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 이층 참관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일렁임. 색색의 수영모를 쓴 소녀들이 보인다. 출발선에 선 소녀들의 모습에서 긴장감이 느껴진다. 발가락에 힘을 너무 주었는지 엄지발톱이 하얗게 질렸다. 발차기 한 번에 리듬을 타고 앞으로 미끄러진다. 아찔함을 이겨내고 수영장 물로 뛰어드는 소녀들의 모습에 내가 흡, 하고 숨을 고르게 된다. 포기자가 나왔다. 수영 레인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일이 얼마나 공포감이 들지 충분히 안다. 출발선에 선 청소년들에게 세상은 얼마나 참혹하게 외로울 것인가. 연신 발차기를 하는 아이들의 박자가 제자리를 찾아갈 때쯤 책을 꺼내들고 나도 깊은숨을 몰아쉬고 SF소설 속으로 나만의 유영을 시작한다. 미지의 레인에 뛰어든 소녀들과 나는 한 호흡이 된다.
  이필원의 『파로스』(씨드북, 2024)는 심해 괴생명체의 공격을 받은 등대섬 사숙도를 배경으로 한 청소년 SF소설이다. 주인공 정민은 괴생명체의 공격으로 사라진 언니를 기다리고 있다. 섬이 공격을 받은 지 구십 일째. 아직도 언니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붉은 거인들은 닥치는 대로 지상의 모든 것을 파괴했고, 긴 팔과 촉수를 뻗어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정민은 등대섬 바깥에 생존해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딘가에 살아 있을 누군가를 정민은 기다리지만 그게 언니 유민이길 바란다.
  정민이 보트를 타고 섬 주변을 살피던 중 은회색 물체를 발견한다. 로봇이었다. 이 로봇은 아티스트형 로봇으로 호화 유람선에서 피아노를 치는 일을 했다. 이름은 주주. 주주가 타고 있던 유람선도 붉은 거인들에 의해 침몰되었다. 주주를 자신을 동료로 인식하는 선장이 있었지만 그녀도 괴생명체의 공격에 살아남지 못했고 주주만이 사숙도로 흘러들었다.
  심해 괴생명체의 공격으로 세상이 멸망하는 순간보다 정민에게는 언니의 실종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등대 밖으로 나가 섬을 둘러보기 두려웠던 것도 붉은 거인들의 촉수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언니의 죽음을 바로 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봇 주주의 등장으로 정민은 언니의 죽음을 제대로 직면할 수 있었다. 진실을 받아들였고 정민 스스로에게 비밀은 없었다. 주주는 언니의 죽음을 확인시켜주는 존재이면서 고독한 섬 생활을 하던 정민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었고 이것은 정민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정민은 주주와 같이 지내는 날이 더 오래 이어지길 바라며 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표면이 손가락 끝에 와닿았고 그것을 살며시 잡아 쥔 손에 힘을 줬다.
  으쌰, 하고 일어난 정민은 엉덩이를 털며 주주에게 말했다.
  “이만 갈까.”
  어쨌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그곳에 함께 갈 누가 있다는 사실이 정민을 앞으로 나아가게끔 했다. (71쪽)

작품 속 정민은 언니의 죽음을 추모하고 그의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인 후에는 새롭게 등대섬에서의 삶을 모색하게 된다.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은 후에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 나서는 데 큰 기폭제 역할을 한다. 정민이 느낀 안도감은 타자의 고독과 외로움을 읽어내고 로봇이 겪었을 이별을 어렴풋이 느끼며 함께 곁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정민은 주주가 바다에서 예상하지 못한 이별을 해야만 한 것이 자신과 언니와의 이별과 비슷하다고 짐작했다. 주주가 늘 들려주던 “Beyond the sea”의 노랫말은 주주에게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누군가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등대섬은 근영의 등장으로 긴장감이 더해진다. 공군 대위인 근영은 심해 괴생명체의 공격으로 섬에 불시착하게 된다. 근영은 멸망 직전의 세상에 대해 전해주었고 섬에서 숨어 지내는 방법 외에는 목숨을 구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정민은 가만히 앉아서 언니와 세상을 향한 추모를 하면서, 섬 주위를 돌며 주주와 살아갈 날을 머릿속으로 그려봤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정민은 섬에 고립된 채로 살아온 지난 시간을 뒤로 하고 무엇이라도 시도해보고 싶어졌다.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정민은 여기 사숙도 등대를 전설 속의 등대처럼 허물어지게 두고 싶지 않으며, 마지막까지 숨어 살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고스란히 내보였다. (108쪽)

『파로스』의 소녀 정민은 갑자기 나타난 주주와 근영과의 만남을 통해 타자의 가치와 더불어 자기 자신의 가치도 함께 확인하게 된다. 파괴와 고립의 상황에서 정민의 선택은 새로운 시도였고, 스스로 선택한 가치였다.
두 손으로 짚고 있는 바닥이 진동했다. 견고한 돔형 지붕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대로 가면 무신호가 줄어들고 만다. 음향을 감쇄시키는 악조건을 어떻게든 없애야 했다. 이를 악문 정민은 근영이 말릴 새도 없이 등탑을 빙 돌았다. 그러고는 등대 한편에 구시대 항해 유물로 보관중이었던 유리 케이스를 질질 끌고 왔다.
  케이스를 밀어 깨트린 정민은 그 안에 있던 무종을 세우고 나무망치를 집어들었다. 망치 든 손을 높이 치켜든 정밀이 수십 년 동안 울린 적 없던 황동 재질의 종을 울렸다. (120~121쪽)

정민이 종을 울리는 장면은 지금까지 정민이 가지고 있던 고립에 대한 깨트림이자, 바깥으로 향한 울림이다. 언니의 죽음으로 인한 소녀 내면의 고통, 미안함, 외로움 등은 섬에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났었다. 하지만 이후 주주와의 만남을 통해 언니의 죽음을 직면했고, 서서히 정민의 내면은 변화했다. 정민의 내면에서 일어난 사건은 고립에서 벗어난 자기 자신과 타자에 대한 인정, 그들의 외로움을 볼 줄 아는 것이었다. 섬에 오게 된 것도, 등대를 관리하는 것도 사실 정민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정민은 어둠과 섬, 언니의 죽음이라는 고립에서 벗어나 등대의 불빛과 종소리로 바깥으로 향하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송우들의 『니아』(씨드북, 2024)는 시간 소멸로부터 탈출해 ‘타임 노마드’가 된 소녀의 이야기다. 니아는 엄마가 만들어준 타임 쉽 ‘버거’를 타고 낯선 시간대에 불시착한다. 시간 소멸로부터 탈출했기 때문에 제타의 공격을 받아 쫓기는 상황이다. 니아는 이십사 시간 안에 시간 이동을 해 제타의 추격을 따돌려야 한다.
  니아는 어떤 소녀인가? 타임 쉽의 운항이 불법인 세계에서 스스로의 시간을 찾아 나서는 모험가 소녀다. 엄마가 만든 타임 쉽 버거의 부품을 교체하기 위해 니아는 고물 성에 잠입하게 된다. 제타의 감시를 피해 고물 성에서 원하는 mo27을 구해야 하지만 시간이 길지 않다. 니아는 그곳에서 은우라는 소년과 호시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니아는 호시 할머니에게서 결정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니아야, 너에게도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올 거야. 네가 정착해 살아갈 시간 말이다. 너 혼자 그렇게 쫓기는 삶을 사는 건 힘들어.”(39쪽)

니아는 쫓기며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하다가 버거를 떠올린다. 자신이 정착을 하기 위해서는 타임 쉽인 버거를 떠나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니아에게 버거는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자, 가족이었고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존재다. 니아는 버거와 헤어지지 않기로 마음먹고 시간 여행을 계속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야만 엄마를 만날 수 있다. 영원히 시간 속에서 떠돌이생활을 하더라도 니아는 버거와 엄마를 포기하지 않는다. 기꺼이 타임 노마드의 삶을 선택한다.
  니아는 어려움이 생겼을 때 자신을 믿고 정면 돌파하는 포기하지 않는 소녀다. 니아와 엄마는 꾸준히 포기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자기 자신을 믿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용기인지 안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를 믿는 믿음이 필요했다.
“포기해라, 네 엄마를 포기했던 것처럼. 너 혼자선 절대 우리를 이길 수 없어.”
  제타의 말은 엄마를 두고 떠났던 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게 제타가 원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니아는 자기 마음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떨쳐내기 힘들었다. 니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포기…… 안 해!”(140쪽)

니아는 낯선 시간에 대한 두려움 없이 현재의 기쁨을 아는 소녀다. 타임 노마드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무작위의 시간을 방문하는 니아와 같은 타임 노마드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퍼스트 타임 쉽이 또다시 제타가 그들을 추격한다고 해도 그들이 처음 스며든 시간에 먼저 방문해 막아야 하는 일 말이다. 니아는 해야 하는 일을 수행했고, 하나씩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있었다. 정보를 갖게 된다는 건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된다는 거라는 엄마의 말처럼 말이다.
  씨드북의 ‘내일의 숲’ 시리즈에서 나온 이필원의 『파로스』 와 송우들의 『니아』, 두 청소년 SF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녀들의 모습은 가까운 대상이(가족) 사라진 후 그들의 부재를 인정하고 소녀 스스로가 기회를 만든다는 것에 있다. 세상의 멸망과 시간의 파괴라는 SF적 균열을 통해 소녀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고 불안과 위험에도 포기하지 않는 정면 돌파의 정신을 가지게 된 소녀들이 발견된다.
  고립되었던 등대섬에서 로봇 주주, 근영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앞둔 정민과, 타임 노마드로서 시간 사이를 오가며 언젠가는 엄마를 만나게 될 현재의 기쁨을 아는 니아.
  그리고 큰 숨을 몰아쉬며 모험과 경이의 바다로 힘차게 뛰어들, 출발선 앞의 또다른 소녀들에게도 응원과 더불어 행운을 빈다.

장미례

어린이‧청소년문학을 연구합니다. SF와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프로젝트 그룹 ‘SF x F’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수영장에서 책 읽기에 빠지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 시간 남짓, 수영장에서 멍하니 보내는 자투리 시간이 아까워서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이때는 주로 청소년 SF소설을 읽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레인 앞에선 수강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리뷰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2025/01/08
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