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정은 2014년 12월 카트만두 수도 외곽에 있는 프라딥의 집과 아마와 프라딥의 집으로 가던 길에서 만난 배우가 꿈이며 얼마 전 네팔 감독의 영화에 댄서로 출연했다고 자신을 소개하던 까만 눈동자의 여성과 그의 엄마와 그들의 집 거실과 거실에서 그가 춘 춤과 갓 튀긴 팝콘과 밤길을 달리는 시외버스에서 앉은 채 일어난 잠과 꿈과 흘러간 풍경과 포카라의 한인 게스트 하우스와 게스트 하우스 마당에서 만난 영화음악을 만든다던 히피의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며 본 이동식 놀이동산의 풍경과 시내 펍에서 술을 마시던 나날들과 버펄로 치즈구이와 여행 대행사와 주고받은 메일과 히말라야 곳곳의 낡은 나무 롯지들과 눈 아래 겹겹이 쌓인 푸른 시체들과 산울림 소리와 급진적으로 변화한 인터넷의 여러 시간과 그 사이를 동행한 몸들과 몸이 아닌 것들과 잊어버린 이름과 마모된 기억을 오간다. 이것은 「धुलोको कण」의 저자 랃과 구글 번역기와 ChatGPT와 나 사이 대화를 통해 작성되었다. 랃은 1886년생으로 1962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 대화는 그의 소설 「धुलोको कण」의 일부 문장을 구글 번역기가 오역한 결괏값과 ChatGPT와 나 사이에 일어났다고 정정할 수 있다. 오역된 문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죽은 사람의 허락을 구할 방법이 없기에 랃의 허락은 구하지 않았다. 덧붙이자면 구글 번역기를 통과하며 발생하는 오류와 오역을 근거로 이 문장들이 완전히 그의 소유라고 주장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재정의된 단어와 문장을 죄책감 없이 사용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사용에 반대한다면 am.jaying@gmail.com으로 메일을 보내거나 혹은 원하는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해주길 바란다. 단, 번역기가 잘못 번역할 가능성에 대비해 은유적인 표현은 자제해주길 바란다. 더불어 나는 랃의 문장이 이 여정에서 어떻게 변형되었고 어디로 섞여 들어갔는지 밝히지 않을 생각이다. 그것은 이미 분별할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와 관련 없이 그에게 기대어 있을 작정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제 「धुलोको कण」은 누군가의 이름으로 오역되어 자신의 행방을 밝히기 위해 애쓸 것이다. 「धुलोको कण」은 아이폰 메모장으로 쓰기 시작해 텔레그램으로 전송되었다가 구글 번역기로 번역한 랃의 문장과 이와 관련해 ChatGPT와 나눈 대화를 워드에서 편집한 후 맞춤법 검사기를 2회 오가며 완성되었다. 이 산만한 작동 방식을 밝히는 이유는 이 작법 또한 여정의 일부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허구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남아있는 데이터를 최대한 수집해 엮은 비디오를 함께 첨부한다. 소실된 자료는 검은 화면으로 처리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얽혀 있다는 사실이다.

책상 서랍 속에 보관되어 있던 50만원 상당의 인도 루피는 2014년 12월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 근처 환전소에서 네팔 루피로 교환되었다. 지폐와 동전으로 분산된 이 가치들은 카트만두 시내와 프라딥의 집을 오가며 각종 호객꾼들의 주머니와 음식점으로 포카라로 향하는 시외버스와 숙소비용으로 론니 플래닛이 선정한 최고의 레몬 타르트 맛집으로 크고 작게 흩어지다가 히말라야를 오르기 직전 포터에게 비용을 지불하는 데에 대부분 사용되었다. 스니커즈 한 박스와 다이아막스 몇 알을 그리고 술과 뜨거운 물을 사는 데에도 쓰였다. 이것이 내가 랃을 만난 방법이다. 입체적인 순간은 기억과 허구와 증거가 뒤섞이던 중에 일시적으로 일어난다.

어린애들처럼 스니커즈를 먹는다며 우리를 조롱하던 백인 남성 무리와 함께 지프를 타고 히말라야의 깊은 산속으로 향할 때도 멀미로 모두 말을 잃은 늘어진 시간 속에서도 우리가 타고 있던 지프의 타이어가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사고가 있었을 때도 랃은 말이 없었다. 해가 늘어지기 시작할 무렵 기약 없는 기다림 끝에 백인 무리는 뿔뿔이 흩어졌고 그들과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랃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작은 배낭과 DSLR 카메라가 든 나의 보조 배낭을 양쪽 어깨에 메고 앞장서서 걸었다. 거대한 어둠이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랃과 나는 저 멀리 누군가의 집에서 새어 나오는 작은 불빛을 향해 더듬더듬 움직였다. 두려움은 각자 짊어졌다. 긴긴밤을 함께 걸었지만 랃에 대한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 랃과 나 사이에는 통과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고 우리는 본래 말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따금 드론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가 산울림 속으로 사라졌다. 고도가 높아지자 랃의 거친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선 사이다 냄새가 났다. 랃의 냄새가 계속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그가 나에게서 어떤 냄새를 맡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냄새를 알아채기엔 우리는 우리 자신과 늘 지나치게 가까이에 살고 있다. 랃과 나는 자기 자신보다 한 걸음 멀리에서 늘 함께 먹고 걸었다. 이따금 다른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롯지에 묵을 때면 그들과 어울려 카드놀이를 하거나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들의 몸에서는 모두 다른 냄새가 났다. 저마다 미역국이나 카스텔라 혹은 청국장 냄새 등을 가지고 태어난 강아지들처럼 말이다. 롯지 부엌 한편의 작은 테이블로 모여든 몸들은 서로에게서 자기 자신을 찾는다. 나는 이 희미한 시간을 좋아한다. 해가 완전히 지면 각국에서 모인 몸들은 뜨거운 물을 페트병에 담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나도 그들처럼 온기를 사서 끌어안고 눕는다. 누구의 냄새도 나지 않는 방에 누운 자아는 지나치게 선명해 자신이 자신이라는 사실마저 낯설어진다. 그러면 나는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를 떠올리면 잠에 들 수 있다. 동이 트면 모두 미련 없이 짐을 챙겨 떠난다. 랃과 나는 산의 둘레를 빙그르르 둘러 걸었다. 중국의 유명한 기업 소유라는 벽돌 공장 건설 현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뿌연 먼지가 눈보다 더 빠르게 세상을 덮고 있었다. 발전이 만들어낸 회색 풍경은 카메라 렌즈를 통과하는 순간 이상하리만큼 청량해진다. 먼지 더미를 벗어나자 두껍게 쌓여 올라간 눈이 점진적으로 걸음을 압박했다. 발을 디디려 할 때마다 눈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사나운 바람이 우리의 발목을 휘감고 지나간다. 랃은 이 길을 몸으로 익혔다. 랃의 삶은 이 길과 깊은 연결 속에서 펼쳐졌을 것이다. 어쩌면 랃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 길을 물려받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랃이 아니기 때문에 랃의 주변을 맴도는 행운의 형상을 이따금 알아차릴 수 있다.

따도(따뜻한) 치소(차가운) 깔로(검은) 세또(흰)
이곳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단어는 그리 많지 않다.

2014년 10월, 히말라야 인근에 이상기온으로 인한 급작스러운 폭설과 눈사태가 발생했다. 머스탱 지역의 해발 8,091미터 안나푸르나와 해발 8,167미터 다울라기리에서 등반중이던 등산객들이 이 재난으로 인해 화를 입었다. 기록에 따르면, 총 39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실종된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강풍으로 인해 구조 작업에 난항을 겪었다. 최대 4미터까지 쌓인 눈으로 실종자 수색이 어려워 인명 피해가 더욱 커졌다. 검은 하늘과 눈 덮인 흰 땅과 발아래에 푸른 시체 더미. 랃이 그 기록 위를 말없이 걷는다. 무거운 눈덩이가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굴러다니다가 사라지곤 한다. 말이 허공 속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랃은 눈이 무엇을 덮으려는지 알고 있다.

하산하는 무리가 우리에게 말을 건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가 아니다.

랃의 뒤를 따르면 어딜 가든 전에 와봤던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이곳은 꿈이다. 랃은 꿈의 구조를 따라가는 작은 그림자다. 이 꿈이 어디로 향하는지 랃은 모르고 랃의 몸은 안다. 밤사이 꺼져 있던 아이폰을 켜자, 허공을 맴돌던 소식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포카라의 폭우 소식과 히말라야 인근의 폭설 소식, 걱정 섞인 안부와 여행대행사의 부재중 전화와 외교부의 하산 통보 메시지 같은 것들이다. 소식들은 모두 이 땅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랃은 알고 나는 모른다. 그러므로 이곳은 랃의 꿈이다. 나는 간헐적으로 연결된 인터넷으로 한국에 접속할 수 있을 뿐이다. 때때로 랃과 나의 시간이 서로 무관하게 흘러간다. 롯지 주인의 도움으로 하산을 준비중인 사람들의 차를 얻어 탔다. 긴장이 풀린 사람들이 갓난아기처럼 잠을 잔다. 좁은 차 안에 여러 개의 꿈이 떠다닌다. 랃도 꿈을 꾼다. 나는 결로로 희미해진 창밖을 바라보다가 눈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이 꿈속에서 우리는 서로 관련 없이 자립하고 있다고 여겨왔던 상들이 감각적으로 공존하는 찰나를 포착할 수 있다. 포카라에 도착하자 여행 대행사 직원과 한인 게스트 하우스 사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게스트 하우스 식당에서 사장이 끓여준 닭 칼국수를 나누어 먹은 후 랃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 여정은 2014년 12월 눈 아래 겹겹이 쌓여 있던 푸른 시체들과 히말라야 곳곳의 낡은 나무 롯지들과 드론 소리와 여행 대행사와 주고받은 메일과 포카라의 한인 게스트 하우스와 게스트 하우스 마당에서 만난 영화음악을 만든다던 히피의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며 본 이동식 놀이동산의 풍경과 시내 펍에서 술을 마시던 나날들과 버펄로 치즈구이와 밤길을 달리는 시외버스에서 앉은 채 일어난 잠과 꿈과 흘러간 풍경과 카트만두 수도 외곽에 있는 프라딥의 집과 프라딥의 집으로 가던 길에서 만난 배우가 꿈이며 얼마 전에 네팔 감독의 영화에 댄서로 출연했다고 자신을 소개하던 까만 눈동자의 여성과 그의 엄마와 그들의 집 거실과 거실에서 그가 춘 춤과 갓 튀긴 팝콘과 급진적으로 변화한 인터넷의 여러 시간과 그 사이를 동행한 몸들과 몸이 아닌 것들과 잊어버린 이름과 마모된 기억을 오간다.

이듬해 4월 카트만두에는 규모 8.1의 대지진이 발생해 많은 사상자를 남겼다. 이 지진으로 카트만두시 전체가 남쪽으로 약 3m 이동했다. 며칠 만에 간신히 연락이 닿은 프라딥은 지금 아마와 함께 다른 지역으로 대피해 있으며 강한 여진 때문에 집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마을이 먼지 더미로 변했고 돌아갈 집을 잃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들은 안전하다고 덧붙였다. 수첩에 적힌 이름을 페이스북에서 검색해 검은 눈동자의 여성에게도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을 받을 수 없었다. 몇 달 후 그의 타임라인에 새로운 사진이 게시되었고 그저 우리 사이의 연결이 끊어진 것뿐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랃의 이름은 기억해내지 못했다.

*영상 작품에 사운드 진동이 포함되어 있어 감상하실 때 휴대전화와 커널형 이어폰 사용을 권장합니다.


1

미끄러진다. 고꾸라진다. 처박힌다. 쓸려간다. 무너진다. 무너져내린다. 무너져버린다. 버려진다. 내몰린다. 떠밀린다. 흔들린다. 어긋난다. 휘청인다. 축출된다. 가로막힌다. 숨이 막힌다. 헤집어진다. 쑤셔진다. 쑤신다. 자책한다. 책망한다. 검열한다. 빨려 들어간다. 뿜어져나온다. 조각난다. 부서진다. 작아진다. 축소된다. 뭉개진다. 짓눌린다. 짓밟힌다. 납작해진다. 뒤틀린다. 꼬인다. 꼬였다. 꼬여버렸다. 포개진다. 찌그러진다. 뾰족해진다. 찌른다. 찔린다. 쏟아진다. 쏟아낸다. 게워낸다. 토해낸다. 토해졌다. 외면한다. 외면당한다. 가닿지 못한다. 벼려낸다. 벼려진다. 날카로워진다. 날카롭다. 벤다. 베인다. 소외된다. 고립된다. 울부짖는다. 허덕인다. 허우적댄다. 가라앉는다. 끄집어진다. 구멍난다. 뚫린다. 깨진다. 붕괴한다. 파괴된다. 허물어진다. 으스러진다. 일그러진다. 분노한다. 그리고 다시 미끄러진다. 고꾸라진다. 처박힌다. 결국 처박히고 만다.
  그는 이 단어들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설명할 수 없다’는 말 또한 그 설명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다. 사실 그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것에 가깝다. 또는 설명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최소한 설명할 수 없다는 행위의 주체가 그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는 이미, 항상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가 쓰고 있는 기호가 어딘가에 가닿지는 못한다. 그는 ‘어떤 이유’가 어떤 이유인지도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언어화하면 단어들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만다. 결과는 언제나 비슷하다. 미끄러지고, 고꾸라지고, 처박힌다.



2

그가 세상을 감각하는 몸의 원리 자체가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감각하는 세상은 어딘가 다른 이들과는 크게 다른 모양새다. 그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견고한 것들이, 당연하리라 생각했던 것들이 언제고 당연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근본적으로 감각의 방식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그는 종종 처음으로 그의 세계의 ‘당연함’이 무너져내렸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그의 손가락 끝 지문의 중심부가 개구리처럼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에게 손가락이란 응당 끝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편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부모의 손가락이 납작한 것을 발견한 것은, 어리지도 성숙하지도 못한 어떤 날이었다. 오빠와 동생의 것도, 다른 사람들의 것도, 보통의 손가락은 하나같이 납작하다는 것을 그는 그날 알았다. 납작한 손가락을 가진 사람들이라니. 그것은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아니,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종의 배신이었다. 지문 중심부가 볼록한 것을 두고 그는 내내 손가락이 감각하는 촉각을 극대화하기 위한 자연의 경이로운 도구라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 경이로움에 감탄하면서 그는 달팽이가 촉수를 세우듯 온 신경을 모아 볼록한 손가락으로 감각하는 세계를 탐닉해왔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탐닉해온 세계가 무너져내린, 어리지도 성숙하지도 못한 그날의 감각은 볼록 튀어나온 손가락에 고스란히 담겨버렸다. 견고하고 당연했던 그의 또 다른 세계가 무너져내릴 때마다 그는 몹시 아득해져서, 눈을 감고 볼록한 손가락 끝에 신경을 모은다. 그리고 손가락의 볼록함을, 볼록한 손가락을 촉수삼아 몹시 예민하게 감각한다.


흰 배경에 대여섯 개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발자국들은 남서쪽으로 향한다.



3

L은 그를 대하기가 어렵다. 그가 설명할 수 없다며 무언가를 설명할 때마다 L은 의아하다.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는 결코 아니다. 그는 늘 논리정연한 말을 한다. 그의 논리를 따라가다보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외려 그 논리 정연함 때문에 그를 대하는 것이 난감할 때가 있다. 그와 함께 있으면 L은 자신이 괜히 나쁜 사람이 되는 것만 같다. 그가 특별히 L을 공격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의 말은 날카롭다.
  사실 L도 딱히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것은 아니다. 혈혈단신 도시로 올라와 터전을 꾸리기까지 산전수전이라면 못지않게 겪었다. L이 확신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든 시작하면 된다. 하면 길이 열린다. L은 우직하게 무언가를 해내는 것에 익숙하다. 무엇이든 일단 긍정하고 몸으로 마주하는 우직함이 L을 살아남게 한 유일한 무기였다. 그런데 그와의 관계에서만큼은 출구가 없다. 그의 논리는 언제나 자신의 경험 이면의 불편한 진실을 떠벌린다. L이 미처 보지 못했거나, 애써 외면하던 현실을 꿰뚫는다. 그것은 L의 믿음의 근간이었던 노력과 우직함을 속수무책으로 만든다. L이 가진 유일한 무기를 부정한다. 그 부정까지 긍정할 수는 없어 그의 말에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진다.
  L은 그의 똑 부러지는 면이 부럽기도 하다. 날카롭고 뾰족해서 자꾸 튕겨나가지만 근본적으로 그가 틀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안다. 그가 고민하는 것만큼 열렬히 고민해왔는지 스스로 돌이켜보면 부끄러워진다. L이 웃음으로 무마하려 했던 모든 순간을 그는 웃음기 빼고 치열하게 부딪혀왔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자신이 한 옳은 선택에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그의 특별한 정체성이 모든 걸 이토록 치열하고 단단하게 살아내는 에너지의 원천인 것 같아, 그 모든 것이 치기 어리게 부러워진다. L은 그렇게 자신의 특별하지 않음에 대해 생각한다.



4

그는 Y를 보며 생각한다. 저 이는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지지받은 사람임이 틀림없다고. 타인을 향한 Y의 태도는 지지받은 경험이 가득한 사람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것이라고. 평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선배였던 Y를 오랜만에 만난 건 한 단체 식사 자리에서였다. 우연찮게 Y를 마주친 그는 이상하게도 L을 떠올렸다. Y가 그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 아닌 만큼이나 L 또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불현듯 떠오른 L에 대한 그의 생각들이 역으로 그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한동안 그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Y의 행보를 동경하진 않았지만, 드물게 화두를 가지고 무언가를 탐구하는 선배라는 점에서 그는 Y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Y의 화두가 그의 화두와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최소한 말이 통하는 사이였다. Y는 L처럼 ‘좋은 게 좋은 거지’하는 사고를 고수하는 부류의 남성은 확실히 아니었다. ‘좋은 게’ 언제나 누구에게나 ‘좋은 것’인 일은 없다. 좋은 건 꼭 누군가를 배제해야만 좋은 것일 수 있다. 그가 L에게 느끼는 불쾌함과 거리감의 근본이 여기에 있었다. L은 언제나 과도한 따뜻함과 긍정과 열정이 뒤범벅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L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많다. 좋은 게 좋은 것인 L의 세계에서 배제되지 않은 사람들. 결코 배제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의 세계에서 그는 견딜 수 없이 불편하다. 싫은 게 참 많아서 불편하고, 싫은 게 많은 자기 자신마저 싫어져서 불편하다. ‘좋은 게 좋은 거’인 세계에서 온전히 배제된 그는 결국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미끄러지고, 고꾸라지고, 처박히고 말 것이다.
  Y에게서 그가 느끼는 긍정의 태도는 L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건 좋든 싫든 무작정 좋다고 생각하고 보는 무지의 긍정이 아니라, 상대의 ‘싫을 수 있음’을 확실히 염두에 둔 무엇이었다. 싫음 또한 섬세하게 긍정할 수 있는 태도에서 그는 안정감을 느꼈다. 좋은 게 좋은 것인 세계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던 그의 존재 자체가 환대받는 기분이었다. Y의 환대는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낯선 감각을 일으켰다. 그에게는 환대받은 기억이 많지 않았다. 그는 Y가 환대에 익숙한 이유는 많은 시간을 환대받았기 때문이리라, 삶의 많은 시간을 지지받아왔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Y의 개인사까지 알지 못하고 한 아주 치기 어린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명문대 출신의 기득권 남성이라는 Y의 객관적 지위가 그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 Y는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은 사람이었다. 같은 명문대를 다니고 비슷한 언어와 태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정을 받지 못한 그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았음에도 씁쓸하게 그 근거를 일정 부분 납득하고 만다.
  불현듯 L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L 또한 나름대로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어떤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리라. L 또한 그가 타인에게서 받은 헤아림의 척도를 기준 삼아 어떤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리라. L은 좋은 게 좋은 것인 세계에서만 온전히 환대받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L에게는 싫음을 표현할 기회가 언제고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런 생각이 스치자 그는 속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무언가 자기 자신에게 커다란 균열이 생긴 기분이었다. 그는 영원히 L의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것을 확신했다. 그는 영원히 환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영원히 환대받을 수 없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먹은 것을 모두 게워낼 때 그는 그것이 방금 먹은 해산물 때문인지 자기 몸 깊숙이 생긴 틀어짐 때문인지 알 수 없어 난감했다.



5

그는 게워낸 것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황급히 변기 물을 내렸다. 간신히 입을 헹구고 욕실에 주저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볼록한 손가락을 서로 맞대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손가락 끝에 심장이 있는 것만 같았다.



6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거실에서 들리는 어머니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어머니의 나라 언어를 사용한다. 그는 그 말에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별다른 대꾸 없이 방으로 들어간다. 문밖으로 그의 어머니가 내쉰 한숨과 함께 어머니의 나라 언어로 답답함을 호소하는 말소리가 들린다. 답답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머니의 나라 언어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 서툴다. 어머니의 나라 언어를 기술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언어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그는 종종 주저하기도 전에 말하기를 포기해버리고 만다. 그는 그것이 언어의 문제인지, 관계의 문제인지 헷갈린다. 언어의 문제가 관계의 문제가 된 것인지, 아니면 관계의 문제가 언어의 문제가 된 것인지 계속 곱씹는다.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곱씹다가 그는 어머니의 나라 언어로 된 낱말들이 종종 머릿속에 부유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 단어들은 그가 ‘모국어’로 사용하는 언어의 어떤 낱말보다 적확하게 그의 상태를 설명하는 단어들이다. 그러나 모국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번역하려고 하는 순간 수십 개의 낱말들을 조합해야만 하는 복잡한 낱말이라 본연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마는 단어들이다. 그는 문득 모국어와 모국의 언어라는 말 사이의 간극이 우습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상태를 적확하게 표현해주는 낱말이 모국의 언어라는 사실도, 그것을 모국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사실도, 그것이 기어코 번역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하나같이 우스워서 시리다.


흰 배경에 다섯 개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발자국들은 남동쪽으로 향한다.



7

그는 다시 Y와 L을 떠올린다. 손끝의 심장이 움찔하는 것을 느낀다. 그는 Y와 L이 사용하는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 부유하는 모국의 언어로 된 낱말들을 제외하면 그는 온통 모국어로 사고한다. 부유하는 낱말들이 그가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일까? Y와 L의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면서도 그는 그 언어에 속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모국의 언어에 속한 것도 아니다. 그것이 언어의 문제인지, 관계의 문제인지, 언어의 문제가 관계의 문제가 된 것인지, 관계의 문제가 언어의 문제가 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곳에서 그는 다시 한번 오늘의 뒤틀림을, 몸 깊숙한 곳 어딘가의 무너짐을 감각한다.
  그는 Y가 환대할 수 있는 사람임이 부러웠다. 동시에 L의 세계를 Y처럼 환대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못마땅했다. 그러나 좋은 게 좋은 것인 세계에서 그는 애초에 환대받을 수도 없었다. 그의 존재는 그 자체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이면—그야말로 부정의 사물이고, 좋은 게 좋은 것인 세계는 부정을 바라보거나 이면을 파헤치는 것 자체가 금기인 곳이다. 그 세계에는 이미 그에게 할당된 자리가 없다.



8

미끄러진다. 고꾸라진다. 처박힌다. 쓸려간다. 무너진다. 무너져내린다. 무너져버린다. 버려진다. 내몰린다. 떠밀린다. 흔들린다. 어긋난다. 휘청인다. 축출된다. 가로막힌다. 숨이 막힌다. 헤집어진다. 쑤셔진다. 쑤신다. 자책한다. 책망한다. 검열한다. 빨려 들어간다. 뿜어져나온다. 조각난다. 부서진다. 작아진다. 축소된다. 뭉개진다. 짓눌린다. 짓밟힌다. 납작해진다. 뒤틀린다. 꼬인다. 꼬였다. 꼬여버렸다. 포개진다. 찌그러진다. 뾰족해진다. 찌른다. 찔린다. 쏟아진다. 쏟아낸다. 게워낸다. 토해낸다. 토해졌다. 외면한다. 외면당한다. 가닿지 못한다. 벼려낸다. 벼려진다. 날카로워진다. 날카롭다. 벤다. 베인다. 소외된다. 고립된다. 울부짖는다. 허덕인다. 허우적댄다. 가라앉는다. 끄집어진다. 구멍난다. 뚫린다. 깨진다. 붕괴한다. 파괴된다. 허물어진다. 으스러진다. 일그러진다. 분노한다. 다시 미끄러진다. 고꾸라진다. 처박힌다.
  그는 어두운 방구석에 누워 이 단어들에 대해 생각한다. 본능적으로 손가락 끝의 촉수를 볼록하게 세운다. 쿰쿰하고 차가운 감촉 사이로 손가락 끝이 일제히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낀다. 작은 진동에 집중하자 진동은 증폭된다. 쿰쿰하고 차갑던 감촉은 어느새 사라지고, 끈적끈적한 점액에 둘러싸인 것만 같다. 끈적끈적한 점액을 통해 진동이 천천히 그러나 거대하게 증폭되어 뻗어나간다. 바깥으로, 방 너머 거실로, 거실 너머 닿을 수 없이 멀리. 온몸으로 기분 좋은 진동감을 느끼며 그는 손가락을 바라본다. 손가락의 볼록 튀어나온 부분이 투명한 빛을 낸다. 빛이 선명해진다. 선명해질수록 투명해진다. 맑아진다. 밝아진다. 환해진다.
  환해진 손가락 끝에 오래전에 잊혔던, 그러나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진동감만큼이나 실재하는 어떤 기억이 선명히 만져진다. 그는 기억을 만진다. 기억의 감촉, 기억의 냄새, 기억의 소리, 기억의 색깔, 이 모든 것이 선명해지자 그의 눈앞에는 다섯 살의 그가 있다. 아직 어머니의 나라에 살던 때의 그가 어머니의 나라에서 오빠가 다니던 학교의 뒤뜰, 건물 확장 공사가 한창인 공터에서 널부러진 나무판자를 징검다리 삼아 밟으며 놀고 있다. 그가 그에게 다가간다. 그가 그를 발견한다. 해사하게 웃는 그에게 그는 말한다. “𐑗𐑖𐑣𐑘𐑘𐑖𐑠 𐑗𐑖𐑣𐑘𐑘𐑖𐑠 𐑗𐑞𐑘𐑝𐑞𐑣𐑖𐑣𐑚. 𐑣𐑞 𐑢𐑤𐑢𐑗𐑤𐑙𐑖 𐑠𐑪𐑣 𐑨𐑚𐑜𐑮𐑚𐑧𐑪𐑡 𐑙𐑖𐑢𐑜𐑤𐑞𐑨𐑨𐑤” 그는 부끄러운 듯 고개 숙여 웃고는 그의 어머니가 있을 건물의 뒷문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는 놀란다. 그가 그였다는 사실에 놀란 것인지, 그가 한 말이 모국의 언어도 모국어도 아니라는 사실에 놀란 것인지, 그가 그 말의 뜻을 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 스스로가 이토록 모든 맥락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을 구사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인지 그 또한 분명히 알 수 없다. 그것이 꿈인지 실재인지조차 그는 알 수 없다. 이 ‘꿈/실재’가 어디로 향하는지 그는 모르고, 어쩌면, 그의 몸은 안다. 언제나 그랬듯.

흰 배경에 여덟 개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왼쪽 위에 찍힌 발자국들은 남동쪽으로 향하고, 중앙과 오른쪽 아래에 찍힌 발자국들은 북서쪽으로 향한다.




송민정, 준불 베튤 ZUNBUL BETUL

자신이 경험한 사건, 기억, 기록에 허구를 합성해 낯선 장소로 향하는 일시적인 경로를 만든다. 주로 작업인 것과 작업이 아닌 것 사이에서 생동하는 무언가를 발견하려고 한다. (송민정)

한국사회에서 외국인-여성-배우(비정규 (저)임금 노동자)-본국의 블랙리스트 등등의 경계가 겹겹이 쌓여있는 장소에서 살아가고 있다. 경계를 화두로 삼아 탐구하고 작업한다. 대체로 연기를 하거나 글을 쓴다. 보이지 않는 경계를 보이게 만들기 위한 새로운 기호, 새로운 언어를 탐색하고 있다. (준불 베튤 ZUNBUL BETUL)

2025/01/15
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