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 기획을 기획하다’는 여러 분야의 문화예술인이 써내려가는 기획 노트입니다. 현장의 구체적인 기획을 가능하게 하는 메타-기획에 초점을 맞춰 새로운 장을 만들어가는 활동에 다가갑니다.


대담: 임성연(무소속연구소 대표), 박현진(프리랜서 에디터)
글: 박현진(프리랜서 에디터)

2009년 아르코미술관의 ‘신진독립큐레이터워크숍’에서 만난 임성연, 박상권은 무소속연구소를 만들며 본격적인 기획자의 길로 들어섰다. 무소속연구소는 그들의 이름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장소와 상황에 맞는 방법으로 지역과 예술의 공존을 고민해왔다. 몇 년간 연희동에서 공간을 운영하다가 ‘2017 연희동아트페어’를 시작으로 부여, 순천, 속초로 이어지는 ‘bac.(becoming a collector.) 아트페어’를 비롯, 곳곳에서 여러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해온 그들의 활동은 미술 전시기획이라는 단어로 규정하기엔 보다 다채롭고 포괄적이며, 수도권을 비롯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등 남한을 아우르는 넓은 발을 지녔다.
  그들의 활동에 수년간 디자이너로 발을 담그고 있는 한 관계자의 파트너이자 오랜 지인으로서 필자는 그들이 기획한 여러 행사를 흥미롭게 관찰했으며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커다란 착각이었다. 나는 임성연 대표로부터 올해 4월 일을 제안받고 5월부터 얼렁뚱땅 ‘2024 bac 속초아트페어’에 스태프로 투입되었는데, 속속들이 밀도 있게 현장을 경험하며 씁쓸하고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피, 땀, 눈물 그리고 네트워킹 능력과 근력이 필수인 기획자는 내 길이 아니라는 것. 속초에서 휘몰아치던 6월을 보내고 몇 달 뒤, 행사의 도파민이 잦아들 무렵 임성연 대표와 기획자의 일, 그간의 지역 행사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1. 첫 지역 행사 - 제주도 그리고 판타지

박현진 : 제가 기억하는 무소속연구소의 첫 지역 행사는 2014년 제주도에서 열었던 ‘프로릭 아트페스티벌’이예요. 그때 제주도에서 두 분을 처음 만났고, 무소속연구소의 활동에 대해서 알게 됐죠. 그 행사는 어떻게 기획하게 된 건가요?

임성연 : 제주도에서 했던 ‘프로릭 아트페스티벌’은 저희가 시작하진 않았고, 한 지인이 기획자를 필요로 하던 곳에 소개해주셨어요. 그때 제주도가 ‘핫’해지기 시작하는 초창기였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프로젝트를 하는 것만큼 멋진 일이 없었죠. 기본적인 숙식과 교통비가 제공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열악했던 것 같아요. 작은 원룸에 여러 명이 묵고, 노숙할 때도 있었고. 그래도 제주도에 대한 판타지가 엄청 큰 시기였기에 감당할 수 있었어요. 작가 섭외도 제주도라는 환상 덕에 수월했죠. 그 행사가 우리의 첫 지역 프로젝트였고 정말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지역 행사를 할 때마다 이야기하는 부분은 무소속연구소 메인 멤버들의 공통점이 서울 혹은 수도권에서 나고 자란 서울 촌년, 촌놈들, 심지어 찾아갈 시골 할머니 집도 거의 없는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어쩌면 지역에 대한 판타지가 많은 사람들이 중심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와 친하게 계속 프로젝트를 같이 하는 사람들, 스태프들 모두 지방 어디에서 행사한다고 하면 마냥 좋아하는 거죠.

박현진 : 환상이 없으면 힘든 일인 것 같아요. 미지의 지역, 자연, 순박한 사람들 속에서 행사하면 엄청 아름답고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상상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잖아요.

임성연 : 맞아요. 10년 전 제주도에서 프로젝트를 할 때는 정말 그런 판타지가 실재했어요. 이효리가 행사장 가까이 살기도 했고, 제주도에 산다는 유명인들과 같이 술을 마시기도 하고. 요즘은 제주에 대한 판타지가 없어요. 다 소비된 것 같고 더 이상 사람들을 유혹할 수가 없는 거죠. 속초는 아직 그 판타지가 유효한 지역인 것 같고요.


2. 기획의 공간 - 카페 보스토크와 ‘연희동아트페어’의 시작

박현진 : 2013년 연희동에 카페 보스토크를 오픈하셨어요. 2017년에 ‘연희동아트페어’ 첫 행사가 그곳에서 열렸고요. 카페를 오픈하실 때 커피 마시는 공간으로 그치지 않는 문화 공간을 염두에 두셨을 것 같은데, 첫 행사까지 시간이 좀 걸렸어요.

임성연 : 처음에 카페를 열기로 결심했던 건 무소속연구소의 일을 만들고 담을 그릇이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기획자로 일은 하는데 공모사업을 실행하거나 누가 불러줘서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우리 일이 되지 않더라고요. 아주 강력한 그릇이 있어야 콘텐츠가 빨리 모이고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카페 보스토크를 만들었고요. 공간도 1층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비웠고, 2층에 카페를 만들었어요. 2층에서 돈을 벌고 1층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 했던 거죠. 막상 기획과 현실은 정말 달랐어요. 카페가 살랑살랑 커피나 내리면 굴러가는 게 아니잖아요? (웃음) 절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운영하면서 알게 됐죠. 처음 3년 정도는 카페 운영의 안정화에 전력투구할 수밖에 없었어요. 시간이 지나며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단골도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분들이 카페 마당에서 재밌는 걸 해보자는 제안을 하더라고요. 또, 주변에 지인도 많아서 연희동에 자리 잡은 것도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단골 중 대다수가 예술가였고, 봄에 카페에 앉아 있는 손님들을 관찰하면 거의 다 전시 관련 지원서를 쓰고 있더라고요. 자연스럽게 그분들이 카페에서 벼룩시장을 해보자, 아트페어를 해보자는 등 다양한 제안을 했고 그렇게 ‘연희동아트페어’가 시작됐어요.

박현진 : ‘연희동아트페어’는 무소속연구소를 주축으로 시작됐는데, 한편으론 공간만 빌려주고 애초에 제안한 사람들이 행사를 꾸릴 수도 있지 않았나요?

임성연 : 카페는 영업 공간이니까 일반 갤러리의 화이트 큐브, 중성적인 공간과는 좀 다르죠. 화이트 큐브에서는 외부 사람이 와서 뭘 해도 상관이 없어요. 영업 공간은 행사도 잘되고 장사도 잘되게끔 유기적으로 운영해야 하는데,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사장밖엔 없는 것 같아요. 다른 외부 행사는 대관을 주더라도 이 아트페어는 우리가 직접 하자고 했어요. 지나고 보면 아트페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고 시작했던 것 같아요. 전시 기획만 했을 때는 작품을 파는 일은 없었으니까, 판매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못 했던 거죠. 속으로 ‘얼마나 팔리겠어?’ 생각하기도 했고, 팔린다 해도 그때그때 대응하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폭발적으로 많은 사람이 놀러 왔는지, 왜 그렇게 작품을 산 건지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웃음) 첫해에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로 작게 시작했어요. 카페 단골들, 연희동 인근에서 작업하는 작가들 중심으로 50명의 아티스트를 모았어요. 첫해니까 인지도가 없잖아요. 카페 보스토크도, 무소속연구소도, 우리가 하는 아트페어도 사람들이 모를 테니까 행사 이름에 연희동을 넣기로 했어요. 유일하게 인지도가 있는 게 연희동이라는 동네 하나였으니까요. 전직 대통령들도 살았고, 연남동과도 연결되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죠. ‘bac.’ 행사에 동네, 지역 이름을 넣는 전통이 이때부터 생긴 거예요.


3. 다시 지방으로

박현진 : ‘연희동아트페어’는 2017년부터 19년까지 무소속연구소가 진행했고, 2020년부터 현재까지는 ‘연희아트페어’라는 조금 수정된 이름으로 연희예술공간연합에서 주최하고 있어요. 무소속연구소는 2020년에 순천으로 가서 아트페어를 열었는데, 왜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가신 건가요?

임성연 : 우리의 족쇄 같던 카페를 팔고 나서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 어떤 판타지를 찾아 또 다른 도시에서 행사를 하는 거였어요. 서울에서 아트페어 3년을 하고 나니 확실한 변화가 느껴졌고 행사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어요. 앞으로 이 행사에서 연희동이라는 이름을 쓰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연희동 일대의 모든 것을 아울러야 한다, 보다 동네를 대표하고 포괄할 수 있는 아트페어로 성장시켜야 한다고. 그런데 하기 싫었어요. 어떤 사업이나 프로젝트가 안정기에 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는 맨땅에 헤딩하면서 시행착오 속에 겪는 카타르시스는 없는 단계거든요. 안정기 이후에는 다소 반복적이고, 반복을 더 극대화하는 식의 업무여야 하는데, 그게 뭔지 아니까 하기가 싫었던 거죠. 무소속연구소는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팀입니다. (웃음)

박현진 : 그런데 기획자는 늘 새로운 기획과 도전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아닐까요?

임성연 : 맞지만 아니기도 해요. 관객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안정된 행사가 주는 행복감이 있거든요. 저희가 ‘연희동아트페어’ 준비할 때 일부러 행사 한 달 전부터 ‘연희동에서 미술 작품 팝니다. 연희아트페어’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매년 같은 사이즈로 항상 같은 자리에 걸었어요. 카페 앞이 출퇴근하는 길목이라 차도 사람도 많이 지나다녔거든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이 행사 또 하네. 우리 동네 행사잖아. 우리 동네는 매년 이런 걸 해”라고 하더라고요. 아마 제가 이 행사를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을 거예요. 시간과 공간을 고정하고, 동일한 형식의 플래카드를 항상 같은 자리에 매년 노출하면서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싶었거든요.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대중들에게 내재화될까 궁금했는데 3년이면 된다는 걸 알게 됐죠. 2019년 행사 때 “우리 동네에서 아트페어 매년 하잖아”라고 동네 사람들이 홍보하고 알리는 말을 들으면서 이 행사는 자리 잡았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런데 더 하고 싶진 않았어요. 이다음 단계를 잘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았죠. 한 공간에 매여 있는 게 너무 힘들었고, 카페가 7년이 지나가면서 리뉴얼을 해야 하는데 하기가 싫더라고요. 그래서 ‘연희동아트페어’는 더 잘할 수 있는 조직에 넘겼고, 카페는 팔았고, 우리는 짐을 최소화하며 원할 때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공간만 마련해 놓고 다음을 준비했어요. 그 이후 제일 먼저 러브콜을 보낸 게 순천이었던 거죠.


4. ‘2020 순천아트페어’ – 코로나가 만든 온라인 갤러리

박현진 : 왜 순천이었나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임성연 : 카페를 팔고 2020년에 연희동의 전시 공간 플레이스막 사무실 한쪽에 세를 들었어요. 그때 플레이스막 대표님께서 순천에서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는 선배님과 우리를 연결해주셨어요. 우리는 지방에서 아트페어를 하고 싶었고, 당시 전라도에 대한 판타지들, 목포로 청년들이 가서 ‘괜찮아 마을’을 만든다든지, 전라도 미식 여행도 인기를 끌었고, 전라도의 판타지가 있던 시절이었죠. 대도시인 전주나 광주에 비교해 전라남도 곳곳은 그때만 해도 덜 알려진 편이었고 좀 더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그래서 순천으로 갔죠. 우리와 순천의 사회적 기업 그리고 플레이스막 이렇게 세 팀이 모여서 기획을 시작했어요. 아무래도 아트페어에 대한 경험이 있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기획과 틀을 만들고, 순천의 회사는 공간을 지원하고 지역과 네트워크를 만들어주고, 지역 예산을 연결해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셨어요. 우리는 아트페어에 대한 모든 노하우를 공개하고 공유했죠. 2021년부터는 순천이 자체적으로 지원금 받아서 운영하고 계십니다.

‘2020 순천아트페어’ 전시장의 한구석을 담은 사진. 왼쪽 벽면에는 지난 행사의 포스터, 두 장이 걸려 있고 오른쪽 벽면에는 흰 벽에 파란색 글자로, ‘순천아트페어’라는 행사의 제목과 더불어 “순천에서 미술작품 팝니다”라는 문장이 큰 글씨로 쓰여있다. 흰 벽 앞에는 바퀴 달린 회색 카트가 놓여 있고 그 안에 갈색 강아지가 타고 있다. 카트의 옆면에는 “2020 becoming a collector. : 순천 아트페어”라는 행사명이 쓰여 있다.
‘2020 bac 순천아트페어’ 전경

박현진 : 2020년은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 해였고, 방역 규정이 엄격했어요. 대중을 상대로 하는 행사인 만큼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임성연 : 순천 행사가 아쉬운 점이 코로나로 순천 도시 전체가 ‘셧다운’됐었기 때문에 행사에서 사람을 만나지 못했어요. (웃음) 관객을 맞이하려고 스태프들이 행사장 곳곳에 있었는데, 관객도 올 수 없었고 할 일이 없었죠. 심심했던 스태프들이 밤에 모여 온라인 갤러리를 만들었어요. 원래 홈페이지는 행사에 관한 정보를 올려놓는 용도로 사용했는데, 누군가 “우리 온라인 갤러리나 만들까?”라는 말을 던졌고 그게 시작이 된 거예요. 작품 사진 일일이 찍어서 홈페이지에 하나씩 올려가면서. 신기한 건 이 온라인 갤러리가 대박이 났어요. (웃음) 그 당시 매출 70퍼센트를 온라인으로 판 거예요. 그때 온라인 갤러리가 터지면서 온라인 아트페어의 전성시대가 왔고, 온라인으로 아트페어를 하기 시작한 행사가 많아졌어요. 할 일이 없는 우울한 팬데믹 상황에서 우연히 얻은 새로운 기획이었죠.

박현진 : 2021년에는 순천을 떠나 부여에서 아트페어를 개최하셨는데, 왜 순천에서 이어가지 않았나요?

임성연 : 사실은 2020년에 부여에서 아트페어를 열기로 계획하고 있었는데, 부여가 준비가 안 되면서 1년 뒤로 미뤄졌어요. 2021년에는 자연스럽게 부여로 가게 된 거죠.


5. ‘2021 부여아트페어’ – 최악과 최선은 함께 온다

박현진 : 올해 속초에서 일하면서 스태프들을 통해 “이곳은 정말 일하기 쉬운 곳이다, 부여에 비하면 정말 좋은 환경”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무시무시한 에피소드가 많았나 봐요.

임성연 : 부여에서의 경험은 인프라가 없는 지역에서 행사를 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지역 관계자들과 협업하고 소통하는 게 얼마나 진이 빠지는지, 열악한 상황 속에서 얼마나 우리 스태프들이 웃음꽃을 피우기 위해 애썼는지…… 할 말이 참 많은 행사예요. 부여 지역 관계자들과 협업하면서 배운 중요한 교훈이 있는데, 첫번째는 ‘굴러온 돌은 굴러온 돌일 뿐 주인공이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속초에서는 항상 칠성조선소를 앞에 세우고 무소속연구소는 뒤에 있죠. 두번째 교훈은 ‘처음부터 그 지역의 예산을 지원받지 않는다’예요. 지역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이 예산은 지역민을 위한 것인데 왜 굴러온 돌이 쓰고 있나?’로 비칠 수 있거든요. 이후로는 중앙 예산만으로 꾸리려고 했어요.

박현진 : 지역 관계자들과 협업과 소통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요?

임성연 : 먼저 밝혀 두자면 제 친가 고향이 부여예요. 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집안 식구들이 모두 충청도 출신이라 그 화법에도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부여에서 일하는 동안 제 오만을 깨달았어요. 어떤 분들과는 어느 순간부터 대화하거나 회의할 때마다 이 문장 자체로 이해해야 하는지 숨은 의미가 있는 건지 헷갈리면서 점점 혼란 속으로 빠지더라고요. 예를 들어, 아트페어 시작 전에 완공이 예정된 공간에서 행사도 하고 스태프들의 숙소도 제공받는다는 조건이 있었어요. 그 조건이 있었기에 시작된 프로젝트였는데 행사 기간이 다가오도록 완공이 안 되는 거예요. 공사 담당자인 사장님을 만나서 “언제 완공되나요?”라고 물으면, “가을쯤 될 겨”라고 하시는데, “가을 언제요? 행사가 9월 21일 오픈이면 8월 5일에는 이것을 해야 하고, 언제까지는 설치해야 합니다”라고 다시 물으면, “이렇게 얘기하면 난 얘기 안 혀”라고 확답을 주지 않으셨어요. “내가 알아서 해줄 겨”라고 대화를 끝내셨는데, 뭘 해주시는지 명확해야 우리는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잖아요. 부여에서 “도와주겠다”는 말은 도와준다는 말이 아니더라고요. 수많은 오해와 혼선 속에서 어려움이 많았어요.

박현진 : 사람을 가장 무섭게 만드는 게 불확실성이잖아요.

임성연 : 그 불확실성 속에서 서로 불신도 커지는 거죠. ‘부여아트페어’의 예산 구성은, 반은 부여의 공예센터에서 반은 우리가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받기로 합의가 된 거였어요. 우리가 중앙 예산을 끌어왔으니, 부여 입장에서는 좋아할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그분들은 우리가 지역 예산도 받고 중앙 예산도 받는다며 수상하게 생각하셨어요. 어쩌다 보니 감사도 여러 번 받았고요.

박현진 :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행사는 개최됐고, 무사히 끝나지 않았나요? 그래도 긍정적인 경험들이 있었을 텐데요.

임성연 : 외부의 적이 있으니 내부가 똘똘 뭉쳐서 단단해진 거죠. 숙소 완공이 안 된 상황 속에 임시로 제공된 마을회관에서 내무반 같은 생활을 하는데도, 그 말도 안 되는 최악의 상황들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일 끝나면 밤마다 모여서 ‘저스트댄스’(Just Dance, 닌텐도 게임)하고, 요리대회하고.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에요. 중요한 깨달음도 얻었어요. ‘부여에서도 했는데 어디서든 못할까’라는. (웃음)

‘2021 부여아트페어’ 중 규암목재소에서 전시된 이기일 작가의 작품. 정림사지5층석탑이 목공조형물로 재현되어 있다. 작품 앞 입구 철문에는 전시 기간과 참여작가명을 적은 안내용 현수막이 걸려있다.

‘2021 부여아트페어’ 행사장을 멀리서 찍은 사진. ‘bac.’라고 적힌 색색깔의 세로형 현수막과 행사 기간과 제목을 안내하는 가로형 현수막이 건물 외벽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건물 외벽에는 비행기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하늘엔 구름이 끼어 있고 사진 중앙 부분에는 행사장 길 안내를 해주는 표지판이 보인다.
‘2021 bac 부여아트페어’ 전경과 이기일 작가 작품

박현진 : 행사 자체에 대한 참여 작가들이나 지역민의 반응, 행사의 결과는 어땠나요?

임성연 : 원래 부여의 공동화된 마을 여기저기에서 행사를 하기로 했다가 공간들이 완공되지 않으면서 한 공간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어요. 저희가 가진 자원과 스태프들이 한 곳으로 집중되니까 오히려 공간의 완성도를 높일 수가 있더라고요. 다들 옹기종기 모여서 들고 파는 거예요. 예를 들면, 장소 특정적 설치 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원래 마을 여기저기 흩어져야 했는데 한 공간에 모이니 서로 경쟁하게 되더라고요. (웃음) 우리가 드린 지원금보다 자발적으로 돈을 더 써서 작업 완성도를 높이기도 하고, 원래 계획한 것과 다른 결과물이 나오는 상황이 정말 재밌었어요. 순천과 부여를 통해서 보면 새로운 에너지는 의도적으로 기획해서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즉흥적, 감각적으로 선택했던 것들이 사후에 의미가 부여되며 마치 기획된 것처럼 보이는 거죠. 알고 보면 어쩔 수 없이 했던 것들의 묶음이 결과인 경우가 있는 거예요.
  지역민들의 반응 같은 경우는 행사가 끝나고 한참 후에 나타나요. 저희가 지역에서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하지 않고 신기루처럼 하고 빠지는 이유가, 우리가 사라진 후 지역민들이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그때야 생각과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것 같더라고요. 3년 정도는 돼야 ‘좋다, 싫다’라는 반응을 느낄 수 있어요. 지역민들은 우리 행사에 대해 처음엔 판단을 유보하시는 것 같아요. 2021년에 아트페어를 할 때 부여에서 공방, 전통공예 하시는 예술가분들이 “아트페어는 외지인들을 위한 행사 아니냐, 어차피 저 그림들과 우리는 상관없고 참여할 수도 없지 않냐?”며 회의적으로 반응하셨어요. 그분들은 자체적으로 벼룩시장 등의 행사를 꾸리셨는데, 올해 초에 한계를 느끼셨는지 내부적으로 아트페어 같은 행사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분들이 부여아트페어를 경험하셨기 때문에 3년 뒤에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된 거라고 생각해요.


6. ‘2022~2024 속초아트페어’ - 지역 파트너의 중요성

박현진 : 지역에 어떤 문화가 뿌리내린다는 게 시간도 오래 걸리고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외지인이 주도적으로 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지역에 행사를 위한 거점, 지역 파트너가 굉장히 중요하지 않을까요? 속초의 칠성조선소나 고성의 동해형씨처럼요.

임성연 : 지역 파트너가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 지역 파트너가 없는데 우리한테 예산을 주고 어느 컨벤션센터에서 ‘○○아트페어’를 만들어달라 요청한다면 못 해요. 속초는 칠성조선소가, 고성은 동해형씨가 있으니까 하는 거지 이건 단순히 예산의 문제가 아니에요.

박현진 : ‘속초아트페어’는 그간의 지역 행사 경험과 노하우가 쌓여서 점점 잘되고 있는 케이스 아닌가요?

임성연 : 맞아요. 그 전 지역에서 했던 여러 가지 우여곡절과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우리도 카페 영업을 해봤으니, 칠성조선소의 운영에 방해가 되지 않는 행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죠. 우리는 예술 한답시고 으스대는 걸 제일 싫어하거든요. 예술이 뭐가 중요해요? 더 중요한 건 먹고사는 거예요. 칠성조선소가 카페로 먹고 사는 게 제일 중요하고 예술은 그냥 거드는 거죠. 예술은 왼손이에요. 그래서 칠성조선소가 카페 영업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 손님의 동선, 추구하는 취향 등을 완벽하게 파악한 다음에 기획을 같이 시작했어요. 저희는 ‘속초아트페어’ 준비하면서 일주일간 서로 집을 바꿔서 살아본 적이 있어요. 칠성조선소 가족은 서울에 숙소가 필요했고, 우리는 속초에 대해 리서치하고 싶었고요. 집을 보면 아주 일상적인 물건들 속에서 사는 이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잖아요. 만약 너무 깨끗하고 정리돼 있었으면 같이 일 안 했을 수도 있어요. (웃음) 그 집에 머물면서 마음이 편해진 부분은, 이들이 좋아하고 용납하는 어떤 비주얼적인 완성도를 집을 통해 봤거든요. 그런 것들을 관찰하면서 우리와 아주 다르지 않고 충분히 협의할 수 있는 상대일 것 같았어요. 순천과 부여를 경험하며 아무리 좋은 마음이어도 서로 추구하는 완성도 내지는 목표의 정도가 비슷하지 않으면 싸움의 원인이 된다는 걸 배웠거든요. 지역에서 활동하며 새로운 파트너를 만났을 때 우리만의 체크리스트가 하나씩 생긴 거죠.

박현진 : 체크리스트엔 또 무엇이 있나요.

임성연 : 지역에서 처음에는 지역 예산을 쓰지 않는다. 또 지역의 예산을 쓰지 않되 지역에 인사는 꼭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을 모르게 하지 않는다. 그다음은 우리가 하는 일을 알려 드렸는데 참여하지 않는다면 두번째부터는 권하지 않는다. 스스로 원해서 하지 않으면 완성도도 별로고, 돈도 많이 들고, 과정 내내 삐그덕거려요. 그걸 관리하느라 스태프 일도 많아지고요. 첫해에는 일단 손을 내밀고 상견례를 하면서 충분히 설명해요. “우리가 중앙 예산을 가져와서 이런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는데 어때?” 이런 질문을 던져요. 두번째 해에 우리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응하는 팀들은 다 받는 거죠. 두번째 해에도 소극적이라면 저희는 권하지 않습니다. 손 내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생각해보면 두 가지 정도인데, 하나는 행사에 주도권을 갖기 위해서인 것 같고 또 하나는 우리의 행사에 대해 동의하지 못한 거예요. 프로토타입을 충분히 보여줬는데도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분과는 파트너가 될 수가 없죠.

‘큰 창고형 공간 앞에 스무 명의 스태프가 모여서 촬영한 기념사진. 반려견과 동행한 사람들도 셋 있다. 대부분 같은 모자를 쓰고 있고, 앞줄의 사람들은 바닥에 앉았고 뒷줄의 사람들은 서 있다. 사람들 뒤, 건물 외벽에는 “GOOD LOUCK! 10.01 SAT-10.09 SUN”이라고 적힌 ‘2022 bac 속초아트페어’의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2022 bac 속초아트페어’ 단체 사진

박현진 : ‘속초아트페어’에서 일하면서 인상적이었던 지점 중 하나가 칠성조선소 외에도 속초, 고성, 양양 지역의 생각보다 많은 작가와 지역 파트너가 다양한 모습으로 행사에 참여하고 있단 거였어요.

임성연 : 맞아요. 속초의 동아서점, 고성의 동해형씨도 있고, 완앤송이라는 레스토랑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중이고요.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도 처음에는 작가로만 만났다가 그들의 다른 능력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다른 일들, 예를 들어 특별전 기획이나 사진 촬영, 영상 제작 등 다양하게 일을 맡기게 됐어요. 결국 지역에 긍정적인 변화와 영향을 주려면 우리가 아니라 지역민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진화해야 해요. 우리는 그것을 하기 위한 과정을 밟아가는 중이고요. 우리가 예산을 받아 서울에서 팀을 꾸려 합숙 생활을 하며 행사를 만드는 것이 언제까지 의미가 있을까 싶어 회의적이거든요.

박현진 : 지역에서 행사가 자생적으로 피어나고 만개하도록 씨앗을 던지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말씀인 거죠? 약속의 3년이 성황리에 지나갔으니 속초도 곧 현재의 ‘연희아트페어’처럼 자리 잡지 않을까요?

임성연 : 속초가 그렇게 된다면 도시가 변해 있을 것 같아요. 연희동은 이제 갤러리 마을, 갤러리 동네가 됐잖아요. 행사를 시작으로 마을이 변한 거예요. ‘bac.’의 캐치프레이즈가 ‘내가 사는 동네에서 나만의 취향을 찾는다’ 예요. 지역마다 취향이 있고 그에 따른 방법이 있는데 자꾸 다른 지역이나 동네의 예시를 보고 쫓아가려 하면 답이 안 나오는 것 같아요. 그 지역만의 솔루션, 조금만 건드리면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작은 포인트를 찾아내야 하고, 속초 같은 경우는 칠성조선소라는 공간을 잘 이용한 거죠.


7. 최고의 순간 - 물아일체

박현진 : ‘속초아트페어’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최고의 순간이 있을까요?

임성연 : 제가 올해 ‘속초아트페어’에서 가장 강렬했던 순간은 칠성조선소 마당에서 해 질 무렵 음악과 디제이들이 있고, 밴드 공연도 있었고, 사람들이 있고, 애들이 뛰어다니며 좋아하고, 공간을 채우는 알록달록한 조명 아래 비눗방울이 날아다니는데, 술에 살짝 취해 있는 그 분위기 그 냄새였어요. 아이들은 음악을 듣는 건지 노는 건지 비눗방울을 잡는 건지 모두가 어떤 목적이 있어서 하는 게 아닌 자연스러운 행동들. 그 모든 것이 좋았는데 그 순간과 상황을 절대 계획하고 만들어낸 건 아니거든요. 그 순간 속에서 어쩌면 우리가 이 장면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온 게 아닐지 생각했어요. 이런 상황이 자연스럽게 조성되기까지 우리가 겪은 과정들, 여기 모인 사람들이 공간 여기저기서 거리낌 없이 술을 마실 수 있는 건 이전부터 술을 마시던 사이였기 때문이고,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은 이미 몇 년간 아트페어에 방문하며 어떻게 노는지 학습이 돼 있기 때문이고, 이 모든 것이 축적돼서 그날의 이미지가 탄생한 거예요. 그런데 이 장면을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할 진 모르겠어요. 와 본 사람들은 아는데, 그들도 설명은 못 할 걸요? (웃음)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어두워질 무렵, 알록달록한 조명 아래 비눗방울이 떠돈다. 어린이와 어른 몇몇이 그 사이에 서서 비눗방울을 보거나 옆을 보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현장을 즐기고 있다. 사진의 중앙에는 작은 천막이 설치되어 있고 그 뒤에는 빛나는 구조물이 있다.
‘2024 bac 속초아트페어’의 한 순간

박현진 : 지역 행사가 소위 ‘핫’해지기 위해선 그 지역의 전형적인 이미지 위에 일종의 신선함을 부여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속초아트페어’는 칠성조선소가 가진 오래된 조선소라는 기존 관념에 아트페어라는 현대미술 행사가 더해지면서 또 다른 무언가가 만들어진 것 같아요. 레트로와 현대미술의 결합이 만든 새로운 감각이랄까요.

임성연 : 맞아요. 그 도시가 가진 어떤 전형적인 이미지에 도발적인 것을 넣었을 때 재밌는 결과가 나오는 것 같아요. 이질적인 것들이 마주쳤을 때 나오는 묘한 감정들, 분위기, 내 머릿속의 선입견과 행사의 메시지나 분위기가 교차했을 때 만들어지는 어떤 느낌. 그런 부분을 항상 생각하면서 행사를 만들어요. 어떻게 하면 도발적인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판타지 같은 순간 속에 있게 할지. 아트페어에서 나도 모르게 작품을 사야 하거든요. (웃음) 오른손이 모르게 왼손이 카드를 내야 되는 그런 분위기. 그림은 머리로 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저절로 지갑을 열게 되는 비이성적인 순간을 만드는 거죠.

박현진 : 처음엔 ‘속초아트페어’도 3년을 계획했다고 알고 있어요. 그 시간이 지나갔는데, 또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은 안 드시나요?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합니다.

임성연 :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있지만 속초와 연결된 고성과 양양이 보이면서 이 세 도시를 연결하는 또 다른 행사들을 할 수도 있겠다 싶어요. 양양서핑학교에서 바닷가 공간을 활용한 행사를 하고 싶어 해서 작년에 뭔가를 시도했어요. 우리도 역량이 되면 함께 바다에서 무언가 해보면 좋을 것 같고요. ‘이런 느낌으로 행사를 하면 도발적이겠다’ 싶은 기획이 감으로는 있어요. 올해 처음으로 ‘고성반려문화축제’를 했을 때도 고성 공현진 해변의 작은 마을에 현대미술 이미지가 얹어졌을 때 발생하는 짜릿함이 있었거든요. 현대사회는 이성이 만든 논리에 의해 구획되어 있잖아요. 반면 자연은 나누어져 있지 않아요.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 물아일체를 늘 꿈꿔요. 술로 쉽게 그걸 하는데, 술을 마시는 어른들에게만 가능한 거고, 음악으로도 가능하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만 해당하잖아요. 앞으로 목표는 올해 행사에선 아이들까지 함께 잘 놀았으니 반려동물까지 함께 즐길 수 있는 행사를 만드는 거예요. 어른, 아이, 개 그리고 예술과 공간이 하나가 돼서 내가 이 공간인지 공간이 나인지 알 수 없는 혼미한 순간. 행사에 온 모든 이들이 물아일체의 경험을 하고 그 분위기 속에서 그림을 하나 사게 되는. 그런 순간을 만들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임성연, 박현진

독립큐레이터 교육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퇴근 후 ‘무소속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자’며 2009년 무소속연구소를 결성했다. 서대문구 연희동에 카페 보스토크 & 프로젝트 스페이스 공공연희(2013~2019)를 운영했으며, 서울문화재단 지역문화진흥사업 ‘N개의 서울’을 서대문구와 컨소시엄으로 5년간 운영했다. 또한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순천, 부여, 속초에서 아트페어, 울주에서는 영화제 등 지역의 문화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운영하고 있다. 현재는 서울과 속초를 오가면서 활동하고 있다. (임성연)

디자인 분야의 잡지사와 출판사에서 기자, 편집자로 일했다. 현재는 프리랜서로서 주어지는 모든 일을 환대하겠다 결심했지만, 집에 있는 걸 너무 좋아해서 마음의 갈등이 많다. (박현진)

2025/01/15
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