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우편 프로젝트
2화 그의 편지談
3월의 일반우편, 김제형
김제형의 노랫말에는 진지한 고민이 묻어 있다. 조심스럽게 선택한 단어들과 신중하게 만들어진 가사를 들을 때면, 창작자로서 김제형이 지니고 있는 책임감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김제형의 노래 너머 ‘곡예’1)가 궁금했다. 빈 편지지 위에서 그는 어떤 곡예를 펼칠까?
Q.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뮤지션 김제형입니다. 작년에 첫 정식 앨범을 발매했고 근근이 공연을 이어가며 현재는 지속적으로 어떻게 먹고살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Q. ‘편지’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지, 어떤 느낌이 드는지 궁금합니다.
돌이켜보면 편지를 자주 써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글씨를 쓴다는 감각은 저에게 꽤 낯선 감각이에요. 그래서인지 글을 쓸 때도 손으로 쓰기보다는 타이핑을 주로 하고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나 감정상태가 충분히 녹아 있는 편지를 받았던 기억들은 무척 좋았습니다. 편지지의 물성과 편지지를 고르는 그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타이핑으로는 느낄 수 없는 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고요.
매년 고마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는 친하지 않아서 그 편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말이죠.(웃음) 이처럼 편지라는 것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감성이 오늘날에는 많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도 하고요.
Q. 제형님의 기억 속 첫번째 편지 혹은 가장 기억에 남는 편지는 무엇인가요?
기억에 남는 편지가 있어요. 여덟 살 때 옆집에 살던 친구가 있었어요. 아주 친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별명을 부르고 노는 정도였는데요. 그 친구가 어느 날 이사를 갔어요. 5년이 지난 후에, 그러니까 6학년이 됐을 때, 저희 집에 편지 한 통이 왔어요. 바로 그 친구가 저에게 보낸 편지였어요. 읽어보니 저를 좋아한다는 내용이었는데, ‘내가 몇날 몇시 초등학교 정글짐에 있을 테니 마음에 들면 나와라’ 하고 적혀 있었어요. 그 편지를 받고 무서움을 느꼈던 것 같아요. 꽤 오랜 시간 동안 제가 연애감정을 좀 낯설어했거든요. 그래서 그걸 어딘가에 버리고 하교를 하는데, 학교에서 보지 못했던 무리가 정글짐에 와 있더라고요. 그곳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집으로 곧장 향했던 기억이 있어요. 왜 무서웠을까 생각해봤더니, 그 친구가 이사를 가던 날에 저희 집 우편함에 ‘김제형 코딱지’라고 낙서를 하고 떠났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6학년이 되어서는 좋아한다고 말을 하니, 좋아한다는 감각이 무언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굉장히 못된 아이였네요.(웃음)
Q. ‘3월의 일반우편’은 어떤 내용인가요? 제형님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쓰셨을까 궁금하네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어떤 행동을 할 때 확신에 차서 실수도 실수인 줄 모르고 해버린 경우가 많았어요. 돌아보면 어떻게 그렇게 자신감에 차 있었을까 싶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확신할 수 있는 게 없고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하지만 자신이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움만큼 작품에 대한 확신도 중요하더군요. ‘조심’과 ‘자신감’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게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해요. ‘3월의 일반우편’은 조심만 늘고 확신은 사라져가는 현재의 제 생각들과 닿아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오전에 주로 홍대 앞 도서관에 가서 신문과 주간지를 읽으며 하루를 보내요. 기사 속 사건과 현안들을 보며, 어려운 지점들이 많은 것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과 확신 속에서 종종 거대하고 치밀한 방식으로 약자를 향해 폭력이 행사되는 것을 보곤 하거든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저 역시도 윤리적 기준들이 빠르게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제 생각 속 기준들을 잘 세우고 가다듬어야 누군가를 올바르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월의 일반우편’에서는 이처럼 제 자신이 일상을 느리게 세워나가면서 만나게 되는 도시의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넌지시 이야기합니다. 제가 직면하고 있는 혹은 저도 모르게 지니고 있는 권력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가운데서, 저는 세상의 움직임을 천천히 바라보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애인과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배워요. 그렇게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들이 편지의 내용 속에 슬며시 녹아 있습니다.
Q. 일반우편 프로젝트의 주제가 ‘느리고 복잡한’인데요. 제형님께 느리고 복잡한 일상은 무엇인가요?
요즘 시작한 일상이 하나 있어요. 주변에 채식을 하는 친구들이 한 명씩 생기면서, 저도 제 식생활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육식을 끊겠다!’까지는 아직 못하고,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최근 같이 도서관에 만나서 공부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와 우리 일주일에 한 번 비건 식당을 가보자는 얘기를 했어요. 요즘에는 별로 먹을 것에 대한 집착, 생각이 많이 없어졌거든요. ‘이 기회에 채식에 대해 집중을 해보자’ ‘자세하게 먹어보자’는 생각으로 채식을 조금씩 시도해보고 있어요.
하지만 문화적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상권이 가장 활발히 형성되어 있는 서울에서도 채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더라고요. 식생활이라는 게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다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관습 하에 우리의 식탁, 골목의 식당들이 형성되어온 거니까요. 저는 채식이 ‘느리고 복잡한’ 것과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재료부터 요리, 윤리적인 문제까지 느리고 복잡한 사고를 하게 만드니까요. 선택적 채식을 시작했다는 게 저의 느리고 복잡한 일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Q. 제형님의 글, 노랫말이 ‘조심스러운 정확함’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이유는 제형님의 글이나 노래의 가사를 들었을 때, 누군가에게 폭력적으로 들리거나,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을 쓰지 않고자 하는 노력을 느꼈거든요. 만약 그러하다면, 제형님이 어떤 글을 쓰거나, 가사를 적을 때 꼭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알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과찬이라고 먼저 써야겠네요.(웃음) 일단 누군가가 제 노래를 들었을 때, 배제되는 기분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의도하지 않아도 저도 모르게 소외를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계속 공부하고 있어요. 가령 최근엔 한국사회에서 남성으로 태어나 자라난 제가 “예쁘다”라고 말하는 것의 폭력성을 실감했어요. 그래서 그런 말의 의미 너머에 있는 것들을 생각할 때, 대체할 말을 찾거나 말을 줄이는 방식을 채택하는 편입니다. 이처럼 내가 하고 있는 말이 어떤 의미로 읽힐지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사실 멜로디가 묻은 가사의 효과라고 해야 할까요. 노래 속 가사는 책으로 활자를 읽는 것보다 흘려듣게 되는 경우가 있지만, 저는 생산자이기에 그런 다양한 것들을 더 염두에 두고 글을 써요. 하지만 이런 것들을 고민하면서도 제가 추구하는 색이나 명랑함을 잃지 않으려 하는데, 그게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Q. 제형님이 주로 쓰는 글은 노래의 가사가 아닐까 싶어요. 노래의 가사라는 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결국 멜로디와의 만남을 염두에 두고 쓰이는 글인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또 운율과 반복이 있는 것이 꼭 시와 닮아 있기도 하고요. 만약 제형님에게 노래의 가사를 적는 일이 다른 글을 쓸 때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지, 또 글에 멜로디가 입혀졌을 때의 느낌은 어떠한지 이야기해주세요.
멜로디를 먼저 생각하고, 가사를 쓰는 것과 가사를 먼저 생각하고 멜로디를 얹히는 것은 그때그때 순서가 바뀌곤 하는 것 같아요. 말씀 주신 것처럼 많이들 시를 쓰는 일이 노랫말을 만드는 일과 비슷하다고들 하잖아요. 그래서 저도 시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시를 좋아하지도 않았던 때였는데, 저도 막연히 시를 적는 일과 가사를 적는 일이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갔던 것 같아요. 하지만 막상 마주해보니 시와 가사는 전혀 다르더군요. 하지만 그 시간들이 제게 가사를 쓰는 과정을 돌아보게 만들어주었던 것도 같고요.
요즘은 제 나름의 글쓰기를 가사를 적는 일에서 조금 더 안정적으로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만약 제가 다른 글을 써야 했다면 자신감이 떨어졌을 텐데, 제게 가사를 쓰는 일은 그보다 제게 더 잘 맞는 것 같거든요. 저는 노래를 다른 글을 쓸 때 보다 조금 들떠 있는, 노동에서 살짝 멀어져 있는 느낌이 들 때 쓰는 편이에요. 그래서인지 작사를 하는 것이 더욱 제게 재미있고 편안해요. 하지만 다음 앨범을 쓸 때는 중의성 등의 장치를 넣고 보다 포괄성을 부여해서 곡을 써볼까 생각해요. 지난 앨범 ‘곡예’를 발매하고 돌아보니 조금 더 다른 식의 글쓰기를 이어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는 가사를 쓸 때 말의 전달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노래를 만드는 분들 중에는 의미 없는 배열들로 의미를 구축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저는 오히려 그런 작업을 못하는 사람이더라고요. 요즘은 작사라는 것이 내 나름의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말의 옷을 찾는 과정’인 것 같다고 생각해요.
Q. 제형님의 노래 중엔 꼭 편지 같은 곡들이 있어요. 〈빨개지는 사람〉도 그렇고, 〈그건 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도 그렇고요. 혹시 편지가 노래가 된 경험은 없으신지, 만약 없으시다면 누군가를 떠올리며 편지 형식으로 가사를 적은 적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편지로 곡을 만든 직접적인 경우는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곡을 쓸 때도 편지를 쓸 때처럼 ‘거짓말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을 갖고 써요. 편지와 가사 모두 제 마음에 있는 얘기들만 과장하지 않고 담아서 써야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슷한 지점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말씀 주신 <그건 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은 특정인을 생각하고 쓴 가사이고, <빨개지는 사람> 같은 경우는 특정인은 아니에요. 아무래도 특정인을 생각하며 쓴 경우에는 편지와 많이 닮아 있겠죠.
Q. ‘3월의 일반우편’이 어떤 이들에게 도착하기를 바라시나요? 그리고 편지를 받아본 이들에게 편지를 읽으며 함께 들을 노래를 추천해주신다면 어떤 곡이 있을까요?
제가 소개하고 싶은 곡은 Randy Newman의 〈you've got a friend in me〉입니다. 이 노래를 들을 때 왜 꼭 울컥하는지 모르겠어요. 최근에는 노래를 많이 듣지 않고 있는데, 이 노래는 듣고 싶은 생각이 자주 나네요.
월간비둘기
월간비둘기는 손 편지 정기구독 프로젝트입니다. 정찬처럼 자리를 잡고 먹어야 하는 긴 글 덩어리 말고, 빵 쪼가리처럼 뜯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편지 한 장을 써서 띄웁니다. 그리고 우편함 속 전기세 고지서, 백화점 전단지, 예비군 소집 통지서, 슈퍼마켓 광고지 사이에서 우연히 사람이 쓴 편지를 발견했을 때의 작은 희열을 아낍니다.
2018/03/27
4호
- 1
- ‘곡예’는 김제형의 1집 EP앨범의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