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시선을 잡아끈


   카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앞에 있는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 만난 사람이 어쩌고저쩌고……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데…… 계속해서 듣던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 피곤해.’ 가끔은 옆 테이블 이야기가 더 흥미로운 것 같다. 내가 집중해서 들어야 할 이야기 말고, 흘러가다가 문득 탁 치고 지나가는 이야기들 말이다. 일상에 널린 텍스트 또한 그러하다. 내가 꼭 봐야 할 것 말고, 지나가다 무심코 본 것이 눈길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대체로 ‘광고물’로 분류되는 것들이다. 광고물들은 어떻게 시선을 끄는 걸까? 광고 자체의 목적이 누군가의 시선을 강하게 끌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표현 하나하나에 더 공을 들이는 것 같다. 비시각각에 제보된 사진들 중 압도적으로 많은 것 또한 광고물이었다. 제보자들에게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켰기에, 사람들이 일상의 걸음에서 잠시 멈춰 카메라를 들게 된 걸까. 이번 화에서는 어느 날 누군가의 시선을 잡아끈 광고물들을 살펴본다.


‘앵그리버드’는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모바일게임의 캐릭터로, 화난 얼굴을 한 빨간 새이다. 위 문구에 따르면 핸드폰만 볼 경우 앵그리버드처럼 험상궂은 얼굴이 될 수 있으니 소중한 나를 찾기 위해 책을 보라는 속뜻을 찾을 수 있다. ‘ㅠㅠ’와 ‘^^’는 휴대폰 및 웹상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문자 표현으로 휴대폰 문자 세대에게 친근감을 불러일으킨다. 광고에서 분명 책을 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 광고물을 보고 있고 하단까지 시선이 내려간다. 광고 문의는…… (사진은 윤마님 제보)

420, 18, 0.08 숫자들의 기울기와 색깔이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일종의 강조인 셈이다. 숫자들의 색깔은 하단의 ‘아끼는 물’ 색깔과 같다. 강조된 일련의 숫자들을 통해, 광고물은 어렵사리 우리에게 찾아온 소중한 물(아끼는 물)에 대해 말한다. (GH님 제보)

이 광고물을 통해 협성대학교가 화성시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광고물에선 화성이라는 우리나라 지명이 우주의 화성과 동음이의라는 것을 이용해 ‘화성(華城)’이 ‘화성(火星)’인양 말하고 있다. 좌측 상단에는 ‘성큼성큼’이라는 의태어에 ‘이룰 성(成)’이라는 의미를 임의로 넣어 또 새로운 의미를 만들고 있다. 하단에는 화성시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화성시 : 세계 7대 부자도시 4위’ 이 광고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동생 제보)

한국어의 절반 이상이 한자어인 만큼, 한자는 우리에게 친숙한 글자이다.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자의 동음이의를 이용하여 광고 문구를 만드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 광고 또한 이점을 적극 활용했다. ‘수호신(守護神)’의 ‘지킬 수(守)’가 ‘물 수(水)’로 대체되어 수산업 협동조합인 수협(水協)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당신을 지켜주는 이 ‘수호신(水護神)’은 바로 수협보험이다. (GH님 제보)

‘최초’ ‘단 하나’의 부사어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도 강조의 기능을 수행한다. (디유님 제보)

저 꽃잎 하나하나는 팔을 들어올려 활동하는 사람을 나타낸 것인가? 그리하여 장미가 된 것인가? 스위스 국기는 빨간 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 광고의 마크와 배경색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스위스 힐링 아웃도어 와일드로즈’라는 문구가 이해가 된다. 그런데 힐링은 왜? 꽃잎 하나하나에 맺힌 꽃향기가 힐링과 연관된 것인가? (GH님 제보)

‘S-OIL’ 과 ‘사랑’ 위에 점을 찍어 강조를 하고 있다. S-OIL이 곧 사랑(sarang)이라는 것 같다. 그냥 가득도 아니라 가~득이다. (디유님 제보)

유명인의 이름을 넣은 이유가 뭘까? 사람들이 더 주목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일까. ‘~ 제가 해냅니다!’ ‘~ 말입니다!’ 문장 말미에 비슷한 어구가 들어간다. ‘99퍼센트’라는 숫자를 통해 성공률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의 후예’라는 말은 단지 후손이라는 뜻으로 쓰이지 않는 것 같다. 이를테면 ‘단군의 후예’라는 말에서, 이때의 후예는 족보를 따졌을 때 단군의 자손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단군을 비롯한 고조선의 전통을 계승한 사람 등의 의미일 테다. 즉 후예라는 말에는 혈통을 비롯한 어떠한 전통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담겨있다. 그런데 부킹의 후예라니, 부킹에도 전통이 있단 말인가? (Y님 제보)


   늘 그렇듯 마지막엔 같은 질문을 한다. 이것은 시인가 시가 아닌가?


   광고 속 혐오하십니까?


   대학 시절, 학생문화관은 또다른 집이었다. 체육 관련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수업이 끝나면 무조건 동아리방이 있는 학문관으로 달려갔다. 시험 기간이면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 동아리방에서 자는 경우도 허다했다. 한 손에 목검을 들고 학생문화관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사람이 바로 본인과 동아리 친구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집) 학문관에 붙은 한 포스터를 보았다. 장애인 인권 관련 동아리에서 독서 모임을 주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층이었던 것 같은데…… 어떤 활동을 하는지도 잘 몰랐다. 인권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던 때라 문자를 보냈다. ‘저도 이 모임에 참여하고 싶은데요.’ 곧 답장이 왔다. ‘네, 오세요.’
   읽고 가야 하는 부분은 관련자 분이 프린트로 나눠주었다. 열심히 읽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명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완벽히 이해하진 못해도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어느 정도 알게 되겠지, 생각하고 모임에 참여했다. 책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잘 이야기할 수 없었다.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책 바깥의 내용에서도 그랬다. 그만큼 장애인의 인권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장애인 비하 표현과 관련된 주제로 옮겨갔다. 누군가 말했다. “이런 광고 아세요?”

장애인 주차구역 관련 공익광고이다. (공익광고협의회)


   어렸을 때, 분명 본 광고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 표현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장애인 주차구역을 지키자는 내용인데, 그 문구는 명백히 시각장애인을 비하하고 있었다.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말했다. “말도 안 되죠.”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내가 듣거나 말하는 어떤 표현이 누군가의 비하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기발하다’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비하와 혐오의 표현일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어떤 표현을 써야 하지?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건 어려운 일이구나. 그만큼 섬세해야 하는 거구나. 그때부터 시작된 고민은 지금까지도 죽 이어지고 있다.


   비시 인터뷰 : 당신이 생각하는 시가 아닌 것


   다른 사람들은 비시(非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비시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한지 살펴본다. 이번 화에서는 소설과 시를 쓰는 조시현의 이야기를 들었다.

조시현. 소설과 시를 쓰고 있다. 치즈를 좋아하는 물고기자리이다.

   Q. 비시, 즉 시가 아닌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시가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이다. 사랑편지나 노래 가사를 떠올렸다. 사랑한다는 말로 시작해 사랑한다는 말로 끝나며 여기에는 다른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일종의 아름다움을 느끼면 그것이 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름다움만으로 시가 되진 않는다. 명확히 그 자체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시가 아니다. 이밖에 약국에서 주는 약에 대한 설명서도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떤 성분들이 얼마나 함량되어 있는지, 하지 말아야할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지시되기 때문이다.

   Q. 그렇다면 명확히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비시인가?


   그렇다. 비시는 그 자체로 완결된다. 여기에는 어떤 의문도 남지 않는다. 그것이 하고자 하는 바를 곧장 수행하는 것은 시가 아니다. 그에 비해, 시는 언제나 의문스러운 지점이 있다. 독자에게 상상할 수 있는 자리를 넘겨준다.

   Q. 다른 질문인데, 비시라고 일컬어지는 텍스트를 오독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독해할 수 있다면 시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시의 자리가 그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텍스트 자체는 비시이다. 빈틈 있는 텍스트가 시에 가깝다고 느낀다.

   Q. 본인이 시를 쓸 때도 빈틈을 만드는가?


   시를 쓸 때 스스로는 완결성을 갖춘다고 하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독해를 한다. 본인의 의도대로 읽히지 않는 것, 새롭게 읽히는 것 등이 일종의 빈틈이라고 본다. 시는 일종의 실수라 할 수 있다. 완벽한 것은 오히려 시가 아닌 것 같다. 시를 쓰는 것은 사랑한다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사랑한다는 말에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는 것이다. 형식의 문제와는 다르다. 지시문의 형식을 가져와도 시를 쓸 수 있다. 요즘에는 시 같지 않은 형식으로 시를 쓰는 것에 대해 고민 중이다. 다른 방식, 다른 분야(이를테면 SF)로 시를 말할 수 없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양지윤

비시(非詩)에 대해 탐구합니다. 시가 아니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텍스트를 다룹니다. 직접 목격한 비시 텍스트를 상시 제보 받습니다. 관련된 생각과 일화도 보내주세요. 함께 나누며 생각하고 싶습니다. 메일 jiyangyoon@gmail.com, 인스타그램 @bisi_write

2018/02/27
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