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의 시간

지난봄에 7년을 산 집에서 나와 이사를 했다. 이사는 나를 나로 지탱했던 분산되어 있던 물건들을 대개는 한 번에 이동이 가능한 형태로 압축했다가 이동시킨 뒤, 새 장소에서 새로운 정지 상태와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다. 그 물건들의 정지, 즉 배치가 끝나면, 이제는 나의 이동을 조정할 차례다. 바로 통근의 루틴을 확립하는 일, 그것이 거의 저절로 일어날 수 있도록 탐색과 연습을 반복하는 과정이다.
  과거의 한 에세이에서 나는 집에서 학교로 이동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이 필요했기에 일부러 학교에서 전철로 한 시간은 떨어진 곳에 집을 구했다고 적었다.1) 그러나 졸업과 함께 통학 정기권을 못 쓰게 되고, 학교에 내 오피스가 생기면서 약간 사정이 달라졌다. 이사 후, 20킬로미터 떨어져 있던 집과 학교는 3.8킬로미터로 가까워졌다. 다만 그 사이에는 거대한 언덕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이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지만 그 모든 방법 가운데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좋은 것은 없었다.
  두 달 동안 여러 방법을 시도해보는 탐색의 과정을 거쳤다. 한때 나는 공유 전기 자전거에 빠져 그 주행 기록을 단축하는 데 열을 올렸지만 지금은 승차 시간으로 치면 지하철을 훨씬 웃도는 두 개 노선의 버스를 번갈아 이용한다. 하나는 집에서 정거장까지, 또 다른 하나는 정거장에서 내린 뒤 오피스까지 꽤 많이 걸어야 한다. 지하철의 경우 걷는 건 비슷하고 돈은 조금 더 적게 들지만 그건 나를 너무 빨리 내릴 역에 도착하게 만든다. 버스를 선택하는 이유가 좀 더 오래 탈 수 있어서라니, 나는 이동 기계에 멍하니 몸을 싣고 ‘가는 중’이라는 가장 소극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시간을 조금 그리워하는 모양이다.
  사회학자 크리스티나 니퍼트-엥은 이런 출퇴근 시간에 대해, 일과 집 영역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며 다양한 전이적 활동이 발생하는” ‘경계의 시간’이라고 말했다.2) 그것은 목적지에 도착한 후 수행해야 할 일을 준비하거나 한 자아가 수행하는 복수의 다른 역할 사이의 거리를 조정할 수 있게 해준다.3) 시드니의 한 통근자는 자동차 운전으로 겨우 삼십 분이 걸렸던 통근길을, 운전을 하는 내내 긴장하는 자신을 발견한 뒤 그보다 훨씬 비효율적인 대중교통이동으로(한 시간 사십 분 소요) 바꾸었다고 말한다.4) 나 역시 출강하는 대학 중 하나가 신칸센을 이용하면 꽤 빨리 갈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늘 백 분이나 걸리는 재래선 급행열차를 선택했다. 12시 26분 이케부쿠로역을 출발해 다카사키역으로 한 번에 가는 열차, 천 엔을 추가하면 탈 수 있는 우등석은 늘 한산했고 나는 거기서 밥도 먹고 수업 준비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냥 있었다. 나는 언제나 이 넉넉한 ‘가는 중’이 나를 영점으로 맞추는 시간, 혹은 내가 잠깐 사라지고, 그 때문에 나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열차에서 내려 버스 정류장으로 가면 그때부터 나는 ‘저 선생’으로 발견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캠퍼스에 들어서면 그 윤곽은 더욱 명백해진다.


자동차는 차단하고 자동차는 연결한다. 나는 자동차를 미워하고 자동차가 고맙다

아마 우리 엄마에게는 자신이 직접 운전하는 자가용이 여러 역할 사이의 수행을 조정하면서, 긴장을 푼 상태로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오랫동안 ‘카운슬러’라 불리는 화장품 방문 판매원으로 일을 해왔는데, 많은 짐을 들고 많은 사람을 그야말로 방문해야 했기에 그게 엄마가 면허를 따고 자기 차를 산 계기가 되었다. 엄마 차는 운전석과 조수석을 제외하면 판매할 물건과 샘플로 가득 찬 움직이는 창고였다. 또한 엄마는 차 안에서 이런저런 일을 봤다. 고객 만날 약속을 잡고 그들을 기다리며, 기다리는 동안 이어폰 없이 유튜브를 보거나 집에서 싸온 간식을 꺼내 먹는다. 그 와중에 자동차는 운전되며 방판이 이뤄질 장소에 도착하거나 틈틈이 은행이나 수선집 등에 들르며 ‘틈새 일’도 수행한다. 나는 움직이는 일터이자 쉼터인 그 차에 ‘오랜만에 집에 온 주제에 바깥으로만 나도는 딸이 겨우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의 등장인물로 여러 번 올라탔다. 대화가 늘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지만 차는 다행스럽게도 늘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고, 제대로 도착하며 이제는 그만 굴러갔으면 좋겠는 대화를 멈춰 세운다. 이 비좁은 공간은 60대 여성의 노동과 사회관계의 현장, 이룰 수 없는 것의 기대와 좌절이라는 한국의 모녀관계를 주조하는 보이지 않는 실이 얽히는 현장이다.
  운전자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도 독점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공공적인 도로의 규칙을 익혀야 하고 시험을 치러 자격을 얻어야 하며, 도로 위 규칙을 어기면 범법자가 될 수 있다. 운전하는 동안 우리 신체는 작은 운전석에 처박혀 특정 자세와 하나의 방향을 강요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만큼 신체와 지각 및 주의력을 사회적, 기술적으로 규율화하는 장치는 없다. 그럼에도 자가용차는 주로 그것이 판매되는 상품이라는 점과 관련해 끊임없이 자유라는 관념과 연결되었다. 이 자유는 때로 환상에 불과한데, 비교적 확실한 것은 적어도 한국의 대중의식 속에서 자동차의 유연성과 자율성이 고정적 스케줄에 종속되는 철도 승객이 되는 그것과 대조를 이루고 가치의 우위를 점해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간적 종속 외에도, 자동차가 철도로 대표되는 대중교통에 비해 모르는 타인, 단지 우연히 그때 함께일 뿐인 타인과 좁은 공간을 공유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일종의 타인에 대한 차단기와 필터로 기능하기 때문이라는 점이 있다. “그런 세계는 좋을 것이다. 내게도 권리가 있어. 남들에게 시달리지 않을 권리가 말이다. 예컨대 잡상인, 이런저런 방문객, 확성기 소음, 휴대폰 매장의 무자비한 플레이리스트, 사람들이 망해가는 모습, 그런 것으로부터 해방… 해방이라기보다는 차단될 수 있는 권리….”5) 이 문장에 이어 작가가 덧붙인 대로, “그런 게 있고 그것이 내게도 분명 있는 권리인데 그걸 확실하게 실현하려면 돈을 가지고 있어서 돈으로 그 권리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하는 거야”라는 문제가 있다. 이 계급화된 차단막과 게이트의 문제는 분명 더 심각하거나 정교한 배치들—단순히 물리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감각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특권을 ‘자연적인 것’으로 믿게 만드는 정신과 신체의 오랜 기간에 걸친 설계들—을 가리킬 때 더 날카롭겠지만 자동차의 물질적-담론적 구성에도 분명 중요한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차’를 소유하는가에 관련한 계급화는 첨예하지만 한국에서 자동차 소유와 운영 자체는 비교적 관대하게 많은 사람에게 열려 있다. 이 때문에 엄마는 만일 거기에서 배제되었다면 현저히 낮았을 사회적 네트워크 자본을 어느 정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자가용의 민주화는 자동차의 범람, 자동차로 구별짓기하고 아이들의 교육을 관리하고 여가를 통해 행복을 연출하는 가족주의를 강화하고 대중교통 이용자들과 도보자들에게 고통을 안기는, 내가 대체로 폐해로 여기는 결과와 문화를 낳았지만 그 안에는 사실 나 따위가 절대로 헤아릴 수 없는 구원의 사례들 또한 섞여 있으며 그것을 하나로 묶으면 테크놀로지가 사회적 약자를 돕고 불평등한 역관계를 해소하는 데 기여한다는 윤곽이 나타난다. 우리 엄마, 그리고 많은 여성에게 자동차는 “자기만의 방”이자 “자아를 소집”할 수 있게 만드는 친밀한 기계, “집을 벗어나게 해주는 도구인 동시에 집”이다.6)


당신과 옆 자리 승객과 그날의 우연과 그 축축한 공기와

영화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종종 여성이 ‘자기만의 방’의 작은 자유를 빼앗길 때가 있다. 긱 이코노미의 폐해를 정면으로 언급하는 영화 〈미안해요 리키〉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애비는, 남편 리키가 택배 회사의 배달원으로 취직하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차를 팔아 그의 지입차를 마련한다. 글로벌 대기업인 회사는 택배원 개인을 ‘프리랜스 사업자’라 부르며, ‘자유롭게’ 일하고 일하는 만큼 벌 수 있다고 하면서, 노동에 필요한 자원의 구입이나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사고에 대한 책임은 개개인에게 떠넘긴다. 리키의 지입차가 그런 것처럼 애비에게도 자가용은 언제든 돌봄 노동의 상시적 요구에 응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 회로에 가두는, 하지만 동시에 그 노동의 피로를 경감하고 또 거기서 거리를 두고 혼자될 수 있게 만드는 양가적인 도구였다. 나는 이제 버스로 돌봄 노동의 회로를 주유하게 된 그녀가 지친 얼굴로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거나 버스 정류장에서 오열하는 그녀에게 동료 승객인 다른 여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괜찮은지 물어보는 장면을 봤거나 적어도 상상할 수 있었다. 한편, 백인 남성의 속도와 진보의 이데올로기, 질주하는 자동차의 창유리가 만들어낸 도시 LA에서 버스는 분명 자동차이면서도 자동차가 아닌, 자동차를 위해 만들어진 도시의 (‘저쪽’의 비전에는 들를 일 없는) 탁아소나 값싼 에스닉 마켓 등 가장자리를 잇는 유색인종 여성들의 또 다른 평행 도시다.7) LA의 버스 이동과 기다림에 대한 글에서 작가 시키부 허친슨은 버스에서 “자동차의 규율을 벗어난 또 다른 방식의 보고 듣고 냄새 맡기”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중교통이 이처럼 명백하게 인종화되고 성별화된 공간일 때만, 아마도 그 동질성으로 형성되는 연대감이 발생할 때만, 우는 타인에게 괜찮냐고 말을 걸 때만 거기에 ‘사회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비셀은 우리가 대중교통으로 여행하는 일의 사회성을 사교적인 것, 대화적인 것을 넘어서 확장된 수준에서 발견하려고 했다. 이를 정면으로 시도한 한 논문에서 그는 대중교통 공간 가운데서도 캡슐이나 통조림, 철창으로 묘사되는 통근 열차의 객차 내에서 일어나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8) 대중교통에서 우연히 함께 탔을 뿐인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 대해서는 『산시로』나 〈비포 선셋〉 등 수많은 대중적 서사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춘 형태로 삽화되지만 우리가 좀 더 일상적으로 겪는 건 다음 역에 누가 내릴지 또 누가 탈지 알 수 없고 서로 몹시 붙어 있지만 서로 얼굴조차 보지 않는 ‘의례적 무관심’9)이나 ‘친밀한 소외’10)의 현장일 것이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과거에는 신문, 이제는 자신의 스마트폰과 이어폰으로 작은 방패를 두르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말을 해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다.11)
  하지만 거기엔 ‘말 걸지 않는’ 커뮤니케이션과 사회성이 있다.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 비셀은 ‘정동적 분위기’(affective atmospheres)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출현하고 합쳐지고 무너지고 솟구치고 소멸하는 것으로, 승객들, 열차 기계, 안내 방송, 사람들의 소지품, 표지판과 좌석 등받이, 누군가의 한숨, 갑작스러운 지연 등 복수의 기술, 물질, 신체, 상징 이전에 감각 기관에 등록되는 것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사회적인 것’은 “특정 개인의 산물로 환원되거나 간주되지 않”는, 우리가 늘 그 일부가 되면서도 간과하는 집단성이다. 그것은 전염되고 전염한다. 몇 년 전 기온이 올라가던 어느 봄날 사이쿄선 급행열차를 타고 오미야 방면으로 이동하는 중 열차가 갑자기 속도를 줄이더니 간격이 먼 두 역 사이에서 완전히 멈춰 버렸다. 처음에는 곧 다시 움직이겠거니 무관심했던 승객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고개를 들고 불안한 눈빛을 발산했고, 그것은 교차되며 쌓였다. 잠시 후 점검으로 차내 전력 공급이 중단되었고 너무 큰 정적과 맺히는 땀방울과 올라가던 습도, 냄새가 되기 이전의 기운이 귀와 뺨과 코 주변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나타난 최악의 경우, 보이지 않지만 나타나는 그림, 나는 내가 떠올린 끔찍한 그림이 몸에서 먼 상징과 재현의 매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 얼굴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통해 분명 누군가의 머릿속에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중교통의 정동을 감지하고 우리가 이런 정동의 공동체가 되는 것을 인식하는 건 ‘그래서 그게 우리의 대중교통을 좀 더 낫게 해주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데?’라는 질문에 어떤 방식으로 견딜 수 있을까? 개인 주체 사이의 담화 교환을 넘어 사회성을 말하려는 비셀의 견해는, 사건을 다양한 인간-비인간 행위소들의 배치와 그것의 연합된 행위성으로 파악하려는 좀 더 잘 알려진 정치철학적 기획을 연상시킨다.12) 이런 관점에서 사건의 배치는 “비난의 대상을 특정하기 힘든 정체불명의 생물”로, ‘배후’의 하나의 행위자를 가려내고 책임을 추궁하는 도덕주의를 무력하게 만든다. 비셀은 대중교통 공간의 사회성을 정동으로 사유하고 우리가 그것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는 사실과 그럼으로써 우리의 경험을 바꿀 수 있음을 인식하는 일이 승객을 책임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라는, 우리가 그 분위기를 좀 더 버틸만한 것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는 동료 승객이 되라는 규범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얕은 공격성과 혐오, 좌절감, 짜증, 분노 같은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그 부정적 감정이야말로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관심과 대답하는 것에 대한 요구”를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윤리적 지향과 대응 능력”을 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 될 수 있다. 이 사고는 책임에 대한 즉답은 비껴가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뭔가를 명확하게 해준다. 우리는 자주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개인이라기보다 복수의 궤적이 휘감기고 휘감아지는 덩어리로서 존재하고 그런 상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회에 대한 비전. 그리고 나도 피곤하고 너도 피곤한, 서로 무시하지만 가까이에 있음과 얽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이동중인 대중교통 공간이야말로 사회적인 것과 윤리를 사고하기에 적절한 현장이라는 것. 그렇기에 때로 나는 열차에 몸을 실으며 이 제안을 떠올리곤 한다. (이상한 마조히즘이지만 때때로 이것이 통조림 열차나 예기치 않은 사고와 정차, 누군가의 방해까지도 버티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소비자와 생산자를 만들어내고 실어나르며

줄곧 도쿄권에 살았던 친한 동료가 W현의 대학으로 옮기게 됐다. 떠나기 싫었던 이유 중엔 ‘그곳엔 도쿄권 같은 철도망이 없다는 것’이 있었다. 아마 그것은 특권적인 수도권 교통 인프라로부터의 소외, 차를 사거나 운전을 배워야 한다는 귀찮음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얘기를 듣고 내게 ‘도쿄 철도’가 거의 애착 대상에 가까운 무엇임을 깨달았으며 나 역시 다른 나라로든 도시로든 떠나게 되면 바로 이 얘기부터 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도쿄권의 철도는 내게 이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감각에 아주 높은 지분을 차지하며 때로 도쿄 철도가 도쿄를 초과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실제로 그것은 수많은 다른 도시로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말하면 철도와 철도 이동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때로 스스로의 한국 철도와 서울 지하철 이동에 대한 적은 관심은 왜일까 자문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납득 가는 이유를 찾았다.
  올해 나는 외국인 관광객의 도쿄권 철도 이동에 관한 현장조사를 진행했다. 낯선 시스템 속 길 찾기와 ‘익숙해져가는’ 이동성이 어떤 커뮤니케이션을 포함하고 어떻게 기존의 지식과 테크놀로지를 동원하며 이루어지는지 그들과 함께 동행하며 기록하는(mobile ethnography) 시도였다. 연구참여자 한 명은 마침 당시 반도체 부족으로 교통카드가 생산 중단되어 매번 승차권을 새로 구입해야 했는데,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 두 회사의 노선을 사용할 때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티켓을 한 번에 살 수는 없었다. A노선의 개찰을 빠져나와 이번에는 B노선의 티켓을 사서 그 개찰구에 들어가는 일은 좀 과장하자면 마치 남의 사유지를 사용하는 입장권을 구입하는 일인 것만 같았다. 그는 과거에 베를린에 거주한 적이 있었고 우리는 개찰구가 없는, 승차권 구입을 자율에 맡기는 베를린 지하철이 주는 열린 느낌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이 ‘퍼블릭함’에 대한 다소 양가적인 평가를 들려줬으며 나 역시 그것을 바람직함과 그렇지 않음의 문제로 접근한 건 아니었다. 다만 이 대화 속 베를린 철도와 도쿄 철도의 대비는 공공적이라기보다는 상업적인 성격, 소비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부각시켰다.
  다른 연구참여자의 흘러가는 말 속에서는 이 성격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종종 포착되었다. 독일에서 온 60대 부부는 “그래피티가 없이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 역”에 감탄했다. 서울에서 온 30대 여행자는 “제가 내린 역만 유독 그런지 모르겠는데 여기는 왜 이렇게 역에 쇼핑 시설이 많을까요? 매번 구경하고 싶은 유혹을 받아요”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친구는 1회 승차 삼십 엔 수준인 키이우에 비해 도쿄의 철도교통이 너무 비싸지 않냐는 질문에 대해 “(일본의 도시철도는) 그만큼의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서비스”라고 대답한다. 이런 평가를 정리하면서 나는 “향후 도쿄권 철도 모빌리티에 대해서는, 강력한 규제와는 다른 ‘부드러운’ 도시 거버넌스의 맥락 속에서, 철도 이동을 통해 사람들이 어떻게 안정적인 소비자층으로 구성되는지에 대한 보다 면밀한 탐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도쿄 철도 공간에 갖는 모종의 애착의 정체, 혹은 내가 그 이동을 반복하면서 ‘어떤 것’이 되는 길을 걸어왔는지 확인하고 받아들였다. 잘 고안된 서비스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말이다.
  “모든 직원은 철도가 서비스 산업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객이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회사를 운영할 수 없고 급여를 지급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고객에게 달려 있습니다.” 1987년 일본국유철도가 분할 민영화되어 JR 체제가 발족했을 때 당시 JR 동일본 초대 회장이 취임식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13) 철도 민영화와 그것을 추동한 ‘신자유’라는 믿음의 체계 속에서 다른 철도 사업자들도 ‘승객’이나 ‘이용자’가 아닌 서비스를 향유하는 주체로서 ‘고객님’ ‘소비자’를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14) 그러나 국철 민영화는 하나의 계기였을 뿐, 안 그래도 교외 사철 회사가 부동산, 백화점, 문화 사업을 거느린 재벌로 성장해온 일본 대도시권에서 ‘대중교통의 공공성’의 모호함 문제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대중교통(public transportation)은 그 이름에서 나타나듯 공공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지만 이들은 종종 “유료 고객 집단”으로 개념화된다.15) 이 집단의 육성 양상은 때로 단지 서비스로서의 이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도큐의 노선으로 통근하기 위해 도큐가 지은 맨션을 구입하고 도큐의 슈퍼마켓과 백화점에서 생활을 꾸리는 방식으로 확장된다. 또한 다양한 상업 광고, 특히 여행 광고를 통해 ‘지금 여기’를 벗어날 수 있다고,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말하는, 승객의 상상력을 어떤 방향으로 주조하려는 노력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16) 내가 도쿄의 철도를 대개의 경우 안전하고 편리하고 쾌적하게 누리고 높게 평가했으며 심지어는 매혹마저 느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육성 프로그램의 부수 효과로서 달성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스스로가 도쿄 철도, 나아가 일본 철도 전반에 가져왔던 관심에 대한 자기분석일 뿐 각성도 뭣도 아니다. 다만 이것을 출발점 삼아 약간 더 나아가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현대 대중교통 시스템에서의 ‘퍼블릭’은 ‘모두’ 혹은 ‘전체’를 포함하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모두이며 전체인가? 이는 언제나 긴장을 안고 있는, 불완전하게 달성되는 이념형이며, 실제로는 철도 운영주체의 관심에 따라 초점이 맞춰져 배제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승객’과 ‘고객’ 사이를 진동하는 위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전장연의 박경석 대표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그동안 장애인 이동권을 위해 수많은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싸워 왔지만 출근길 지하철 행동이 유독 큰 “난리”로 여겨졌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놓는다. “도대체 이렇게 된 이유가 뭘까요? 저는요, 이 질문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봐요. (…) 노동자들이 돈 벌러 직장에 가야 하는데 늦으면 안 되잖아요. (…) 그 광경을 보고 있으니까 언제부턴가 딱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야! 지하철이란 곳이 진짜로 노동력을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구나. 그렇게 정시성에 맞춰 컨베이어 벨트가 잘 굴러가야 노동자들도 공장에 가고, 학생들도 쓸모 있는 노동력으로 성장을 해가지고 자본도 계속 돈을 벌겠구나.”17) 말하자면 한쪽에서는 명시적인 통제와 규율이 아닌 부드럽게 주무르고 길들이는 소비자 주체화를 통해, 한쪽에서는 ‘생산성’을 높이고 경제를 더 빨리 굴러가게 할 수 있는 신체들과 그렇지 않은 신체를 솎아내며 손실된 생산성을 계산하는 방식으로 모빌리티의 배제 혹은 불균등한 배분이 이루어진다. 나는 이것이 각 도시의 철도 모빌리티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이미지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어느 쪽이 더 나쁘다거나 낫다거나 가려내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 그 열차가 누구를 태웠고 안 태웠는지, 그리고 만일 타는 데 성공했다면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고 무엇으로 만들고 있는지 조금 더 유심히 관찰해보자고 제안하고 있을 뿐이다.

안은별

예전에 기자였던 연구자이자 에세이 작가. 일본 도쿄대학 정보학환·학제정보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기관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이동을 둘러싼 상상력과 그 감각과 경험이 사회적, 기술적으로 매개되는 방식과 특히 현대 일본에서 철도 이동이 ‘사회적인 것’을 형성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인터뷰집 『IMF 키즈의 생애』를 썼고,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연구자의 탄생』 『확장도시 인천』 등의 책에 참여했다.

메타포의 어원은 ‘넘어가다meta’ 그리고 ‘운반하다pherein’다. ‘오늘날 아테네에서 대중교통은 메타포라이라고 불린다. 일을 하러 가거나 집으로 돌아갈 때 사람들은 ‘메타포’, 즉 버스나 기차를 탄다. 이야기들도 이 멋진 이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미셸 드 세르토). 한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며 우리는 공간을 또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세르토의 글에서 철도 여행은 철창으로 묘사되었지만 한편으로 도시를 써내려가는 보행자의 기계적인 버전 또는 연장이기도 했다. 출근길 지하철, 우리는 꿈을 꿀 수 있는데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2025/01/15
71호

1
박솔뫼, 안은별, 이상우,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민음사, 2023, 15쪽.
2
데이비드 비셀, 『통근하는 삶』, 박광형・전희진 옮김, 앨피, 2019, 148쪽.
3
Juliet Jain and Glenn Lyons, “The Gift of Travel Time,” Journal of Transport Geography 16 (2), 2008, pp. 81-89.
4
데이비드 비셀, 같은 책, 151쪽.
5
황정은 「누가」,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 전자책 열람.
6
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문학동네, 2021, 전자책 열람.
7
Sikivu Hutchinson, “Waiting for the bus,” Social Text 18(2), 2000, pp. 107-120.
8
David Bissell, “Passenger Mobilities: Affective Atmospheres and the Sociality of Public Transport,” Environment and Planning D: Society & Space 28(2), 2010, pp. 270-289.
9
Erving Goffman, Behavior in Public Places: Notes on the Social Organization of Gatherings, London: Free Press of Glencoe, 1963.
10
James A. Fujii, “Intimate Alienation: Japanese Urban Rail and the Commodification of Urban Subjects,” Differences 11(2), 1999, pp. 106-133.
11
이 표현은 다음의 책에서 빌린 것이다. W. G. 제발트, 『토성의 고리』, 이재영 옮김, 창비, 2019, 전자책 열람.
12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문성재 옮김, 현실문화, 2020, 109쪽.
13
야마시타 이사무(山下勇), Christoph Schimkowsky, “A Passenger Service Revolution? Transport Design and Passenger Experience on Tokyo's Urban Railway Network, c. 1945-2010,” Mobilities, 2024. pp. 1-19.
14
田中大介, 『電車で怒られた!—「社会の縮図」としての鉄道マナー史』, 光文社新書, 2024, p. 211.
15
Christoph Schimkowsky, 같은 논문, p. 4.
16
Kaima Negishi and David Bissell, “Transport Imaginations: Passenger Experiences between Freedom and Constraint,” Journal of Transport Geography 82, 2020, 102571.
17
박경석, 정창조, 『출근길 지하철』, 위즈덤하우스, 2024, 전자책 열람. 기울임꼴 강조는 인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