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이 글은 2018년 1월 8일에 마감한 글이다. 《비유》의 발행 일정이 변경되어 뒤늦게 실렸다. 2018년 2월 9일 연세대 위당관에서 열린 국학자료원 주최 워크샵 <비평 현장의 쇄신을 위하여:페미니즘과 한국문화를 논하다>에서 이 글을 대폭 확장하여 발표한 바 있음을 밝혀둔다.

   예성 아파트로 가기 위해 연당집 앞을 지나다가 나는 문득 눈을 치떴다. 대문 옆 울타리에 눈에 익은 내 스카프가 매어져 있었던 것이다. 벌써 여러 날 전 내가 바보의 다리 상처에 묶어 주었던 것으로 나는 그동안 스카프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래된 물건으로 색깔이 낡고 올이 해져, 버리려고 내놓았다가 그날 목에 두르고 나갔던 것이다. 엉뚱한 장소에 놓인, 붉은 무늬가 요란한 낡은 스카프는 이물스럽고 부끄러웠다. 내게 익숙하고 내 몸에 걸쳤던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
   며칠 전 나는 바보가 울타리를 뽑는 것을 보고 있었다. 바보는 작은 톱으로 울타리를 엮은 철사를 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톱이 아닌 펜치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일을 시작하면 바보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바보의 주위에는 유치원에도 학교에도 가지 않는 동네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바보의 행동 하나하나에 따라 바보가 담배를 피운다, 바보가 오줌을 눈다, 바보가 웃는다, 라고 일일이 말했다. 끊기지 않는 쇠줄을 끊으려 온 힘을 다해 애쓰던 그가 다리를 싸쥐고 주저앉았다. 더러운 트레이닝 바지에 피가 배어나왔다. 톱이 동강이 나면서 무릎을 찔렀던 것이다. 바보가 쥐어짜듯 온 얼굴을 찡그리며 어헝어헝 울었다. 집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피는 점점 더 짙고 붉게 번지고 나는 바보에게 바지를 걷도록 한 뒤 스카프를 풀어 피 흐르는 상처를 동여매었다. 피 흐르는 푼수치고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바지 자락이 자꾸 흘러내려 나는 무릎 위로 버쩍 올려주었다. 근육질의 단단한 살 위로 내 손이 닿자 바보는 간지럼을 타듯 움찔움찔 몸을 비틀었다. 바보도 털이 난다, 우리 아빠처럼. 어린아이들이 바보의 다리를 가리키며 떠들어대고 울음을 그친 바보는 잔뜩 찡그린 얼굴에 자랑스러운 표정을 떠올렸다. 나는 그가 알아들으리라 믿지 않으면서도 꼭 소독을 하고 약을 발라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바보라서 아무것도 몰라요. 바보는 히죽 웃고 아이들이 대신 대답했다. 바보는 아마 내게 돌려주기 위해 스카프를 울타리에 묶어 놓는 기교를 부렸는지도 몰랐다. 나는 엷은 수치심 비슷한 느낌에 스카프에서 눈을 돌리고 예성 아파트로 향했다.
(「옛우물」, 『불꽃놀이』, 33~35쪽)

    1. 오정희 소설의 토폴로지
   오정희의 소설이 특별한 ‘장소’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물론 오정희 소설의 공간성이나 장소성에 관한 연구들이 이미 제출된 바 있다.) 물리적인 좌표인 ‘공간’이나 정보의 표면인 ‘지도’가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을 표시하고 있는, 그래서 그 사람의 생활과 감정과 가계(家系)와 기억과 현재가 기록되어 있는 장소 말이다. 오정희의 토폴로지는 끝없이 분기해나가는 장소들의 분산 내지 수렴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나면 그 장소가, 마치 명료한 의미의 영토 위에 구축된 왕국인 것처럼, 그리하여 말의 입법권과 행정권과 사법권이 일체화된 의미의 전제(專制)가 가능한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다.
   「옛우물」(1994; 위의 인용은 『불꽃놀이』, 문학과지성사, 2017. 이하 이 책에서 인용할 경우 본문에 쪽수만을 표기한다.)을 생각해보자. “어릴 때 살던 동네 가운데에 큰 우물이 있었다.”(45쪽) ‘나’의 회고를 따라가던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 우물이 현재의 삶과 대비되는 장소임을 알게 된다. ‘유년/중년’ ‘추억함/살아감’ ‘물이 깊고 물맛이 좋으며 금빛 잉어가 살던 꿈의 삶/중년의 안정되었으나 권태로운 삶’ ‘기원/현재’ 등으로 분화해가는 의미론적 분할이 바로 이 장소의 등장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옛우물’이 정말로 그런 장소라면 이쪽 세계와의 대비나 대조로서만 자리해선 안 된다. ‘옛우물’은 이 세계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출현해야 한다. 기원이란 그런 것이다. 푸코는 기원이 원뿔의 꼭짓점과 같다고 상상했다. 2) 꼭짓점 자리에 놓인 기원은 그 자신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현재의 평면(원뿔의 바닥면)을 초래한 보이지 않는(비가시적인) 원인이다. 따라서 기원은 현재라는 표면 위에, 그 가시적인 표식(mark)을 끊임없이 아로새기고 있다. ‘옛우물’이 지금 ‘나’의 삶에 무수히 중첩된 흔적을 남겨놓는다는 말이다.
   원근법의 중심인 소실점은 사라진 것, 부재하는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옛우물」의 옛 연인인 ‘그’도 시간성의 밖에서 부재하는 것으로 존재한다.(“원근법이 모범적으로 구사된 그림의, 점점 멀어져가는 풍경의 끝, 시야 밖으로 사라진 까마득한 소실점으로 그는 존재한다.”, 44쪽) 시간의 마모와 상관없이 추억의 형식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도 옛우물이다. 그뿐인가. “깔끔한 성격의 남편”이 “그답지 않게 자주 변기의 물을 내리는 일을 잊”(15쪽)을 때, 남편의 똥을 담은 변기는 어린 시절의 남편을 증언하는 ‘옛우물’이다.
   본래의 ‘옛우물’은 회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것이었으나 현재의 평면에 중첩되고 이행하며 가시적인 것으로 다시 등장한다. 어린 시절의 남편을 증거 하는 저 똥을 품은 변기도 마찬가지다. ‘옛우물’도 한 번은 저렇게 속을 드러낸 적이 있다. “물맛이 뒤집혔기 때문이었다.”(47쪽) 바닥을 드러낸 우물 속에는 “바닥의 흙이며, 녹슨 두레박과 두레박 건지는 갈쿠리, 삭아버린 고무신 한 짝, 썩은 나무토막, 사금파리 따위들”만 있었다.(48쪽) 그것은 황폐한 내면, 이를테면 죽음을 안고 있는 기원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친구 정옥이는 그 우물에 빠져 죽었다. 옛우물은 그처럼 ‘죽음’을 감추고 있기도 하다. 염쟁이인 정옥의 아버지는 밤마다 “관 속에 들어가 잔다고 했다.”(25쪽) 우물 속의 우물 속의 우물인 셈이다. 정옥의 죽음 이후 “우물은 메워졌다.”(50쪽) 그러니까 우물은 추억 속에서도 이미 자취를 감춘 것이다. 부고로 존재하는 ‘그’처럼.
   마흔다섯 살의 ‘나’에게도 찾아갈 수 있는 혹은 볼 수 있는 두 개의 장소 즉, 가시화된 ‘옛우물’이 있다. 하나는 “우리 가족이 편의상 ‘작은집’이라 부르는 예성 아파트”다.(32~33쪽) 새로 분양받아 이사 오기 전에 잠깐 살았던 “열한 평짜리 서민 아파트”(36쪽)로 ‘나’가 혼자 찾아가 쉬곤 하는(때로는 죽은 듯이 잠이 들기도 하는) “빈집”(55쪽)이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출입금지 푯말을 무시한 채 개구멍으로 드나들어야 한다.(33쪽) 집 안엔 벽에 액자를 떼어낸 자리가 있다.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존재의 흔적”(38쪽)이다. 역시 우물 속의 우물이다. 또 하나는 연당집이라는 곳이다.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이백 년도 넘은 크고 낡은 기와집으로 여름이면 앞마당의 수련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38쪽) 후손의 재산 다툼에 퇴락하고 무너져가는, 옛 영화만을 흔적처럼 간직한 곳이다.

   2. 장소와 여성
   여성주의를 이야기하는 지면에서 뜬금없이 장소론을 펼친 이유는 우리의 익숙함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다. 개척자 남성과 미답지 여성, 동선(動線)을 그리는 남성과 지도로 표시되는 여성, 이런 이분법을 따른다면 ‘옛우물’은 여성적인 것의 표상으로 간주될 법하다. 자궁(기원으로서의 장소), 생산(생명의 물이 솟는 장소), 죽음(무로서의 장소), 유년(부재하는 유토피아로서의 장소), 유폐(가두어버린 장소) 등의 의미가 거기에 내려앉는다.
   그런데 ‘옛우물’은 오히려 이러한 의미 부여를 거부하는 장소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앞에서 살펴보았듯 ‘옛우물’이 부재하는 것으로서 ‘나’의 현재에 저토록 자주 출몰한다면, ‘옛우물’이야말로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성으로서 혹은 비의미론적인 것의 의미론으로서 간주되어야 하지 않을까? 가시성과 의미, 둘은 교환될 수 있는 말이다.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화된다는 것은 의미화 되지 않는 것이 (의미의 잉여로서건, 의미의 교란으로서건) 의미로서 실존한다는 뜻이다.
   인용문의 ‘스카프’를 보자. “엉뚱한 장소에 놓인, 붉은 무늬가 요란한 낡은 스카프는 이물스럽고 부끄러웠다.” 그런데 이 감정은 “내게 익숙하고 내 몸에 걸쳤던 것이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이물감과 수치심은 그것이 통상의 가시적인 자리에 놓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나’가 누군가에게 ‘선물’하거나/받거나 ‘나’를 ‘치장’하는 데 그것을 사용했다면, 그래서 그것이 ‘나’의 ‘여성임’을 강화하는 데 썼다면, 그것은 이물스럽거나 부끄러운 것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스카프는 한 ‘바보’의 상처를 동여매는 데 썼으며 그것도 원래는 버리려고 매고 갔던 것이었다. 그것이 바보가 지키는 집 “대문 옆 울타리”에 매여서 바람에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한 남자의 전리품인 것처럼.
   ‘바보’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연당집을 지키고 있었다. 바보는 열심히 연당집의 나무 울타리들을 뽑고, 주변의 나무들을 베고 있었다. 그것이 집을 허무는 일이라는 것도 모르면서. 집은 “어느 부자가 이 집 재목을 그대로 옮겨 써서 산속에 근사한 한식 별장을 짓기로 했기에”(52쪽) 헐려나가고 있었고, 바보는 바로 그 일을 했던 것이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면서 그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으니 바보는 바보였으나, 그것은 ‘옛우물’로 표상되는 모든 장소의 운명이기도 하다. 어떤 장소를 보존하는 것은 그것의 ‘퇴락’을 나아가 ‘폐허가-되기’를 지키는 것이다. 당연히 그것의 완성은 그 장소의 ‘사라짐(멸실)’이다. ‘옛우물’이 메워짐으로써 ‘나’의 기억 속에 장소화 되었듯이. 만일 ‘옛우물’이 여성을 의미화한다면 바로 이러한 역설로서만 의미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무엇을 지키는지도 모르고 지키고 있는 바보(이 바보는 신화적으로 말해서 성소를 지키는 괴물에 해당한다)에 의해서, 특정한 ‘의미’ 내지 ‘가시성’이라고 일컬어질 만한 의미나 모습을 지우면서.

   3. 오빠의 말과 부네의 말
   잠시 「유년의 뜰」(『유년의 뜰』, 문학과지성사, 2017)로 가보자. 여기서도 저 ‘뜰’은 ‘옛우물’과 같은 장소에 있다. 생계를 위해 밤마다 술집에 나가는 어머니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어머니를 증오하면서 영어 교과서의 문장들을 읊어대는 오빠, 언니와 ‘나’로 이루어진 가계가 있다. 오빠는 늘 다니다 만 중학교의 영어 교과서를 읽는다. “홧 아 유 두잉? 아임 리딩 어 북.”(12쪽) 그러다가 오빠는 미국인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서분의 충고에 따라, 미국에 가리라는 희망을 안고 이런 영어를 배운다. “아임 낫 라이어. 아임 어니스트 보이.”(61쪽) 이 말은 의미를 실어나르는 말하자면 가시적인 언어이다. 오빠의 미국행은 실패로 끝났으나 오빠(들)은 자라서 “은행의 부장직에 있는” 「옛우물」의 “남편”이거나 그의 동승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저 말들은 의미에 포획된 법의 언어, 욕망을 가시화하는 질서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속물로 보이는 서분의 언니가 ‘부네’다. 부네는 아비에 의해 방 안에 갇혀서 지낸다. 그녀가 갇힌 방은 “바로 눈앞에 있으면서도 실제의 것이 아닌 듯 아득히 여겨지는” 방(24쪽)이다. 우물 속의 우물……이 여기에도 있다. 우리는 “늙고 말없는 외눈박이 목수”가 오디세우스와 일행을 동굴(!)에 가둔 퀴클롭스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 결국 딸이 살아서는 영영 그 방을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 방을 지키는 것으로 그 방을 폐허로 만들었다는 것, 딸을 지키는 일이 딸을 죽인 일이 되고 말았다는 것, 마지막으로 딸의 관을 짜는 일을 해서 딸의 유폐를 완성하고 말았다는 것을 안다. 외눈박이 목수는 어쩌면 ‘연당집’을 지키던 그 바보이기도 하다. 딸의 벗겨진 옷이 “창 앞 석류나무에 사흘씩이나 걸려” 있었다. 그 옷이 「옛우물」의 ‘나’가 바보에게 건넨 바로 그 스카프였으리라. 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비의 손에 끌려와서 유폐되었다. 저 어마어마한 묵언이야말로, 오빠의 영어(“아임 낫 라이어. 아임 어니스트 보이”)와는 반대의 자리에서,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을 건네는, 의미화되지 않음으로써 전달되는 의미가 아니었을까.3) “아아아아아아―그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분가루처럼 엷게 떨어져 내리는 햇빛뿐이었다. 내가 들은 것은 환청인지도 몰랐다.”(55~56쪽)
   부네의 저 말은 어떤 음절로도 분해되지 않으며, 어떤 형태소로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아무 의미도 갖고 있지 않으나 바로 그 의미 없음(비가시성)으로써 노래와 탄식과 신음을 모두 가지고 있는 소리가 되었다. 그것은 결코 무의미의 소리가 아니다. 다만 통상의 언어(“아임 낫 라이어, 아임 어니스트”)가 아닐 뿐이다. 그것은 “입 안 쪽의 살처럼 따뜻하고 축축한 느낌”을 전달하는 말 아닌 말이고 “내 몸 가득 따뜻한 서러움”과 “부드러움”을 전해주는 말 밖의 말이다.
   위의 두 소설에서 공히 주인공인 여성의 신체를 대표하는 옷이 깃발처럼 펄럭이는 장면이 나오다. “구조를 청하는 낡은 헝겊 쪼가리”가 「옛우물」의 “낡은 스카프”이자 「유년의 뜰」에서의 부네의 속옷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헛되고 헛되이 펄럭일 것”이지만, 이 공간을 교란하는 펄럭임이라는 점에서 헛된 것만은 아니다. 절박감에 입을 벌리고 가쁜 숨을 쉬며 웃는 저 웃음이 부네의 입에서도 머물렀을 것이라는 점 역시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나는 우리의 여성주의가 대립물의 토포스 위에 축조되지 않고, 이 이분법을 논파하고 넘어서고 새롭게 구축하는 자리에 서 있기를 희망한다. 모든 언어는 남근적이다. 그것의 상징적 작용을 인정하든, 그것의 부재를 주장하든 우리가 그것의 가시성 내지 의미화에만 몰두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포획된 것이다. 말을 하면서도 그 말의 포착에서 빠져나가는 말, 부네의 저 말이 우리에게 절실하다.

양윤의

문학 평론가. 읽고 쓴다. 다시 읽고, 다시 쓴다.

2018/04/24
5호

1
본래 이 글은 2018년 1월 8일에 마감한 글이다. 《비유》의 발행 일정이 변경되어 뒤늦게 실렸다. 2018년 2월 9일 연세대 위당관에서 열린 국학자료원 주최 워크샵 <비평 현장의 쇄신을 위하여:페미니즘과 한국문화를 논하다>에서 이 글을 대폭 확장하여 발표한 바 있음을 밝혀둔다.
2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 452쪽.
3
오정희의 소설에 등장하는 ‘부네’에 대한 여성주의적 분석은 신수정에 의해서 이미 제출된 바 있다. 이 글은 신수정의 분석에 동의하면서, 여성과 토폴로지를 연결하고자 하였다. 신수정의 글은 다음을 참조. 「부네에게―서러운 성장, 흐느끼는 주체」, 《비유》 1호. http://view.sfac.or.kr/html/epi_view.asp?cover_type=VWCON00003&cover_idx=43&page=1&epi_idx=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