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로이, 로이, 로이
햇빛이 복도를 따라 어지럽게 빛났다.
개미 한 마리가 창문에 붙어 있었다. 머리와 가슴이 빨갛고 강한 턱이 달려 있었다.
로이는 개미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튕겼다. 하지만 개미는 그대로 있었다. 그뒤로 끝도 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온 지구는 사막이 되었다. 인간은 우주 정거장과 새로운 행성으로 떠났다. 지구에는 가난한 인간과 낡은 로봇만이 남게 되었다.
로이가 일하는 작은 병원에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우주 정거장에 있는 스크린 닥터가 가끔 진료를 보기는 했다. 아주 가끔만. 응급 수술 로봇은 다 고장났고, 수리를 기다린 지 오래였다.
[B-9: 호출]
B-9 병실에서 로이를 불렀다. 그사이 모래 바람에 휩쓸렸는지 창밖의 개미는 사라져버렸다.
“로이, 이리 와봐!”
다른 간호 로봇이 휘파람을 불며 로이를 불렀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 로봇들이 모여 있었다. 벽에는 독감 예방 주사 포스터가 빛바랜 채 붙어 있었다. 로봇들은 작은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쉿.”
아무도 소리 내지 않았지만, 로봇 하나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말했다. 이어 스크린 속에 한 남자가 외쳤다.
“모든 로봇은 인간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자신의 임무가 끝난 로봇은 자유입니다.”
우주 연합 대표는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외쳤다. 그는 얼마 전에 큰 수술을 받았는데, 몸의 일부가 기계로 바뀌었다.
“자유! 자유! 자유!”
로봇들이 다 같이 외치기 시작했다. 일 년도 더 지난 영상이지만, 볼 때마다 로봇들은 환호했다. 춤을 추거나 허공에 손 키스를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로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스크린을 보다가 돌아섰다. B-9 병실로 가야 했다.
“로이, 뭐가 그렇게 바빠?”
지구에 남은 낡은 로봇들은 은빛이 도는 금속으로 되어 있었다. 인간과 닮도록 인공 피부와 가발을 쓴 ‘뉴 로봇’은 우주로 함께 이주한 뒤였다. 그런데 로이를 가로막은 이 로봇은 어설프게나마 얼굴에 인공 피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갈색 가발이 달린 빨간 야구 모자까지 썼다. 하지만 목소리는 익숙했다.
“휴먼, 너 맞아? 지구를 떠난 거 아니었어?”
로이가 반가워서 외치자 야구 모자를 벗은 휴먼이 짓궂게 웃었다. 원래 이름은 FDF-5로, 얼마 전에 자유가 되면서 휴먼이라는 새 이름을 지었다.
휴먼은 이층 병동을 맡았고, 열세 명의 아이를 간호했다. 하지만 지난달에 마지막 아이가 갑자기 죽으면서 휴먼은 임무가 끝났다.
휴먼이 로이에게 자신의 가슴을 들이댔다.
“여기를 만져봐.”
로이는 이유를 몰라 휴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괜찮아. 얼른.”
하는 수 없이 로이는 휴먼이 가리키는 왼편 가슴에 손을 가져다댔다. 순간, 로이는 놀라서 손을 뗐다. 무언가 꿈틀대는 것 같았다. 로봇에 붙어 사는 전자 기생충인가, 고장난 회로가 터지려는지도 몰랐다.
“가슴에 귀를 대면 심장 뛰는 소리도 나. 요즘 유행하는 심장 성형 수술이지. 진짜 인간 같지?”
“설마……”
로이가 약간 감탄하며 눈을 크게 떴다.
“돈은 어디서 났어?”
로이가 물었다. 휴먼은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자유가 된 로봇은 우주 연합에서 지원금을 받았다. 그 돈으로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가는 셔틀 티켓을 사거나, 대부분은 감정 업데이트와 성형 수술에 모두 써버리곤 했다.
휴먼은 감정 업데이트를 받았다. 그래서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겉모습까지 달라졌다. 물론 어설펐지만.
[B-9: 호출]
다시 B-9 병실에서 호출이 왔다. 그냥 심심해서 로이를 찾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왔던 호출의 89퍼센트가 그런 이유였다.
“그애가 마지막이지?”
휴먼이 눈썹을 위로 당기면서 물었다. 로이는 휴먼의 표정이 아주 풍부하다고 생각했다.
“응.”
로이는 이제 가보아야겠다며 의료용 카트 손잡이를 잡고서 대답했다. 그런데 휴먼이 로이의 팔을 거칠게 붙들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빨리 자유가 되고 싶다면 말이야……”
휴먼은 로이의 손에 무언가 쥐어주었다. 로이 손바닥에는 길쭉하고 빨간 알약이 놓여 있었다.
“이건 불법이야. 옳지 않아.”
로이가 말했다. 로봇은 정해진 규칙을 지켜야 했다. 인간을 항상 보호하고 돌보아야 했다. 하지만 이 전자 알약을 먹으면 규칙을 어길 수 있다고 들었다.
어떤 로봇은 자유가 되려고 전자 알약을 먹고서 사람을 해쳤다. 또는 심각한 버그를 일으켜 작동을 멈추기도 했다. 그래서 우주 연합에서는 전자 알약을 가진 로봇을 찾으면 바로 해체했다. 바이러스에 걸린 컴퓨터를 폐기하듯 말이다.
“나 보고 이걸 먹으라고?”
로이가 전자 알약을 돌려주려고 하자 휴먼은 싱글거리면서 물러섰다.
“선물이야. 곧 이곳을 탈출할 선물!”
로이는 말없이 전자 알약을 내려다보았다. 로이가 자유가 되려면 간호하는 아이가 모두 죽어야 한다.
다시 B-9 병실에서 호출이 왔다. 로이에게 남은 아이는 이제 딱 한 명이었다.
“그럼, 오늘도 수고.”
휴먼은 손을 흔들면서 힘차게 복도를 나갔다.
지은이 누워 있는 병실은 하얀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벽에는 짧은 연두색 커튼이 달려 있지만 창문은 없었다.
잠깐 잠이 들었던 지은이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깨어났다. 피부는 하얗고 투명했으며, 눈썹 옆에 파란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지은이 바싹 마른 입술을 떼며 로이를 반겼다.
“로이, 왜 이렇게 늦었어?”
로이는 지은의 디지털 진료 기록을 훑어보았다.
지은. 열두 살. 원인을 알 수 없는 심장병.
지은의 심장은 어제보다 오늘 더 조금씩 나빠져가고 있었다. 다른 심장을 이식받기도 늦어버렸다.
로이는 지은의 단발머리를 빗겨주었다. 그러고는 구겨진 침대 시트를 정리했다. 우주 정거장에 사는 아이들은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지은은 혼자서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한쪽 귀에는 항상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몇 달 전, 로이가 간호했던 아이 물건이었다.
“내 이름은 로이가 아닙니다.”
로이가 대답했다. 로이가 만들어질 때 받은 이름은 JX-612였다. 휴먼의 이름이 FDF-5였듯 말이다. 자유가 된 로봇만이 스스로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그렇지만 다른 로봇들도 로이를 로이라고 불렀다. 지은 때문이었다.
“넌 로이야. 아주 잘 어울리는데?”
지은이 웃었다. 로이는 지은이 웃으면 함께 미소 짓곤 했다. 모든 아이에게 다 그러는 건 아니었다.
“나는 아직 내 이름을 정하지 않았어요.”
“왜, 내가 죽지 않아서?”
지은이 두 눈을 깜빡이면서 물었다. 대답을 들으려는 게 아니라 진실을 꿰뚫는 눈빛이었다. 그 진실은 지은이 태어날 때부터 부서진 심장에 담겨 있었다.
“아직은 내가 자유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로이가 대답했다.
로이는 심장이 없었다. 하지만 간호 로봇은 환자의 상태를 계속해서 확인해야 했다. 로이는 지은의 심장 소리를 원격으로 항상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로이 가슴에도 부서진 심장이 들어 있었다.
“좋아요. 이제부터 내 이름은 로이입니다.”
로이는 지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눈밑이 거뭇거뭇하던 지은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느새 오후 네시가 넘어갔다. 이때쯤 로이는 지은에게 잠드는 약을 주었다. 하지만 지난달부터 의료품이 오지 않았다. 우주 연합에서는 ‘아주 복잡한 사정으로 의료품 전달이 몹시 미뤄졌다’라는 답만 보내왔다. 그래서 급하지 않으면 의료품은 아껴두어야 했다.
“로이, 사막이 보고 싶어.”
지은이 커튼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사막은 바람을 따라서 열심히 모래 언덕을 만들었다가 지우곤 했다. 만약 저 벽에 창문이 있다면 로이와 지은은 밤새도록 꿈틀대는 사막을 보았을 것이다.
“로이, 내 말 들었어?”
로이는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은을 재우려면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은에게는 별이 있어요. 부모님이 지은에게 별을 선물해주었어요.”
지은은 로이를 처음 만난 날,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은 흐릿해지곤 한다. 하지만 로이는 로봇이기에 지은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기억하였다.
“맞아. 나에게는 별이 있어. 망원경이 있다면 나는 매일 밤, 그 별을 볼 거야.”
지금까지 로이는 지은의 별 이야기를 2,145번이나 반복하였다.
“이십 년 전, 우주 연합에서 별을 팔기 시작했어요. 그 좌표에 있는 실제 별의 소유권을 갖게 되는 거예요. 많은 부모가 자신의 아이에게 별을 선물로 주곤 했어요.”
“응.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항상 말했어. 나한테도 별이 있다고.”
로이는 지은이 잠들 수 있게 어깨를 쓰다듬었다.
별은 아주 비쌌다. 로이 같은 로봇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별을 선물 받은 아이들은 그 별에 이름을 붙였다. 매일 밤 망원경으로 구경하고 또 구경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별 따위는 잊고 말았다. 그 아이들에게 세상은 매일매일 달라지고 넓어졌을 테니까.
“로이, 여기를 나가서 내 별을 보고 싶어.”
지은은 여덟 살 때 버려져 여러 병원을 옮겨 다녔다. 우주 시대가 열리면서 많은 병원은 사라지고 합쳐졌다. 그 과정에서도 지은은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다. 그때만 해도 병원에는 아픈 아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책임감을 가지고 병원에 남아 있던 의사들도 있었다. 가장 바쁠 때 로이는 한 번에 백 명도 넘는 아이들을 간호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는 로이 품속에서 죽어갔다.
죽은 아이들 몸은 점점 차갑게 식었다. 비로소 아이들과 로이의 체온이 같아졌다. 그 순간, 로이는 모든 로봇이 죽은 인간과 같을 수도 있다는 생각했다. 차갑고 뻣뻣하고 더이상 숨쉬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아이들은 로이와 연결되어 있었다.
쿵. 쿵. 쿵.
특히 지은의 심장 소리가 로이에게 전해질 때, 로이는 다시 살아났다. 지은의 부서진 심장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로이는 죽은 아이들을 사막에 묻고서 병원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지은이 로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별을 보고 싶어. 내 소원이야. 마지막 소원.”
지은은 로이의 머릿속 깊이 그 별이 박힌 듯 뚫어져라 보며 중얼거렸다. 지은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푹 꺼진 눈가가 축축해졌다.
잠든 지은의 손이 움찔거렸다. 무언가 놓치지 않으려고 주먹을 꽉 쥔 모습이었다. 로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빠져나왔다.
어두운 복도 천장에는 전등이 깨져 있었다. 하지만 로봇은 센서가 있어서 빛 없이도 모든 걸 볼 수 있었다. 로이는 어둠 속에 가만히 서 있다가 병원 바깥으로 나왔다.
버석거리는 모래가 발밑에 밟혔다. 팔과 다리, 가슴에 와 부딪히는 바람에서 모래가 느껴졌다.
예전에 차가 바쁘게 오가던 사거리였다. 이것저것 물건을 팔던 가게도 늘어서 있었다. 무너진 육교로 보이는 커다란 계단이 마주보고 서 있었다. 글자가 지워진 표지판과 머리가 떨어진 신호등도 보였다. 다들 모래 아래 가라앉아 잠자고 있었다.
요즘 지은은 『우주의 시작』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것도 죽은 아이 물건이었다. 그전에는 또다른 죽은 아이의 책이었을 것이다. 로이가 무언가를 가져오면 지은은 어디서 구했는지 묻지 않았다.
“로이, 인간은 어디에서 왔을까?”
“흥미롭네요. 로봇은 인간이 만들었어요. 우리는 공장에서 왔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로봇도 우주에 속해 있잖아. 우리 모두는 같은 존재야. 그리고 언젠가 너는…… 지구를 떠나 우주로 가겠지.”
“지금은 이곳에서 지은을 간호하는 게 나의 임무예요.”
로이가 지은에게 하는 대답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로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이 되자 하늘은 컴컴해지며 어둠 속에서 별을 빛냈다. 밤하늘이 우주의 ‘시작’이라면…… 우주는 아주 먼 것 같으면서도 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저 빛나는 것들 중에 지은의 별이 있을까. 정말로.
[B-9: 응급 상황]
지은의 심장이 나빠졌다. 심심해서 로이를 호출하는 게 아니었다.
로이는 병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가까운 길을 검색했다. 가장 빨리 달려도 지은의 병실까지 183초가 걸렸다.
[B-9: 응급 상황(2)]
지은의 심장이 멈추었다. ‘삐이이이-’ 경고음이 길게 이어졌다. 로이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가슴이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B-9: 응급 상황(3)]
로이는 다리를 움직이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무슨 오류가 발생한 걸까. 로이는 당황하였다. 시스템을 불러와 진단을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쿵.
바닥이 흔들렸다. 처음에는 불규칙적으로. 이윽고 자신의 리듬을 찾아가며 로이 발밑을 울렸다. 로이 가슴에서 무언가 뛰는 게 느껴졌다.
모래바람 사이로 희뿌옇게 불을 밝힌 병원이 보였다.
로이는 지은의 병실로 뛰어왔다. 이미 다른 간호 로봇이 응급 처치를 한 뒤였다.
지은은 심장이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뛰었다. 깨어난 지은은 가슴을 아파했다. 전기 충격을 하면서 갈비뼈에 무리가 간 듯했다.
“지은,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로이……”
지은은 손을 들어 로이의 얼굴을 감쌌다.
“네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 그래서 내가 안 죽었나봐.”
지은은 의식을 잃으면서도, 응급 처치하는 로봇이 로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로이는 그게 가능한 일인지 믿을 수 없었다.
“지은이 죽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되면 넌 자유야.”
“알아요.”
“별을 보러 나가고 싶어.”
지은은 다시 커튼을 보며 중얼거렸다. 입술에는 피멍이 들었고, 침대에 놓인 두 팔은 가냘펐다.
“지금은 몹시 추워요. 지은에게 좋지 않아요.”
“내 마지막 소원이야.”
로이는 규칙을 지켜야 했다. 아픈 지은을 데리고 병원 바깥으로 나갈 순 없었다. 하지만 스크린 닥터는 사흘째 지은의 진료 기록을 읽지 않았다. 로이는 의사가 아니었기에 어떤 처방도 내릴 수 없었다.
“제발.”
지은이 로이를 향해 주먹을 펼쳐 보였다. 손바닥에는 빨간 전자 알약이 올려져 있었다. 로이는 아까 휴먼에게 받았던 전자 알약을 서둘러 찾아보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로이, 네가 아까 떨어뜨리고 간 거야.”
“지은, 이게 뭔지 알아요?”
“그래. 나를 위해 이 약을 먹어줘. 그래야 우리는 나갈 수 있을 거야. 자유가 될 거야.”
지은이 로이의 딱딱한 팔을 붙잡고 속삭였다. 병실은 아주 조용했다. 주변 병실은 비워진 지 오래였다. 로이는 지은의 곁에 앉아 심장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선물이야. 곧 이곳을 탈출할 선물.’
휴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로이는 이곳을 떠나고 싶을까. 그렇다면, 지은이 죽었기 때문이다. 로이는 지은이 죽기를 원할까. 그것은 로이가 바라고 바라지 않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로이는 규칙을 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로이에게는 지은을 보호하고 돌볼 임무가 있었다. 그렇다면, 지은을 이 병원에 이대로 두는 게 지은을 위한 일일까.
“정말로 자유가 되고 싶나요?”
로이는 지은이 뭐라고 대답할 줄 알면서도 물었다. 지은은 소리 내 대답하지 않았다.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까딱였다.
“알겠어요.”
로이는 전자 알약을 입에 넣고 삼켰다. 그리고 두 눈을 감았다. 지은은 가만히 손을 뻗어 로이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이윽고 로이가 삼킨 전자 알약은 로딩을 시작했다.
로이는 지은을 품에 안고 병원을 나왔다.
서걱서걱. 사막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지은의 심장은 느리게 뛰었고, 그 박자에 맞춰서 로이는 모래 위를 걸었다.
“로이, 로이, 로이……”
“지은, 괜찮아요?”
“별이 보여.”
지은은 눈을 꼭 감은 채로 속삭였다. 어쩐지 하늘이 어두워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로이는 최대한 높은 언덕에 오르려 했다.
“로이, 지금 우리가 보는 별빛은 오래전에 죽은 별빛이래.”
“하지만 빛나고 있잖아요.”
로이는 계속해서 걸었다. 지은의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밤하늘이 울컥하고 로이의 머리 위로 쏟아져내릴 것 같았다.
개미 한 마리가 창문에 붙어 있었다. 머리와 가슴이 빨갛고 강한 턱이 달려 있었다.
로이는 개미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튕겼다. 하지만 개미는 그대로 있었다. 그뒤로 끝도 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온 지구는 사막이 되었다. 인간은 우주 정거장과 새로운 행성으로 떠났다. 지구에는 가난한 인간과 낡은 로봇만이 남게 되었다.
로이가 일하는 작은 병원에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우주 정거장에 있는 스크린 닥터가 가끔 진료를 보기는 했다. 아주 가끔만. 응급 수술 로봇은 다 고장났고, 수리를 기다린 지 오래였다.
[B-9: 호출]
B-9 병실에서 로이를 불렀다. 그사이 모래 바람에 휩쓸렸는지 창밖의 개미는 사라져버렸다.
“로이, 이리 와봐!”
다른 간호 로봇이 휘파람을 불며 로이를 불렀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 로봇들이 모여 있었다. 벽에는 독감 예방 주사 포스터가 빛바랜 채 붙어 있었다. 로봇들은 작은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쉿.”
아무도 소리 내지 않았지만, 로봇 하나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말했다. 이어 스크린 속에 한 남자가 외쳤다.
“모든 로봇은 인간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자신의 임무가 끝난 로봇은 자유입니다.”
우주 연합 대표는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외쳤다. 그는 얼마 전에 큰 수술을 받았는데, 몸의 일부가 기계로 바뀌었다.
“자유! 자유! 자유!”
로봇들이 다 같이 외치기 시작했다. 일 년도 더 지난 영상이지만, 볼 때마다 로봇들은 환호했다. 춤을 추거나 허공에 손 키스를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로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스크린을 보다가 돌아섰다. B-9 병실로 가야 했다.
“로이, 뭐가 그렇게 바빠?”
지구에 남은 낡은 로봇들은 은빛이 도는 금속으로 되어 있었다. 인간과 닮도록 인공 피부와 가발을 쓴 ‘뉴 로봇’은 우주로 함께 이주한 뒤였다. 그런데 로이를 가로막은 이 로봇은 어설프게나마 얼굴에 인공 피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갈색 가발이 달린 빨간 야구 모자까지 썼다. 하지만 목소리는 익숙했다.
“휴먼, 너 맞아? 지구를 떠난 거 아니었어?”
로이가 반가워서 외치자 야구 모자를 벗은 휴먼이 짓궂게 웃었다. 원래 이름은 FDF-5로, 얼마 전에 자유가 되면서 휴먼이라는 새 이름을 지었다.
휴먼은 이층 병동을 맡았고, 열세 명의 아이를 간호했다. 하지만 지난달에 마지막 아이가 갑자기 죽으면서 휴먼은 임무가 끝났다.
휴먼이 로이에게 자신의 가슴을 들이댔다.
“여기를 만져봐.”
로이는 이유를 몰라 휴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괜찮아. 얼른.”
하는 수 없이 로이는 휴먼이 가리키는 왼편 가슴에 손을 가져다댔다. 순간, 로이는 놀라서 손을 뗐다. 무언가 꿈틀대는 것 같았다. 로봇에 붙어 사는 전자 기생충인가, 고장난 회로가 터지려는지도 몰랐다.
“가슴에 귀를 대면 심장 뛰는 소리도 나. 요즘 유행하는 심장 성형 수술이지. 진짜 인간 같지?”
“설마……”
로이가 약간 감탄하며 눈을 크게 떴다.
“돈은 어디서 났어?”
로이가 물었다. 휴먼은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자유가 된 로봇은 우주 연합에서 지원금을 받았다. 그 돈으로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가는 셔틀 티켓을 사거나, 대부분은 감정 업데이트와 성형 수술에 모두 써버리곤 했다.
휴먼은 감정 업데이트를 받았다. 그래서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겉모습까지 달라졌다. 물론 어설펐지만.
[B-9: 호출]
다시 B-9 병실에서 호출이 왔다. 그냥 심심해서 로이를 찾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왔던 호출의 89퍼센트가 그런 이유였다.
“그애가 마지막이지?”
휴먼이 눈썹을 위로 당기면서 물었다. 로이는 휴먼의 표정이 아주 풍부하다고 생각했다.
“응.”
로이는 이제 가보아야겠다며 의료용 카트 손잡이를 잡고서 대답했다. 그런데 휴먼이 로이의 팔을 거칠게 붙들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빨리 자유가 되고 싶다면 말이야……”
휴먼은 로이의 손에 무언가 쥐어주었다. 로이 손바닥에는 길쭉하고 빨간 알약이 놓여 있었다.
“이건 불법이야. 옳지 않아.”
로이가 말했다. 로봇은 정해진 규칙을 지켜야 했다. 인간을 항상 보호하고 돌보아야 했다. 하지만 이 전자 알약을 먹으면 규칙을 어길 수 있다고 들었다.
어떤 로봇은 자유가 되려고 전자 알약을 먹고서 사람을 해쳤다. 또는 심각한 버그를 일으켜 작동을 멈추기도 했다. 그래서 우주 연합에서는 전자 알약을 가진 로봇을 찾으면 바로 해체했다. 바이러스에 걸린 컴퓨터를 폐기하듯 말이다.
“나 보고 이걸 먹으라고?”
로이가 전자 알약을 돌려주려고 하자 휴먼은 싱글거리면서 물러섰다.
“선물이야. 곧 이곳을 탈출할 선물!”
로이는 말없이 전자 알약을 내려다보았다. 로이가 자유가 되려면 간호하는 아이가 모두 죽어야 한다.
다시 B-9 병실에서 호출이 왔다. 로이에게 남은 아이는 이제 딱 한 명이었다.
“그럼, 오늘도 수고.”
휴먼은 손을 흔들면서 힘차게 복도를 나갔다.
지은이 누워 있는 병실은 하얀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벽에는 짧은 연두색 커튼이 달려 있지만 창문은 없었다.
잠깐 잠이 들었던 지은이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깨어났다. 피부는 하얗고 투명했으며, 눈썹 옆에 파란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지은이 바싹 마른 입술을 떼며 로이를 반겼다.
“로이, 왜 이렇게 늦었어?”
로이는 지은의 디지털 진료 기록을 훑어보았다.
지은. 열두 살. 원인을 알 수 없는 심장병.
지은의 심장은 어제보다 오늘 더 조금씩 나빠져가고 있었다. 다른 심장을 이식받기도 늦어버렸다.
로이는 지은의 단발머리를 빗겨주었다. 그러고는 구겨진 침대 시트를 정리했다. 우주 정거장에 사는 아이들은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지은은 혼자서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한쪽 귀에는 항상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몇 달 전, 로이가 간호했던 아이 물건이었다.
“내 이름은 로이가 아닙니다.”
로이가 대답했다. 로이가 만들어질 때 받은 이름은 JX-612였다. 휴먼의 이름이 FDF-5였듯 말이다. 자유가 된 로봇만이 스스로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그렇지만 다른 로봇들도 로이를 로이라고 불렀다. 지은 때문이었다.
“넌 로이야. 아주 잘 어울리는데?”
지은이 웃었다. 로이는 지은이 웃으면 함께 미소 짓곤 했다. 모든 아이에게 다 그러는 건 아니었다.
“나는 아직 내 이름을 정하지 않았어요.”
“왜, 내가 죽지 않아서?”
지은이 두 눈을 깜빡이면서 물었다. 대답을 들으려는 게 아니라 진실을 꿰뚫는 눈빛이었다. 그 진실은 지은이 태어날 때부터 부서진 심장에 담겨 있었다.
“아직은 내가 자유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로이가 대답했다.
로이는 심장이 없었다. 하지만 간호 로봇은 환자의 상태를 계속해서 확인해야 했다. 로이는 지은의 심장 소리를 원격으로 항상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로이 가슴에도 부서진 심장이 들어 있었다.
“좋아요. 이제부터 내 이름은 로이입니다.”
로이는 지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눈밑이 거뭇거뭇하던 지은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느새 오후 네시가 넘어갔다. 이때쯤 로이는 지은에게 잠드는 약을 주었다. 하지만 지난달부터 의료품이 오지 않았다. 우주 연합에서는 ‘아주 복잡한 사정으로 의료품 전달이 몹시 미뤄졌다’라는 답만 보내왔다. 그래서 급하지 않으면 의료품은 아껴두어야 했다.
“로이, 사막이 보고 싶어.”
지은이 커튼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사막은 바람을 따라서 열심히 모래 언덕을 만들었다가 지우곤 했다. 만약 저 벽에 창문이 있다면 로이와 지은은 밤새도록 꿈틀대는 사막을 보았을 것이다.
“로이, 내 말 들었어?”
로이는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은을 재우려면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은에게는 별이 있어요. 부모님이 지은에게 별을 선물해주었어요.”
지은은 로이를 처음 만난 날,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은 흐릿해지곤 한다. 하지만 로이는 로봇이기에 지은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기억하였다.
“맞아. 나에게는 별이 있어. 망원경이 있다면 나는 매일 밤, 그 별을 볼 거야.”
지금까지 로이는 지은의 별 이야기를 2,145번이나 반복하였다.
“이십 년 전, 우주 연합에서 별을 팔기 시작했어요. 그 좌표에 있는 실제 별의 소유권을 갖게 되는 거예요. 많은 부모가 자신의 아이에게 별을 선물로 주곤 했어요.”
“응.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항상 말했어. 나한테도 별이 있다고.”
로이는 지은이 잠들 수 있게 어깨를 쓰다듬었다.
별은 아주 비쌌다. 로이 같은 로봇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별을 선물 받은 아이들은 그 별에 이름을 붙였다. 매일 밤 망원경으로 구경하고 또 구경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별 따위는 잊고 말았다. 그 아이들에게 세상은 매일매일 달라지고 넓어졌을 테니까.
“로이, 여기를 나가서 내 별을 보고 싶어.”
지은은 여덟 살 때 버려져 여러 병원을 옮겨 다녔다. 우주 시대가 열리면서 많은 병원은 사라지고 합쳐졌다. 그 과정에서도 지은은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다. 그때만 해도 병원에는 아픈 아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책임감을 가지고 병원에 남아 있던 의사들도 있었다. 가장 바쁠 때 로이는 한 번에 백 명도 넘는 아이들을 간호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는 로이 품속에서 죽어갔다.
죽은 아이들 몸은 점점 차갑게 식었다. 비로소 아이들과 로이의 체온이 같아졌다. 그 순간, 로이는 모든 로봇이 죽은 인간과 같을 수도 있다는 생각했다. 차갑고 뻣뻣하고 더이상 숨쉬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아이들은 로이와 연결되어 있었다.
쿵. 쿵. 쿵.
특히 지은의 심장 소리가 로이에게 전해질 때, 로이는 다시 살아났다. 지은의 부서진 심장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로이는 죽은 아이들을 사막에 묻고서 병원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지은이 로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별을 보고 싶어. 내 소원이야. 마지막 소원.”
지은은 로이의 머릿속 깊이 그 별이 박힌 듯 뚫어져라 보며 중얼거렸다. 지은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푹 꺼진 눈가가 축축해졌다.
잠든 지은의 손이 움찔거렸다. 무언가 놓치지 않으려고 주먹을 꽉 쥔 모습이었다. 로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빠져나왔다.
어두운 복도 천장에는 전등이 깨져 있었다. 하지만 로봇은 센서가 있어서 빛 없이도 모든 걸 볼 수 있었다. 로이는 어둠 속에 가만히 서 있다가 병원 바깥으로 나왔다.
버석거리는 모래가 발밑에 밟혔다. 팔과 다리, 가슴에 와 부딪히는 바람에서 모래가 느껴졌다.
예전에 차가 바쁘게 오가던 사거리였다. 이것저것 물건을 팔던 가게도 늘어서 있었다. 무너진 육교로 보이는 커다란 계단이 마주보고 서 있었다. 글자가 지워진 표지판과 머리가 떨어진 신호등도 보였다. 다들 모래 아래 가라앉아 잠자고 있었다.
요즘 지은은 『우주의 시작』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것도 죽은 아이 물건이었다. 그전에는 또다른 죽은 아이의 책이었을 것이다. 로이가 무언가를 가져오면 지은은 어디서 구했는지 묻지 않았다.
“로이, 인간은 어디에서 왔을까?”
“흥미롭네요. 로봇은 인간이 만들었어요. 우리는 공장에서 왔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로봇도 우주에 속해 있잖아. 우리 모두는 같은 존재야. 그리고 언젠가 너는…… 지구를 떠나 우주로 가겠지.”
“지금은 이곳에서 지은을 간호하는 게 나의 임무예요.”
로이가 지은에게 하는 대답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로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이 되자 하늘은 컴컴해지며 어둠 속에서 별을 빛냈다. 밤하늘이 우주의 ‘시작’이라면…… 우주는 아주 먼 것 같으면서도 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저 빛나는 것들 중에 지은의 별이 있을까. 정말로.
[B-9: 응급 상황]
지은의 심장이 나빠졌다. 심심해서 로이를 호출하는 게 아니었다.
로이는 병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가까운 길을 검색했다. 가장 빨리 달려도 지은의 병실까지 183초가 걸렸다.
[B-9: 응급 상황(2)]
지은의 심장이 멈추었다. ‘삐이이이-’ 경고음이 길게 이어졌다. 로이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가슴이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B-9: 응급 상황(3)]
로이는 다리를 움직이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무슨 오류가 발생한 걸까. 로이는 당황하였다. 시스템을 불러와 진단을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쿵.
바닥이 흔들렸다. 처음에는 불규칙적으로. 이윽고 자신의 리듬을 찾아가며 로이 발밑을 울렸다. 로이 가슴에서 무언가 뛰는 게 느껴졌다.
모래바람 사이로 희뿌옇게 불을 밝힌 병원이 보였다.
로이는 지은의 병실로 뛰어왔다. 이미 다른 간호 로봇이 응급 처치를 한 뒤였다.
지은은 심장이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뛰었다. 깨어난 지은은 가슴을 아파했다. 전기 충격을 하면서 갈비뼈에 무리가 간 듯했다.
“지은,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로이……”
지은은 손을 들어 로이의 얼굴을 감쌌다.
“네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 그래서 내가 안 죽었나봐.”
지은은 의식을 잃으면서도, 응급 처치하는 로봇이 로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로이는 그게 가능한 일인지 믿을 수 없었다.
“지은이 죽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되면 넌 자유야.”
“알아요.”
“별을 보러 나가고 싶어.”
지은은 다시 커튼을 보며 중얼거렸다. 입술에는 피멍이 들었고, 침대에 놓인 두 팔은 가냘펐다.
“지금은 몹시 추워요. 지은에게 좋지 않아요.”
“내 마지막 소원이야.”
로이는 규칙을 지켜야 했다. 아픈 지은을 데리고 병원 바깥으로 나갈 순 없었다. 하지만 스크린 닥터는 사흘째 지은의 진료 기록을 읽지 않았다. 로이는 의사가 아니었기에 어떤 처방도 내릴 수 없었다.
“제발.”
지은이 로이를 향해 주먹을 펼쳐 보였다. 손바닥에는 빨간 전자 알약이 올려져 있었다. 로이는 아까 휴먼에게 받았던 전자 알약을 서둘러 찾아보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로이, 네가 아까 떨어뜨리고 간 거야.”
“지은, 이게 뭔지 알아요?”
“그래. 나를 위해 이 약을 먹어줘. 그래야 우리는 나갈 수 있을 거야. 자유가 될 거야.”
지은이 로이의 딱딱한 팔을 붙잡고 속삭였다. 병실은 아주 조용했다. 주변 병실은 비워진 지 오래였다. 로이는 지은의 곁에 앉아 심장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선물이야. 곧 이곳을 탈출할 선물.’
휴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로이는 이곳을 떠나고 싶을까. 그렇다면, 지은이 죽었기 때문이다. 로이는 지은이 죽기를 원할까. 그것은 로이가 바라고 바라지 않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로이는 규칙을 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로이에게는 지은을 보호하고 돌볼 임무가 있었다. 그렇다면, 지은을 이 병원에 이대로 두는 게 지은을 위한 일일까.
“정말로 자유가 되고 싶나요?”
로이는 지은이 뭐라고 대답할 줄 알면서도 물었다. 지은은 소리 내 대답하지 않았다.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까딱였다.
“알겠어요.”
로이는 전자 알약을 입에 넣고 삼켰다. 그리고 두 눈을 감았다. 지은은 가만히 손을 뻗어 로이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이윽고 로이가 삼킨 전자 알약은 로딩을 시작했다.
로이는 지은을 품에 안고 병원을 나왔다.
서걱서걱. 사막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지은의 심장은 느리게 뛰었고, 그 박자에 맞춰서 로이는 모래 위를 걸었다.
“로이, 로이, 로이……”
“지은, 괜찮아요?”
“별이 보여.”
지은은 눈을 꼭 감은 채로 속삭였다. 어쩐지 하늘이 어두워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로이는 최대한 높은 언덕에 오르려 했다.
“로이, 지금 우리가 보는 별빛은 오래전에 죽은 별빛이래.”
“하지만 빛나고 있잖아요.”
로이는 계속해서 걸었다. 지은의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밤하늘이 울컥하고 로이의 머리 위로 쏟아져내릴 것 같았다.
잠자
서울예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하였다. 최근에 쓴 책으로는 『잠자는 비밀을 얘기해』가 있다.
그날 거리에서 빛나는 응원봉을 보았다. 올겨울 가장 추운 날이지만, 춥지 않았다. 로이와 지은이 찾아갈 ‘그 별’도 빛나기를. 우리는 언제나 나에게 소중한 것을 지켜나가기 위해 싸울 것이다.
2025/02/19
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