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한 집. 어디 앉아 있을 곳도 마땅치 않아, 그 상태로 바닥에 주저앉아 해가 넘어가고 새벽이 오도록, 불도 켜지 않은 채 내내 운 적이 있다. 그때, 이렇게 울다간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고(실제로, 운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꽤 아프다.) 119를 부르듯 언니에게 전화했다. 나 너무 아프다고, 왜 나한테만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언니가 뭘 어찌해줄 수 없다는 건 잘 아는데도 전화 너머로 투정과 자기연민, 분노 등을 마구 퍼부었다. 조용히 울음을 삼키던 언니는 정제된 목소리로 내게 한 글자씩 이해시키려는 듯 말했다.
   “그래. 근데 우주야. 지금 이렇게 이 시간에 방에서 쭈그려 앉아 너처럼 울고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 그렇게 생각해보면 위로가 좀 되지 않니. 마냥 슬프지만은 않지 않아? 모두가 안타깝게 다 같이 울고 있다고.”
   순간 눈물이 좀 사그라들었고 이렇게 울고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고 생각하니, 다시 연필을 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고 당신들은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고,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어떤 꽃병이 우리 눈에 인식되려면 공간, 그리고 바닥이 필요하다. 어떠한 여백이라도 필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꽃병의 모양을 읽을 수 없듯이, 나의 존재도 입증되려면 무언가 필요했다. 그것이 나에겐 ‘일기’였다. 매일이 불행이고, 하나도 즐거운 일이 없다고 느껴지던 순간마다, 사라져가는 나를 다잡기 위해 잡은 것은 연필과 종이였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연필을 잡고 써내려간 것은 그림이 아니라 글이었다. 내가 글을 쓴다고 하면 지인들은 으레 ‘그림일기’처럼 삽화가 있는 형태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글에서는 단 하나의 작은 드로잉조차 발견할 수 없다. 글은 글로서 충분하고 그림은 그림 자체로 충분하다는 내 고리타분함 때문일까. 차치하고 나의 일기는 사랑과 이별, 치정, 정신질환과 약의 반응들, 동업 혹은 동거의 괴로움까지 다양하게 이야기한다. 이 글을 쓰면서 일기장에 적힌 글을 재구성해보니 글이 이야기하는 것은 늘 한 가지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로 ‘생존’이다. 앞에서 언급한 존재의 입증과도 연결할 수 있는 것인데, 부모님 슬하에서 이십대를 그러저러하게(사실은 그러저러하다고만 할 수 없지만) 보내고, 삼십대를 맞이하며 갑작스럽게 또다른 어른으로 지칭되면서 어떻게 자립해야 하는지를 꽤 늦게 깨달은 탓에 매우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생존’하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쳐온, 그런 내용의 일기다. 본질 자체를 인정하고, 무엇으로부터든지 억지로 떠밀듯 하게 되는 것들을 삭제해나가고, 좋아하는 것들을 천천히 모으면서 자립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이 험악한 사회의 정글에서 생존하는 방법이었다.
   아직도 나는 실존하는 나를 찾기 위해 여러 가지 좋아하는 일들을 늘어놓고 있다. 그것으로 비추어보아 나만의 모양을 찾으려 하고 그것들이 결국 나를 살게 한다. 방에서 혼자 울고 있을 누군가에게 나의 일기가 편지처럼 닿아 울음 그칠 수 있기를, 우리 다 같이 이 삶을 잘 살아내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3월 18일 토요일
   결국 B와 헤어졌다.
   어떤 확신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갑작스럽게 생긴 오해로 헤어지게 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무기력한 것이었나. 몇 번이나 되새김질하듯 이런 이유로 보지 않아도 괜찮겠냐고 묻는 나의 질문을 그는 계속 피해갔고, 그가 원하던 대로 ‘마음껏 미워할 수 있는 이별’이 되었다.
   아직 책상 위에는 새벽녘 시장에서 사온 꽃들과 향수, 떨림의 편지. 그에게 주고 싶은 것들로 가득하다.
   서른한 살. 처음 하는 프러포즈였다. 일주일 내내 준비했었다. 옷이며 장소, 어떤 말을 할지, 무슨 표정을 지을지……까지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까. 정말 아무 의미 없는 걸까.
   꽃은 꽃대로 아름답고 향수는 그 향을 그대로 전달하는, 날것의 오늘. 오늘은 진짜 의미가 없다.

   - 11월 21일 월요일
   너무 힘들었다. 지난 십 개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달라지겠지만, 기대하진 않지만, 그래도, 다시 기록해보려 한다. 다시 묶이게 되더라도.

   - 1월 1일 금요일
   드디어 서른. 생각보다 더 싱숭생숭하다. 이십대는 내내 바쁘고 아프게 살았던 것 같다. 자꾸 돌아보게 되는 지금. 어렸던 나에게, 옆에 있던 이들에게 미안한 감정뿐이다. 그렇다고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가족들과 티브이 속 카운트다운 외치며 새해를 맞이했다. 이제는 케이크와 선물을 내가 산다. 점점.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가는 것 같다. 새해마다 무슨 일이 계속 있었는데, 올해는 언니의 발병이다. 다 괜찮을 것이다. 얘기했지만. 사실, 너무 걱정된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우주에 무언가 힘이 있다면 우리 언니를 지켜주기를……
   이십대의 절반을 같이 보내고, 새로운 삼십대 앞에 같이 놓인 나의 연인. 여수의 시간을 맞이한다.

   - 1월 2일 토요일
   여수.
   정말 커다란 동백나무들을 봤다. 연신,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떨어진 동백꽃 하나를 주워 손위에 올려두었다. 가만. 엄마도 떠오른다. 동백이 가득했던 오동도.
   케이블카, 검은 모래해변, 모사금 해수욕장, 동산 공원, 경도, 구공항, 롯데마트 레고와 공룡과 바비 인형, 캔들, 간장게장, 우럭, 매운탕, 스위티.

   - 1월 3일 일요일
   돌아온 서울 집. 6시쯤 도착.
   같이 산 지 일 년이 넘었다. 함께 나이를 먹어간다. 큰 녀석은 침대 위에 누워 그루밍을 하고, 나는 턱을 괸 채 끄적거리고, A는 컴퓨터를 하고, 또다른 고양이는 밥을 먹는다. 부담스럽고 또 설레는 새로운 월요일 앞에, 모두 말이 없다.

   - 1월 4일 월요일
   오래간만에 출근. E와 나, 둘이 일을 하게 되었다. A는 나오지 않았다. 사무실 바닥의 더러운 카펫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냈다. 오자마자 힘든 일을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만큼 많은 일을 해나가는 것이 뿌듯했다. 정리를 마치고, 일정상 자리를 비운 매장 직원들을 대신해 일을 마무리 지었다.
   C가 몇 주 전, 장문의 문자를 보낸 적이 있다. 내용인즉슨 시간 내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드는지, 다른 남자들 만날 시간은 있고, 자기와 잠깐 밥 먹을 시간은 되지 않는 건지, 연락을 잘 하지 않는 내 고질적인 성향에 대한 질책의 문자였다. 덧붙여 할 이야기가 없었다. 어제 C가 또 문자를 보내오더니 오늘은 회사로 찾아왔다. 그녀는 섭섭해했고, 동시에 이해하지 못했던 순간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저녁 10시. 인천에 사는 C를 생각하며 그만 가자고 했고, 그녀는 그런 내게 좀 서운한듯했다.
   어떻게 살아가는 하루일까. 사람. 일. 그리고 서른이 된, 이윽고 서른이 된 나.

   - 1월 5일 화요일
   정신과를 가는 날이다. 요즘 잠은 잘 자며, 대화 속 붕 뜨는 순간에 대한 느낌과 여전히 호흡이 잘 안 되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언니가 아프면서 가족들이 서로 더 의지하는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의사는 답했다. 가족에게 내 병증에 관해 얘기하는 편이 좋을 수도 있다고, 자식 때문에 부모가 속상한 건 숙명 같은 거라고 했지만, 난 지금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근래에는 약을 먹지 않고는 나가는 것이 힘들다. 그래도 괜찮아지고 있다고 믿어야겠지.
   정말로 말해야 하는 걸까. 걱정하는 부모의 역할을, 기회를 주어야 하는 걸까.

   - 1월 6일 수요일
   언니의 ‘병’이라고 칭하고 싶지 않은, 몸속에 꽤 자란 혹 때문에 병원에 오게 되었다. 언니는 침착해 보이려 했지만 두려움이 ‘정신없음’으로 드러나 나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의사는 ‘육종암이 아니길 바라야지’라고 책임감 없는 이야기로 마무리 지으려 했고, 환자는 배를 가로로 찢을 것인지 세로로 찢을 것인지만 고민하라고 했다. 묻는 것에 어느 것도 시원히 답해주지 않았고, 무엇이든 수술해 보아야 안다고만 했다. 속상했다. 왜인지 언니를 괴롭히는 것만 같고, 답답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으면.

   - 1월 7일 목요일
   회사로의 출근. 남은 촬영을 하고, E, D, 대표와 나 이렇게 회의의 시간을 가졌다.
   일 년이 지난 지금, 지금의 선택들은 과연 또 무엇을 만들지, 설레고 동시에 두렵다. 매번, 옳은 선택도 그른 선택도 없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것에 책임지어야 할 사건만이 남아 있을 뿐.

   - 1월 8일 금요일
   화분 제작 중인 이천에 촬영차 갔다. 9시 버스를 타니 10시 도착. 선물로 드릴 도넛을 사고, 카푸치노와 초코아몬드 링 한 조각으로 허기를 달랬다. 택시를 타 최대한 자연스럽게(이방인인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한솔아파트요, 남정리, 남정 마트 옆에 있는.” 이라고 말하자 기사는 “남정리에 아파트가 있어요?” 하고 되묻는다.
    조용히 닫혀 있는 도자기 집은 밖에서 보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살짝 열린 문으로 들어가니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인다. 남자 사장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시고 여자 사장님께서 박카스를 챙겨주신다. 어려 보인다는 말에 가슴이 쿵 내려앉고 여지없이 엄마 생각이 났다.
    바로 시작된 공정은 두 시간 정도 촬영이 가능했고, 열두 시가 넘자 모든 일이 끝났다. 집에 돌아오니 3시쯤. 밀린 빨래와 설거지, 남겨둔 햄버거를 처리하고, 누워서 드라마 몇 편을 보고 나니 어두워졌다. 나는 잠시 후 씻을 것이고, 약을 먹을 것이고, 아마 저녁을 먹지 않고 긴 잠을 잘 것 같다.

   - 1월 10일 일요일
   나는 여자로 태어났다. 그래서 사랑을 할 때, 섹스의 언어를 쓸 때 가장 행복하면서 너무 두렵다. 오늘의 섹스는 가임기에 이루어졌다. 제대로 된 피임을 하지 않아 걱정에 빠진다. 아마도 이 걱정은 한 달은 가게 될 것이고, 생리는 언제 시작하려나 기다리겠지. 그러고도 배는 고파서, 떡볶이를 먹고 낮잠을 잤다. 늦은 저녁에 일어나 글이라기보단 기록을 하는 이 시간이 고요하고 좋다. 혼자라면, 이란 생각이 자꾸만 든다. 새해가 열흘이 지났다.

   - 1월 11일 월요일
   기억나지 않게 일을 함.
   기억이 나지 않음.

   - 1월 13일 수요일
   언니의 입원. 언니가 환복을 하면서 아빠는 그제야 언니의 아픈 배를 처음 본 것 같았다. 아마도 걱정과 어이없음의 감정이 동시에 일어난 것 같았고, 그것은 역시나 엄마에게 분노로 표출되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그들을 중재했지만, 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아빠의 걱정 아닌 걱정이 화로 이어졌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결국엔 아빠를 혼낼 수밖에 없었다(혼냈다는 표현이 맞다). 가장 힘든 사람은 언니다. 누구를 향한 분노가 남아 있다면 언니에게 위로를 하라고 했다.
   언니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그녀의 두려움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 1월 14일 목요일
   드디어 수술 날.
   1시에 시작한다던 수술은 2시가 다 돼서야 기별이 와 수술실로 향할 수 있었다. 언니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고, 엄마는 이미 눈물을 떨궜다. 아빠는 남 일처럼 힘내라는 말을 반복했고, 언니 남자친구는 힘없이 따라왔다. 나는 종교도 없으면서 예루살렘 목주를 손에 꼭 쥔 채 아무 일 없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렇게 수술은 네 시간 정도 진행되었고, 다행히도 언니의 혹은 그리 나쁜 녀석은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하늘로 날아갈 듯한 기쁨. 언니가 나오자마자 큰 소리로 “언니! 아무 문제없대! 너무 수고했어, 아무렇지도 않대!”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저녁이 되자 언니는 매우 고통스러워했고, 해줄 수 있는 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 지나갈 거야.’라는 것뿐이었다.

   - 1월 15일 금요일
   언니 수술 후 첫째 날.
   생각보다 일찍, 점심쯤 일어나서 걷기 시작한 언니를 보고 있자니 마치 예수의 이야기처럼 신기했다. 인간의 회복력이 진짜 놀랍구나. 다시 한번 느꼈다. 나는 생각보다 긴장을 많이 했었는지 오후가 되니 잠이 왔고 일찍 집에 갔다.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던 집. 잘 사는 건지 의심하며 잠이 들었다.

   - 1월 17일 일요일
   피하듯 도착한 레몬차 위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오는 내내 이기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나만을 위한 것이다, 라는 말로 위로를 했다. 이상하다. 스스로가 이기적임이 드러나는 처절한 순간에 위로라니, 아프고 아픈 사람들 곁을 떠나 위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곳에 와 있다. 불안한 마음. 어디에서 기인하는지조차 모르겠는 그런 것들. 죄책감 속에 물음표와 물음표가 섞여서 이제 무엇이 질문인지도 모르겠는 순간.

   - 1월 18일 월요일
   출근을 하기로 한 날이다. A는 몸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고, 문자로 내일까지만 같이 쉬자 했다. 나도 쉬고 싶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아침 일찍 집에 도착해 짐을 채 풀기도 전에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2시가 넘고 잠도 자고 먹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천에서의 물건도 수요일에 받기로 약속을 미뤘다.
   오늘은 월요일이다.

   - 1월 19일 화요일
   병원에 가는 날. A는 갑자기 다른 곳에서 자고 싶다 이야기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면서부터 싸웠고, 결국엔 길거리에서 소리 치고 나는 병원으로 향했다. 너무 서운하고 답답했다. 진료가 끝나고 혹시 잘 가는 빵집에 있지 않을까 싶어 갔지만 없었다. 전화를 걸었다. 집에 가는 길이란다. 대화하기 힘들단다. 발길을 돌려 택시를 잡아탔다. 언니에게 가기로 한 것. 타자마자 전화가 온다. A다. 어디냐 묻고 내리라고 한다. 나는 또 순순히 내린다.
   카페. 경찰이 많다. 카푸치노가 마실수록 맛있다.
   이터널 선샤인. 아, 그 영화 전에 타코 집에서 식사. 그는 울었다. 아버지 생각이 났다고 한다. 위스키를 사 호텔. 다시 언성이 높아지고 난 약 먹고 술 먹고 기절. 필름이 오래간만에 끊겼다

   - 1월 21일 목요일
   7시. 예정대로면 언니에게 가야 하는데, 몸은 이미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문자로 못 가겠다고 퇴원 잘하라고 주말에 가겠다 했다. 그리고 출근 시간이 다가왔고 A에게 반차를 쓰겠다 했다. 아팠고, 속도 몹시 좋지 않았다. 혹시 임신인가 하는 불안감이 어떤 상황으로 몰고 갔고, 그는 그냥 오늘 병가를 쓰라고 했다. 진짜 병가. 그도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고 나가서 테스트기를 사왔다. 줄은 한 줄이었다. 그래도 불안했다. 다음주에 한 번 더 해봐야지 생각한다. 침대 위에서 일기를 쓰고 한숨을 쉰다. 다리 사이엔 고양이가 있고 A는 쉬지도 않고 일에 열중한다. 오른쪽 네번째 손가락엔 여전히 진물이 나고, 언니의 수술비는 큰 외숙께서 다 지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 1월 22일 금요일
   다시 출근하는 날, 자리를 오래 비워서 좀 민망하다.
   해피밀 다섯 개로 점심 식사를 해치우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식물과 꽃, 그것들을 찍고 편집하는 것도 나의 일. 그리고 드디어 이천에서 화분 600여 개가 도착했다. 한 개씩 검수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대로 두고, 피로한 몸을 이끌고 조명 달기에 나섰다. 무섭기도 하고 재밌기도 한 사다리를 타고 무사히 다 달았다. 진작할걸. 예쁘다. 꽤 늦어진 퇴근 시간. 택시를 불러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차는 이미 출발했는데 핸드폰이 없다. 회사로 돌아갔다. 어이없는 곳에 버젓이 있는 핸드폰을 주워 집으로 돌아왔다.
   고양이가 있고 고양이가 있다.
   보쌈을 먹고, 그냥 잠에 들었다.

   - 1월 24일 일요일
   가족들이 처음으로 내가 일하는 곳에 왔다. 엄마와 아빠는 흠이라도 찾는 눈치로 여러 군데를 돌아본다. 그러고는 몇 마디 거든다. 삼계탕을 먹고 카페도 갔다. 그리고 언제까지 될지 모를 그런 시간. 더 열심히 해야지.

   - 1월 25일 월요일
   기억나지 않는 하루.

   - 1월 27일 수요일
   고무나무 촬영. 편집.
   상처, 아무 생각이 없음.
   피규어 패키지 도착.
   조금 지침.

   - 1월 29일 금요일
   사진 촬영.
   냉온풍기 설치.
   사진 찍기 재미남과 동시에 피곤함.
   사무실 정리.
   치킨과 맥주.

   - 1월 30일 토요일
   쉬는 날. 인천 집에 가지 않고 서울 집에 남았다. 늦잠을 자고, 빨래와 설거지를 하고, 환기를 시키고,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고, 털을 빗겨주고, 점심으로 커피와 빵을 먹었다. 지금은 침대에 고양이들과 같이 엎드려 일기를 쓰며 졸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TV를 보며 피자든 짬뽕이든 먹겠지. 일단 자야지.

   - 3월 23일 수요일
   1차
   리보트릴 두세 알
   리보트릴, 졸피뎀 각 한 알

   2차 1day
   리보트릴 두세 알
   리보트릴, 졸피뎀 및 다른 수면제 각 한 알

   - 3월 24일 목요일
   M의원으로 병원 교체. 약 처방 바꿈. 리보트릴 0.5그램. 점심 +a, +로라반.
   10회에 걸친 클리닉을 받길 권함. 전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들은 불안, 공황장애, ADHD, 조울증, 강박증 대한 치료 약이었음. 이곳에서 판단하기에, 현 상태는 공황장애, ADHD, 조울증으로 판단. 약은 궁극적으로는 먹지 않는 게 중요. 3월부터 귀울림(이명)이 심해짐.
   1회 165,000원 x 10회,
   약 12,000~14,000원 x 10회 +a

   - 3월 30일 수요일
   약 감량으로 인한 반응: 메스꺼움, 속 불편감, 헛구역질, 어지러움, 귀울림,

   - 4월 3일 일요일
   구토, 어지러움, 귀울림

   - 4월 6일 수요일
   헛구역질 시작(구토 멈춤), 냄새에 심하게 예민해짐, 귀울림, 두통

   - 4월 10일 일요일
   어지러움, 냄새 예민, 식사는 잘함, 두통

   - 4월 13일 수요일
   식사는 잘함, 무기력, 어지러움, 두통, 귀울림

   - 4월 16일 토요일
   세월호 2주기. 2014년 4월 16일, 있을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일이 생겨났다. 온 나라가 장례식장이 되고 고개를 숙여 들 수 없었다. 그렇게 매일 같이 오가는 출퇴근길 속에서 이 년. 광화문만 봐도 불끈불끈 솟아오르던 감정이 어느새 잠깐씩 잊히고, 어떤 날은 종일 잊히기도 했다. 1주기 때 정부의 심한 압박으로 꽃 한 송이 전하는 일도 하지 못했다. 2주기 때는 추모제도 할 수 있었지만, 광장에는 여전히 서명 운동을 하고 있고 배 안에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나 더 긴 싸움이 될까. 눈물도 나오지 않고 사실 눈물 흘리는 것조차 죄스럽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 잊고 산 죄. 남 일이라 생각한 수많은 죄들이 나를 감싼다.

   - 4월 17일 일요일
   속 울렁거림, 약 먹고 잘잠

   - 4월 18일 월요일
   월요일의 시작 8시 20분 알람이 울렸다. 머리가 꽤 길어 전날 늦게 샤워를 하면, 다음날 아침엔 머리를 감지 않기에 다른 날보다는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묶거나 살짝 드라이만 해주어도 괜찮다. 그런 이유로 8시 10분이 아닌 20분에 울리는 알람은. A를 먼저 깨우는 소리다. 먼저 씻고, 내가 씻으면 얼추 출근 시간에 맞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 눈만 봐도 느껴진다. 8시 20분 알람이지만 내가 먼저 씻고 나가야 한다는 것. 나는 씻고 얼굴에 무언가들을 바른다. 그때 씻고 나온 A는 매우 컨디션이 좋지 않은 얼굴로 쉬자고 한다. 아프다. 정말 저런 눈을 할 때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그렇게 잠깐의 정적. 바람을 쐬러 가기로 했다. 기차 중간에서 나는 책을 읽었고, 그는 잠을 청했다. 다시 집에 도착. 그는 묵묵히 얼굴과 발을 닦고는 침대로 가버린다. 나는 불을 끄고 침대 밑 소파가 놓인 공간에서 작은 등을 켠다. 빨래를 갠다. 비 오는 소리를 듣는다. 문자에 답을 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한다. 무언가 기록하고 동시에 졸고 있다. 좀 자야지. 도저히. 졸리다.

   - 4월 19일 화요일
   아침 8시 30분경 양치 중 구토(위액만), 귀 먹먹함, 이명.

   - 4월 20일 수요일
   매장 직원들이 그만둔다고 했다. 처음엔 F가 어제저녁에 대표를 불러서, 그다음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하는 문자에 D가, 그리고 오늘은 아침에 이 내용을 전달하는데 G가 그만둔다고 했다. 같이 일해온 지 일 년이 넘는 두 명의 직원과 신입 직원이라 내게는 아쉬운 정도의 일이지만, 대표로서는 예상했어도 갑작스럽게 모두가 그만두는 상황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사람이 들고 나는 일이 얼마나 괴롭던가. 야속하게 계속 비는 오고, 몸까지 아파져서 다잡은 마음까지 흔들리는 때에, 나는 그에게 어떻게 힘을 주고, 회사에는 어떻게 더 좋은 힘이 될 수 있을까.

   - 4월 21일 목요일
   메스꺼움, 울렁거림, 아침 양치 시 심한 구역질, 속만 안 나온 구토, 두통.
   7시에 일어남. 어제 1시쯤 잠듦. 근래에는 언제 잠들어도 6시에서 8시 사이에는 기상.
   5시 정도부터 11시 정도까지 어지러움. 치료는 X. 약만 받기로.

   - 4월 28일 목요일
   어지러움. 냄새에 예민, 체력이 떨어짐. 병원 4차 치료 트레이닝.
   속이 좋지 않음 → 금방 배부름 → 가스 참.

   - 5월 24일 화요일
   알람을 한 시간씩, 삼십 분씩, 뒤로 미뤘다. 7시에는 면접이 있었고, 계속되는 결근으로 이래저래 사무실에 나가봐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2시에 가야 하는 병원도 갈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가자고 보챌 수 없었다. 그는 면접과 병원 예약을 취소했다. 그렇게 소파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내가 먼저 입을 떼었고, 동업은 다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는 나에게 그 수준의 몰입을 원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래, 같이 하자고, 이런저런 의견도 내보았지만, 그는 왜 나에게 같이 일하자고 했을까. 그저 그에게 어떤 상대가, 같이 오래 할 수 있는 사이로만 여겨진 것이 이유라 한다면 납득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이렇다 할 답을 주지 않았고, 아마 내가 생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그와 회사가 잘 성장할 수 있게 돕고 싶다. 나에게는 이렇게 적당한 이유가 이미 있는 것 같다.

   - 5월 29일 일요일
   집에 오니 A가 폐업을 알아보고 있었다. 주말 내내 혼자 생각이 깊었던 것 같다. 일단, 더 생각하고 내일 제대로 이야기하자고 했다. 부대표 제의받은 지 보름이 되었고 나는 이제 마음을 다졌기 때문에 바로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잠들었다.

   - 5월 30일 월요일
    월요일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의 마음은 흔들리고 불안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느낀 것 같다. 말없이 준비를 하고 점심쯤 회사에 도착했다. 나는 물어볼 것 없이 재고 파악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주말 세일이 너무 되지 않았다. 답답하고 속도 상했다. 괜히 직원들이 밉기도 했다. 좀더 열심히 해주지, 아무리 나갈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지 하고 투정에 가까운 감정들이 들었다.
    나도 이렇게 서운하고 아쉬운데, 그는, 처음부터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만든 회사를 접어야지 하고 결단 내리기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또다시 가슴이 아프다.
    역시. 어김없이 돈 때문이고, 또 돈이 든다.
    6월도 잔인하게 다가올 것 같다. 또 어떤 계획을 세워나가야 할까. 또 한 번 알 수 없는 슬픔, 불안감, 답답함, 때론 살아내는 것의 벅참 등이 느껴진다.

   - 5월 31일 화요일
   그는 다시 일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단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또다시 마음을 추스르는데 힘들었던지라, 그가 얼마나 힘들고 외롭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임을 알고 있음에도, 짜증을 보이고 말았다. 그는 실망하고 답답한 얼굴로 이런 상황에 왜 나랑 같이하냐는 식의 화살로 받아버렸다. 지금 서로가 힘들고 예민한 시기라고 이해하자며 마무리했지만, 사실은 내가 울어버렸다.
   그녀들은 아무 생각 없이 울고, 나는 여러 가지로 운다.
   그의 눈에는 생기가 없고 두려움이 만연하다. 나 역시 전이되는 감정과 그를 향한 안쓰러운 마음에 이유 없는 두려움이 만연해진다.

   - 6월 1일 수요일
   드디어 6월 1일이 되었고, 법률 상담과 대출 상담 등을 받기로 했다. 매장에 들러 보내야 할 택배를 보내고, 법률 상담을 받은 그를 만나러 갔다. 뭐가 잘 안 된 눈치다. 기력이 없는 그에게 쉰 소리를 해가며, 다시 기운 내보자고 했다. 육회를 먹고 대출 상담을 같이 갔다. 별로 방법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 갑자기 모든 회로가 닫히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말도 하기 어려웠다. ‘어디 갈래?’라는 그의 묻는 말에, 그냥 ‘집으로’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처럼 쉰 소리 할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도 멍한 얼굴로 집에 들어와 있다. 에어컨은 돌아가고, 고양이들도 알아서 자기 할일을 하는데, 우리만 무언가 잃은 것 같다. 어쩌면 좋은지, 누가 도와주면 좋겠다. 아니면, 내가 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전 내 그림들이 팔릴까, 그림을 팔아볼까. 아니면 당일 알바를 해볼까. 어떻게 도와야 할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 6월 2일 화요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런 하루가 가고 있다. 병원에 가지 않았다. 약을 이틀 동안 먹지 않았다. 하루는 잠자는 약을 먹지 못할 것이다.

   - 6월 3일 금요일
   일을 오랜만에 나갔다. 둘 다 어리둥절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일을 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칼에 베이고 테이프 날에 엄지를 박히는 상처들보다도 더 아리고 슬프다. 순간. 왜 이래야 하지, 왜 이렇게 일해야 하지라는 생각들이 스친다.
   무거워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병원을 향한다. 우리는 해가 저물도록 무엇도 먹지 않았기에, 임시방편처럼 카페에서 작은 샌드위치 한 조각으로 허기를 달랬다. A는 진료를 받았다. 그의 진료가 끝나고 길가에 있는 우동과 돈가스 가게에서 남은 끼니를 채웠다. 무엇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로 집으로 향했고, 한숨과 멍한 눈빛이 오가는 사이 밤이 찾아왔다. 병원에서 받아온 약으로 잠을 청해본다.

   - 6월 4일 토요일
   주말이 우리에게 있는 걸까. 어느새 ‘우리’라는 단어를 쓰게 된다.
   어딘가 나가고 싶지도, 뭘 하고 싶지도 않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수많은 SNS 속 사람들의 삶을 보지만 이런 아픔은 잘 보이지 않는다.

   - 6월 6일 월요일
   연휴가 끝나고, 일해야 한다는 중압감 아니, 그때 모습이 재현될까봐 무서웠던 게 맞는 것 같다. 지레 겁이 난 채로, 날이 선 채로 이야기를 꺼냈다. 언성이 높아지고, 나는 결국 집 밖으로 나왔다. 걸었다. 갈 곳은 없고, 눈물도 나지 않았다. 누구의 잘못이기라도 하면 욕하며 울기라도 할 텐데, 아니니까. 그저 나의 일, 나의 인생인 걸 너무 잘 아니까. 돌아오는 길에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우리가 떠올랐고 ‘배고프지, 편의점에서 뭐라도 사갈까.’라는 문자에 아마 그도 소리 없이 울었을 것이다.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도 아닌,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로 하는 ‘땅끝수저’. 수저를 물고는 태어났는지, 그냥 맨입은 아니었는지, 오늘따라 괜스레 서럽다.
   엄마 아빠, 언니도 안쓰럽고, 그도, 그의 모친도, 돌아가신 부친도…… 너무너무 서럽다.
   내일이 온다. 무엇이 다를까.

   - 6월 7일 화요일
   택배 포장이 익숙지 않아 늦어질 것을 예상해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감기 기운에 몸이 계속 안 좋은 것 같더니, 도저히 힘이 나질 않았다. 그는 하던 일을 마치고, 기운 없는 내 얼굴을 보더니 병원에 가자고 했다. 이럴 때마다 아픈 내가 진심으로 걱정되는 건지, 아니면 멍하고 기운 없이 아픈 모습이 보기 싫은 건지, 잘 모르겠다. 걱정보다는 화가 더 많이 느껴져서인 것 같다. 너무 걱정하면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두 개의 감정은 너무도 다르다.
   이기심과 이타심. 이런 걸 알아차릴 때마다 힘이 쭉 빠진다.
   왜, 왜, 왜 이러고 있지.
   너 혼자. 그냥 해. 스스로. 그냥 제발 혼자서, 누구 없이도.
   머리 저 안에서 무언가 딩, 딩, 딩 울린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의존하고 있다. 어떤 폭력성에서조차.

   - 6월 8일 수요일
   새벽 6시 30분. 일찍부터 농장에 가기로 했다. 그러나 가지 못했다. 몸이 쇳덩이 같았다. 불에 담가 둔 듯, 뜨겁고 무거웠다. 죄책감이 꿈속까지 찾아와, 계속 깨웠다. 그래도 일으켜 세울 수 없었다. 결국, 오후 2시가 넘었고, 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배는 고팠다.
   전화가 울렸다. 엄마다. 잠긴 목소리를 다듬어보지만 잘 안 된다. 외가 쪽 단연 금수저인 사촌 언니가 미국 어느 대학에 교수로 초빙되어 몇 년간 가 있게 된다는 것. 이렇게 송별회 한다고 몇 시간 전에 알려주면 갈 수 있어도 가기 싫다, 못 간다, 했다. 엄마도 언니도 못 간다 했단다. ‘금수저는 좋겠다.’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사회적 동물인 나는‘가기 전에 따로 봐.’ 하고 마무리했다. 다시 생각해도 가식적인 대사다. 잘했다, 아프기를. 라면 먹고 병원 가야지. 배가 너무 고프다.

   - 6월 9일 목요일
   미뤘던 병원에 갔다. 미루는 이유는 사실 대게 돈 때문이다. 오늘은 치료 7회차에 해당되는 날로 총 두 번의 치료만 남게 된다. 대처 카드라는 것을 작성(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나오는 행동이 어디에서 기인한 과잉대응 혹은 회피인지를 인식하며 글로 써보는 것)하고 심상 치료를 했다. 의사는 편안한 자세로 앉으라 했고 가장 편안한 곳을 상상해보고 그것을 말로서 표현해보라고 했다. 뒤이어 어린 시절 가장 힘들었던 순간 떠올리기, 근래에 가장 힘들었던 순간 떠올리기를 차례로 진행했다. 언젠가 어린 나에게 위로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바랐는데, 그 아이를 만났고 이제 다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끝없이 눈물이 흘렀다. 진료가 끝나고 농장으로 이동했다. 택배에 나가야 할 물품을 사고 밀린 택배를 싸고 나니, 밤 11시가 되었다.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고 잠들었다.

   - 6월 12일 일요일
   출근하자마자 파손된 것과 퀵 배송 하나를 보냈다. 이제 어떻게 할까 묻는 질문에 그는 ‘기운 없고, 하기 싫고, 그냥 집으로 가서 자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안쓰럽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자마자 씻고 자버린다. 같이 자자고 한다. 조금 부스럭거렸다. 그는 이내 ‘시끄러워.’라고 소리쳤다. 싫었다 그 말. 그러나 그냥 삐죽거리기만 한다. 시를 읽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게 귀찮을 것이다. 나도 그걸 알면서도 이기적이다. 끝까지.

   - 6월 13일 월요일
   뭐라도 잡힐까, 이 어둠에 사각사각 연필 소리를 끊이지 않고 내본다. 지금 쓰는 글씨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자는 그를 위해 불을 껐기 때문이다.

   - 6월 14일 화요일
   일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떠나기로 했다. 물론 다시 돌아오기 위함이지만 어쨌거나.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지금은 장사하는 사람이니 그 생각뿐. 사무실을 개인 작업실로 만들란다. 여러 생각이 든다. 내게 그림은 ‘다시’이고 한다면 ‘제대로’이다. 아직 조금 무겁다. 턱 하고 무언가 가로막는다.

   - 6월 15일 수요일
   비, 흔들리는 비행기, 새소리, 엉겅퀴, 고사리, 회, 와인, 파도소리, 일찍 잠들기.

   - 6월 16일 목요일
   일찍 일어나기, 새소리. 종달새인가, 듣기 좋다. 대평리, 변했다 많이.
   그리고 가지 못했던 강정마을. 군인, 사람들, 강아지, 올챙이, 빈 구럼비.
   눈물, 망원경, 바보들, 등신, 천치, 눈물, 답답함.
   흰 꽃과 갈색에 초록 잎. 베이컨볶음밥. 답답함.
   이어서 써내려가는 것을 하지 못해 단어를 나열한다. 모든 게 그냥 편안한데 귀찮다.

   - 6월 17일 금요일
   내일이면 서울로 돌아간다. 어두운 낯빛이 역력하고, 거기에 난 눈치 없는 말까지 해버렸다. 무작정 나온 게 싫은 그는 그늘에 앉아 생각을 좀 하자 했고, 난 예전에 갔던 곳에 가보자고 했다. 전과 같진 않지만 꽤 많이 그대로였고, 그저 그런 식사를 하고 그저 그런 커피를 마셨다.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그는 자고, 나는 남은 책을 읽었다.

   - 6월 18일 토요일
    돌아왔다. 서울에. 그리고 긴 잠을 잤다. 긴장 속에.

   - 6월 19일 일요일
   늦잠을 자는 게 잘 안 된다. 약은 삼십 분 만에 잠들게 하고, 일곱 시간 정도를 자고 나면 깨도록 리듬을 만들어주는 것이지만. 사실 약 다섯 시간 정도의 잠을 자고 있다. 몸이 많이 안 좋았는지 그와 타이 마사지를 찾았다. 짧은 바지를 입고 온몸으로 일하는 젊은 그녀는 여기 인생이 싫겠다, 싶다. 감히 그렇게 생각한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당연히 불룩해진 것을 아무렇지 않게 보고는 지나친다.

   - 7월 8일 금요일
   묶여버린 시간들이 많다. 결국 아팠고, 아픈 나를 두고 가질 못하는 건지, 회사에 가기 싫은 건지, 그는 옆에 앉아있다. 혼자서는 자신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그를 등 떠밀듯 보낼 수 없었고, 혹여 나 때문에 일이 안 되는 건 아닌지, 아마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었던 것 같다. ‘의존적’이었다. 방금의 나는. 아니 지금의 나도.
   현실적으로 회사에서 갚아나가야 할 돈도, 개인적인 돈도, 살아가야 하는 돈도, 이렇게 벌어야 할 돈이 많은데, 둘 중 누구라도 일하러 나가지 않으면 한 푼도 벌 수 없다는 불안감이 자꾸만 밀려왔다. 아파서 못 간 것도 있지만, 돈이 없어서 병원에 이 주 넘게 가지 못했다. 이제 약이 없다.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나는, 더. 힘들다.
   팔이 아프다. 손에 힘이 없고 계속 써내려가기가 힘들다.
   아무도 망친 삶이 아니길. 내가 내일은 다시 태어날 수 있길. 아무도 아프지 않기를.

   - 11월 22일 목요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도쿄만 가봐서 편견일 수 있지만, 일본은 정돈된 거리와 정돈된 사람들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곳이다. 그런데 오키나와는 조금 달랐다. 미국의 흔적, 오래된 건물, 낡은 것들이 전체를 쌓아서 만들어가는 공간 같았다.
   이 상황에 ‘휴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추워지는 한국의 서울, 매주 집회로 서성거리게 만드는 이 나라를 떠나, 어쩌면 이렇게 만든 장본인의 후손의 나라에서 조용히 앉아 차를 마시고, 해변을 걷는 것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휴식’이라고 이야기해도 괜찮은 걸까.

   - 11월 30일 수요일
   11월 마지막 날에 왔다. 너무 빠르다. 어떻게든 견뎌내는, 버텨내는 시간들이었다. 내일과 올해의 남은 몇 안 되는 날들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생각한다. 많이 변해 있는, 변해가는 삶 속에서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앞에 놓인 길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내가, 가끔은 원망스럽다. 너무 많은 감정의, 사건의, 커다란 물결 속에서 또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
   달그락달그락 탁탁 음식을 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가 왠지 미안하다. 농구 중계가 그 무게를 대신하고, 조금 더 감정에 솔직해지기 위해 연필과 일기장을 꺼내놓는다. 거짓은 어디까지이고 진실은 그 진심이 맞는지 자문하게 되는 일이 많아지고, 이런 내가 불편하기도 새삼 낯설기도 하다.
   〈it had to be you〉의 멜로디가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고, 여러 명의 얼굴 속에서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오롯한 이별이 또하나의 진정함 알게 해주지 않을까 하면서도, 엄마의 피가 섞인 나를 다시금 느껴본다. 기다리고 참는 그 모습 위에 나.

   - 12월 1일 목요일
   아마 아무도 이런 날에 대해 예상을 하진 않겠지. 그 어떤 날만큼이나 무겁게 지친 모습으로 일어나 출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말했다. 의욕이 없다고, 힘들다고 이야기했다. 나흘째 매장을 비우고, 일하지 않고, 그런 나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데도, 움직이기 힘든 나와 기다리기를 하지 않을까봐 겁이 나는 너는 그대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이례 없는 오랜 잠을 자고 계속 문자들을 확인하고, 무엇인가 잘못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떠다니는 생각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역시 감당하지 못하는 나. 나이가 들어가고 서른이 넘어가는데도 크게 바뀌지 않는 나. 아니면 혹시 이상하게 바뀌어가는 나.
    ‘내일은’ 하고 다짐을 해본다. 아마도 다짐일 것이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생각은 분리되고 부유한다. 병원에 가야 한다. 운동을 가야 한다. 일을 하러 가야 한다. 나의 제대로 된 진심을 봐야 한다.

   - 12월 3일 토요일
   3시 병원 다녀옴. 소극장. 소등 시 자동사고→ 호흡곤란 이어짐. 리보트릴 두 알 먹음. 회복까지 사십 분 이상 걸림. 잘 돌아오지 않았음(손이 차고 땀나고 어지러움). 두 시간 후 약효 때문인지 사람 많은 곳에서 이동은 괜찮았음.

   - 12월 5일 월요일
   출근하지 않았다. 그와 나는 잠시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을 천천히 갖고 여름쯤 일을 정리하고 싶다고, 그동안의 미수금을 갚기 위해 봄 성수기를 지내고 정리하고 싶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알겠다, 도울 수 있는,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은 같이 하자, 했다. 그리고 나 역시 어느 정도 의사를 밝혔다. 혼자 살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상황이 바뀌게 될지, 나는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을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이 겨울 끝자락에 답이 없는 글을 뒤적인다.

   - 12월 14일 수요일
   시간은 다시 속수무책으로 흘러가고, 일을 해야 하는 날이다.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 지나고, 자리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인다. 속으로 조급해졌고, 동시에 기운이 빠졌다. 출근하지 않을 거냐고, 그러면 나라도 출근하겠다고 물으며, 대답을 재촉 혹은 강요했고 끝내 그는 폭발해버렸다.
   “너도 그만둬. 나 혼자 하면 되잖아. 나 혼자 하면 되지. 너도 그만해.”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집을 나갔고, 나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멍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했고 눈물이 났다. 이 집에 있기 싫었고 나가야 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그는 집으로 왔고, 나는 그런 그를 등 뒤로 둔 채 문을 열고 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버스를 타고, 잠깐의 풍경에 감탄하고 좋아하고 맥주를 마시고 순간 기뻐하고,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나를 밀어넣는다. 무엇을 원하는 걸까 나는.

   - 12월 15일 목요일
   보름이 남은 한 해, 해결해야 하는 일들은 쌓여가는데 또 출근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해결할 수 있을까, 채무 계획들은 이행할 수 있을까, 죄책감이 일었다. 제발 너라도 나가. 마음속에서 외쳤다. 답답했다. 집에 들어와서, 계속되는 기억 속에 감정을 찾아보려 노력했다.
   어려웠다.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어디로 가는 건지. 어디에 가고 싶은 건지. 올해도, 오늘도 시간은 흐르고 내일은 내일의 시간이 기다린다. 무섭고. 또 두렵다.

   - 12월 18일 일요일
   지난 금요일, 임파선이 부었다. 출근하지 않아도 될 구실이 또 생겼다. 아팠다. 너무.
   나는 안 될 줄 알면서 조심스럽게 “오늘 시장은 못 갈 것 같아. 아마도 일을 못 갈 것 같아. 그러니 네가 내 몫까지 해줘.”라고 말했고, 그는 아주 희미하고 작고 힘없는 목소리로 “응.”이라고 대답했다. 예상대로 그는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정말 나가지 않을 거냐고 물었다. 그는 혼자서는 할 수 없다고 도와달라고 했다. 조금만 더 도와달라고. 솔직히 뿌리치고 싶었다. 너무 지쳤고 이 침대마저 싫었다. 그는 내게 월요일에 출근하면 된다고, 화요일은 혼자 하겠다고 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같이 있어 주겠노라 하고 싶었지만 나는 이미 한 손가락씩 그를 천천히 떼어내고 있었다. 아마 마지막 손가락을 뗄 때까지 모르게 하겠지, 잔인하게, 그리고는 그게 최선이라 하겠지.
   나의 20대, 새로운 것들, 감정, 고통, 기쁨, 불안, 등이 나를 어지럽힌다.
   매우 이기적이게도 사랑하고 있고, 아이러니하게도 살기 위해 떠나려 한다. 지나친 기우일 수 있으나, 그도 이 이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이 일에 몰두하는 것이 지금 나의 알량한 사랑이다.

우주

"하지만 나의 글에서는 단 하나의 작은 드로잉조차 발견할 수 없다. 글을 글로서 충분하고 그림은 그림 자체로 충분하다는 내 고리타분함 때문일까.”

2018/02/27
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