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오리를 만난 날
안 좋은 기분이 꽁무니를 따라오고 있어요. 책상 밑에 두고 오려고 했는데 마음대로 안 됐어요. 나는 모른 척하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어요. 느릿느릿 따라왔어요. 잰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렀지요. 빨리빨리 따라왔어요.
교문을 나서자 신호등이 초록색 불로 바뀌었어요. 빨리 건너라는 듯 다급하게 깜박였지요. 맞은편을 잠시 건너다보았어요. 곧장 집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공원 놀이터로 향했어요. 거기 가면 내가 좋아하는 시소가 있어요. 시소에 조금만 앉아 있고 싶었어요.
코끼리 시소 한쪽 끝에 앉자마자 강한 바람이 솨 불어왔어요. 나뭇잎들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흔들렸어요. 풀숲도 마구 흔들렸지요. 난 손잡이를 꼭 잡고 풀숲을 바라보았어요. 입을 벌리듯 풀숲이 쩍 벌어졌어요. 그리고 그 안에서 웬 오리 한 마리가 걸어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공원에 여러 번 와보았지만 오리를 본 건 처음이었어요. 오리가 몸을 흔들어 털었어요. 오리 머리 위에 붙어 있던 마른 잎 한 개가 휙 날아와 내 운동화 위에 내려앉았어요. 난 눈동자만 굴려 마른 잎을 보았어요. 그러고는 다시 오리를 보았지요. 오리가 나처럼 등에 가방을 메고 있었어요.
“너 어디 가던 길이니? 꽥꽥?”
난 깜짝 놀라 뒤로 발랑 넘어질 뻔했어요. ‘꽥꽥’ 소리가 어찌나 큰지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였어요.
“그 얼굴은 뭐야, 꽥! 다 큰 것 같은데 설마 아직 말도 못 하는 거야, 꽥꽥?”
오리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어요.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교감 선생님이 나를 빤히 내려다볼 때처럼요.
“답답해서 못 참겠네, 꽥! 누가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꽥꽥.”
“지, 집에 가던 길이야.”
그렇게 대답하자 오리가 부리를 꽉 다물었어요. 그러고는 나를 쌩 지나쳐 가지 뭐예요. 오리가 뒤뚱뒤뚱 부지런히 걸어갔어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았어요.
마음이 섭섭해지려고 했어요. 다시는 오리를 못 볼 테니까요. 그러자 불쑥 용기가 났어요.
“넌 어디 가는데?”
오리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어요. 얼굴이 울적해 보였어요.
“나도 그걸 잘 모르겠단 말이야, 꽥. 찾으러 가긴 가는데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거기 가면 정말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 꽥꽥.”
답답한 오리 마음이 느껴졌어요. 내 마음도 그랬거든요. 기분이 안 좋긴 한데,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단 말이에요.
“내가 도와줄까?”
“정말, 꽥꽥?”
날 올려다보는 오리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였어요. 학원이 반짝 떠올랐지요. 곧 집에 들렀다가 학원에 가야 해요. 엄마가 학원에 늦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물론 나도 늦는 걸 좋아하지 않고요. 하지만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늦을 때가 있나봐요. 오늘처럼 기분이 착 가라앉거나, 오리를 만난 날이라면요.
“그래, 내가 같이 가줄게.”
“고마워, 꽥! 그럼 출발, 꽥꽥!”
오리가 뒤뚱뒤뚱 힘차게 걸어갔어요. 난 오리 뒤를 따라가며 물었어요.
“근데 뭘 찾고 있어?”
“우리 선생님, 꽥꽥!”
“너도 선생님이 있어?”
그러자 오리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당연하지, 꽥! 너희들만 선생님이 있는 게 아니야, 우리 오리들도 선생님이 있다고, 꽥꽥!”
조금 미안해졌어요. 난 오리와 나란히 발걸음을 맞춰 걸었어요.
“근데 왜 밖에서 찾아? 선생님은 학교에서 찾으면 되잖아.”
“그야 선생님이 학교에 없으니까 그렇지, 꽥. 어제, 아니 그저께부터 선생님만 기다렸는데 선생님이 학교에 안 왔어, 꽥. 오늘은 글쎄 학교 문까지 굳게 닫혔지 뭐야, 꽥꽥.”
오리 선생님처럼 우리 선생님도 학교에 안 왔어요. 생각해보니 오늘이 벌써 삼 일째였지요. 하지만 다행히 학교 문은 닫히지 않았어요. 다행인지 아닌지, 우리 선생님 대신 교감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왔고요.
“1, 2교시는 조용히 책을 읽자.”
교감 선생님이 책 수레를 끌고 들어와 말했어요.
“각자 책 한 권씩 가져가볼까?”
아이들이 앞다투어 수레로 달려들었어요.
난 교감 선생님을 가만히 살폈어요. 멀리서는 몇 번 보았는데 이렇게 가까이 보는 건 처음이었어요. 교감 선생님이 움직일 때마다 하얀색 치마가 눈부시게 빛났어요. 야옹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요. 교감 선생님이 아주 귀여운 고양이 슬리퍼를 신고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다른 아이들은 책을 고르느라 바빴어요.
“넌 책 안 가져가니? 마지막에 남은 책은 아주 두껍고 어려운 책일 텐데?”
교감 선생님이 날 가만히 내려다보았어요. 교탁을 보면 자리마다 번호와 이름이 붙어 있어요. 그렇지만 내 이름을 찾아 불러주지 않았어요. 나는 교감 선생님이 궁금한데, 교감 선생님은 내가 안 궁금한 모양이었어요.
오리가 기다란 종이를 펼쳐 들고 보았어요.
“도대체 여기가 어딜까, 꽥꽥? 어제 선생님 자리에서 발견한 건데 아무래도 어떤 장소 같아, 꽥! 그런데 아무리 봐도 어디인지 통 모르겠어, 꽥꽥.”
난 오리 옆에 쪼그려 앉아 그것을 같이 들여다보았어요. 어려운 글자가 몇 개 보였어요. 가슴부터 두근거렸지요. 그런데 잘 보니, 글자 밑에 짝꿍처럼 작은 그림이 하나씩 붙어 있지 뭐예요. 신발이랑 사과도 있고, 크레파스랑 꽈배기도 있고……
“아, 시장이네!”
어릴 때부터 엄마를 따라 시장에 자주 다녔어요. 요즘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시장에 가고요. 난 글자를 더듬더듬 읽어나갔어요.
“신발 백화점, 차, 착즙 과일……”
어려운 글자가 나오면 그림을 보면서 머릿속에 시장을 떠올렸어요.
“화, 황룡 문방구, 뱅글뱅글 꽈배기……”
시장이라면 눈을 감고도 훤했지요.
“공구 철물, 명품 떡집, 금두꺼비 잡화, 떡볶이랑 김밥, 사계절 이불……”
“너……,”
오리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그렇게 안 봤는데 벌써 글을 읽을 줄 알아, 꽥꽥?”
나도 조금 놀랐어요. 어제만 해도 교감 선생님 앞에서 떠듬떠듬 읽다가 개미만큼 작아졌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반대로 우뚝 커진 기분이었어요.
“그치만 술술 읽으려면 아직 멀었는걸.”
“방금도 술술 읽던데 뭘, 꽥꽥! 너 진짜 좋겠다, 꽥! 나도 글을 배우면 너처럼 잘 읽을 수 있을 텐데, 꽥…… 혹시 말이야, 시장까지 갈 줄도 알아, 꽥꽥?”
난 손으로 방향을 가리켰어요.
“저기서 길을 건너 조금만 가면 돼.”
“기, 길은 어떻게 건너는데, 꽥꽥?”
오리가 숨을 죽이고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어요. 난 우리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로 대답했어요.
“신호등을 잘 보고 초록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려. 초록불이 켜진다고 바로 건너면 안 돼. 차가 멈추면 손을 들고 건너는 거야. 오른쪽 왼쪽 잘 살피면서.”
“와, 정말 대단하다, 꽥! 넌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야, 꽥꽥?”
오리가 날개를 파닥이며 꽥꽥거렸어요. 그러다가 내 다리를 끌어안고 목소리를 높였어요.
“너희 선생님은 상을 받아야 돼, 꽥! 널 이렇게 똑똑한 아이로 가르쳤잖아, 꽥꽥!”
기분이 이상했어요. 난 책도 술술 못 읽고, 줄넘기도 다섯 개 이상 못 넘어요. 리코더도 아직 잘 못 불고요. 우리 선생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리코더 부는 법을 가르쳐주었어요. 낮은 도에서 높은 미까지 배웠는데, 아직 높은 레와 미를 잘 못 불었지요. 조금만 더 배우면 잘할 수 있는데, 선생님이 아파서 학교에 못 왔어요.
그런 것도 모르고 교감 선생님은 리코더로 합주를 하자고 했어요. 도도도솔 라라솔 미미레레도…… 세상에나! 높은 도에서 시작했어요. 높은 레와 미까지 불어야 했고요. 이상한 소리를 낼까봐 조심했어요. 그러느라고 얼마나 긴장했는지 몰라요.
“선생님! 지유 아픈가봐요. 얼굴이 빨개요!”
옆에 앉은 호준이가 소리쳤어요. 그 바람에 내 얼굴은 토마토처럼 정말 빨개지고 말았어요.
“빨리 길을 건너자, 꽥. 나 정말 길을 건너보고 싶었어, 꽥꽥!”
“지금은 빨간불이라서 안 돼. 초록불로 바뀌면 건너자.”
“빨간불? 초록불? 지금 빨간불이라고, 꽥꽥?”
“저기 신호등 있잖아! 신호등에 빨간색 안 보여?”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고 말았어요.
“신호등이 어떤 건지는 나도 배워서 안다고, 꽥. 하지만 봐도 봐도 색깔은 잘 모르겠는데 어떡해, 꽥꽥.”
오리가 기운 없이 고개를 푹 숙였어요.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요.
오늘 급식 시간이었어요. 호준이가 나를 또 참견했어요.
“야, 너 청경채 안 먹어? 내가 시범을 보일 테니까 잘 봐. 젓가락으로 이렇게 딱 집어서, 입을 크게 벌리고 쏙 집어넣으면 돼.”
호준이 입안으로 청경채 볶음이 쑥 들어갔어요. 나도 골고루 먹어야 하는 것쯤은 잘 알아요. 하지만 진짜 진짜 청경채는 못 먹겠는데 어떡해요. 호준이가 요란하게 청경채를 씹었어요. 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맛이 느껴졌어요.
“급식을 안 남기고 다 먹은 사람은 선생님이 상으로 사탕을 두 개씩 줄 거야. 청경채는 몸에 좋으니까 사탕 두 개쯤은 먹어도 돼.”
교감 선생님이 사탕 두 개를 들고 나를 기다려 주었어요. 선생님 손끝에서 사탕 봉지가 부스럭거렸지요. 만약 우리 선생님이 옆에 있었다면, 난 선생님만 들리게 작은 소리로 말했을 거예요.
‘선생님, 저 그만 먹고 싶어요.’
그런데 교감 선생님 앞에서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가슴이 점점 빨리 뛰었어요. 배가 콕콕 찌르는 듯 아팠고요. 나는 배를 잡고 몸을 웅크렸어요.
“선생님, 이지유 또 배 아픈가봐요!”
이번에는 먼저 나서준 호준이가 고맙기만 했어요.
교감 선생님이 사탕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말했어요.
“그럼 식판 치우고 보건실에 다녀오자.”
교감 선생님 목소리는 부드러웠어요. 고양이 슬리퍼의 털만큼이나요. 또 교감 선생님은 언제나 친절했지요. 목소리를 크게 하거나 화를 낸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줄넘기 연습 좀더 해야겠다.’
‘소리 내서 읽는 연습을 자꾸 하다보면 술술 잘 읽게 될 거야.’
‘반찬을 골고루 먹어야 키도 쑥쑥 클 텐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점점 작아졌어요.
교감 선생님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아요. 내가 좋아하는 청포도맛 사탕을 들고 있다가 주머니에 집어넣은 것도 괜찮고요. 하지만 이제 우리 교실에는 그만 오면 좋겠어요!
답답했던 마음이 이제야 좀 시원해졌어요.
난 오리를 내려다보았어요. 반짝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럼 신호등 안에 있는 모양을 잘 봐. 사람 모양이 얌전히 서 있지? 저게 빨간불이야. 그리고 걷는 것처럼 다리가 벌어지면 초록불이고.”
오리가 뚫어져라 신호등을 보았어요. 신호가 바뀌고 움직이는 것처럼 사람 모양의 다리가 벌어졌어요.
“초록불이다, 꽥! 차가 멈추면 건너자, 꽥꽥!”
차들이 멈추어 섰어요. 난 손을 들고 오른쪽 왼쪽을 살피면서 길을 건넜어요. 오리도 나를 따라 한쪽 날개를 들었어요. 그리고 뒤뚱뒤뚱 부지런히 길을 건넜지요. 하지만 걸음이 느려서 도중에 빨간불로 바뀌고 말았어요. 그래도 차들이 잘 기다려주었어요.
길을 다 건넌 오리가 차를 향해 고맙다는 듯 날개를 흔들었어요.
“넌 언제 선생님이 가장 좋아, 꽥꽥?”
난 선생님을 떠올려보았어요. 우리 선생님은 잘 웃고, 뭐든 찬찬히 잘 가르쳐줘요. 내 이름을 항상 장난스럽게 불러주고요. 그리고 밥을 정말 맛있게 먹어요. 내가 브로콜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선생님이 내 브로콜리를 쏙 집어먹고 헤헤 웃은 적도 있어요. 그리고 또……
“난 재밌는 노래를 가르쳐줄 때가 가장 좋아, 꽥꽥!”
오리가 날개를 파닥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왕딱지 사러 가게 갔더니 왕딱지 없어 화딱지 났네,”
나도 아는 노래라 조그맣게 따라 불렀어요.
“왕딱지 사러 가게 갔더니 왕딱지 없어 화딱지 났네. 왕딱지 화딱지, 왕딱지 화딱지,”
목소리가 점점 커졌어요. 부르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고요.
“왕딱지 화딱지, 왕딱지 화딱지,”
발음이 꼬이기 시작했어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면서 불렀어요.
“왕딱지 화딱지, 왕딱지 화딱지, 왕딱지 화딱지, 왕왕왕!”
다 부르고 나서야 마음껏 웃었어요. 오리와 난 똑같이 ‘왕왕왕’으로 노래를 끝냈어요. ‘화화화’로 끝낼 수도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더 신나게 웃었어요.
“혹시 선생님 이름이……”
“나리 나리 개나리를 닮은 ‘채나리’ 선생님이지, 꽥꽥!”
이럴 수가요! 오리 입에서 우리 선생님 이름이 튀어나왔어요. 난 내 머리에 꿀밤을 한 대 꽁 먹이고 싶었어요. 왜 오리 선생님은 당연히 오리일 거라고만 생각했을까요? 어서 빨리 선생님을 찾아야 해요. 오리 선생님, 아니 우리 선생님을요!
“선생님이 아파서 학교도 못 왔는데 시장에 갔을까?”
“선생님이 맛있는 걸 먹으러 시장에 갔을 수도 있지, 꽥! 아플 땐 잘 챙겨 먹어야 하니까, 꽥꽥.”
그제야 선생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선생님은 세상에서 참치김밥이 제일 맛있어! 아플 때도 참치김밥 한 줄만 먹으면 기운이 불끈불끈 난다니까!’
어느새 시장 입구였어요. 걸음이 점점 빨라졌어요.
선생님이 정말 시장에 갔을까요?
그럼 곧 불끈불끈 기운이 나고, 내일이면 학교도 갈 수 있겠지요?
“선생님, 꽥꽥!”
오리가 선생님을 부르며 뒤뚱뒤뚱 달려갔어요. 어찌나 빠른지 거의 나는 듯했어요.
시장 안쪽에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어요. 뒤통수 쪽에서 뭔가 ‘반짝’ 했어요. 왕 집게 핀에 달린 큐빅이에요. 그렇다면 우리 선생님이 틀림없어요!
“선생님!”
나도 달렸어요. 이제 보니 뒤쪽이 개운했어요. 더이상 따라오지 않았지요. 이제야 좀 살 것 같았어요.
교문을 나서자 신호등이 초록색 불로 바뀌었어요. 빨리 건너라는 듯 다급하게 깜박였지요. 맞은편을 잠시 건너다보았어요. 곧장 집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공원 놀이터로 향했어요. 거기 가면 내가 좋아하는 시소가 있어요. 시소에 조금만 앉아 있고 싶었어요.
코끼리 시소 한쪽 끝에 앉자마자 강한 바람이 솨 불어왔어요. 나뭇잎들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흔들렸어요. 풀숲도 마구 흔들렸지요. 난 손잡이를 꼭 잡고 풀숲을 바라보았어요. 입을 벌리듯 풀숲이 쩍 벌어졌어요. 그리고 그 안에서 웬 오리 한 마리가 걸어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공원에 여러 번 와보았지만 오리를 본 건 처음이었어요. 오리가 몸을 흔들어 털었어요. 오리 머리 위에 붙어 있던 마른 잎 한 개가 휙 날아와 내 운동화 위에 내려앉았어요. 난 눈동자만 굴려 마른 잎을 보았어요. 그러고는 다시 오리를 보았지요. 오리가 나처럼 등에 가방을 메고 있었어요.
“너 어디 가던 길이니? 꽥꽥?”
난 깜짝 놀라 뒤로 발랑 넘어질 뻔했어요. ‘꽥꽥’ 소리가 어찌나 큰지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였어요.
“그 얼굴은 뭐야, 꽥! 다 큰 것 같은데 설마 아직 말도 못 하는 거야, 꽥꽥?”
오리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어요.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교감 선생님이 나를 빤히 내려다볼 때처럼요.
“답답해서 못 참겠네, 꽥! 누가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꽥꽥.”
“지, 집에 가던 길이야.”
그렇게 대답하자 오리가 부리를 꽉 다물었어요. 그러고는 나를 쌩 지나쳐 가지 뭐예요. 오리가 뒤뚱뒤뚱 부지런히 걸어갔어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았어요.
마음이 섭섭해지려고 했어요. 다시는 오리를 못 볼 테니까요. 그러자 불쑥 용기가 났어요.
“넌 어디 가는데?”
오리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어요. 얼굴이 울적해 보였어요.
“나도 그걸 잘 모르겠단 말이야, 꽥. 찾으러 가긴 가는데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거기 가면 정말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 꽥꽥.”
답답한 오리 마음이 느껴졌어요. 내 마음도 그랬거든요. 기분이 안 좋긴 한데,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단 말이에요.
“내가 도와줄까?”
“정말, 꽥꽥?”
날 올려다보는 오리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였어요. 학원이 반짝 떠올랐지요. 곧 집에 들렀다가 학원에 가야 해요. 엄마가 학원에 늦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물론 나도 늦는 걸 좋아하지 않고요. 하지만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늦을 때가 있나봐요. 오늘처럼 기분이 착 가라앉거나, 오리를 만난 날이라면요.
“그래, 내가 같이 가줄게.”
“고마워, 꽥! 그럼 출발, 꽥꽥!”
오리가 뒤뚱뒤뚱 힘차게 걸어갔어요. 난 오리 뒤를 따라가며 물었어요.
“근데 뭘 찾고 있어?”
“우리 선생님, 꽥꽥!”
“너도 선생님이 있어?”
그러자 오리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당연하지, 꽥! 너희들만 선생님이 있는 게 아니야, 우리 오리들도 선생님이 있다고, 꽥꽥!”
조금 미안해졌어요. 난 오리와 나란히 발걸음을 맞춰 걸었어요.
“근데 왜 밖에서 찾아? 선생님은 학교에서 찾으면 되잖아.”
“그야 선생님이 학교에 없으니까 그렇지, 꽥. 어제, 아니 그저께부터 선생님만 기다렸는데 선생님이 학교에 안 왔어, 꽥. 오늘은 글쎄 학교 문까지 굳게 닫혔지 뭐야, 꽥꽥.”
오리 선생님처럼 우리 선생님도 학교에 안 왔어요. 생각해보니 오늘이 벌써 삼 일째였지요. 하지만 다행히 학교 문은 닫히지 않았어요. 다행인지 아닌지, 우리 선생님 대신 교감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왔고요.
“1, 2교시는 조용히 책을 읽자.”
교감 선생님이 책 수레를 끌고 들어와 말했어요.
“각자 책 한 권씩 가져가볼까?”
아이들이 앞다투어 수레로 달려들었어요.
난 교감 선생님을 가만히 살폈어요. 멀리서는 몇 번 보았는데 이렇게 가까이 보는 건 처음이었어요. 교감 선생님이 움직일 때마다 하얀색 치마가 눈부시게 빛났어요. 야옹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요. 교감 선생님이 아주 귀여운 고양이 슬리퍼를 신고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다른 아이들은 책을 고르느라 바빴어요.
“넌 책 안 가져가니? 마지막에 남은 책은 아주 두껍고 어려운 책일 텐데?”
교감 선생님이 날 가만히 내려다보았어요. 교탁을 보면 자리마다 번호와 이름이 붙어 있어요. 그렇지만 내 이름을 찾아 불러주지 않았어요. 나는 교감 선생님이 궁금한데, 교감 선생님은 내가 안 궁금한 모양이었어요.
오리가 기다란 종이를 펼쳐 들고 보았어요.
“도대체 여기가 어딜까, 꽥꽥? 어제 선생님 자리에서 발견한 건데 아무래도 어떤 장소 같아, 꽥! 그런데 아무리 봐도 어디인지 통 모르겠어, 꽥꽥.”
난 오리 옆에 쪼그려 앉아 그것을 같이 들여다보았어요. 어려운 글자가 몇 개 보였어요. 가슴부터 두근거렸지요. 그런데 잘 보니, 글자 밑에 짝꿍처럼 작은 그림이 하나씩 붙어 있지 뭐예요. 신발이랑 사과도 있고, 크레파스랑 꽈배기도 있고……
“아, 시장이네!”
어릴 때부터 엄마를 따라 시장에 자주 다녔어요. 요즘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시장에 가고요. 난 글자를 더듬더듬 읽어나갔어요.
“신발 백화점, 차, 착즙 과일……”
어려운 글자가 나오면 그림을 보면서 머릿속에 시장을 떠올렸어요.
“화, 황룡 문방구, 뱅글뱅글 꽈배기……”
시장이라면 눈을 감고도 훤했지요.
“공구 철물, 명품 떡집, 금두꺼비 잡화, 떡볶이랑 김밥, 사계절 이불……”
“너……,”
오리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그렇게 안 봤는데 벌써 글을 읽을 줄 알아, 꽥꽥?”
나도 조금 놀랐어요. 어제만 해도 교감 선생님 앞에서 떠듬떠듬 읽다가 개미만큼 작아졌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반대로 우뚝 커진 기분이었어요.
“그치만 술술 읽으려면 아직 멀었는걸.”
“방금도 술술 읽던데 뭘, 꽥꽥! 너 진짜 좋겠다, 꽥! 나도 글을 배우면 너처럼 잘 읽을 수 있을 텐데, 꽥…… 혹시 말이야, 시장까지 갈 줄도 알아, 꽥꽥?”
난 손으로 방향을 가리켰어요.
“저기서 길을 건너 조금만 가면 돼.”
“기, 길은 어떻게 건너는데, 꽥꽥?”
오리가 숨을 죽이고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어요. 난 우리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로 대답했어요.
“신호등을 잘 보고 초록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려. 초록불이 켜진다고 바로 건너면 안 돼. 차가 멈추면 손을 들고 건너는 거야. 오른쪽 왼쪽 잘 살피면서.”
“와, 정말 대단하다, 꽥! 넌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야, 꽥꽥?”
오리가 날개를 파닥이며 꽥꽥거렸어요. 그러다가 내 다리를 끌어안고 목소리를 높였어요.
“너희 선생님은 상을 받아야 돼, 꽥! 널 이렇게 똑똑한 아이로 가르쳤잖아, 꽥꽥!”
기분이 이상했어요. 난 책도 술술 못 읽고, 줄넘기도 다섯 개 이상 못 넘어요. 리코더도 아직 잘 못 불고요. 우리 선생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리코더 부는 법을 가르쳐주었어요. 낮은 도에서 높은 미까지 배웠는데, 아직 높은 레와 미를 잘 못 불었지요. 조금만 더 배우면 잘할 수 있는데, 선생님이 아파서 학교에 못 왔어요.
그런 것도 모르고 교감 선생님은 리코더로 합주를 하자고 했어요. 도도도솔 라라솔 미미레레도…… 세상에나! 높은 도에서 시작했어요. 높은 레와 미까지 불어야 했고요. 이상한 소리를 낼까봐 조심했어요. 그러느라고 얼마나 긴장했는지 몰라요.
“선생님! 지유 아픈가봐요. 얼굴이 빨개요!”
옆에 앉은 호준이가 소리쳤어요. 그 바람에 내 얼굴은 토마토처럼 정말 빨개지고 말았어요.
“빨리 길을 건너자, 꽥. 나 정말 길을 건너보고 싶었어, 꽥꽥!”
“지금은 빨간불이라서 안 돼. 초록불로 바뀌면 건너자.”
“빨간불? 초록불? 지금 빨간불이라고, 꽥꽥?”
“저기 신호등 있잖아! 신호등에 빨간색 안 보여?”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고 말았어요.
“신호등이 어떤 건지는 나도 배워서 안다고, 꽥. 하지만 봐도 봐도 색깔은 잘 모르겠는데 어떡해, 꽥꽥.”
오리가 기운 없이 고개를 푹 숙였어요.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요.
오늘 급식 시간이었어요. 호준이가 나를 또 참견했어요.
“야, 너 청경채 안 먹어? 내가 시범을 보일 테니까 잘 봐. 젓가락으로 이렇게 딱 집어서, 입을 크게 벌리고 쏙 집어넣으면 돼.”
호준이 입안으로 청경채 볶음이 쑥 들어갔어요. 나도 골고루 먹어야 하는 것쯤은 잘 알아요. 하지만 진짜 진짜 청경채는 못 먹겠는데 어떡해요. 호준이가 요란하게 청경채를 씹었어요. 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맛이 느껴졌어요.
“급식을 안 남기고 다 먹은 사람은 선생님이 상으로 사탕을 두 개씩 줄 거야. 청경채는 몸에 좋으니까 사탕 두 개쯤은 먹어도 돼.”
교감 선생님이 사탕 두 개를 들고 나를 기다려 주었어요. 선생님 손끝에서 사탕 봉지가 부스럭거렸지요. 만약 우리 선생님이 옆에 있었다면, 난 선생님만 들리게 작은 소리로 말했을 거예요.
‘선생님, 저 그만 먹고 싶어요.’
그런데 교감 선생님 앞에서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가슴이 점점 빨리 뛰었어요. 배가 콕콕 찌르는 듯 아팠고요. 나는 배를 잡고 몸을 웅크렸어요.
“선생님, 이지유 또 배 아픈가봐요!”
이번에는 먼저 나서준 호준이가 고맙기만 했어요.
교감 선생님이 사탕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말했어요.
“그럼 식판 치우고 보건실에 다녀오자.”
교감 선생님 목소리는 부드러웠어요. 고양이 슬리퍼의 털만큼이나요. 또 교감 선생님은 언제나 친절했지요. 목소리를 크게 하거나 화를 낸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줄넘기 연습 좀더 해야겠다.’
‘소리 내서 읽는 연습을 자꾸 하다보면 술술 잘 읽게 될 거야.’
‘반찬을 골고루 먹어야 키도 쑥쑥 클 텐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점점 작아졌어요.
교감 선생님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아요. 내가 좋아하는 청포도맛 사탕을 들고 있다가 주머니에 집어넣은 것도 괜찮고요. 하지만 이제 우리 교실에는 그만 오면 좋겠어요!
답답했던 마음이 이제야 좀 시원해졌어요.
난 오리를 내려다보았어요. 반짝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럼 신호등 안에 있는 모양을 잘 봐. 사람 모양이 얌전히 서 있지? 저게 빨간불이야. 그리고 걷는 것처럼 다리가 벌어지면 초록불이고.”
오리가 뚫어져라 신호등을 보았어요. 신호가 바뀌고 움직이는 것처럼 사람 모양의 다리가 벌어졌어요.
“초록불이다, 꽥! 차가 멈추면 건너자, 꽥꽥!”
차들이 멈추어 섰어요. 난 손을 들고 오른쪽 왼쪽을 살피면서 길을 건넜어요. 오리도 나를 따라 한쪽 날개를 들었어요. 그리고 뒤뚱뒤뚱 부지런히 길을 건넜지요. 하지만 걸음이 느려서 도중에 빨간불로 바뀌고 말았어요. 그래도 차들이 잘 기다려주었어요.
길을 다 건넌 오리가 차를 향해 고맙다는 듯 날개를 흔들었어요.
“넌 언제 선생님이 가장 좋아, 꽥꽥?”
난 선생님을 떠올려보았어요. 우리 선생님은 잘 웃고, 뭐든 찬찬히 잘 가르쳐줘요. 내 이름을 항상 장난스럽게 불러주고요. 그리고 밥을 정말 맛있게 먹어요. 내가 브로콜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선생님이 내 브로콜리를 쏙 집어먹고 헤헤 웃은 적도 있어요. 그리고 또……
“난 재밌는 노래를 가르쳐줄 때가 가장 좋아, 꽥꽥!”
오리가 날개를 파닥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왕딱지 사러 가게 갔더니 왕딱지 없어 화딱지 났네,”
나도 아는 노래라 조그맣게 따라 불렀어요.
“왕딱지 사러 가게 갔더니 왕딱지 없어 화딱지 났네. 왕딱지 화딱지, 왕딱지 화딱지,”
목소리가 점점 커졌어요. 부르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고요.
“왕딱지 화딱지, 왕딱지 화딱지,”
발음이 꼬이기 시작했어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면서 불렀어요.
“왕딱지 화딱지, 왕딱지 화딱지, 왕딱지 화딱지, 왕왕왕!”
다 부르고 나서야 마음껏 웃었어요. 오리와 난 똑같이 ‘왕왕왕’으로 노래를 끝냈어요. ‘화화화’로 끝낼 수도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더 신나게 웃었어요.
“혹시 선생님 이름이……”
“나리 나리 개나리를 닮은 ‘채나리’ 선생님이지, 꽥꽥!”
이럴 수가요! 오리 입에서 우리 선생님 이름이 튀어나왔어요. 난 내 머리에 꿀밤을 한 대 꽁 먹이고 싶었어요. 왜 오리 선생님은 당연히 오리일 거라고만 생각했을까요? 어서 빨리 선생님을 찾아야 해요. 오리 선생님, 아니 우리 선생님을요!
“선생님이 아파서 학교도 못 왔는데 시장에 갔을까?”
“선생님이 맛있는 걸 먹으러 시장에 갔을 수도 있지, 꽥! 아플 땐 잘 챙겨 먹어야 하니까, 꽥꽥.”
그제야 선생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선생님은 세상에서 참치김밥이 제일 맛있어! 아플 때도 참치김밥 한 줄만 먹으면 기운이 불끈불끈 난다니까!’
어느새 시장 입구였어요. 걸음이 점점 빨라졌어요.
선생님이 정말 시장에 갔을까요?
그럼 곧 불끈불끈 기운이 나고, 내일이면 학교도 갈 수 있겠지요?
“선생님, 꽥꽥!”
오리가 선생님을 부르며 뒤뚱뒤뚱 달려갔어요. 어찌나 빠른지 거의 나는 듯했어요.
시장 안쪽에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어요. 뒤통수 쪽에서 뭔가 ‘반짝’ 했어요. 왕 집게 핀에 달린 큐빅이에요. 그렇다면 우리 선생님이 틀림없어요!
“선생님!”
나도 달렸어요. 이제 보니 뒤쪽이 개운했어요. 더이상 따라오지 않았지요. 이제야 좀 살 것 같았어요.
이소풍
『반쪽짜리 초대장』을 펴내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지은 책으로 『호랑이 태권도장』과 『모두가 친구』가 있습니다.
2025/02/05
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