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교환
이동 속 삶
공항을 나오자마자 바로 택시 승강장으로 갔다. 시스템 트러블이 생각보다 내 발목을 오래 잡았다—비행기를 타고 오긴 했지만. 목적지는 1년 전에 알게 된 부평의 숙소였다. 어디로 가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안내를 받고 택시를 탔다. 어서 오세요. 이 시간에 댁으로 안 가시고 호텔로 가시는군요. 어디서 오셨어요? 일본에서 왔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받는 질문의 대답은 훨씬 간결하다. 예상되는 질문은 대답까지 준비해준다. 하지만, 발음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한다. 입에 붙어있었던 언어를 다시 입에 붙일 때, 그 언어는 그동안 어디로 떠나 있었던 걸까—어쨌든, 어서 오세요. 토요코인이 무슨 캡슐호텔 같은 건가요? 코인 노래방처럼? 시속이 올라간다. 속도가, 바람이, 풍경이 타격한다. 충돌은 수없이 많지만, 내 옆을 지나가기만 할 뿐이다. 아니요. 그냥 비즈니스호텔입니다. 토요/코인으로 끊어 읽는 게 아니라 토요코/인이에요. 아 그렇군요. ○○가족 여러분이라고 환영해주는 모 항공사는 ‘이랏샤이마세~’라고 안내해 주시는데, 탈 때마다 매번 무슨 노래방 기계가 있는 스낵1)으로 온 기분이 든다. 그러면 잠깐, 여기서 한 곡 불러 드릴까요? 나니모 시라즈니…… 아나따와 잇따와……2)
있다 온 사람이, 잇데키타(말하고 온/다녀온) 사람이, 아침을 맞이한다. 에어비엔비보다 비즈니스호텔을 선호하는 이유는 거기에 떠난 사람의 온기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기 때문—고로, 없기 때문이다. 프론트에는 이런 문구가 걸려 있지만 말이다. “내 집 같은 편안함.” 일어나면 어제는 벌써 전생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전생으로 돌아간 적이 없어서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다. 정말 그냥, 기분 탓(気のせい)이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서, 대한민국에서 고시원 생활을 보내던 시절의 기억이 종종 스쳐 지나간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과거를 불러일으킨다. 침실에, 기억 속에 들어온 햇빛.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현생이 이미 전생이 되어버렸다. 어제까지 읽고 있던 책도 없고, 옆에 있던 삶의 동반자도 없고, 토스터를 돌리는 장모님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추락해도 다행이었겠다. 내게 정말로, 정말로 소중한 것들은 다 일본에 놓고 왔다—나 혼자 빼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권 사에 작가의 글을 번역한 이후부터인 것 같다.
만약에,
만약 천국까지 가는 비행기가,
지상에 있었을 때 행실에 따라 등수로 나뉘고
나는 일등석이 아니라 저가 항공편을 타게 되면,
나는 분명 기내 반입이 가능한 만큼
가져갈 수 있는 것도 필사적으로 고르겠지.
근데 있잖아,
타다가 추락해서 지옥에 가게 되면
나는 분명 후회하겠지,
그 소중한 추억을 지상에 두고 올 걸 그랬어. 이렇게 말이지.
—권 사에(권사영) 지음, 콘노 유키 옮김, 『“조난당하신 겁니까? ... 그러세요?”(불신지옥 편)』, 「꿈은 클수록 좋다」부분
이틀, 사흘이 지났다. 내력이 점점 길어진다. 어디서 오셨어요? 일본 사이타마에서 나리타공항까지 전철로 이동하고, 비행기를 타고…… 숙소요? 부평의 비즈니스호텔에 묵어요. 오늘이요? 오늘은 안국역-경복궁역 인근에서 전시를 보고, 을지로로 넘어와서 몇 개 전시를 보고, 여기가 마지막입니다. 그럼 언제 오셨어요? 시간과 관련한 질문은 매번 시간을 초월한다. 2006년에 한국에 왔습니다. 지금은 2024년이니까 18년 전이네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습니다. 처음에 어학당을 1년 다닌 후 일반학교를 다녔습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일본인이신데, 조기유학을 보내고 싶어하셨고, 저는 혼자 와서 기숙사에서 살면서 공부했어요. 별다른 목적은 없었습니다. 어쩌다가 온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 2019년 10월, 비자를 연장하지 않고 귀국했습니다.
왜 여기에 (와) 있게 되었을까—이 질문은 미술 전시를 보러 다니기 시작한, 2017년 무렵부터 나와 작품 또는 전시 사이에서 공명하기 시작했다. 막연히 꺼낸 질문이 계기와 출발점이 되어 돌아온다. 어느 통역 자리에서 한국 동시대 미술의 현황을 작가에게 듣고 내 입으로 옮겨와/번역해 일본어로 말했다. 너무나 생소한 내용이었다. 같은 시기에, 같은 곳에 있었는데, 정작 왜 모르고 있었을까? 미술관에 들어오기 전, 작가들은 어디에 있을까. 미술관이나 주요 갤러리에서, 미술사에서 소개되는 사람만 인정 받은 사람일까? 마침 대학원에서도 한국 동시대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전시를 같이/따로 보는 일이 생겼다. 이 작업, 전시, 작가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그때부터 나는 뒤늦게나마 따라다니려고 애썼다. 전시장이 문을 여는 평일 11시, 엘리베이터 없는 빌딩의 4층, 작가가 조용히 전시장을 혼자 지키던 어느 날, 일어나는 일들의 목격자가 되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나 혼자 늦게 배우고, 주변 사람들이 관심 가지던 한국 동시대 미술을 늦게나마 알아가는 것이 뒤늦게, 유학 생활의 목적이 되었다.
여기에 (와) 있을 때
출발지와 목적지는 늘 분명하다.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 그러면 그 사이는 어디라고 할 수 있을까? 전에는 해협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목적지에서 보내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목적지는 내가 잠시만 머무는 중간 영역이다. 그 시간 안에서 전시를 보고 사람을 만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다음 날 그곳을 뒤로한다. 여느 때처럼 전시를 보러 다니다가, 인가희갤러리에서 열린 김지민의 개인전 ‘새 모양 새’(2024) 중 한 회화에 시선이 멈췄다. 〈타일 두루미〉(2024)에서 하늘을 날아가는 새의 모습은 멈춰 있다. 당연히 작가가 본 것이 타일로 된 새이기 때문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회화이기 때문이다. 길을 지나가다가 자주 보는 장식을 회화로 옮긴 작업으로 단순히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내 발걸음을 멈춰 세운 이유가 있다. 2022년에 김지민의 개인전이 열렸고 나는 서문 작업을 위해 작업실을 방문했다. 당시 코로나가 완화되어 한국에 다시 갈 수 있게 된 시기였다. 인사를 이메일로 먼저 나눈 두 사람이 대면한다.
사전에 공유받은 장소에서 기다렸다. 차량번호를 확인하여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드렸다. 이른 아침에 작업실까지 차로 고속도로를 이동하면서 풍경을 봤다. 며칠 전에 본 밤의 풍경보다 느린 템포로 풍경이 쇄도한다. 작업실에서 본 김지민의 회화에도, 얇은 붓질이 거듭 칠해져 있었다. 〈푸르고 긴 밤〉(2022)은 차창 너머 펼치는 풍경을 아크릴 물감의 획으로 포개놓아 그린 회화 작업이었다. 화면 속, 어둠에 둘러싸인 곳에서 가로등의 표현은 여전히 저 멀리 보인다. 시간과 속도 속에 남은 빛의 윤곽이, 2024년 작업에서 철새들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벽에 그려진 새의 모습뿐만 아니라 전선 위나 수풀 사이에 보이는 새에 작가가 관심을 보내게 된 이유는, 지나가다가 보낸 시선과 함께 걸음이 멈추었고, 작품을 보는 사람의 시선 또한 멈추길 바랐기 때문 아닐까. 떠나는 존재의 모습을 유심히 보려면, 보는 사람 또한 속도를 늦춰야 한다. 새를 볼 때, 순간이란 날아가는 그때가 아니라, 사실 멈춰 있는 상태가 순간이다. 쇄도하는 시간과 대비시키면서 빛이 머무는 공간을 이전 작업에서 그렸다면, 멈춘 실제 새와 날아가는 타일의 새를 그린 작가의 태도에 나의 시선과 발걸음이 멈춰 섰다.
어쩌면 철새처럼, 이곳에 살지 않고 이동하는 삶을 보내고 있기에 순간적인 멈춤을 갈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들어가면서 쓴 자전적인 이야기는 이런 관심사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출발하면서 여기에 (와) 있게 된 계기, 과정, 사유를 추측하듯이 작품을 보게 되었다. 추측 끝에 얻을 수 있는 이해란 소급적이다. ‘알고 보니’가 아닌, ‘그러고 보니’와 ‘보고 나니까’의 시선으로 미술 작품을 대하게 되었다. 알던 것이 많지 않던 어린 나이에, 내가 여기에 온 것처럼. 새들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까? 중요한 건 여기에 (와) 있게 된 사실, 이토록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생각을 (다시) 그려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떠나는 사람과 떠나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사람
전시를 보고, 미팅을 마무리하고, 집이 아닌 숙소로 가는 길에 많은 생각을 한다. 항공사 이름 뒤에 가족이라고 붙인다면, 여기는 1호선 가족 여러분이 같이 타는 셈이다. 정작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어디에서 와서 가족이 된 것일까. 오늘 하루를 인생이라고 치자면, 그 갈림길은 신창행이냐 인천행이냐, 아니면 서동탄행이냐에 따라 다르겠다는 별의별 생각도 한다. 어쩌면 가족이란 그런 우연과 우발 속에서 만나고 헤어지기를 동거시킨 결과와 다름없는 건 아닐까. 사람이 들어오고, 빠지기를 반복한다. 내리는 사람과, 타는 사람. 떠나는 사람과 아직 안 떠나는 사람. 오류동, 온수, 역곡, 역곡, 내 옆자리에 있던 사람도, 앞에 있던 사람도 내린다. 출입문이 닫히고, 열차는 다음 역으로 향한다. 역곡, 아, 역곡. 내 소중한 사람이 서류상으로 남아 있는 곳, 역곡.
지나가는 차창 너머, 풍경 속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바깥과 안쪽이 비치는 창문을 그린 권태경의 〈Silhouette〉(2022). 인물이 그림자처럼 비치고, 유리창에 생긴 시트지의 기포나 먼지, 아니 어쩌면 덮고 금방 사라질 눈송이를 떠올리게 하는 질감 속에 풍경이 스미듯이 보인다. 그의 작업에서 사이 공간이란 정차역이 아닌, 지나가는 중의 상태를 그린 것에 그치지 않는다. 동양화 재료로 그려졌지만, 작품의 푸른 색은 청사진(시아노타입)을 연상시킨다. 명확하지 않은 그림자처럼 나타난 이미지는 현상(development)중의 모습처럼 흐릿하게 나타난다. 이 흐릿한 윤곽은 작가일 수도 있고, 작품에 시선을 보내는 사람일 수도 있고, 전동차 안에 있던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세 사람이 옅은 이미지 안에, 덮치고 겹친다. 모습을 나타내기 전 단계에, 이들은 모두 머문다. 나타나는 이미지라는 사이 공간이다. 더 선명해지길 거부하는 듯 권태경의 그림은 흔적을 그 안에 담는다. 선잠을 자는 듯한 몽환적인 화면을 보다가 질감이 시선의 침투를 가로막는다. 한낱의 종이에 때처럼 남은 장지(한지) 찌꺼기와 하얀 점들이 (현)실감 있게, 이미지를 차단한다. 화면 안에서 사람은 이미지에 머문다. 여기에는 실체가 빠져 있다.
얼마 전에 일본의 한국대사관을 방문했다. 내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고 여권도 받고 혼인신고를 대사관 통해서 하면 오빠도 한국에서 일하기 쉽지 않을까? 삶의 소중한 동반자와 서류를 들고 도쿄에 갔다. 데스카라…… 간코쿠노 고쿠세키또 니혼노 고쿠세키가 니쥬니 낫데마스노데(한국과 일본에서 이중 국적이신데요)…… 대사관 담당자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서류를 다시 집으로 가지고 왔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아내는 한국에도 호적이 있지만, 한국에서 여권을 만들거나 혼인신고를 하려면 행정상 국적을 선택해야만 한다고, 그렇게 안내받았다.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선택할 수 없는 것.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매번 복수 아닌 단수 처리된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아버지,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은 아버지는 선택한 것일까, 선택할 수 없이 온 것이었을까. 아내는 법에 어긋나지 않다면 역곡에 남아 있는 주민등록기록을 파기하지 않겠다고 담당자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끊을 수 없는 연줄이 한국과 일본에 여전히 이어져 있다. 열차는 흔들린다. 좀 지나 부평에서 나는 내린다. 역곡이라는 역명을 안내방송으로 들을 때마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어느 순간 겹친다—나-아내-그의 아버지.
빈자리에 들어오는 시간들, 공간들, 사람들
열차가 지나간다. 내가 앉아 있던 자리가 비어 있다. 사람의 실체가 빠져 있음은 공허하기만 할까? 부재에는 세대는 물론 입장을 넘어 공감으로 이끌어주는 힘이 응축되어 있지 않을까. 내가 나를, 나에게서 떠나, 기꺼이 타자가 되는 일—그런 의미에서, 타자를 받아들이는 일.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 주는 일. 생각해 보니 ‘자리’라는 말만큼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도 없다. 일본어로 이바쇼(居場所), 그러니까 ‘있는 곳’으로 번역하기도 종종 하는데, 그러면 너무 (점유자처럼) 주인의 성격이 강조되어 버린다. 김익현의 〈나노미터 세계의 시간〉(2019)을 2022년의 부산비엔날레에서 다시 봤을 때, 아무도 없는 전철 안에서 찍은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가끔, 사람이 지나간다. 자리에 아무도 없고, 창에는 아무도—카메라도, 카메라를 든 인물조차도 비치지 않는다. 창 너머 풍경은 지나가는데 그조차도 신경을 안 쓰듯 카메라의 시선이 유지된다. 자막은 말한다. “볼 수 없으니까 상상을 못 하게 된 것인지 / 상상할 수 없으니까 볼 수 없게 된 것인지 / 사실 중요하지 않아요.” 빈자리 앞의 독백도 잠시, 장면이 전환된다. 구 벨기에 영사관의 유물(파편)이 등장한다.
이 장면 전환은 무엇이었을까 문득 생각했다—빈자리와 유물에 보내는 시선은 어떤 면에서 동질적이지 않을까? 고정된 시점은 그 안에 다양한 흐름을 받아들인다. 유물은 하나의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각도의 시선으로 향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아닐까. 벨기에와 조선, 일제와 조선, 한국 해군헌병대의 역사, 주인은 계속 바뀌고 쓰임새도 바뀐다. 고정된 시선과 단단한 유물은, 단일성을 향하는 대신 복수형의 역사—여러 사회사, 여러 개인사로 쪼개지는 동시에 접합시킨다. 手に入れること(손에 넣는/획득하는/소유하는)와 手放すこと(손을 놓는/남에게 넘겨주는/처분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영상에서 시간은 쪼개지고 견고해지길 반복한다. 고정된 프레임 안에 사람이, 시간이, 풍경이 잠시 들어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한다. 영상을 보는 내 시선은 하나지만, 그 안에 수많은 흐름이 만들어진다. 현우민의 〈잔상여행〉(2024)에도 비어 있는 장소가 고정된 시선으로 포착된다. 텅 빈 길이 영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 영상 작업에서, 우리는 한국어로 말하는 세 화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재일교포 3세인 작가와,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인 아버지, 한국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이주한 어머니가 경험을 각자 서술한다.
비어 있는 길에 사람들이 지나간다. 혹은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다. 셋이 말하는 과거사에 등장한 배경들이 영상에 비어 있는 길로 등장한다. 이들이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온 삶의 길은 비어 있는 곳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세 사람이 만나는 교차점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비어 있는 길은 셋의 말하기를 통해서 삶의 길로 그려진다. 〈잔상여행〉의 잔상이란 한국어로 이야기할 때 살짝 보이는 어눌함이 아닐까. 평소 쓰지 않는 언어로 말할 때 드러나는 어눌함은 과거와 미래의 내력을 동시에 가진다. 모국어와 늦게 습득한 언어 사이에서—익숙함과 낯섦 사이, 그 사이에서 합쳐지는 경험이 삶-언어에 응축된다. 그러다 잠시, 그 언어가 갑자기 더 묘한 인상을 가져다준다. 세 사람의 목소리, 이들이 한국어로 말하는 대화는 한국어 화자가 이끄는 셈인데, 그것은 사실 화면 안에 부재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도 여태까지 부재했다. 한국어 교재본을 찍은 장면에서, 작가 본인은 한국어를 나중에 배웠다고 말한다. 세 사람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이끌어주는 존재는 목소리 없이, 여백으로 존재하는 한국어 화자다.
여백인 목소리와 비어 있는 길이 세 사람의 삶을 열어준다. 화면은 다시 처음의 그 자리로 돌아온다. 고정된 시선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옆에서 한 사람이 얼굴이 프레임에 들어온다. 카메라-감상자의 시선을 예기치 못했다는 표정을 짓지만, 나 또한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내 표정을 내가 그때 보진 못했지만, 분명 그랬을 것이다.) 비어 있는 길은 아무도 없고, 그 이유로 간과되는 곳이 아니다. 보이지 않을 뿐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화면 바깥의 존재—여백의 목소리, 보이지 않았다가 나타난 사람—가 비어 있는 길을 대면할 때, 세 사람의 삶은 (다시) 그려지게 된다. 각자, 그러나 서로 만나는 길이 영상에 놓이게 된다. 〈잔상여행〉의 마지막 장면에는 프레임에 넣은 사진이 보인다. 왜상처럼 비친 바깥 풍경과 사진 속 해변의 만남. 이 사진이 ‘길가에 놓인’ 사진임을 알게 된 순간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프레임은 쪼개질 뿐만 아니라 직면할 수 있는 지점 즉 접점을 마련하기도 한다. 프레임 바깥의 시간과 안의 시간 감각은 다르지만,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을 보내온 존재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점. 영상에는 멈춘 시간과 흐르는 시간이 프레임을 통해 동거한다.
모두가 도착한다
비행기 안에서 오늘 본 신미정의 〈대전역〉(2020)을 다시 떠올린다. 일제 강점기, 철도 기관사였던 아버지와 함께 대전의 소제동 철도관사 53호에 거주하던 하기모토 미치유키의 이야기를 다룬 영상 작업이다. 마지막에 화자 하기모토는 패전/광복 이후, 가족과 기차 타고 떠나야만 했던 경험을 담백한 어조로 말한다. 그들은 기차 타고 부산으로 내려간다. 물건과 사람으로 꽉 찬 화물칸 안에서 보낸 기억은 상세히 말해지지 않고, 영상에는 지금의 대전역에서 찍은 열차가 지나간다. 외관만 보이는 열차에, 화자의 말을 들은 우리가 상상으로 그 안을 채운다. 이 장면에 앞서 그가 만든 소제동과 소제동 관사촌 모형이 등장한다. 그곳에서 보낸 시절을 간직하고자 만든 모형과 내려가는 기차. 두 외관 안에 채워질 상상은 대조적이다. 상상되는 이미지는 안과 밖,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를 만든다. 그러나 이는, 안/밖이나 과거/현재/미래 사이의 괴리에 기반하여 출발하는, 단절을 뒷받침한 만남일지도 모른다.
선잠을 자다 난기류에 잠이 깬다. 옆에 앉은 사람은 풍경을 보거나, 스마트폰을 보고 있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천국에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상공은 천국만큼 뭐든 해볼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지상과의 연결이, 데이터 통신이 끊긴 곳에 자유로움과 정처 없는 불안이 공존한다. 권 사에(권사영)의 글은 궁극적으로 단절의 경험에 촉발되어 쓰인 글이 아니었을까. 그가 쓴 『“조난당하신 겁니까? ... 그러세요?”(불신지옥 편)』에는 이동중의 장면이 나온다. 택시, 열차, 그리고 비행기—승객이 주도권을 잡기 어려운, 승객으로 머무는 자리에서 짧은 무대들이 펼친다. 자율과 타율, 선택과 제약, 반갑거나 반갑지 않은 만남이 이동하는 경험에 응축된다. 이 글을 나는 ‘기꺼이’와 ‘내키지 않고’, 그리고 ‘어쩌다가’를 동거시키는 이동의 경험으로 읽었다.
그런데 ‘조난’이란 말에는 ‘당하다’의 의미가 있는데, 왜 ‘조난하다’가 아닌 ‘조난당하다’라는 말을 자주 더 쓸까요? 마찬가지로 ‘타자’라는 말에는 ‘치다’의 의미가 있는데, 왜 ‘타자’를 ‘친다’고 할까요—타자를 치는 감각. 내가 나에게서 떠나 타자가 되어 나를 친다. 나의 생각이 타자를 통해 입력된다. 글이라는 것도 어쩌면 안/밖이나 과거/현재/미래 사이의 괴리에 기반한다. 여기에서 언어의 괴리 또한 여기에 있다. 최대한 빨리와 최대한 느리게가 공존하는 언어. SNS의 대두와 함께 문자 기반 소통에 익숙해진 나는, 히라가나, 가타카나, 한자를 매번 변환해야 하는 일본어보다 한국어로 글을 빨리 쓴다. 글은 동시에 최대한 느린 매체이다. 말은 즉각적인 주고받음을 전제로 하지만, 글은 내가 내 생각을 제3자처럼 바라보고 정리하고 다듬을 수 있는 곳이다. 말 앞에 생각이 침묵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면,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곳이 글이었다. 어눌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고, 익명성을 보장해주는 곳. 여기에 나는 있는 동시에 없고, 내 마음을 담은 흔적을 타자처럼 바라본다.
사라짐 속 살아짐이 있기를
“오니모츠와 스베테 오소로이데스카?(짐은 이게 전부 다 맞으시죠?)” 있다 온 사람이, 잇데키타(말하고 온/다녀온) 사람이, 공항을 뒤로한다. 내가 하늘 가까이 있었을 때, 내가 머물던 숙소는 이미 청소가 다 끝났었을 것이다. 지내는 곳, 보는 풍경,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 그들과의 대화에서 쓰는 말이 달라지면서 매번 다른 세계, 다른 생을 살듯이 출입국을 한다. 하지만, 내가 떠난 자리에 남는 온기는 객실의 침대가 아니라 나에게 여전히 맴돈다. 일본어가 잔상처럼 남는 한국어와, 한국어가 잔상처럼 남는 일본어가 섞인 글. 모국으로도 타국으로도 수렴되지 않은 언어를 출현할 수 있는 자리. 어쩌면 내가 전시를 보고 글을 쓰는 행위도 그렇지 않을까. 붙들고 싶은 언어로 붙들고 싶은 감각을 타자를 치는 경험을 통해서 남기기. 언급한 여러 작품에 하나둘 관심이 생긴 가장 큰 이유는, 일본에 살다가 간헐적으로 한국으로 이동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고부터였다. 미술 전시를 보러 가는 목적으로 시작한 이동은, 중간에 사람을 만나 이야기와 고민을 나누는 일로, 이들과 잠시나마 시간을 보내는 일로 이어졌다. 그리고 잠시동안의 헤어짐을 고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작품 속 이동하는 장면에서 그들은 어디로 가고 우리는 무엇을 볼까. 그들 안에 누가 있고, 나는 우리 안에 포함될까. 그 사이에서 나는 전시를 보고 나를 일치시키고 때때로 타자가 되었다.
이동 안에서 사라지는 것이 있다면, 살아지는 것 또한 있다. 판데믹을 겪으면서 나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불안은 언어의 상실, 그리고 그 언어와 삶을 같이한 경험이었다. 모국어 다음에 배운 한국어는 모국어 앞에서 허약했다. 집에서, 회사에서, 일상적으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기회가 없어지는 시기에, 치매에 걸린 사람은 모국어로 이야기하게 된다는 뉴스를 마침 봤다. 나는 내가 10여 년 동안 한국에서 보고 경험한 것들을 하나하나 잃어버리는 것일까? 규칙과 문법을 하나부터 배운 언어는 마치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와도 같았지만, 이 견고함마저 어느 순간 바스라질지도 모르는 감각에 휩싸였다. 모(母)국어 아닌 부(父)국어를, 오늘도 글로 세워나간다. 나중에 나에게서 떠나갈지도 모르는 불안과, 그럼에도 잔상처럼 남으리라는 바람으로 하나씩 조합해간다. 그 안에 살아짐이, 나의, 우리의 그들의 삶이 있길 바라는 시선으로, 오늘도 지난 기억 속에 글을 쓴다.
콘노 유키
콘노 유키. 한국과 일본에서 미술 전시를 보고 글을 쓰는 사람. ‘GRAVITY EFFECT 2019’ 비평 공모에서 2위를 수상. ‘애프터 10.12’(2018), ‘한국화와 동양화와’(2022)를 기획했다. 그 외 많은 전시에 기획 협력, 공동 기획으로 참여했다. 한국과 일본의 전시 정보 공유 플랫폼 Padograph 공동 운영자.
창작 노트를 쓰고 있는 지금, KTX로 이동하고 있다. 울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열차는 역방향으로 가고 있다. 서울을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라고 뒤에서 누군가가 목덜미를 잡고 끌고 가는 것과도 같았다. 풍경이 지나간다. 내가 ‘있는’ 자리가 내가 ‘있던’ 자리가(,) 순식간에(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있다. 비행기는 역방향으로 가지 않아서, 풍경이랄 풍경도 없어서 참 다행이다. 권 사에(권사영) 작가가 썼듯, "하늘은 어디를 잘라내도 하늘(空はどこを切り取っても空(비어 있음))”니까. 생각해 보니, 긍정적이라는 표현을 일본에서는 ‘앞을 본다(前向き)’라고 한다. 내 앞에 놓인 과거를, 나의 빈 자리를 계속 보고 있다. 後悔先立たず(후회는 먼저 오지 오지 않는다=후회해 봤자 소용없다)라는 말도, 어쩌면 당연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후회는 늘 뒤늦게 하는 거니까. 과거가, 기억이 나를 앞으로 보내준다. 노트북 화면의 밝기를 조정하는 대신, 블라인드를 반만 내린다. ‘앞의 사람이 풍경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까’ ‘블라인드를 내려봤자 사실 햇빛은 거의 차단되지 않는데’ ‘어차피 터널을 지나가는데’ 그러다 옆에서 같이 주행하던 열차가 저쪽으로 간다. 갈림길에서 저 열차는 어디로 갈까. 가릴 수 있지만 완전히 가리지 못하는 블라인드처럼, 갈릴 수도 있지만, 하나씩 갈라놓기 힘든 철길처럼, 나에게 평행 세계는 이렇게나 가까이 있다. 그리고 매순간, 지금의 삶이 평행 세계를 사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2025/01/15
71호
- 1
- 스낵(スナック)은 바 종류의 하나. 연령대 높은 사람들이 주인(여성)과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로 필자는 인식하고 있다.
- 2
- 테레사 텐의 대표곡 〈공항〉(1974)의 가사. “아무것도 모르는 채, 당신은 말했지……” 이어지는 가사는 다음과 같다. “가끔은 혼자 떠나는 여행도 좋지 않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