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점점한 일들
ㄱ에서 ㅈ까지 흐르는 리듬.
꺾어 신은 운동화가 땅에 닿는 박자.
빠르게 돌아가는 자전거 체인.
뒤로 밀려나는 나무들.
지금 내 안에서는 이 모든 게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것을 남들에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평소 이것은 내밀하고 고요한 리듬이어서 글로 적을 수 있거나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이것에 관해 얘기하곤 했다. 안에서 비행기가 소리를 질러요. 나뭇잎이 잘게 찢어지고 있어요.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다르다. 내가 가슴을 가리키며 뱉는 것. 여기. 비. 소. 나. 오래전 활동 보조 선생님은 말했다. 아아, 알겠다, 아니, 어쨌든. 네 안에서 무언가 벌어지고 있구나.
그러지 말고 뭐라 말 좀 해봐. 한주가 말한다.
선생님은 나의 움직임, 몸을 좌우로 흔들거나 손을 접고 펴는 버릇이 내가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게 전부는 아닌데. 전철을 탈 때 나는 내 안에 돌아다니는 리듬을 느낀다. 한쪽 팔을 접거나 머리에 손을 올리곤 가장 편한 자세로 흔들린다. 그렇게 나는 주변 리듬도 함께 느낄 수 있다. 바닥의 흔들림 휴대폰 진동 누군가 뱉은 기침 문이 열리고 닫힘 나를 보는 눈동자.
리듬은 이런 거야.
선생님은 검지로 내 손바닥을 톡 톡 톡 두드렸다. 이게 리듬. 리듬. 리듬. 리드에서 미음으로 넘어가는 움직임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런데 바깥 리듬은 내게 특정한 신호로 다가오지 않는다. 특정한 신호라는 건 한주의 말이다. 한주는 그게 내 문제라고 했다.
언니, 그만. 제발. 한주가 말한다. 한주는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다. 오른쪽 눈썹 위에 상처가 보인다.
한주가 걱정되면서도 내 몸은 멈추지 않는다. 평소보다 더 많은 리듬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몸을 흔든다. 얼음 같은 바람, 회색 가로등, 찌그러진 자동차 범퍼, 나무와 나무, 얇은 나뭇가지들의 떨림을 느낀다. 사람도 자동차도 오가지 않는 도로 위에 한주와 내가 있다.
여기는 어디일까.
한주와 나는 얼마나 멀리 나온 걸까.
엄마는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만났다. 검은 티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엄마는 다른 사람들과 밥을 먹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사람들이 한주와 나를 보며 말했다. 쟤넨 겨우 스물하나, 스물셋이야. 그런데 하나는…… 여름에 까맣게 탄 나무 냄새가 났다. 장례식장에서 나온 뒤 한주는 오래 말없이 지냈다. 나는 엄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바깥이 점점 추워지면서 엄마는 작고 둥그스름한 모양으로 남았다. 검은 여름 눈사람이었다.
언니, 미안해.
한주는 자동차 앞쪽으로 걸어간다. 운전석 안으로 몸을 숙인다. 나는 가로등 옆에 서서 한주를 바라본다. 다시 밖으로 나온 한주의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다. 한주의 등이 보인다. 한주가 나와 멀어지고 있다. 여보세요. 한주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한주의 목소리가 흔들린다. 여보세요, 제 목소리 들려요? 나는 흔들리면서 걷는다. 자동차 옆으로 뒤로 옆으로 앞으로 걷는다. 어느새 다시 가까이 온 한주가 나를 바라본다. 한주는 우는 얼굴이지만 울지 않는다. 한주가 자동차 뒷좌석에 들어간다. 이제 나는 트렁크 앞에 서 있다. 검은 유리창을 한주의 뒷머리를 한참이나 한참이나 한참이나 바라보다
몸을
돌려
천천히 걷는다.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는 차갑게 욱신거린다. 나는 자동차가 달리던 반대 방향으로 발을 움직인다. 몸을 앞뒤로 움직이며 조금씩 빨리 걷기 시작한다. 걸음 걸음 걸음…… 리듬은 조금씩 하나의 줄기로 변한다. 그러니 걸음을 멈출 수 없다. 한 번 뒤를 돌아본다. 한주는 보이지 않는다. 한주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그게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지만 우선 집으로 집으로 집의 방향으로 걷는다. 나는 두리번두리번두리번거리고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도로, 나무, 바람. 멀리서 자동차가 달려온다. 빠른 속도로 내 옆을 스친다. 찬바람이 나를 때린다. 비명이 몸 안에서 끓다가 거품으로 새어 나온다. 나는 손으로 입을 더듬는다.
도로 이정표가 보인다. 처음 보는 단어를 외워둔다. 화살표는 위와 오른쪽을 가리킨다. 오른쪽 길 너머 건물들이 보인다. 자동차들이 도로를 지나다니기 시작한다. 나는 파란색 주유소와 흙길을 지나친다. 골목을 사람을 빌라를 주택을 상가를 지나친다. 큰길을 따라 걷는다. 집으로 가기 위해 전철역을 찾아야 한다.
이번에 귤이 정말 끝내줘.
밖으로 나온 여자가 말한다. 여자는 두툼하고 빨간 패딩을 입고 있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진짜 끝내준다니까.
내가 대답하지 않자 여자는 묻는다.
뭐 사려고요? 안 사요?
여자는 나를 가만 쳐다본다. 여자의 눈을 피하고 귤을 본다. 딱딱한 입술이 벌어지지 않는다.
말을 해야 무슨 맛이
껍질 될 것이다
말은
손바닥으로
좋다고 그런데
굴려
말을 이런 했는데
먹으면
될까 귤은 해야 하지?
해주야, 말을 해야 돼. 아빠는 말했다. 어릴 적 안방 서랍장 네번째 칸에는 노란 필름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아빠는 한주와 나와 엄마를 찍어주었다. 나는 버튼이 눌릴 때 들리는 소리를 좋아했다. 츠르츠, 츠르츠. 기분 좋은 소리. 그런데 엄마가 집을 나가고 나서 아빠는 서랍장에 들어 있는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서랍장에서 카메라를 몰래 꺼내 버튼을 눌렀다. 트, 트. 트, 트. 소리가 달랐다. 카메라의 몸을 이곳저곳 만졌더니 덮개가 열렸다. 네모난 빈칸이 있었다. 나는 아빠가 탁상시계의 빈칸을 채워넣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건전지를 꺼내 카메라 빈칸에 넣었다. 카메라 소리는 그래도 트, 트. 탁상시계 초침이 움직이지 않자 아빠가 새로운 건전지를 넣어두었다. 나는 또다시 건전지를 꺼내 카메라 빈칸에 넣었다. 그래도 소리는 트, 트. 건전지를 빼냈다. 건전지들을 서랍장 구석에 숨겼다. 몇 번 더 반복했다. 한참 뒤 아빠가 필름을 가져와 내게 보여주었다. 이건 건전지. 이건 필름. 아빠는 글자를 적어서 각각 이름을 붙였다. 그런 다음 카메라 빈칸에 검은 필름을 넣고 버튼을 눌렀다.
츠르츠가 아니라 츠르츠트 소리가 났다. 츠르츠트.
해주야, 이러지 말고 말을……
나는 탁상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 초침이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사랑을 때리고 벗기고 버리는 사람.
사람을 때리고 벗기고 버리는 사랑.
이야기를 볼 때 양배추 냄새가 났다. 부엌에서 한 솥 가득 양배추가 삶아지고 있었다. 말은 때림은 벗겨짐은 버려짐은 삶은 양배추 냄새가 난다.
어디에 있지?
몸을 찾는다. 열심히 주위를 둘러보며 빙빙 돈다. 차도와 건물들과 나무들과 사람들이 빙빙 돌고 있다. 패딩 주머니 바깥으로 내 손이 빠져나와 있는 게 보인다. 천천히 손을 들어 귀 쪽을, 귀가 있다고 믿는 곳을 두드린다. 거기에 귀가 생긴다. 얼굴. 목. 어깨. 배. 허벅지. 종아리. 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두드린다. 그리고 다시 걷는다. 다리가 자꾸 사라져서 허벅지와 종아리를 세게 두들겨야 한다. 무언가가 나를 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주변을 둘러본다. 거리에는 검은 패딩, 검은 코트, 또다른 검은 패딩. 대부분 검은색이다. 나는 그들의 눈을 보지 않는다. 계속해서 걷는다. 집과 자꾸만 자꾸만 멀어지는 것만 같다.
가서 잘 적응해야 해.
차 안에서 한주는 말했다.
언니, 괜찮지?
언니, 언니.
어쩔 수 없어.
한주는 월화수목금 아침 7시에 일하러 나가고 토요일은 컴퓨터 학원에 간다. 나는 아침 7시에 일어나 이불을 정리한다. 냉장고에서 반찬통들을 꺼내고 밥솥에서 밥을 꺼내 먹는다. 밥이 없으면 쌀을 씻어야 한다. 물로 일곱 번 헹구기. 한주가 가르쳐준 것이다. 한주는 밖에서 반찬을 사온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미역국. 한주가 제일 좋아하는 건 김. 나는 김이 싫다. 입안이 자글거려. 나는 말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 둘밖에 없어. 한주는 말한다. 돈을 아껴야 해. 아침을 먹으면 몸을 씻어야 한다. 한주는 화장실 안에서 자글자글한 노래를 틀어놓는다. 내 머리 안쪽에서 뾰족한 쇳덩어리가 생겨난다. 한주는 가끔 노래를 부른다. 한주의 노래는 부드럽고 좋다. 이제 한주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나는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몸을 씻는다. 수영장에 갈 시간이다. 수영장에 다녀온 다음에는 점심을 먹고 텔레비전 보기. 책장 순서대로 책읽기. 저녁 먹기. 한주와 먹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한주는 그리고 집으로 온다. 한주와 나만 있을 때 생겨난 새로운 규칙이다.
귀를 두드리고 있는데 안경 쓴 여자가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여자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힌다. 물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소리에 집중한다. 내 귀가 다시 생겨나고 단어가 들린다.
저기, 괜찮아요?
안경 쓴 여자가 말한다. 도움이 필요 하느냐고 묻는다.
그 말에 아빠와 선생님이 거실 가운데 마주 앉은 모습이 떠오른다. 아빠와 선생님이 현관에서 오래 서 있는 모습이 이어진다. 그리고 한주와 내가 거실에 나란히 앉아 있다. 우리와 마주 앉은 아빠가 숫자 열한 개를 반복해서 말한다. 나는 종이에 적힌 숫자들을 보며 순서를 외운다. 아빠의 번호. 한주의 번호.
나는 전화를 빌려달라고 말한다. 말이 잘 나오지 않지만 안경 쓴 여자가 휴대폰을 건넨다. 나는 번호를 누른다. 손가락이 딱딱해서 몇 번이나 다시 쳐야 한다.
수신음이 길게 울리다가 끊긴다.
나는 안경 쓴 여자에게 휴대폰을 돌려주고 여자를 지나쳐 걷는다.
한주는 어디에 있을까.
갑자기 한주와 붙어 있고 싶고 그래서 겁이 난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본다.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다. 나는 두툼한 나무 몸통 옆에 서서 몸을 흔들흔들 흔든다. 앞에는 차도가 있다. 자동차들이 줄지어 움직인다. 건너편 대형마트에서 나온 남자아이가 손에 쥔 비닐봉지를 앞뒤앞뒤앞뒤 흔들며 걷고 있다. 다음 순간 비닐봉지 바깥으로 작은 상자가 빠져나와 바닥을 구른다.
위험해!
오토바이가 소리를 지르며 지나친다. 자동차 불빛이 빨갛게 깜박인다.
저기요.
잠시 후 누군가 내 등을 만진다. 나는 놀라지 않는다. 안경 쓴 여자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안경 쓴 여자에게서 설탕 냄새가 나니까. 여자가 내게 휴대폰을 준다. 전화. 방금. 다시. 여자는 천천히 입을 벌린다. 이번에는 너무 큰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휴대폰을 본다. 한주의 번호다.
여보세요?
나는 겨우 한주의 이름을 부른다.
언니야?
언니 어디야?
한주의 목소리가 깜박인다.
언니, 그분 좀 다시 바꿔줄래?
나는 안경 쓴 여자에게 휴대폰을 준다.
네. 네. 아니요. 여기 연서동인데요. 연서 자연 놀이터라고 치면 나올 거예요. 제가 일이 있어서…… 아니요. 괜찮습니다. 네.
여자는 다시 휴대폰을 건넨다.
여보세요? 언니, 내 말 들려?
응.
금방 갈 테니까 거기 가만히 있어야 해. 알겠지?
나는 안경 쓴 여자에게 휴대폰을 준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오른쪽 골목을 가리킨다.
좀만 더 가면 놀이터가 나오거든요. 거기서 기다리시면 될 거예요.
나는 그네의 흐름이 된다.
덜컹거리며 떨어지고 또다시 날고 있다.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풍경.
두번째 가까워지는 풍경과 다섯번째 가까워지는 풍경은 같지 않다.
오른편에 정자가 보인다. 그곳에 앉은 두 사람은 스물세번째 풍경에서 사라진다.
거기 가만히 있어야 해.
한주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나는 조금씩 느려진다. 누군가는 내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좋아지고 있다. 그렇다고 말한다. 증상. 선생님은 거실에 앉아 아빠에게 말한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서…… 아니야. 이건 증상 같은 게 아니라고, 나는 말해야 한다. 나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선생님이 더이상 집에 오지 않는다. 오래된 일이다. 내 안에 벌어지고 있는 무언가는 벌어지고 있는 채로 거기 있다. 무엇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거기 있는 상태로. 꼭 침대 밑에 난 작은 구멍 같다. 어릴 때 나는 안방 침대 밑으로 자주 기어들어 갔다. 바닥과 침대 사이에 끼어 있으면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내 안이 꽉 눌리고 기분이 편안해진다. 언니는 쥐 같아. 바닥에 엎드린 한주가 웃는다. 침대 밑 작은 구멍은 나만 알고 있다. 오랫동안 바라보면 구멍이 점점 깊어진다.
점점 좋아지고 있어. 나는 소리 내어 말한다. 점점 나빠지고 있어. 나는 소리 내어 말한다. 입술과 혀가 굳어 점저저아지거저, 로 들린다. 점점, 점점만을 발음하게 된다. 점점점점. 한주는 나를 점점점점. 한주는 한주를 점점점점. 나는 나를 점점점점.
점점점점 점점점점.
한주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수영장에 가는 길이었다. 교복 입은 한주가 교복 입은 남자아이와 함께 집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한주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다른 쪽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대로 몸을 돌려 집으로 걸었다.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한주가 보이지 않아서 다시 수영장을 향해 걸었다. 그날 밤 한주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거기 가만히 있어야 해.
한주가 핸들을 꺾었다.
자동차가 가로등을 들이박았다.
한주가 핸들을 꺾었다.
자동차가 가로등을 들이박았다.
차도를 건너는 갈색 고양이를 보았다.
우리들을 보호해주시고 붙잡아주셔서……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축복……
남자의 허리춤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딸각. 딸각.
전국에 눈비가…… 산간에는 최고 6센티미터의 큰 눈이…… 제법 많은 양이 예상됩니다 내일도……
딸각. 딸각. 딸각.
허리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내 머릿속에 들어와 울린다. 툭툭 끊어지는 소리가 조금씩 부드럽게 이어진다.
둔두두 둔두두…… 딸각 약속과 달리 그쪽에서는…… 둔두두 둔두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할렐루야…… 그 문제를 할렐루야 우리는…… 괜찮아요? 커다란 파란 운동화 보냅니다 딸각 그 사람과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딸각 그들이 내는 딸각 진심으로 바라면 늘 쉽지 않습니다 딸각 다들 흔들리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순간이 딸각 다가오는 연말에 알러지엔 알러지엔…… 들어주실 거야 해야 할 일을 우리의 노래를 생기는 딸각 저리 가 딸각 지금 순간을 딸각 하지 않았죠 운동화에 그만 그만 있죠 대신 이렇게 사연을 딸각 이고 딸각 아니 하하 기억할 텐데 이런 말로 시작해서 딸각 상처에는 안타깝지만 누구나…… 딸각 소리를 찾아 집중적으로 바람에 가지 못했어요……
눈을 뜬다.
얼굴이 따끔거린다. 조그마한 아이들 셋이 남자에게 모래를 던지고 있다. 모래알이 이리저리 튄다. 또 왔어. 술냄새. 와하하하하. 체크무늬 목도리를 맨 아이가 그넷줄을 잡는다. 놀란 그넷줄이 흔들린다. 남자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저리 가.
아이들이 다시 모래를 던진다. 남자의 표정이 딱딱해진다. 그리고 갑작스레 오른손을 위로 뻗는다.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숨소리. 바람 소리. 천천히 눈을 뜬다. 남자는 들어올린 손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털어내고 있다. 머리와 얼굴에 묻은 모래들을 느리게 느리게 털어낸다. 모래가 모두 떨어질 때까지. 남자가 그네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나도 따라 일어나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다.
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비틀거리며 걷는 남자는 춤을 춘다. 품 안에 든 소주병을 들어 올려 마신다. 딸각. 딸각. 딸각.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남자의 말을 듣다가 일어선다.
아빠와 한주는 내가 다른 사람을 만지거나 말을 걸면 슬퍼한다. 그러지 마. 그러면 안 돼. 그러지 말라니까.
응, 알았어. 나는 대답한다. 알았어.
한주가 빈소 안쪽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말할 때, 그곳에서 눈을 감고 있을 때, 바깥소리에 귀 기울일 때 내 안에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베개에서는 나이를 먹은 물냄새가 났다. 이불과 담요에서는 쇠냄새가 났다. 그곳에서 일주일을 보낸 것 같기도 하고 하루를 보낸 것 같기도 하다. 정말 그래. 방 안에는 시계가 없는데 어느 순간부터 초침 소리가 들려온다.
안쪽 방에 들어온 한주가 잠이 들면 나는 바깥으로 나온다. 복도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웃음이 멈출 때까지 아빠의 얼굴을 본다. 방으로 들어가 바닥에 눕는다. 잠이 든 한주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는다. 두껍고 빳빳한 한주의 손. 한주와 나는 물과 쇠 사이에 있다.
아빠는 내가 수영장에 다니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처음에는 자동차로 바래다주고 다음에는 전철을 여러 번 탄다. 나는 순서와 규칙들을 외운다. 장소와 글자의 생김새는 그림으로 기억된다. 언제나 예행연습이 필요하다.
괜찮아?
응, 괜찮아.
그래도 아빠는 반복해서 묻는다. 나는 혼자 전철을 탈 수 있게 된다. 내게 노란 줄무늬 수영복이 생긴다. 미끈거리는 수영복이 마음에 든다.
이따금 나는 레일 길을 벗어나 수영한다. 벗어나려 한 건 아니지만 고개를 들면 레일에서 벗어나 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오래 숨을 참을 수 있다. 그리고 물 밑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느낀다. 얼굴 어깨 팔뚝 허벅지 발의 움직임을 한꺼번에 느낀다. 물 안에 들어가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내 안에 있는 리듬은 더욱 고요해진다. 누군가 수영장에 뛰어들거나 물살을 가로지르면 물은 부드럽게 찰랑거린다. 파랗게 찰랑이는 물에게는 또다른 리듬이 생긴다. 나는 앞으로 옆으로 뒤로 나아간다.
물이 넓어져.
계속 계속 넓어진단 말이야.
내 목소리는 안에서 울린다. 가끔 호루라기 소리도 울린다. 누군가 내게 길을 잃지 말라고 소리친다.
눈 덮인 나뭇가지가 한 겹 두 겹 하얗게 자라난다. 도로를 오가는 자동차는 느리게 움직인다. 몇 박자 느리게 느리게. 눈이 우수수수 내려와 눈 앞을 가린다.
사 차선 도로와 다리가 보인다. 나는 다리 밑으로 걸어간다. 어두운 구석에 무언가 누워 있다. 갈색 줄무늬 고양이다. 가까이 다가가 쪼그려 앉는다. 굳은 핏덩이가 고양이 얼굴에 엉겨 있다. 나는 자동차 안에서 보았던 고양이를 떠올린다. 이 고양이가 그 고양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상하지. 그 고양이는 걸어서 걸어서 어딘가로 갔는데 말이지. 그 고양이에게도 이런 줄무늬가 있었나.
어, 거기서 뭐 해요?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본다. 우산을 든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서 있다. 아이들은 똑같은 파란색 장갑을 끼고 까만색 패딩을 입고 있다. 여자아이는 크리스마스트리가 그려진 빨간 담요를 치마처럼 두르고 있다. 뒤이어 나는 여자아이가 품에 안은 상자를 바라본다.
우리가 간식 챙겨주던 애인데.
남자아이가 말한다. 나는 몸을 일으켜 두 발짝 물러난다. 여자아이가 갈색 고양이 옆에 상자를 내려놓는다. 그런 다음 허리에 두른 담요를 풀어 고양이를 감싼다. 냥이야, 착하지. 크리스마스트리 담요에 싸인 고양이가 상자 안으로 들어간다.
얘 알아요?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차에 치였어요. 저기서.
남자아이가 팔을 뻗어 차도를 가리킨다.
우리가 일단 여기로 데려왔는데요.
묻어주려고 박스랑 삽도 구해왔고요.
여자아이가 상자를 들고 일어난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는 나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린다. 다리 밖으로 걸어간다. 나는 흔들흔들 따라간다. 여자아이가 나를 돌아본다.
저어 그런데,
여자아이가 묻는다. 혹시 집에 마당 있어요?
나는 고개를 젓는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와 나는 거리를 걷는다. 여자아이는 물방울이 그려진 까만색 우산. 남자아이는 노란색 곰돌이 캐릭터가 그려진 투명한 우산. 내가 여자아이보다 키가 커서 물방울 까만 우산을 든다. 아이들이 뒤로 멘 가방은 우산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다. 눈송이가 내려앉는다.
어디다 묻어주지?
남자아이가 묻는다.
검색해봤더니 땅에 묻는 게 불법이래요.
여자아이가 품에 안은 상자를 내려다본다.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버려야 한다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아빠가 필름을 알려준 이후 나는 카메라에 빈칸이 생길 때마다 아빠에게 카메라를 가져다주었다. 빈칸은 빈칸이어서 그곳에 휴지 뭉치나 안방에 굴러다니는 유리구슬을 넣었다. 그리고 아빠가 필름을 넣기를 기다렸다. 츠르츠트, 를 기다렸다. 카메라가 살아나는 소리. 내 귀와 눈이 겹쳐지는 순간. 그 순간을 나는 끝없이 재생시킬 수 있다. 풍경이 계속해서 움직인다. 빈칸에 넣은 유리구슬을 본 아빠는 와하하, 웃는다. 카메라에 눈을 대고 하나, 둘, 셋. 아빠가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마법처럼 츠르츠트, 소리가 났다.
남자아이가 말한다.
어디?
여자아이가 묻는다.
산 있잖아. 저기 뒷산.
걷고 또 걷는다. 이리저리 부는 바람. 하얀 스티로폼 눈.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선다. 우산과 모자를 쓴 사람들이 바스락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넌다. 신호등은 사각거린다.
걸음, 걸음, 걸음.
아이들은 큰 도로를 따라 걷는다. 나도 걸음에 맞춰 걸음걸음 걸음걸음 걷는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고 비탈길을 오른다. 언덕을 내려오는 사람들은 미끄러지는 나무 모양이다. 나무와 건물 머리에 두꺼운 눈이 내려앉아 있다. 곧이어 산 입구가 나온다.
괜찮겠지?
여자아이가 말한다.
나무 근처에 묻어주면 될 거야.
남자아이가 말한다.
하얗게 눈 내린 계단이 이어진다. 남자아이가 앞서 계단을 오른다. 하얀 운동화가 미끄러진다. 파란 손으로 밧줄을 쥔다. 남자아이가 우산을 접는다. 나도 우산을 접는다. 차가운 밧줄을 잡았다 놓았다 하며 천천히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밧줄에도 눈이 덮여 있다. 손에 쥔 눈은 아파서 빨리 녹는다.
눈 덮인 나무 아래에 멈춰 선다. 여자아이가 상자를 내려놓는다. 남자아이는 가방에서 작은 삽 두 개를 꺼낸다.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와 내게 삽을 건네준다. 그리고 상자 날개를 찢어 자신의 삽을 만든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와 나는 둥글게 모여 쪼그려 앉는다. 여자아이가 나무 아래 두툼히 쌓인 눈을 퍼낸다. 나도 따라서 삽으로 눈을 퍼낸다. 눈을 퍼내는 소리는 이가 시리다. 남자아이의 상자 날개가 까맣게 젖는다. 딱 딱 딱 딱. 여자아이가 삽으로 땅을 두드린다.
어떡하지?
여자아이가 말한다.
내가 해볼게.
남자아이가 파란 손을 뻗는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에게 삽을 준다.
너무 춥다.
……
그쵸.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좀더 해보자.
남자아이가 삽을 꽂아 흔든다. 조금씩 금을 낸다. 바닥이 번개 모양으로 갈라진다. 돌멩이들이 걸린다. 나는 땅을 좀더 퍼낸다. 차갑고 단단한 흙을 퍼낸다. 몸이 점점 더 기울어진다. 조금씩 조금씩 구멍이 넓어진다. 돌멩이들이 산 아래로 구른다. 작은 구멍이 생긴다. 그릇만큼의 구멍이다. 여자아이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하얀 숨이 흩어진다. 옅은 양배추 냄새가 난다.
원래는 집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냥이가 차에 치이는 걸 봤어요.
여자아이가 입을 연다.
진짜 깜짝 놀랐어요.
남자아이는 고개를 숙여 머리에 묻은 눈을 털어낸다. 이제 묻어주자. 여자아이가 상자에서 크리스마스트리 담요를 꺼낸다. 담요를 구멍에 넣으려 한다. 안 들어가네. 남자아이가 말한다. 눈으로 무덤을 만들까. 그러자. 어쩔 수 없지. 여자아이는 담요를 조심스레 펼친다. 갈색 줄무늬 고양이를 나무 옆에 놓는다.
그런데 좀 이상한 기분이었어. 그치.
잠시 후 여자아이가 말한다.
냥이가 죽는 걸 봤는데, 그러고 나서 다리 밑에 옮겼는데, 박스를 구하러 돌아다니는 동안 거리에 지나치는 사람들 누구와도 눈이 마주치지 않았거든요.
맞아. 남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우리도 같이 죽은 거 아니냐고, 그런 말도 했어요. 이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무서웠지. 나는 말한다.
응.
아이들은 두 손으로 파헤친 흙을 모은다. 고양이의 몸 위에 흙을 올린다. 여자아이가 그 위에 담요를 넓게 편다. 나는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는 눈을 덮는다. 담요 위의 담요처럼 눈을 덮는다. 이불을 정돈하듯 토닥인다. 눈 위에 손이 남는다.
가로등 빛이 켜진다.
츠르츠트
내 안의 리듬은 눈으로 굴린 공처럼 말려 있다. 공은 고요한 리듬으로 리듬으로 구른다. 나는 여전히 그러나 조금씩 흔들, 흔들리며 가로등 빛 아래에 선다. 주택이 츠르츠트 모여 있는 골목이다. 누군가 창문을 열었다 닫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 빛에 비친 투명한 눈송이들을 바라본다. 흔들, 흔들리면서. 이게 좋다는 생각, 생각을. 눈은 바람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움직이고 움직이다 공중에서 츠르츠트 사라지는 눈이 있을까. 우산 바깥으로 츠르츠트 손을 뻗는다. 꽁꽁 언 손은 잘 펴지지 않는다. 점점 내려오는 눈송이 츠르츠트 녹지 않는 눈송이가 나를 가까이 들여다본다. 우리는 숨을 참고…… 츠르츠트 츠르츠트 하얀 숨이 퍼진다. 그러는 동안 계속 눈, 눈, 눈이 내린다.
윤단
2024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인물과 함께 걷기. 이해받지 못한 것들을 들여다보기. 한계에 부딪히면서. 부딪힘을 연습하기. 연습을 연습하기. 느끼기. 견디기. 말하기. 그것이 끝내 ‘이해하게 되기’가 되지 않더라도.
2025/01/08
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