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하는 사람들’은 문학-하기를 수행하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자리입니다. 행위자의 사유와 행동이 모여 하나의 사회적 틀로서 문학계가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이들의 목소리가 질문을 던지는 지점을 조명합니다. 시리즈의 첫 글에서 비평가 조형래는 지금, 문예창작과가 마주한 여러 현실을 다룹니다.
제각각의 방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삽화에 그려진 열세명의 사람 중 일부는 의자에, 일부는 바닥에 앉아 있다. 그들 중 누군가는 펜으로, 누군가는 컴퓨터 또는 타자기로 글을 써내려간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 색깔과 머리색은 물론, 모습과 자세 또한 서로 다르다.


1. 이직

2024년 9월, 나는 광주대 문예창작과에서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로 예기치 않게 이직(移職)했다. 새로운 곳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아직 많지 않다. 뿐만 아니라 원고를 청탁받았을 당시에는 전적 대학의 문예창작과에 재직하고 있었던 만큼 아무래도 그곳에서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직 전’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행위에는 중요한 모순이 여럿 내포되어 있다. 그곳에서 나는 학령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이라는 구조적 위기에 대응하여 소중한 동료들과 함께 지역대학의 문예창작과라는 공동체를 보존하고 유지하며 구성원들에게 의미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 위해 힘썼다. 그곳은 2018년 후반 경력 단절의 궁지에 몰려있던 나를 구해준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구해진 곳을 버리고, 지키려 했던 곳을 떠났다. 떠나면서 남긴 하직 인사는 역설로 가득했다. 슬프지만 슬프지 않고, 걱정되지만 걱정하지 않으며, 미안하지만 미안하지 않다는 모순적인 감정의 토로였다. 이는 결국 그간의 노력에 대한 개인적인 부정이고, 열악한 현실에 대한 나 자신의 인정과 굴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이 자책은 지금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제 무위로 돌린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 가능성은 이직 순간 적어도 내게 있어서만큼은 허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허상을 형언할 도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두번째 모순이다.


2. 이직 전

이러한 모순을 감수하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이미 문예창작과가 있었다. 언급하기도 새삼스럽지만 정부 및 시장에 의해 가해지는 유형무형의 다양한 압력으로 말미암아 문예창작학을 둘러싼 대학의 현실이 호의적이지 않게 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여 년간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는 존속했다. 교수와 학생을 비롯한 다양한 구성원이 모여 있었고 나는 중도에 참여하게 된 것뿐이었다. 다만 바로 그 ‘중도’에 학령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이라는 구조적 위기가 더해지고 있었다는 것이 공교로웠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예기치 않은 사태가 엄습한 순간이기도 했다.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기 위해 애쓰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만나야 했다. 평소 존경해왔던 소설가 이기호와 시인 김중일 그리고 아동청소년문학 작가 안점옥, 웹소설 작가 박도형과 동료가 되었다. 팬데믹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도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가급적 만나려 했다. 문예창작과라는 직장을 지키기 위해 줌(ZOOM) 사용법을 배우고 영상 강의 제작 방법을 익혀가면서, 우리는 함께 물리적 단절이라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수업도, 비교과 프로그램도 온라인으로 진행했고 비대면으로나마 다양한 계기를 만들기 위해 부심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카메라 앞에서 어색해했고 네트워크 문제로 수업이 중단되는 경우도 잦았다. 온라인을 통한 논의는 곧잘 침묵으로 지리멸렬해졌고 생산적인 결과를 도출하지 못하는 다반사였다. 20학번 신입생들은 등교해본 적이 없었고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으므로 데면데면했으며 쉽게 반목했다. 이로 인한 서로의 간극과 불협화음은 쉽게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증명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읽기와 쓰기는 근본적으로 고독한 작업이다. 대체로 작가를 지망하는 문예창작과 학생들은 학과 내 동료 학생들과의 협업이나 팀프로젝트 활동보다 스스로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읽고 자신의 글을 쓰는 일을 중시했다. (비단 광주대 문예창작과만 그런 것도 아니다.) 현역 문인 출신의 교수 전원이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소모임의 합평이나 독서 모임, 작가 특강 등 그 고독한 작업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활동에 대해서는 참여를 독려하곤 했지만 여타 학문 영역처럼 집단 활동을 생활화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팬데믹 상황에서는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대부분의 시간, 교수와 학생들을 포함한 구성원 대다수는 같은 학과에 속해 있지만 각자의 읽고 쓰기에만 몰두하는 개인들의 이합집산으로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도리는 없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시간이 흐르고 상황에 익숙해지면서 예기치 않은 접속의 순간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온라인 화상 수업 및 비교과 프로그램들이 계기가 되기는 했던 것 같다. 온라인 화면을 통해 서로의 얼굴과 목소리를 익혔던 학생들이 어느 사이엔가 줌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스스로 알아서 모이고 조금씩 친해지고 있었다. 소모임이 온라인으로 재개되고 교수와 학생, 학생 상호 간 대화가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읽고 쓰기에 관한 저마다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구성원들은 제각기 부분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마침 공식적인 행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뭔가 의미 있는 활동을 해보고자 했던 학생회장과 몇몇 임원, 친우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한 달여간 뚝딱거린 끝에 학과 웹진을 새롭게 만들어내어 정기적으로 학생들의 작품을 게재했다.
  문예창작학을 둘러싼 구조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진작부터 웹소설 분야를 특성화하고 있었다. 내가 부임하기 몇 년 전, 장르문학과 웹소설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이 등장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들은 자발적으로 소모임을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학령 인구 감소로 인한 입학 자원 확보의 어려움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새로운 문학 영역을 특성화하는 것이 학과 생존의 중요한 전략으로 여겨졌을 터다. 일부 졸업생들이 웹소설 분야에서 경이적인 성과를 거두었고, 웹소설 관련 업체 취업이라는 새로운 진로가 열리면서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적 전망이 현실화되기 시작할 무렵,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했다. 내가 개입하기 시작했던 것은 그즈음이었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동료 교수들과 함께 학생들을 대상으로 온/오프라인 비교과 프로그램이나 소모임, 전문가 초청 특강, 관련 업체와 협력한 작가 발굴 프로그램 등을 지속적으로 개최했다. 이는 웹소설 창작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많은 학생에게 새로운 형태의 연결고리가 되었던 것 같다. 도서관이나 학과의 실습실에 나와 개별적으로 읽고 쓰기에 몰두하는 학생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들 중 몇몇은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이들과 함께 자기들끼리 온라인 합평을 진행하거나 담당 교수에게 개별적인 피드백을 요청하는 경우도 생겼다. 웹소설 분야 외에도 그렇게 모이는 교수와 학생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프라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논의 방식이 창출되었고, 채팅창을 통한 즉각적인 피드백은 때로는 더 솔직하고 날카로운 비평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서로 다투고 소위 ‘손절’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여전히 학교에는 인적이 드물었고 많은 이가 고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OTT를 비롯한 웹콘텐츠 시장이 이전에 비해 활성화되었고 웹소설 플랫폼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웹소설 창작을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기회와 계기가 부여되었다. 학과 차원의 적극적인 주선 및 개별적인 노력을 통해 이전에 비해 많은 학생이 업체와 계약하고 본격적인 플랫폼 연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종료될 즈음 몇몇 성공 사례가 나타났고 상당수의 학생이 첫 연재인 것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들은 어디까지나 소수의 사례였고 집안이나 기숙사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의 진로를 명확하게 찾지 못한 대다수의 학생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C와 키보드/태블릿, 심지어 스마트폰만 있으면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의미 있는 개인 창작을 할 수 있는 문예창작, 나아가 상당한 소득을 거둘 수 있는 웹소설 분야는 경제적 여건이 넉넉하지 않은 많은 학생에게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뿐만 아니라 순문학 창작에 비해 데뷔하거나 성과를 내는 데 소요되는 시간도 현저히 짧았고 특성상 청년 세대가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분야였다. 그렇기 때문에 웹소설 창작에 매진하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났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스스로가 추구하는 장르가 소위 ‘주류’에 비해 서브컬처로 치부되는 현실에 대해 복합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순문학을 하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위축된다”는 한 학생의 고백은 이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많은 학생이 전통적인 등단 제도와 웹소설 플랫폼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했다.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문학상에 시나 단편소설을 투고하면서 동시에 웹소설 연재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이미 여럿이었고, 또 다른 학생들은 웹소설을 쓰면서 1인 미디어나 유튜브 채널 운영에 관심을 보이거나 학과 웹진 운영에 전력투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혼종적 실천은 때로는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저는 결국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문예지를 통해서든, 웹소설 플랫폼을 통해서든 상관없어요”라는 한 학생의 말은 오늘날 문학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그것은 기존의 문학적 질서에 대한 문제제기였고, 다른 방식의 문학하기가 가능하다는 선언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진정 국면에 들어갔던 시기를 즈음하여 문예창작과는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의 작가 양성소로만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했다. 다양한 형태의 문학적 실천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고 흔히 이야기되지만,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불가항력을 감추기 위한 수사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특히 지역대학 문예창작과였으므로 이러한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수도권 중심의 문학 장에서 소외된 목소리들이 자신의 언어를 발견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거점이 되어야 한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지역대학 여럿은 이미 학령인구 감소라는 위기 속에서 휘청거리고 있었다. 문예창작과는 비교적 사정이 나은 편이었지만 학생 여럿이 수도권이나 고향의 대학에 다시 진학하기 위해 자퇴했고 대다수의 학생들 또한 소위 ‘학벌’에 관해 고민하거나 실패자를 자처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역의 문학단체나 문예지는 나름 의미 있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지만 글을 쓰고자 하는 청년들과의 접점을 좀처럼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고, 지자체 및 각종 기관의 문학 관련 지원사업 역시 대체로 기성 작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지역의 문예창작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의미 있는 문학 행사를 자주 마련했던 독립 서점은 팬데믹 상황에서 문을 닫았다.
  이러한 엄혹한 현실 속에서 개별적으로 읽고 쓰기를 이어가는 학생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해갔고, 나는 그저 그 과정을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가르침이란 것이 결국 누군가의 성장을 지켜보고 지지해주는 일이라면, 나는 그저 그들의 여정에 잠시 동행했던 것뿐이었다. 이외에는 주로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를 통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의 의미와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을 끊임없이 공유하는 정도였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서 학생들의 계정을 지속적으로 팔로우하며, 순문학이나 웹소설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재학생과 선배들의 소식, 비교적 안정적인 업체에 취업한 졸업생들의 이야기, 교수진과 선배들의 작업 현장을 소개했다. 교수진의 신작 발간 및 문학상 수상, 데뷔 5개월 만에 메이저 플랫폼에서 300만 조회수 돌파라는 놀라운 성과를 이룩한 22학번 재학생 작가, 한의대를 중퇴하고 문예창작과에 진학해 결국 웹소설 작가로 데뷔한 21학번 학생, 문장청소년문학상 출신으로 BL 장르의 대표적인 작가로 성장한 18학번 학생의 활약, 졸업 전후로 연재한 웹소설이 2년 만에 1,700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한 판타지 작가, 한국과학문학상을 수상한 졸업생, 아동청소년문학 작가이자 고흥 지역 문화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청년 기업의 대표 등의 소식은 그렇게 학생들에게 알려졌다. 학생들이 도전해볼만한 공모전이나 지원 정책 정보도 공유했다. 학생들의 다양한 활동을 동영상 등으로 만들어 업로드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소통은 주로 의욕적인 학생들 사이에서 활발했고, 여전히 소외감과 열패감에 사로잡힌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채 방황하는 학생들, 글쓰기에 대한 열정은 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학생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학생들이 눈에 밟혔다. 하지만 이러한 불안정성과 미완결성이야말로 학생의 본분이자 우리가 직면한 현실의 모습이 아닐까. 나는 소셜 미디어에서든 대면에서든 늘 웃으며 대화하고, 격려했으며, 가능성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느슨하지만 지속적인 대화의 망 속에서, 문예창작과라는 공동체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서서히 생성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자위하곤 했지만 이것은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시간,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되 각자의 글쓰기에만 몰두하는 개인들의 집합에 가까웠다. 문예창작과라는 공동체의 형태는 느슨하고 막연했다.
  팬데믹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되고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등교하기 시작한 시기를 전후하여 수업과 비교과 프로그램을 오프라인으로 진행하는 한편, 정부와 학교 당국의 지원을 받아 시, 소설, 아동청소년문학, 웹소설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작가 초청 특강을 여건이 되는 한 많이 열었다. 특히 교수들 모두 학생들이 자유롭고 편하게 모이고 밤새워 읽고 쓸 수 있는 장소를 제대로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역시 대학혁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강의실과 실습실의 시설을 계속해서 정비하고 개선해나갔다. 그렇게 마련된 다양한 여러 공간에서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늦은 시간까지 합평을 진행했고 창작 프로젝트 공모에 지원하기 위해 토론했다. 주말마다 실습실에서 경야(經夜)하면서 읽고 쓰는 학생들도 여럿이었다. 이 공간들은 때로 그저 서로의 고민을 나누는 대화의 장소로 기능하기도 했다. 물론 학생들은 치열한 논의를 통해 계속해서 반목했고 아직 이루지 못한 목표에 관한 선망과 불안을 안고 개별적으로 번민했다. 하지만 우리는 불안정하고 갈등 가득한 접속을 통해 상상할 수 없는 연결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 나는 이직했다.


3. 이직 후

나는 결국 모든 것을 미완의 기획으로 남겨둔 채 그곳을 떠나왔다. 웹소설 특성화를 통한 새로운 문예창작 교육의 실험도, 지역대학 문예창작과의 존속을 위한 다양한 시도도, 팬데믹이라는 위기 속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문학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한 고군분투도 모두 중단되었다. 각자가 이룩한 성취가 있었지만 이를 나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거나 공동체의 성과라고 할 수는 없을 터다. 나는 이들의 개별적 성과를 그저 지켜보았을 따름이었다. 그나마도 그동안 치열하게 모색했던 모든 가능성은 이직 순간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문예창작과가 있다. 다정하고 열정적인 교수진이 있고, 밤늦도록 실습실에서 읽고 쓰기에 몰두하는 학생들이 있다. 학과 웹진의 운영 등을 통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새로운 문학적 실천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다. 순문학과 웹소설 사이에서 고민하는 학생도 여전히 있다. 생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등단의 꿈을 간직한 채 시와 소설을 쓰고 있는 대학원생들도 있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고독하게, 그러나 때로는 함께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다.
  앞서 여러 차례 언급했던 것처럼 현실은 여전히 엄혹하다. 학령인구는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으며, 지역 소멸이라는 구조적 위기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문예창작학을 둘러싼 제도적 환경 역시 호의적이지 않고, 수도권 중심의 문학 장에서 지역대학 문예창작과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그 어떤 출구 역시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재차 말하지만 나의 이직은 결국 그러한 조건에 굴복한 결과다. 뿐만 아니라 나는 문학과 문예창작의 미래에 대해 말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고 싶다. 문예창작은 개인의 고유한 창작 행위이기 때문이다. 소수문학으로서의 문학은 언제나 개별적 실천으로 존재한다. 어떤 추상적 기획이나 정책, 프로그램도 문예창작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학령인구 감소라는 엄혹한 현실 앞에서 각자도생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불가피하다. 사사키 아타루의 표현을 빌리면, 개개인들이 읽고 쓰는 것만이 혁명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개인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학과 씨름하는 구체적 일상 속 실천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혁명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 가능성이란 섣부르게 형언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부재 속에서도, 아니 어쩌면 나의 부재를 통해 더욱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낼 것이다. 전통적인 문예창작 교육의 한계를 뛰어넘어 웹소설과 장르문학에 관한 그들만의 가능성을 모색할 것이며, 줌과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새로운 형태의 합평과 토론을 생성해낼 것이고, 문학하는 공동체의 의미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재정의할 것이다. 때로는 반목하고, 때로는 갈등하겠지만, 그 속에서 느슨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더 단단한 연대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떠나온 이상, 그 가능성은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몫이다. 나는 이것에 대해 막연한 추측 이상의 그 무엇도 섣불리 발설할 수 없다.
  하지만 거기, 여전히 문예창작과가 있다. 이 사실은 엄연하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믿음이나 기대와는 무관하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고 개별적으로 성장해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문학하는 공동체일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살아있는, 안정적이지는 않지만 역동적인, 미정(未定)의 기획이지만 창조적인, 그래서 더욱 잠재적인 가능성의 공동체로서. 나의 이직이 무위로 돌린 것은 결국 나의 가능성일 뿐, 그들의 가능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다. 나는 그들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싶다. 그렇게 할 것이다.

조형래

비평가.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영화평론으로 당선되고, 2009년 문학동네에 문학평론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평론집으로 『신 없는 세계의 비참』이 있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조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조교수로 재직중이다.

2025/02/05
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