공적 지원 확대 요구 → 보조금 증가 → 공급 과잉’
그는, 우리나라의 예술 시장은 이미 공급 과잉 상태이며 수요공급법칙에 따라 생각할 적에 공급된 예술이 미처 다 소비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적정 수준 이상의 과잉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적 지원이 “자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다른 글5)에서 언급한 바와 충돌한다. 이 주장의 근거가 소비자주권(consumer sovereignty)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시장 경제의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면서도 소비자주권을 원칙으로 삼아 예술이 시장에서 공급 과잉이라 판단하고 공적 지원의 적정성을 지적하는 관점이 합당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공급된 예술이 다 소비되지 않는다는 것은 공급의 과잉이라는 논리가 비약적으로 해석되는 것은 나뿐일까? 이 과정에서 공급 과잉이란 지표가 지나치게 양적으로만 산출된 것은 아닌지, 또한 그 준거 지표는 어떤 집단을 가리키고 있는지와 같은 의구심은 저 도식이 소외시키는 예술가의 존립, 더 근본적으로는 예술의 근원적 성질 그 탄생의 자리에 대한 불안정성을 확인할 따름이다. 예술은 소모와 소비를 탄생의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소비자 주권주의를 중심으로 그는 다른 논고에서 좀 더 세밀한 근거를 드는데, 예술 소비자들이 소비 행위를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실태조사가 그것이다.6) 응답자의 31.7%가 관심 가는 프로그램이 없음을, 21.6%가 시간 부족, 19.1%가 경제적 부담을 그 이유로 꼽았다. 그는 이 결과에 대해 “예술 행사를 관람하고 싶어도, 예컨대, 돈이 없거나 혹은 여유시간이 없어서 향유활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실제 소비수준이 최적 수준이라고 볼 수 없다”면서, 이 수치는 소비자의 선택에 따른 시장의 결괏값이기에 “우리나라에는 예술결핍이라는 문제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니까 돈이나 시간적 여유가 이유가 되지 않으므로 최적 수준의 소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신자유주의식 시장 경제 논리로써의 해석은 그야말로 피상적인데, 심지어 저 수치에는 그가 짚고 있는 문제점인 시간과 돈이라는 문제의 지점, 예술 향유를 하고 싶지만 차선으로 미루어둘 수밖에 없는 사정이 그대로 드러남에도 그보다 앞서는 것이 과잉공급된 안일한 예술의 수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 시간 부족과 경제적 부담의 수치를 합산하면 그 수치가 얼마인가? 이런 수치의 산정이 마냥 옳진 않지만, 지원금이라는 공적 자금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명한 지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예술 향유가 최적 수준이라고 눈 감아버리기에 40.7%라는 지표는 너무도 커 보인다.
  예술의 발달사를 보더라도 ‘먹고 살기’가 해결되고 난 다음의 인간 본능은 쉼, 안정, 고양을 향해 나아가게 스스로를 부추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먹고 살기가 그리 여의치 않다. 신자유주의의 강화와 예기치 못했던 팬데믹은 생의 기반을 흔들고 부채를 쌓아올리는 식으로 또 다른 재앙을 지속시키고 있다. 위기마다 예술은 생존에 그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사정에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지만 이 조건에서라도 ‘갓생’(모범적이고 부지런한 삶)을 살겠다는 생들은 넘쳐난다. 이 생을 누가 도울 수 있을까? 무엇이 인간의 삶을 체념이 아닌 수긍으로 다독일 수 있나? 역설적이게도 생존으로 고달픈 그 자리야말로 오랜 위로로서의 예술의 자리가 아닐까? 그런 위로는 한 인간을 향한 가장 다정한 존중의 방식일 수 있다. 자신의 존엄을 확인한 인간은 곁의 누군가를 위로한다. 그렇게 공동체의 다정함은 쌓아올려지는 것이다. 그런 예술의 작용을 알기에 인간 사회는 오래도록 예술을 원하고 길러온 게 아닌가? 팬데믹이 까발린 것은 틀림없이 우리의 가장 허약한 부분들이었다. 황폐한 이 세계에서 예술은 그 무용성의 정의를 다시 쓰며 약한 것들의 존재를 다시 읽어내고 있는 중이지 않은가? 우리 사회는 예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술 지원금, 수혜자는 누구?

그런 상황과 곤궁함의 와중에도 예술 지원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때 지원의 대상은 누구여야 할까? 얼핏 지원금이 예술가 개인에게 돌아간다고 생각되지만, 이것이 공적 지원일 경우 그 범위와 대상에는 이견이 있다. “정부가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목적은 수혜를 받는 예술가 개인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을 발전시키고 문화예술적 경험을 통해서 국민의 삶과 질을 고양하는 것”임을 적시하는 문장은7) 공적 지원과 예술가 사이에 국민의 존재가 나란히 있음을 상기시킨다. 즉 공적 지원이란 자금의 출처가 국민이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연구자가 밝히듯, 이런 논점들은 ‘한정된 공적 자원의 현명한 배분’을 위해 행정적으로 사료되어야 마땅한 지점인 것이다.
  여러 행정적 관점은 자금을 출연한 국민, 즉 시민 사회가 공적 지원의 수혜자, 공적 지원으로 생산된 예술의 종착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혀 틀리지 않음에도 이런 목표의 지점이야말로 예술의 종속성과 독립성이라는 태생적 아포리아를 건드린다. 예술이 어떤 목적이나 이익에 종속되지 않은 채 자체의 가치로서 존립하게 하려면 예술가의 창작에 수반되는 활동 역시 그러해야 하지만, 그런 생의 존속을 위해 예술가가 ‘후원’을 받아왔음을, 그리하여 예술사가 유지되어 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공적 지원금의 출처를 근거로 하여 수혜를 시민 사회로 규정할 때 예술가는 마치 시민 사회와 외따로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기묘한 분리가 발생한다. 예술가도 엄연히 시민의 한 사람인데 말이다. 거기다 예술은 그 범위와 분야가 광범위한데, 문화, 관광, 예술, 체육을 한 바구니에 넣고 예산을 배분하는 것 역시 예산과 지원금의 수혜 주체에 혼선을 주는 요인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는 응당 더 큰 효과의 창출을 지표로 순위를 매기게 될 것이기에 자본의 재투자는 소위 ‘K-’하는 식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문화, 관광, 대중 예술 분야에 더 많은 몫이 할당되는 구조를 낳는다. 예술이 시장 경제의 논리로 흡수되어야 살 수 있다는 결론이 나버리는 것이다.
  지원이 ‘청년’8)에게만 집중되는 것 역시 시장 경제로 예술을 끌어들이는 요인일 수 있다. ‘청년’이란 생애주기의 구분은 다분히 정치, 경제적으로 사용되는데 청년은 생산력의 주요 축이기 때문이다. 또한 소비의 축대이기도 하므로 이들에 대한 지원은 ‘남는 장사’로의 확률이 증대된다. 그러나 예술가의 경우 그 생애주기를 생산과 소비적인 측면에서 규범화하기가 힘들다. 이를 규정하고자 한다면 등단제도 등에서 나이의 제한을 두어야 하는 식의 오류가 발생한다. 이에 예술인 지원제도에서 청년의 범위를 따르는 경우, 그것이 공적 생산의 측면에서 일어나는 행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럴 때는 행정적 관점의 주장에 따라 지원금의 사용을 논해야 한다는 결론에 닿게 된다. 여러모로 예술가의 지원은 그 요건에서 나이의 제한을 따르기보다는 작품의 주제나 내용면의 독립적 준거를 마련하여 지원하는 편이 그 독립성을 다소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예술할 수 있을까?

예술가는 공적 지원의 대상으로, 또 시민 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사회가 예술을 우대하고 지원하는 구조 속에서 예술가가 존중받고 시민 사회가 이를 넉넉히 누리는 것은 이상에 불과할까? 그런 면에서 한정된 공적 지원금을 보충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기업의 예술 후원, 메세나(Mecenat)9)이다. 실제로 많은 기업들이 메세나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런 풍토는 기업, 예술가, 시민이라는 수혜의 지점을 다각도로 충족하는 선순환의 사례가 되고 있다. 기업은 기업의 이미지 상승과 홍보 채널로 예술가를 후원하고 예술가는 그 후원으로 ‘살아남아’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다.10)
  예술의 후원은 공적 지원이 가리키는 공동의 선을 이룩하기 위한 예술의 이상이라는 전제적 목표를 통해 예술가를 보호하여 예술을 창출하며 그로 인한 시민 사회의 풍요를 보장해야 한다. 이외에도 그것이 지원하고자 하는 방향성과 분야별 선정에 대한 공정성 확보와 합의점 도출이라는 시행의 까다로움이 있다. 민간의 메세나 활동으로 그 역할이 배분될 시 기업에 주는 세제 혜택 등으로 선순환의 제도 만들기와 형평성의 문제 등 고려할 지점이 많아 이는 그리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다. 그렇기에 실상 특정 분야의 한 귀퉁이에 몸담고 있다고 해서 나의 이런 논지가 발언으로 성립 가능한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특별히 행정적 관점의 주장을 반박하며 이 글을 끌고 나간 데에는, “내재적 동기 비율이 더 큰 예술가들에 의한 창작활동은 여전히 계속 될 것이”기에 “공적 지원이 전혀 없다고 해서 예술창작활동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과 함께 “불만 그룹이 시장에서 퇴출된다고 해도 매년 상당한 규모의 신진 예술가(예술중·고·대학 졸업생)들이 새롭게 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온다”는 주장의 기저가 매우 잔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동기에 의해 생계의 곤란을 무릅쓰고라도 예술을 할 사람은 언제든 생산되며 그렇기 때문에 앞선 예술가들이 과잉공급을 하지 말고 탈락하게 두어야 한다며 예술지원금 축소에 대해 “‘임금님은 벌거벗었다’라고 외쳤던 어린 아이와 같은 솔직함과 용기”를 갖고 말할 수 있었야 한다는 주장은 예술인 뿐만 아니라 예술인이 되고자 하는 미래세대까지도 압박하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11) 또한 적당한 생계비로 환원되지도 않는 예술 활동에 (개인 환산분으로는 적고, 기회도 많지 않은) 공적 지원금을 바라보며 근근이 살아가는 예술가가 마치 공적 지원금으로 개인의 배를 불리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며, 이런 행정적 논의와 예술 지원금의 당위 논의에서 뜻밖에 소외되는 것이 바로 예술가 당사자일 수 있다는 우려 역시 이 글의 논지 중심에 있다. 지원금은 예술가와 예술의 향유자라는 양 주체를 고르게 존중하는 방식으로 쓰여야 마땅하다.
  예술은 그 사회의 수준을 드러내는 지표다. 그 다양성은 어떤 외화벌이로 환산되는 일보다 한 사회의 정서적 안정과 치유, 즐거움이라는 향유, 사회의 새로운 독창성의 근원 형성 등으로 환원되어 시민의 정서 속에 스며든다. 그리고 그것이 공적 지원을 받는 예술 활동의 궁극적 목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예술을 보다 독립적이고 온전히 지원하는 일은 꽤 장기적 관점이 필요해 보인다.
  크베브리(qvevri)는 물레를 빠르게 돌려 연질의 흙으로 한달음에 빚어 올리는 방식과는 달리 꾸덕한 찰흙 반죽을 덧대어가며 붙이고 잇는 방식으로 빚어내는 항아리의 이름이다. 덧붙이기는 먼저 빚은 것이 많은 시간을 통과해 충분히 마르고 난 뒤에야 가능하다. 성급히 덧대 올렸다가는 이음매가 갈라져 망가져 버리는 것이다. 크베브리를 빚는 마음으로 예술을 지원하고 그 숙성의 시간을 기다릴 인내심이 없고서야 예술가에 대한 지원은 그 사각지대의 범위만을 넓힐 뿐이다. 무작정 지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모두의 본능적 요청이다. 그리고 예술을 하는 당사자는 시민이고, 노동자이다. 또한 예술가이다. 예술이 직업이 될 수 없는 세계에서 예술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저 항아리를 빚는 마음이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후에야 그 항아리에서 오래 익은 포도주를 모두 함께 마실 수 있지 않을까?12)

황유지

문학평론가.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으로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대산창작기금을 수혜했다. 2022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으로 공적기금을 수혜한 경험이 있다.

위로이고 목소리인 문학은 그래서 어디든 닿을 수 있다.

2024/11/20
70호

1
예술인 복지법에 따라,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등록 절차를 거쳐 예술인임을 증명해야 한다. 해당 절차자체가 복잡하지는 않으나 인정 심의 기간이 정해져 있다. 신청은 상시 가능하지만 승인은 일정 날짜에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때, 서류 미비 등의 문제가 있을 경우 이를 즉시 조치하여 심의를 계속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추후 통보를 받고 다음 심의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런 절차를 거쳐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승인을 한 날로부터 복지 재단이 인정하는 예술인이 된다. 그러니 만약 내가 2022년 등단을 하고 이후 작품 활동을 지속하였어도, 예술인활동 증명을 하지 않았다면 행정이 인정한 예술인은 아닌 셈이다. 실제 예술 활동기간과 행정적 ‘예술인 활동기간’ 간 시차가 발생하는 것이다. 예술인복지재단은 ‘신진예술인’(승인 후 2년간)과 ‘일반예술인’을 분리하여 지원 자격의 대상으로 삼는데, 예를 들어 예술활동준비지원금은 신진예술인의 경우 생애 1회 300만 원, 일반예술인은 격년 200만 원씩 지원한다(물론 지원자 모두 지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
이런 사정에 원고료의 정산 문제는 글쓰기 노동을 더욱 열악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청탁서에는 원고 마감일이 명시되어 있지만 고료 입금에 대한 명시는 빠져 있기 일쑤다. 몇몇 출판사나 웹진 운영체는 이를 개선하고자 명기를 하는 추세이지만 원고 마감과 고료 지급 사이에는 월간의 경우 한 달, 계간의 경우 두 달, 반 연간의 경우 그 이상 등으로 시차가 발생하며, 입금 시기는 말 그대로 시기로 가늠될 뿐 일정한 날짜로 명시되지 않는 경우가 다수다. 이는 낮은 고료와 함께 생계의 불안정성, 전업의 불가성을 높이는 요인이기도 하다. 또한 업계의 관행상 ‘발간 후’ 입금, 즉 원고를 쓰고 제출하더라도 사정으로 인해 발간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원고료를 받을 수 없다는 지점은 이 노동의 열악성과 종속성을 드러낸다. 더러는 고료가 누락되는 경우도 있는데, 입금 기한의 명시가 없는 경우 이 누락에 대해 문의 시기를 가늠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 또한 함정이다. 작가가 적은 고료를 독촉하기 위해 해당 출판사에 문의, 항의하기란 체면을 깎아 먹는 일로 여겨지는 관행이 크고, 다들 아는 처지라 묵과하기도 하며, 다음 지면을 위해 참는 부분도 없지 않을뿐더러, 적은 돈이니 더욱 채근이 힘들다는 것도 이상스런 지점이다. 이런 사정에 출판사가 공적 지원금을 수혜할 경우 작가가 비교적 빠르고 정확한 날짜에 원고료를 수령할 수 있다는 점은 출판 생태계의 운명과 함께 작가의 삶을 안정화하는 공적 지원의 긍정적 효과로 볼 수 있다.
3
김정수, 「문화예술 공적 지원에 대한 검토와 재성찰: 경기문화재단의 문예진흥 지원사업을 중심으로」, 《문화정책논총》 20호, 2008년 11월.
4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웹진 《A-SQUARE》 12호는 ‘문화예술 재원 조성과 발전 방향’을 주제로 다룬다. 가져온 의견은 김정수, 「문화예술 공적 지원의 명암: 공적 기금의 의의와 과제」, 《A-SQUARE》 12호, 2024년 9월.
5
김정수, 앞의 논문.
6
김정수, 「좀비예술가와 벌거벗은 임금님: 우리나라 예술지원정책에 대한 비판」, 《문화정책논총》 30호, 2016년 1월.
7
정홍익의 이 문장을 인용하며 김정수는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이 어디까지나 주민들의 문화복지를 위한 수단이라고 정의한다. 공적 지원을 받는 창작활동에 한해서는 주민들의 문화 향수 대상이 될 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공공기금은 ‘공짜 점심’이 아”니라고 덧붙인다. 김정수, 「문화예술 공적 지원에 대한 검토와 재성찰: 경기문화재단의 문예진흥 지원사업을 중심으로」, 《문화정책논총》 20호, 2008년 11월.
8
청년 기준법이 지정하는 ‘청년’은 19세~34세이며 이 기준은 지원제도나 지자체마다 상이하다. 대한민국의 청년 기준법은 단계적으로 그 기준을 상향하여 37세~39세를 청년의 범위로 지정하려는 계획에 있다. 예로 현시점, 서울 도봉구의 청년은 19세~45세이며, 경북 영양군, 청도군, 예천군, 봉화군, 울진군의 청년 기준은 19세~49세이다. 이런 다양한 기준들은 ‘청년’이라는 개념이 정치, 경제학적이며 사회의 형편에 따라 달라지는 ‘임의적’인 것임을 가리킨다.
9
메세나(Mecenat), 기업이 문화 예술에 대한 지원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고 나아가 국가 경쟁력에 이바지하는 활동을 통칭하는 용어. 로마 제국 정치가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Gaius Clinius Maecenas)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0
한 기업의 관계자에 따르면, 기업이 문화예술 후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① 기업 브랜드 이미지와 사회적 평판 개선 ② 협력사와 동반성장 및 임직원의 자긍심 고취 ③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 효과 ④ 사회와 기업의 혁신성과 창조성 증진 효과 ⑤ 기업과 기업인의 문화유산 구축과 사회적 임팩트 창출 ⑥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행복 증진과 같이 넓은 폭으로 정리된다. 최재호, 「현대차 정몽구 재단과 예술의 동행 사회 혁신을 위한 창조적 파트너십」, 《A-SQUARE》 12호, 2024년 9월.
11
김정수, 「좀비예술가와 벌거벗은 임금님: 우리나라 예술지원정책에 대한 비판」, 《문화정책논총》 30호, 2016년 1월. 가급적 해석의 오해를 줄이기 위해 해당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12
이 글을 고쳐 쓰는 동안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다. 꾸준히 타인의 위로를 위해 목소리를 내온 작가의 수상 소식에 가장 먼저 술렁인 것은 다름 아닌 대중(거의 동시적으로 출판계)이었다. 서점 오픈런이라니! 환상적이기까지 한 장관이다. 이런 대중의 태도를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을 번역 없이 모국어로 읽는 희열을 느끼고 싶다는 한 시민의 인터뷰에서는 예술에 대한 가장 말초적이고 근원적인 동기가 작동함을 느낀다. 더불어 작가 한강이 문학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차곡차곡 그의 소리를 쌓아왔다는 점도 세간의 이목을 끄는 것 같다. 그렇다, 환경이 전부가 아니지만 환경은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환경을 돌아보자. 예술이 가능한 사회,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사회에서 다시 예술은 오래도록 서서히 ‘좋은’ 인간을 잉태할 것이다. 예술이 필요 없다고 예술 또한 시장 경제 속에 그렇게 버려두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