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선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저는 그림책 편집자인데요, 그림책 편집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림책 편집자는 한 권의 그림책이 작가로부터 독자에게 잘 가닿을 수 있도록 힘쓰는 사람입니다. 아직 책이 되지 않은 이야기(그림책의 경우 더미라고 부르는 형태)를 보고 이 이야기가 책이 된다면 어떤 모양새가 좋을지 그려봅니다. 작가의 마음에 풍랑이 일면 작품이 산으로 가지 않도록 키를 단단히 잡는 키잡이 역할을 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구멍을 발견하면 수리공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을 만들면서 기쁜 순간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고심하던 장면이 작가를 통해서 편집자인 제가 머릿속으로 그린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있고 아름답게 구현될 때입니다. {그림책=선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이런 순간들을 마주해왔는데, 이번 사연은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스스로를 ‘경단녀 10년차’라고 소개한 바다님은 두 자녀의 엄마입니다. “그동안 아이 둘을 낳아서 키우며 살았지만 앞으로 전업주부로 살기는 싫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10년 동안 사회와 격리된 채 육아와 가사노동을 하며 살다보니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말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육아의 경험이 없는 저로서는, 바다님께 가닿을 그림책 선물을 잘 고를 수 있을지 걱정이 많이 됐습니다. 다행히 제게는 적절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재주가 있어, 사연을 함께 고민해주실 분들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첫번째로 저를 도와주신 박민영 선생님과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된 인연인데요, 직접 뵌 적은 없지만 그림책에 관해 깊은 내공이 느껴져 이번 프로젝트를 함께 해달라고 부탁드렸더니, 제 예상보다 훨씬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현재 멕시코에 거주하고 계신 박민영 선생님의 편지입니다.


{그림책=선물} 봉투를 열면…… 


바다님께 보내는 세 사람의 편지


    바다님의 사연을 읽고 처음 생각난 그림책은 『민들레는 민들레』(김장성 글, 오현경 그림, 이야기꽃, 2014)였습니다. 저 자신이 경단녀가 되었을 때 힘이 되어주었던 그림책이었거든요. 그런데 사연을 좀더 들여다보니 『바로 나처럼』(마리 홀 에츠 지음, 이상희 옮김, 비룡소, 2002)을 권해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어요. 제가 이끌고 있는 이곳(멕시코) 그림책 모임의 엄마들―한국에서보다 더 자아를 잃어가는 아픔에 시달리는 분들―이 사랑했던 책이기도 합니다.
   저는 원래 음악을 전공했습니다. 백일이 될까 말까한 아기를 생전 처음 보는 베이비시터 손에 맡기고 일을 나갔던 독한 엄마가 접니다. 그렇게 악착같이 일을 했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내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집안 사정으로 어이없이 일을 그만두어야 했어요. 그때 마음이 너무나 허해서 자격증을 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우리 아이나 가르쳐보자고 시작했던 게 한 걸음씩 나아가다가 구청 쪽과 연결되어서 이런저런 많은 일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신나게 일하고 다니던 어느 날, 저는 난데없이 또 한번 경단녀가 됩니다. 남편이 멕시코에서 일하게 되었거든요. 충격은 처음보다 더 컸습니다. 이젠 도저히 새로운 어딘가에서 일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제 나이가 너무 슬프더군요. 하지만 또다시―비록 제가 상상했던 방식은 아니지만―어떤 길이 열렸고 저는 소박하게나마 새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제 이야기를 구구절절 길게 늘어놓은 건 좋아하는 일에 더 몰두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하지 마시고 ‘내가 좋아하는 것’에 먼저 집중해보시면 어떨까요. 저의 경우에는 제일 첫 단추가 그림책이었죠. 그림책을 좋아해서 글쓰기 수업을 들었고, 그게 제 인생의 두번째 마중물이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조심스레 권해봅니다. 좋아하는 일 쪽을 더 파고들어가 보시라고요.
   님이 님인 걸 증명하느라고 너무 애쓰지 마세요. 님이 하는 일이 님을 님이라고 증명해주는 건 아닙니다.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당신은 당신. ‘바로 나처럼’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님도, 님의 아이들도 모두 다 행복해집니다.
   뚜벅뚜벅 걸어가면서 충만함을 하루하루 느끼며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나처럼’.



   두번째로 사연을 함께 고민해주신 분은 이마주 출판사의 문주선 편집장님입니다. 그림책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이라, 바다님 마음에 가닿았으면 하는 그림책을 여러 권 골라주셨습니다.



   사연의 주인공께 어떤 그림책을 추천해드리면 좋을까 오랜만에 깊게 생각해봤어요. 일하는 엄마인 제가 ‘전업맘’들의 상황과 처지와 마음을 100퍼센트 이해한다는 건 거짓말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며칠 아이 방학 때문에 일주일간 비자발적 휴가를 내고 한시적 전업맘으로 지내보니 바다님의 사연이 조금은 더 가깝고 깊게 느껴졌습니다.
   첫번째로 떠올린 그림책은 『연남천 풀다발』(전소영 지음, 달그림, 2018)입니다. 이 그림책에 나오는 풀들은 화려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보자마자 이름을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른 것은 마른 것대로, 시든 것은 시든 것대로 아름답더라고요.
   늘 반쯤 정신 나간 채로 일과 육아 어느 것도 잘 하지 못하는 제게, 아이 낳고 지난 6년간은 안개 속이었습니다. 집과 일터에 뿌리는 내렸지만 화려한 꽃 한 송이, 탐스러운 열매 하나가 없구나 싶어 늘 죄책감과 자책감을 이고 지고 살았는데, 이 그림책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그냥 이 시들고 마른 모습, 허둥대고 모자란 모습 그대로도 좋은 거구나, 하고요.
   두번째로 떠올린 책은 『나오니까 좋다』(김중석 지음, 사계절, 2018)입니다. 바다님이 여행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이 책을 골라봤습니다. 이젠 동네 공원 피크닉도 어렵고 두렵고 귀찮은 일이 되지 않으셨나요?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 그림책은 여행가지 않아도 여행한 듯한 기분을 완벽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멀고 거창하고 힘든 여행보다 가깝고 소박하고 쉬운 여행에서 더 큰 위로를 받게 되더라고요.
   세번째로 떠올린 책은 『고사리 가방』(김성라 지음, 사계절, 2018)입니다. 화려한 도시와 빠른 도시 사람들을 동경했던 이 책 주인공은 도시와 사람들에게 지쳐 고향으로 잠시 피신합니다. 어쩌면 바다님의 고민 또한 내면의 소리 때문일 수도, 또 외부의 불빛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이렇게 살림하고 아이들과 함께 하루 종일 치여 있는데, 나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 혹은 다른 엄마들은 저렇게 자신의 길을 가는구나, 이렇게요. 저도 그랬거든요. 다른 전업맘들의 삶이 얼마나 부럽고 멋져 보이던지요. 바다님만의 ‘고사리’와 ‘산벚나무’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네번째 책은 『숲으로 간 코끼리』(하재경 지음, 보림, 2007)입니다. 저는 그림책을 볼 때 가끔 제 자신을 비롯한 ‘이 세상의 엄마들’을 떠올립니다. 술도 좋아하고 여행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던 여자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부터 그 모든 걸 싹 접고는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오로지 ‘아이 엄마’라는 역할에만 충실해야 하잖아요. 잊고 지낸 본성을 일깨워줄 요정 같은 존재가 제게는 바로 그림책이었습니다. 누구에게는 영화가, 술이, 여행이, 바느질이, 운동이 요정의 역할을 해주겠지요. 가끔 혹은 자주, 요정을 따라 진흙 목욕하기를 추천드립니다.
   『밥, 춤』(정인하 지음, 고래뱃속, 2017)과 『빅 마마 세상을 만들다』(필리스 루트 글, 헬렌 옥슨버리 그림, 이상희 옮김, 비룡소, 2004)를 덧붙여 추천합니다. 가사와 육아의 위대함을 이야기해주는 그림책들입니다. 두 그림책을 통해 바다님이 얼마나 중한 일을 하고 계신지 자부심을 느끼셨으면 합니다. 저도 가끔 지칠 때마다 그러거든요. 암요, 우리는 ‘가이아이자, 마고할미’입니다!



   문주선 편집장님은 추천한 여러 권의 그림책 중 『연남천 풀다발』이 바다님께 전해지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두 분의 진심 어린 추천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제가 덧붙여 고른 책은 『이게 정말 천국일까?』(요시타케 신스케 지음, 고향옥 옮김, 주니어김영사, 2016)입니다. 이 작품에서 할아버지가 언젠가 가게 될 자신만의 천국을 그려본 것처럼, 지금 당장엔 실현할 수 없다고 해도 바다님이 가닿고 싶은 자신만의 세계를, 요시타케 신스케의 재기와 유머에 기대어 최대한 즐겁게, 활기차게 그려보시면 어떨까 했습니다. 이 작품과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던 책이 『그 나무가 웃는다』(손연자 글, 윤미숙 그림, 시공주니어, 2016)인데요, 담고 있는 이야기도, 자수로 표현된 그림도 적당히 쓸쓸하고 아름다워서, 한 번씩 꺼내어 쓰다듬어보는 책이거든요.
   우리가 함께 고른 선물을 어떻게 보실지 궁금했는데, 바다님은 그림책 선물과 편지를 반겨주셨습니다. 선물을 받은 소감을 꼼꼼히 적어 보내주셔서 반갑고 감사했습니다. 바다님이 보내주신 답장입니다.

바다님에게 가닿은 그림책 선물


   오늘 드디어 그림책을 받았어요! 어떤 그림책이 들어 있을까 무척 궁금했지만 왠지 바로 뜯어보고 싶지가 않았어요. 설렘과 기대와 호기심, 그리고 흥분. 그런 기분들을 더 오래 느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오히려 우리 아이들이 배달된 택배를 보고는 제가 말릴 새도 없이 가위로 개봉을 했네요.
   일단 눈으로 빠르게 그림책들의 제목과 표지를 훑어보았죠. 그리고 고운 종이에 쓰인 편지를 보았어요.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감사 이상의 감사, 감동 이상의 감동. 이런 상투적인 말들로는 부족해요. 오롯이 ‘나’를 위한 위로와 응원이 담긴 그림책 선물과 진심이 담긴 편지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울림으로 저를 채워주었어요.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바로 나처럼』은 몇 년 전 도서관에서 빌려와 아이들에게 읽어줬던 책이에요. 하지만 그때는 아이가 동물 흉내를 내는 이야기로만 읽혔는데 오늘 다시 보니 그런 단순한 내용이 아니었네요. 나답게 살아가는 게 무얼까 조용히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에 먼저 집중해보라는 조언이 제 가슴 속에 콕 박혔습니다.
   『이게 정말 천국일까?』는 제가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이랍니다.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요시타케 신스케의 책들을 저도 무척 좋아해요. 즐겁게 책을 읽고 나면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품고 있는 작품이란 생각도 들었고요. 취향저격, 제겐 이 책이 그랬답니다.
   보내주신 책들이 모두 좋아서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한 권을 고르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고심 끝에 제가 고른 한 권은 『연남천 풀다발』입니다. 누군가에게 꽃다발을 받아본 게 언제인지 생각도 나지 않아요. 『연남천 풀다발』은 꽃다발을 한 아름 받아든 것 같았어요. 아름다운 정원을 받은 것 같기도 했어요. 숲속을 거닐다 온 것 같기도 했고요. 꽃다발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더 은은한 향기가 오래오래 남았어요. 잊지 않을게요. 문주선 선생님이 마음으로 전해주신 풀다발의 의미를, 그 가슴 따뜻한 응원을요.
   저를 위해 정성껏 골라주신 책들은 모두 꼭 찾아서 읽어볼게요. 감사한 마음 되새기며 읽을게요.



   답장을 받은 후 저는 바다님에게 이미 가지고 계신 『이게 정말 천국일까?』를 다른 분에게 선물해보시라고 권했습니다. 저는 {그림책=선물} 프로젝트를 통해 선물을 받는 것만큼이나 주는 것 또한 큰 기쁨이라는 것을 확인했거든요.
   책 만드는 일을 하다보면 가끔 “네 일도 아닌데 내 일처럼 일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속으로 대답합니다. ‘이건 내 일입니다.’
   책은 작가의 것이고,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도 작가의 이름이지만, 판권지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이름이 실린 사람들, 편집자, 디자이너, 마케터, 관리부…… 모두에게 한 권의 책은 ‘내 일’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눈에 띄는 일을 하고 주목받는 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누군가와 나의 삶을 비교하는 순간, 균형을 잃고 어디론가 곤두박질치는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한순간의 ‘기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심호흡을 하고, 내 심장의 소리를 듣고, 두 발로 단단히 내 자리를 지키고 설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위모씨

그림책을 좋아하고 그림책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고 싶어 안달하는 경향이 있어 좋아하는 그림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www.facebook.com/we.are.all.children

2018/09/25
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