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해는 짧았다. 어느새 부네의 방문은 엷은 햇빛에도 눅눅히 잠겨들고 있었다. 나는 잦아드는 부네의 방을 보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서러움이 가슴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불현듯 닫힌 방문의 안쪽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쩌면 약한 탄식 같기도, 소리죽인 신음 같기도 했다.
   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어느 순간 감청색의 창호지가 부풀어오르고 그 안쪽에서 어른대는 그림자를 얼핏 본 것도 같았다.
   아아아아아아
   그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분가루처럼 엷게 떨어져내리는 햇빛뿐이었다. 내가 들은 것은 환청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입 안쪽의 살처럼 따뜻하고 축축한 느낌이 내 몸을 둘러싸고 있음을, 내 몸 가득 서러움과 같은 욕정이 차올라 해면처럼 부드러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떠돌던 고추잠자리가 잠깐 물에 스치듯 꽁지를 담갔다 뺀 순간이었을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햇빛이 사위었다는 것뿐.
   부네의 방은 박명 속에 어슴푸레 잠겨들었다. 햇빛은 이제 우리 방 서쪽 창에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맴돌던 고추잠자리는 담장 너머 피마자 이파리로 옮겨 앉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와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섰다. 몸의 근육을 조금도 긴장시키지 않고 축 늘어뜨리고 불룩 튀어나온 배와 작고 주름진 가랑이를 물끄러미 보며 나는 까닭 없이 흐느꼈다.
(「유년의 뜰」, 『유년의 뜰』, 42~43쪽)

   오정희의 단편 「유년의 뜰」(『유년의 뜰』, 문학과지성사, 1981)에 등장하는 부네, 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네의 자살이 좀더 사실에 부합할 듯하다. 인용문에서 보듯 그녀는 ‘보이지 않는’ 인물에 가깝다. 소설의 어린 화자 ‘나’는 그녀가 갇혀 있는 방 안쪽을 볼 수 없다. ‘나’는 다만 안쪽에서 ‘어른대는 그림자’를 얼핏 본 것 같을 뿐이다. 그렇다고 부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아아아아아, 약한 탄식 같기도 하고 소리죽인 신음 같기도 한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화자에겐 ‘환청’과 구별되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정말 소리를 냈는지 아닌지 확정짓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요컨대 그녀는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다. 시종일관 ‘아른대는 그림자’이거나 ‘환청’에 가까운 그 무엇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녀는 누구인가? 일찍이 무수히 많은 여성주의 비평이 그녀에게 주목한 바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람이 나 객지로 도망쳤다가 외눈박이 늙은 목수 애비에 의해 벌건 대낮에 읍내 차부에서부터 끌려와 머리를 깎인 채 별채에 유폐된 부네는 홀몸이 아니라거나, 몹쓸 병에 걸렸다거나, 혹은 미쳐버렸다는 등의 풍문으로만 존재하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들’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이 유폐된 여자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여자들을 가시적인 존재로 소환하고자 하는 노력은 여성주의 비평의 오랜 염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자리에서 부네를 가부장주의의 폭력에 희생된 억압받는 타자의 대명사로 부르고 싶지 않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부네와 폭력을 따로 떼놓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비라는 이름으로 딸의 사랑을 가로막고 그녀의 머리를 깎고 발가벗긴 채 가두는 저 야만의 시간은 법과 제도의 명목으로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조금도 사라지지 않은 채 대물림되고 있는 형편이기도 하다. 사정이 그러할진대, 여성주의 비평은 유폐된 부네의 육체를 통해 그녀를 그러한 상황에 처하도록 만든 ‘적들’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유발하고 해방의 그날을 꿈꾸도록 만들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장면은 부네에 관해서라면 어떠한 ‘이야기’도 온전하고 완전하게 말해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쇠불알통’ 같은 자물쇠가 그녀의 신체를 구속한 이후, 부네는 때로 ‘부정(不淨)’의 체현물이자 ‘부정(不定)’의 미스테리로 이야기되어 왔다. 그녀는 더렵혀진 순수이자 타락한 천사임과 동시에 끊임없이 마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 다름 아니다. 이 ‘온전하고 완전하지 않은 정체성’은 그녀의 애비인 늙은 외눈박이 목수의 무자비한 폭력적 행위를 규탄하고 그녀의 무고함과 결백을 주장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처럼 부네와 그 아비는 읍에서부터 집까지 개처럼 끌려오고 끌고 오는 과정에서 양쪽 모두 조금의 분노도 일말의 씨근거림도 없이 시종 ‘묵극’으로 일관한다. 부네는 왜 아비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심지어 욕도 하지 않았는가? 아비는 어찌하여 딸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정당화하는 어떤 언사도 사용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하였는가?
   이 의문들은 부네, 라는 이름을 예사롭게 들리지 않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부네는 어쩌면 ‘말’로 포착할 수 없는 어떤 존재, 어떤 ‘이야기’로도 모자라고 어떤 ‘의식’으로도 다 담아낼 수 없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라캉이라면 상징적 언어 질서의 저편에 있는 실재를 가리키는 ‘대상 a’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수도 있는 이 존재는 방 안쪽에 유폐됨으로써 우리의 시선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대상이 됨과 동시에 그 도달 불능을 통해 자신의 존재, 즉 ‘있음’을 현시하는 불가해한 그 무엇이 되고 있는 것도 같다.
   따라서 이 존재의 ‘그림자’와 ‘환청’을 온몸으로 대면한 화자 ‘나’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선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아직 십대에 접어들기 전, 미친 듯 단 것을 탐하기만 하던 ‘뚱보’ 여자아이가 자신의 ‘불룩 튀어나온 배’와 ‘작고 주름진 가랑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이 장면은 「유년의 뜰」 전체를 통틀어 경이로운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한 번도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 부네의 실재와 대면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육체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불룩 튀어나온 배’와 ‘작고 주름진 가랑이’에 대한 발견. 자신이 ‘배’와 ‘가랑이’로 구성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 이 발견과 인식은 여자아이를 ‘까닭 없이 흐느끼게’ 만든다.
   돌이켜보면, 인용문은 이런 종류의 ‘존재론적 흐느낌’을 ‘서러움’이라는 정서로 설명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화자는 짧은 가을 해가 부네의 방문에 잦아드는 걸 보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서러움이 가슴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부네가 죽기 직전 질렀을 지도 모르는 탄식과 신음 같은 ‘노랫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내 몸 가득 서러움과 같은 욕정이 차올라 해면처럼 부드러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말하자면, 부네의 없는 듯 있음, 있는 듯 없음 앞에서 ‘불룩 튀어나온 배’와 ‘작고 주름진 가랑이’를 지니고 있는 여자 아이는 마침내 자신이 부네와 다르지 않음을, 부네가 자신과 같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유년의 뜰」이 재현하고 있는 여자아이의 성장이란 이와 같은 정서의 대물림, 그 감각에의 현존, 그 감성적 유대와 무관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것은 “떠돌던 고추잠자리가 잠깐 물에 스치듯 꽁지를 담갔다 뺀 순간”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사실이 그렇다면,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을 수도 있다. 「유년의 뜰」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다만 “햇빛이 사위었다는 것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을 통과한 여자아이는 이제 이전의 그 아이가 아니다. ‘나’는 ‘부네’의 실재와 대면한 뒤 어느새 자신의 몸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그 서러운 상징에 대하여 눈뜨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아이를 ‘그녀’라고 불러 마땅할 것이다. ‘상징의 숲’ 앞에서 처음부터 ‘서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 흐느끼는 주체. 부네는 바로 이 ‘서러운 성장’으로 가는 문이다. 이것은 투항이나 좌절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실재의 세계로 인도하는 출구에 가깝다. 따라서 부네의 죽음, 그 ‘자살’은 단순한 광기의 폭발이나 실패의 기록으로 폄하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나는 오히려 그것을 ‘장엄한 죽음’이라고 부르고 싶다. 개인적으로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의 인조인간 로이의 죽음에 비견할 명장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다. 가을날의 짧은 해가 사위어가듯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지 않은가. 온 우주가 그녀의 죽음에 빛을 잃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부네가 단순히 가부장적 폭력에 무너진 희생양일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수정

명지대 문창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오랫동안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을 겸한 바 있다. 여성적 정체성, 여성 주체의 재현 양상 등과 관련된 여성주의 비평 및 문학사 연구를 통해 정전 다시 읽기를 시도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2017/12/26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