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늙으면 자꾸 이상한 데가 아프다니까.”
  내 앞에 파스를 들고 선 엄마가 말한다. 엄마는 오른팔을 위로 쳐들고 등과 겨드랑이 사이, 허리와 겨드랑이 사이 어디쯤을 가리킨다.
  “여기, 여기에 파스 좀 붙여줘.”
  뭘 했길래 거기가 아프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치솟는다. 거기가 아픈 건 맞아? 라는 생각도 든다. 파스를 붙인다고 낫겠냐고, 차라리 한의원을 가라고, 그냥 잠을 잘못 잔 거 아니겠냐고, 하루쯤 참아보라 말하고 싶기도 하다. 순간 소설에서 읽은 장면이 떠오른다. 엄마가 아픈 이유를 알고 싶어 이것저것 캐묻는 딸 지유에게 실험동에서 자신이 돌보던 초파리가 얼마나 예뻤는지 얘기를 하던 원영이. 아프다면 ‘20년 동안 가족의 저녁 밥상을 차리다가 고등어구이에서 올라오는 미세먼지에 노출되어 암에 걸릴 확률이 더 높을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원영의 모습이.
  나는 ‘왜’라고 묻는 대신 ‘그렇구나’라고 답하기를 선택한다.

오랫동안 나는 엄마에게 ‘아픈 딸’이었다. 섭식장애라는 정신질환을 진단받은 것이 약 16년 전이니 벌써 난 16년째 엄마의 아픈 딸이다. 병을 진단받음과 동시에 나는 엄마의 품을 벗어나고자 했다. 갑갑한 시골을 떠나 서울에 몸을 욱여넣듯 서둘러 자리 잡았다. 그렇게 우리는 따로 살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의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구체적인 증상이 무엇이고 치료는 어떻게 받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내가 아픈 원인이 엄마에게 있는 것 같아 미안해서,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내 치료를 방해할까 무서워서 병에 대해 일절 묻지 않았다. 그저 엄마는 묵묵히 매달 용돈을 보냈다. 서울에서 차로 세 시간 반이나 떨어져 있는 먼 거리에서 살면서도 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종종거렸고, 일주일에 한 번 일 분도 되지 않는 짧은 통화로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나 또한 엄마에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이 모든 게 내 탓인 것 같아서, 먹고 토하는 것을 증상으로 하는 나의 병이 부끄러워서 모든 게 괜찮은 것처럼 굴었다. 한 달에 한 번, 통장에 찍힌 엄마의 돈을 확인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 돈으로 병원비를 내는 대신 편의점에 들어가 폭식할 음식을 샀다. 그리고 모든 것을 만회하려는 듯 매번 두 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버스 한 번이면 갈 수 있는 본가를 일 년에 두 번 정도, 막차로 내려가 첫차로 올라왔다. 이따금 걸려 오는 엄마의 전화를 가능한 한 무심하고 퉁명스럽게 받았다. 짧은 통화 끝에는 늘 가슴 부근이 메어왔고 그러면 가까스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엄마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그렇게 꿋꿋이 지켜온 250km의 거리를 16년 만에 좁힌 이유는 역시 내가 아팠기 때문이다. 내 전화를 받고 차로 새벽길을 달려 서울에 올라온 엄마는 나에게 인제 같이 살자고 말했다. 뒤집어쓴 이불을 내릴 기운도 없었던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응’이라고 대답한 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이삿짐을 싸는 내내 나의 마음은 처참했다. 오랫동안 이어온 싸움에서 결국 패배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서울 생활을 지속하기에는 나의 일상이 너무 망가져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은 아프니까 엄마 집에 잠시 머무르는 거라고, 텅 빈 옷장 앞에 주저앉아 스스로를 다독였다.
  시골에 내려와 나를 가장 당황하게 만든 것은 열악한 대중교통이나 편의시설이 아니었다(엄마의 집이 있는 별묘마을 근처에는 작은 구멍가게 하나 없다. 물건을 사려면 무조건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면에 나가야 한다). 시골 사람들의 지나친 참견이나(택시로 면을 나가는 짧은 시간 동안 호구조사를 당하고 일자리까지 제안받는다) 과도한 기억력(내가 누구의 딸인지만 말해도 나의 중학교 자퇴와 내가 아팠다는 것까지 기억하신다)도 아니었다. 내가 당황한 것은, 석 달이 지난 지금까지 적응하지 못한 엄마의 질병과 노화다.

엄마에게는 오래된 고혈압과 당뇨가 있다. 그 때문에 약을 먹고 음식 섭취에 신경 쓴다. 특히 엄마가 조심하는 것은 당뇨인데, 외할아버지께서 당뇨와 합병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셨던 모습을 온 가족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혈압약을 챙겨 먹고 더불어 ‘야채수’라는 것을 오랫동안 복용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단맛이 나는 음식을 멀리하고 열심히 걷기 운동을 하는 것도 알았다. 내가 몰랐던 것은 일상적으로 아픈 곳이 많아진 엄마의 몸이었다.
  집에 내려와 첫 한 달 동안 엄마가 나에게 한 말의 절반 이상이 “어디가 아프다”였다. 잇몸이 아프다, 어금니가 아프다, 허리가 아프다, 등등. 엄마는 자주 어딘가 아팠고 그 부위는 계속 달라졌다. 아플 때마다 엄마는 병원에 가는 대신 약국에 가서 약을 지어 먹거나 파스를 붙였다. 병원을 가라고 하면 괜찮다고 했다. 그러다 몸이 많이 힘들어지면 면에 있는 의원에 가서 링거를 맞았다. 왜 제대로 병원에 가지 않느냐고 물으면 “됐다”는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을 내뱉는 엄마의 얼굴은 언제나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지방과 근육이 빠져 왜소해진 몸, 나보다 작아진 키, 말을 할 때 파르르 떨리는 이마 근육, 간에 둔감해진 혀, 전보다 더 커진 엄마의 텔레비전 볼륨, 약해진 치아, 쉬어버린 목소리. 내가 그동안 외면해온 것들이었다. 나의 질병과, 질병이 품은 나의 아픔과, 아픔의 출처에 몰두하는 동안 눈길 주지 않으려 애써왔던 것. 바로 엄마의 몸과 마음이었다.

이유를 잊게 되는 원인이 있을 거예요. 스트레스 상황이 반복되면서 단기 기억력이 나빠진 것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유를 잊어야만 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워진 게 아니라 필요에 의해 치워졌다고 해야 할까요.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원인과 이유가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종내에는 알게 돼요. 그 불일치가 나한테는 원인인 것 같아요.1)

“보통 거기가 아픈 이유는 이러저러해서 그렇대”라는 나의 반응에 엄마는 “늙어서 그래”라는 답으로 일관한다. 엄마가 아프다는 곳을 인터넷에 검색해 해결 방법을 찾는 동안 엄마는 새롭게 아픈 곳을 가져온다. 노화로 여기저기가 아픈 엄마의 몸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아프다는 말을 매일 같이 듣고 있자니 피로감이 쌓인다. 내가 엄마의 증상을 해결해줄 수 없음이, 딱히 적극적으로 나으려고 하는 것 같지도 않은 엄마의 모습이 짜증 나기 시작한다. 사실 이 짜증은 하루 이틀 된 게 아니다. 옛날부터 엄마는 자신이 아플 때 “병원에 가”라는 말을 듣기 싫어했다. “약은 먹었어?”라고 물으면 늘 신경질을 냈다.
  그런 엄마의 반응을 매번 이해할 수 없었다. 아프면 병원을 가야지 왜 참고 있는가? 그런데 요즘 들어 생각해 보니 나도 엄마와 다르지 않다. 나도 내 오래된 질병에 대해 증상과 원인만 묻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상대방이 ‘치료는 잘하고 있냐’고 물을까봐 병에 대해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아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런 질문 속에 없기 때문이다. 난 사람들이 섭식장애의 원인을 분석하려는 시도 대신 앓는 ‘마음’을 물어봐주길 바란다. 내가 가진 ‘질병 너머의 서사’에 대해 말하고 싶고, 섭식장애 환자들의 공통적인 발병 원인 대신 개인의 이유를 질문받고 싶다. 나의 질병과 아픔에 있어서는 개인의 고유성을 강조해왔으면서 나와 가까운 사이, 엄마의 아픔에 대해서 난 그동안 내가 가장 싫어하는 방식으로 대해왔다.
  문득 어느 날의 엄마가 떠올랐다. 왜 그렇게 미련하게 아파하고 있냐고, 아프면 제대로 병원에 가라는 나의 말에 엄마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답했다. 엄마의 증상을 해결해주고 싶었던 나와 무기력한 표정을 짓던 엄마의 모습에서 16년 전 섭식장애 치료법을 열심히 찾아다녔던 엄마와 내 곁에 있지 않고 밖으로 뛰어다니는 엄마에게 섭섭함을 느꼈던 나를 발견한다. 증상 너머의 이야기, 몸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내가 나의 질병 서사를 공개한 후 사람들 앞에 서면서 자주 했던 말들이다. 몸에는 역사가 쌓여 있다고, 마음을 표현할 수 없을 때 몸은 증상으로 말한다고. 그 익숙한 논리를 나는 왜 한번도 엄마의 몸에 대입해보지 못했던 걸까.
  나에 대해서는 작은 것도 기억하려고 애쓰는 엄마는 자신의 기분이나 상태는 설명하거나 표현하기 어려워한다. 어두워진 표정에 관해 물으면 신경 쓰지 말라고 답하고 속이 안 좋아진 이유를 물으면 늘 ‘빨리 먹어서’ 그렇다고 답한다. 그날 그 회의에서 숨이 차기 시작한 이유, 어떤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하는 이유에 대해 엄마는 잘 말하지 못한다. 기억으로부터 ‘필요에 의해 치워진’ 수많은 이유는 엄마의 몸에 차곡차곡 쌓여 엉뚱한 통증으로, 잦은 체기로, 쉰 목소리로 드러나는 건 아닐까, 라고 나는 감히 가늠해본다.

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비폭력 대화’에서 추구하는 대화의 첫 단계는 ‘관찰’이다. 개인적인 해석과 감정을 배제한 채 벌어진 상황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예상보다 더 쉽지 않았다. 나를 포함해 수업에 참석한 사람들은 사물 하나를 묘사할 때도 ‘예쁘다’라거나 ‘내가 좋아하는 금색’을 연상하는 등, 습관적으로 개인적인 해석이나 감정을 투영하고 싶어 했다. 자신과 깊은 관련이 없는 사물에도 그러하니 사람과의 관계에서 벌어진 일은 더더욱 거리 두고 바라보며 상황 자체로써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따라온다.
  소설 「초파리 돌보기」 초입에 서술된 초파리에 대한 묘사를 읽으며 비폭력 대화에서의 관찰 수업을 떠올렸다. 초파리를 기존의 시선으로 해석하지 않고 현미경을 통해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교감하는 원영의 태도에서 비폭력 대화가 추구하는 관찰이 엿보였다. 나는 누군가를 원영만큼 다정한 눈길로 있는 그대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상대방의 작은 요청과 바람에도 나의 해석을 섞어 마음대로 본질을 흐리지는 않았던가.
  나아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던 과거의 나에게 돌아가본다. 내가 섭식의 문제로 몸에 급격한 변화를 맞았을 때 엄마에게 무엇보다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싶어 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체중 감소로 가늘어진 나의 팔을, 보송보송한 솜털로 뒤덮인 나의 몸통을, 툭 튀어나와 도드라진 나의 엉치뼈를 엄마가 울지 않으며 어루만져주기를, 피하지 않고 바라봐주기를 기대하고 기다렸었다. 그때 내가 바란 것은 변해버린 나의 외모에 대한 동정이나 앓고 있는 내 몸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연결감’이었다. 겉모습이 변해도 여전히 소속되고, 사랑받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엄마가 나에게 느끼는 ‘자신의 슬픔’을 벗어나 온전한 나에게 닿아 주기를 바랐다.

“그렇구나.”
  치솟는 나의 감정을 누르고 통증을 지닌 엄마의 몸 자체를 본다. 화를 유발하는 것은 엄마에 대한 나의 기대와 바람이지 엄마의 몸에 잘못이 있지 않음을 꾸역꾸역 되새긴다.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 나만 아픈 게 아니라 엄마도 아팠다.
  수도 없이 들었던 엄마의 소망, 단 한 번도 흔쾌하게 들어줄 수 없었던 엄마의 소원, 아직 이뤄지지 못한, 어쩌면 앞으로도 이뤄질 수 없는 엄마와 내가 품은 서로를 향한 바람, ‘아프지 마’ 대신 내가 그동안 듣고 싶었던 말을 엄마에게 꺼낸다.
  “그랬구나.”
  “그럴 수 있겠다.”
  몇 마디 말로 이미 치워져버린 엄마의 수많은 ‘이유’들이 위로될 수 없겠지만, 십수 년 동안 말하지 못한 우리 둘 사이의 감정들이 지워지지도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을 뒤져 최대한 다정한 말을 연습해본다. 아픈 내 곁에 머물러준 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나의 아픔에 집중하느라 엄마의 시간은 잊어야 했던 지난 날들에 대한 미안함을 담아 서툴지만 엄마의 차갑고 메마른 손을 잡는다.

꼭 문제의 원인을 밝히는 것을 해결 방법으로 여겨왔는데 그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끈질기게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초파리 돌보기」 속 지유가 쓴 소설의 마지막처럼, 더군다나 그것이 상대방을 위해서라면, 동의하지 못하는 결말이라도 해피엔드를 쓸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특히 삶에 있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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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기간: 2024. 5. ~ 2024. 12.) click


박채영

섭식장애 경험을 담은 에세이집 『이것도 제 삶입니다』를 썼습니다. 서울이 아닌 곳에서 살기를 연습하는 중입니다.

작년 12월, 15년 만에 시골집에 다시 내려왔습니다. 환갑이 넘은 엄마와 두 마리의 고양이, 한 마리의 개의 반려인이 되었습니다. 시골에 오니 물건을 사러 가게를 가는 것도, 아프면 병원을 가는 것도 전부 새로워진 환경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프다’는 것이,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이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가졌던 질병과 돌봄에 관한 고민들이 ‘젊은 비장애인 도시 사람’을 중심에 둔 것들이 아니었는지 되돌아보는 중입니다.

2024/05/15
67호

1
임솔아, 「초파리 돌보기」,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문학과지성사, 2021, 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