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토리얼 마치 크리스마스처럼

서효인

올해 여름은 무척이나 길었고, 그만큼 덥기도 더웠다. 시간이 지나면 여름 지나 가을이 오고 무쌍했던 더위도 스르르 물러날 것임을 우리는 알지만 한창 더울 때면 이러다 영영 여름이지 않을까 걱정인데, 마냥 흰소리만은 아닌 게 우리가 자초한 기후 위기에 속수무책일 미래를 생각하면 이 걱정은 실존에 가깝다. 그러한 더위가 끝 모르게 이어지던 8월의 마지막 주말, ‘군산북페어’에 참여했다. 올해는 책을 읽는 사람이, 문학을 찾아주는 독자가 나날이 사라져가는 것이 기후 위기만큼 걱정이었다. 그 걱정을 군산에서만큼은 조금 덜할 수 있었다. 행사장에서 마주친 독자, 서점, 출판사, 작가들의 눈빛은 그래도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걸 권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연대하고 신뢰하는 사이가 되었음을 확신하게 해주었다. 참가 준비를 하면서도 이러한 확신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기에, 군산북페어는 내게 마치 크리스마스의 선물 같았다. 마침 군산에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배경이 되는 사진관이 있었다. 행사 기간 내내 군산의 모든 게 아름다웠다. 마치 영화처럼, 무려 크리스마스같이.
  8월의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보내고, 이번 70호 《비유》를 준비하며 다시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다. 더불어 어느덧 발행일에 크리스마스가 끼어 있어 시간의 흐름을 체감할 수 있었다. 올 한 해 여러 어려움과 가끔의 보람을 통과한 모두에게 웹진 《비유》가 크리스마스 선물과 같은 읽을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또한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다. 김송이 시인의 동시 「산타할아버지 한 명을 초대하려면 온 마을이 필요해」에서는 그야말로 산타를 초대하기 위한 항목들이 나열되는데, 그것들이 작고 사랑스러워 그 안에 시와 소설, 글과 책도 꼭 끼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하지만 산타를 그리 쉽게 만날 수는 없는 법. 성요셉 작가의 동화 「산타 마을에 악당이 산다!」에서 산타와 루돌프를 위한 폴의 모험을 확인해주기를 바란다. 일이 잘 풀린다면 「까마귀 여행자」의 송이의 고민 또한 술술 해결될지 모른다.
  산타가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은 (비록 ‘착한 아이에게’라는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크리스마스를 종교적 경계를 넘어 사랑과 베풂의 날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것들이 실로 필요한 인물을 장진영 소설 「헬퍼」에서 만났다. 신의 가호가 그들에게 있길 바랄 뿐이다. 박연준, 임택수의 짧은 소설도 일독을 권한다. 핍진한 묘사와 환상적 서술의 매력을 각각의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양안다와 민구의 시에서 공히 ‘신’을 호명하는 것은 이번 호의 아이러니한 우연이다. 크나큰 호명이 뜻하는 바를 시에서 확인하길 바란다. ‘해상도 높은 장면’에서 한여진 시인과 송지유 조각가가 주고받는 작품과 메시지는 그 과정을 지켜봄만으로 예술의 경이를 믿게 한다. ‘판도’와 ‘요즘 이야기’에서 민구홍, 홍칼리 작가의 글은 예술의 경이를 이루는 과정의 ‘정답 없음’과 ‘신명 있음’을 번갈아 보여준다.
  예술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느 순간 찾아온 영감일 수도 있고, 오랜 시간이 지나 얻은 인정일 수도 있다. 작품을 계속할 수 있는 의지와 건강도 선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공적 기관에서 행정적 절차에 의해 마련한 ‘지원금/지원제도’는 과연 선물이라 할 수 있을까? 다소 도발적이라 할 수 있는 질문에 공연기획자이자 창작자 성다인과 문학평론가 황유지가 꼼꼼하게 답하였다. 예술가는 시혜의 대상이 아니다. 갖가지 지원제도는 시민사회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 정책의 하나일 뿐 그것이 도리어 작가의 창작 환경을 제한하고, 방해하는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당위성이 너무나 마땅해서일까, 제대로 논의되지 않는 문제에 심도 있는 접근을 보여준 두 필자에게 특별한 감사를 전한다.
  한 해가 다 갔다는 건 언제나 믿기지 않는 일이다. 믿기지 않는 일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해 반복된다. 그 반복 안에서 대체로 쓰라렸고 가끔은 빛났을 모두에게 웹진 《비유》의 글이 다정하고 재미있으며 때로는 날카로운 친구가 되었으면 한다. 가까운 친구와 안부를 묻고 답하듯 이곳의 글을 읽어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