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여태 말 안 했네. <로마의 휴일>.”
   “그건 쉽지. 윌리엄 와일러.”
   나는 단체 채팅방을 보면서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치 저녁 설거지 내기 게임은 9시까지도 끝나지 않을 기세였다. 9시까지 끝나지 않으면 무승부였다. 무승부가 되면 설거지는 물론 게임도 내일로 미뤄진다. 저녁 설거지가 다음날 저녁까지 미뤄지는 일이야 우리 집에선 종종 있는 일이다. 그건 대수롭지 않다. 하지만 어제치 저녁 설거짓거리까지도 아직 싱크대에 고스란히 쌓여있다. 오늘도 무승부라면······ 맙소사. 내일은 사흘치 설거지가 쌓여 있을 거라는 말이다. 그러면 엄마는 또 넌지시 ‘우리 딸이 설거지 한 번 할 때도 안 됐어?’ 하고 내게 눈치를 주겠지. 그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엔 아빠의 공격 차례였다.
   “좋아, <월-E>.”
   “고전 영화에서 갑자기 애니메이션으로 건너뛰는 거야? 음…… 맞아, 앤드류 스탠튼!”
   엄마는 유자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대답했다. 저녁 설거지를 가지고 가끔 내기를 하는 엄마 아빠 이야기야 흔해빠졌다. 영은이네도 그렇다고 했다.
   “우리 엄마 아빠도 설거지 가지고 내기 자주 해. 처음엔 오목으로 하다가 이제 새로 나온 테트리스로 하잖아. 덕분에 새 게임기가 생겨서 나야 좋지만.”
   그래, 오목이나 테트리스는 괜찮다. 솔직히 구경하는 재미도 있으니까. 하지만 영화 제목을 대고 감독을 맞추는 게임을 몇 시간 째 하는 엄마 아빠는 대한민국에 우리 집밖엔 없을 거다. 게다가 나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고전 영화가 대부분이다. 내 속도 모르고 이번엔 엄마의 공격 차례였다.
   “<중앙역>.”
   “중앙역? 99년 아카데미 후보작?”
   아빠의 질문에 엄마는 큰 인심이라도 쓰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의 눈빛이 초초하게 변했다. 그 영화를 아빠가 모를 리가 없다. 지금 감독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 뿐이다. 엄마는 벌써 승리를 확신한 미소로 유자차를 마셨다. 후르릅 하는 소리를 엄청 크게 내기까지 했다. 그건 아빠를 약 올리려는 엄마의 속셈이었다.
   “우리 씨네필 선생님 어디 가셨나.”
   “잠깐만 기다려봐,”
   “다섯 세겠습니다. 다섯.”
   “아 감독 얼굴은 떠오르는데 이름이…… 이름이……”
   아빠의 애절한 표정에도 엄마는 단호하게 엄지손가락을 접었다.
   “넷.”
   “배우들 이름도 다 생각나는데……”
   아빠가 머리를 싸매고 있자 엄마가 나를 향해 몰래 윙크를 했다. 그럼 그렇지. 나는 폰으로 보고 있던 단체채팅방 창을 내리고 영화 평점 사이트 즐겨찾기 아이콘을 터치했다. 엄마는 의기양양하게 검지를 접었다.
   “셋.”
   끙끙 앓는 아빠는 내가 등 뒤에 서 있는다는 사실도 아직 모르는 눈치다. 실은 올해 내내 모르고 있다. 엄마는 ‘중.앙.역’ 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사이트에서 중앙역을 검색하자 브라질 영화 한 편밖에 없었다. 제작진과 출연진의 목록에서 감독의 사진과 이름을 찾아 확대했다. 엄마는 중지를 접었다.
   “두~울.”
   엄마의 약 올리는 말투에 아빠는 눈까지 비비며 고민했다. 미안해, 아빠. 하지만 누군가는 설거지를 해야 하잖아. 난 엄마를 향해 폰 화면을 들었다. 정답을 확인한 엄마는 어떠한 미동도 없었다. 역시 아빠를 일 년째 속이고 있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엄마는 이제 약지까지 접었다.
   “하나.”
   아빠. 미안해. 하지만 엄마도 미안해할 거야. 주말엔 아빠가 찜만 해뒀던 게임 하나 사라고 할지도 몰라. 엄마는 이제 마지막 남은 새끼손가락까지 마저 접었다.
   “땡!”
   엄마는 두 팔을 높이 들고 승리를 만끽했다. 아빠는 어깨를 한번 으쓱할 뿐이었다. 그래서 감독이 누구냐는 뜻이었다. 이건 정말로 궁금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월터 살레스잖아.”
   아빠는 이제 서야 생각이 났다는 듯 박수를 쳤다. 엄마도 그러했지만 아빠도 패배는 언제나 시원하게 인정했다.
   “아아. <중앙역> 걸작이지, 아무렴. 그렇지, 그럼.”
   아빠는 고무장갑을 끼면서도 그 영화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 영화 엔딩에서 눈물이 한 바가지가 나왔다는 말에 엄마는 맞장구를 쳐줬다. 씨네필이라 불리는 영화 팬들은 결혼을 해도 다 이렇게 사는 걸까? 친구 부모님 중 씨네필이 없어서 확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은이가 쿵쿵 소리를 내면서 걸어왔다. 속상한 일이 있다는 뜻이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를 속상하게 했을까?
   “오늘은 또 무슨 일이죠? 윤속상씨.”
   영은이는 빌려간 책을 내려놓으며 큰일 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말이야, 주은아, 영주도 멜론 우유 신청했대. 우리 어떡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아뿔싸 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요즘 우리 반에 유행 중인 ‘우유 친구’ 때문이다. 우유 친구는 서로 다른 맛의 우유 급식을 신청한 아이들끼리 매일 반반씩 나눠 먹는 사이를 말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매달 초 새로운 우유 친구를 만들어서 우유를 나눠 마시고 있다. 지난달부터 영은이는 초코 우유를 계속 신청했고 나는 멜론 우유를 계속 신청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지난달부터 우유 친구를 먹고 있었다. 무려 두 달째 우유 친구란 말이다. 게다가 우리 이름에 모두 은 자가 들어가는 것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영은이랑은 원래 서로 좋아하는 친구로 정해진 운명인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오늘도 우유 신청을 새로 받는데 우리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영주가 영은이에게 다가와서는 나랑 우유 친구가 맞는지, 무슨 맛을 바꿔 먹는지도 물어봤다고 한다. 그리곤 영주도 멜론 우유를 신청했다고 하니 영은이가 이렇게 달려 온 것이다.
   “난 아직 영주랑 어색하단 말이야. 그런데 나랑 우유 친구 먹자고 이러는 걸까? 너랑 우유 친구라고 했는데……”
   영은이는 내 귀에 바싹 붙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진짜 안절부절 중인 건 나였다. 영은이는 우리 반의 반장인데다가 인기도 많다. 나만 윤속상씨라고 놀려서 그렇지 다른 친구의 속상한 일에 공감도 잘해줘서 모두 윤공감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어디에 갔나 싶으면 나는 아직 몇 마디 나눠 본 적 없는 아이 옆에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언가에 또 공감을 해주고 있었다. 요즘 들어 영은이와 자주 어울리지 못한 것에 마음이 쓰였다. 이게 다 요즘 내 정신을 쏙 빼놓은 단체 채팅방 때문이다.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들’이라는 방인데 정말로 공룡 이야기로 시작해 공룡 이야기로 끝나는 방이다. 대부분 우리 학교 아이들 같은데 모두 본명이 아닌 별명을 쓰고 있으니 서로 정체를 알 수도 없다, 하지만 학교 뒷담 같은 건 없이 오로지 공룡 이야기만 하니까 마음 편히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 방에서 더 재밌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선 책도 더 찾아보고 다큐멘터리도 놓치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영은이에게 조금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같이 문구점 구경 갔던 때가 언제더라. 그런데 오늘 영은이에게 영주가 우유 친구가 누군지 물어보고 멜론 우유를 신청했다니. 둘 다 이름에 영 자가 있는 것도 신경 쓰인다. 정말 큰일났다. 영은이가 돌려준 책 표지에 그려진 트리케라톱스 캐릭터가 내 속도 모르고 활짝 웃고 있었다. 이 공룡의 이름은 세 개의 뿔을 가진 얼굴이란 뜻이지? 이거 삼각관계 시작인 걸까?

   “이겼다!”
   오늘은 아빠가 설거지 내기에서 이겼다. 내가 거실 바닥에 힘없이 엎드려 있는 바람에 엄마는 반칙을 할 수 없었다. 지금 머릿속에선 나를 잊고 영주랑 더 친해진 영은이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과학실험대회 단체전에서 우승도 한 영주다. 그 우승 덕분에 과학 채널과 인터뷰도 하고 잡지에 사진도 실렸다. 사진 속 아이들 중에서도 영주가 가운데에 있었다, 예약만 받는다는 비싼 미용실에서 만져줬다는 머리가 눈에 띄게 예뻤다. 아이돌 그룹의 리더 같이 보이기도 했다. 공부 잘하는 반장 영은이와 과학실험대회 우승에 빛나는 영주가 우유 친구라면 정말 잘 어울리는 한쌍일 것이다. 내가 봐도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내일 영은이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주은아 미안해. 너랑은 그동안 우유 친구 했었잖아. 이제부턴 영주랑 우유 친구 할게. 괜찮지?”
   우리 반의 모든 아이들이 잘 됐다고 박수를 쳐줄지도 모른다. 내가 혼자서 슬픈 상상에 빠져 있으니 어느새 다가온 아빠가 날 흔들었다. 머리맡에 대충 던져둔 안경까지 씌워주면서 나를 일으켰다.
   “우리 딸! 오랜만에 아빠랑 아이스크림 사러 가자.”

   “멜론 맛, 무지개 맛, 바나나 맛으로 담아 주세요.”
   아빠는 내게 묻지도 않고 멜론 맛을 주문했다. 물론 내가 멜론 맛 아이스크림만 먹는 건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아빠는 내가 멜론 맛을 좋아하고 엄마는 무지개 맛을 좋아하는 걸 언제나 잊지 않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가게의 벽에는 새로 나온 아이스크림 광고가 붙어있었다.‘변함없이 좋아하는 마음을 전해주세요!’
   분홍색 폰트가 유치하지만 우습지는 않았다. 겨우 우유 친구 하나 때문에 저녁 내내 마음을 졸이는 바보에게 오히려 필요한 말일지도 모른다. 영은이에게 변함없이 친하게 지내자고 말해야 할까? 영주랑 우유 친구 먹지 말라고 말해야 할까? 포장된 아이스크림 통을 받고 집으로 가는 길, 아빠의 손을 힘을 줘서 잡으며 물었다.
   “아빠, 변함없이 좋아하는 마음이 어떤 거야?”
   “음, 엄마랑 아빠랑 설거지 내기할 때, 엄마가 주은이에게 몰래 신호를 보내서 답을 알아내도 모른 척해주는 거?”
   난 깜짝 놀랐지만 아빠는 오히려 날 놀렸다.
   “이런! 아빠 뒤에 그렇게 앉아 있으면 맞은편 베란다에 다 비쳐. 그것도 몰랐지?”
   그럼. 그렇지. 엄마가 반칙을 쓰기 이전에 아빠가 알면서도 져주는 것이었다. 이젠 아빠가 물어볼 차례였다.
   “그럼. 이번엔 아빠의 공격. 요즘 폰으로 무언가를 유심히 보면서 웃기도 하고 그러던데 뭘 그렇게 보는 거야?”
   “나쁜 거 아니에요.”
   “의심해서 물어보는 거 아니야. 재밌어하는 표정이니까 물어보는 거지.”
   “그게……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들이라는 단체 채팅방이야. 만날 공룡 이야기만 해.”
   “그렇구나.”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고 있었다는 표정에 나는 조금 더 말하고 싶어졌다.
   “거기서도 설거지 내기 게임 같은 거 해. 누군가 공룡 이름을 말하면 그 이름의 뜻을 말하는 거지. 예를 들어 트리케라톱스라고 누가 말하면 세 개의 뿔을 가진 얼굴이라고 빨리 말해야 돼. 제일 먼저 정답을 맞춘 사람이 다음 문제를 낼 기회를 가지는 거야. 제일 먼저 맞추려고 경쟁하기도 하고 어려운 공룡 이름을 내려고 경쟁도 해서 재밌어.”
   아빠는 웃음을 터뜨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딸도 변함없이 좋아하고 있구나.”
   내가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를 못하자 아빠는 웃음을 참으면서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주은이, 너 아기 때 제일 좋아했던 장난감이 뭔지 기억나? 공룡 로봇이었잖아. 장래 희망도 몇 년 전까지 공룡으로 변신하는 거였지 아마.”
   아빠의 놀리는 말에 살짝 민망했지만 내가 공룡을 변함없이 좋아한다는 말에 놀랐다. 이 정도 마음이면 되는 걸까? 그럼 영은이에게도 내 마음은 변함없다고 보여주면 되는 걸까?

   영은이에게 무슨 말을 해보기도 전에 내 심장은 콩알만해졌다. 영주가 대뜸 내 앞으로 와서 물어보는 바람에 나는 숨이 막히고 말았다.
   “박주은, 너도 멜론 우유 좋아한다면서?”
   영주의 당당한 말투에 나는 기가 살짝 죽을 뻔했다. 하지만 그다음 말에 나는 더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공룡도 좋아한다면서?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들 단체 채팅방에 혹시 들어와 있어?”
   영주는 들고 온 멜론 우유를 벌컥벌컥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내가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자 날 안심시켜주기까지 했다.
   “영은이랑 너랑 우유 친구인 거 알아. 그 사이에 끼어들려는 건 아니고,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나도 멜론 우유 좋아하고 공룡도 좋아하거든. 아, 초코 우유는 안 좋아해.”
   그 말에 눈물이 터졌다. 어제저녁 내내 긴장하고 걱정하던 마음이 녹아버린 것이다. 내 눈물을 보고 놀란 영주가 당황하기도 전에 영은이가 달려왔다. 내 친구 윤속상씨, 아니 윤공감 선생님은 내 등을 두들겨주었다.
   “미안, 미안. 내가 빨리 말 안 해줬지? 영주가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물어본 거래.”

   퉁퉁 부은 눈을 티슈로 닦고 멜론 우유도 한 모금 마시고 나니 기분이 차분해졌다. 혼자서 온갖 상상을 하다가 눈물까지 터뜨린 것이 민망했다. 영주는 그걸 눈치채고 먼저 말을 꺼냈다.
   “단체 채팅방에서 공룡 이름 대기 게임을 하잖아. 너도 봤지? 당연히 문제를 내 본 적도 맞춘 적도 있겠지. 채팅방에서 쓰는 별명은 묻지 않을게.”
   난 영은이를 살짝 한 번 쳐다보고 나서 영주의 귀에 대고 내 별명을 작은 목소리로 말해줬다. 공룡에 관심이 없는 영은이는 물론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별명이었다. 영주가 보여준 따뜻한 마음에 나도 조금 더 마음을 열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주가 화들짝 놀랐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내가 공룡 박사님을 몰라봤었네.”
   내가 코를 풀고 있는데 영주가 물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진지한 말투였다.
   “오우라노사우루스?”
   “응?”
   “오우라노사우루스가 무슨 뜻이냐고?”
   갑작스런 질문이었지만 나는 아는 대로 대답해버렸다. 그 정도야 쉬웠다.
   “용감한 도마뱀이잖아. 너도 알 텐데.”
   “좋아, 이제 주은이 네 차례야.”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내 표정과는 달리 영주는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엄마가 아빠를 놀릴 때 같은 표정으로 날 놀렸다.
   “우리 공룡 박사님 어디 갔지?”
   그 놀리는 말투에 뒤늦게 영주의 속셈을 알았다. 공룡 이름 대기를 하자는 거였구나. 벌써 눈치를 챈 영은이는 어느새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깔깔 웃고 있었다. 코를 한번 더 풀면서도 어려운 공룡 이름을 생각했다. 임영주, 과연 맞출 수 있을까?
   “스테고사우루스!”
   “음…… 지붕을 가진 도마뱀. 생긴 모습을 떠올리니 쉽네.”
   그렇게 영주와 나는 같은 우유를 좋아하는 공룡 친구가 되었다.

   “<원더>!”
   “여태 흑백 영화 하다가 갑자기 최근 작품으로 오면 헷갈리잖아.”
   엄마의 공격에 아빠는 당황했다. 그 수많은 영화는 물론이고 감독까지 다 외우고 있는 엄마 아빠가 이젠 그렇게 신기하진 않았다. 나도 아주 많은 공룡의 이름부터 그 뜻까지 다 외우고 있으니까. 엄마 아빠는 내가 공룡을 좋아하는 만큼 영화를 좋아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영화 제목 수백 개, 감독 수백 명을 외우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아빠가 또 눈을 비비며 감독 이름을 떠올리는 동안 엄마는 내게 또 몰래 윙크를 했다.
   “왜 또 윙크를 하고 그래. 나 바빠. 나도 공룡 이름 외울 거 많거든.”
   아빠가 듣길 바라면서 나는 괜히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토끼 눈을 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했다.
   “어차피 아빠도 네가 도와주는 거 다 알아. 한 번만 반칙하자.”
   “와, 그런데 여태까지 그렇게 반칙을 한 거야?”
   “일주일에 한 번씩만 했거든.”
   내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하자 이번엔 아빠도 거들었다.
   “딸, 이게 바로 변함없이 좋아하는 마음이야. 알면서도 져주는 거. 알면서 져주는 걸 알면서도 그냥 모른 척 이기는 거.”
   아빠의 그 말에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빠에게 꼭 안겼다. 아빠랑 하이파이브까지 한 번 하고 나서는 눈까지 흘기며 말했다.
   “그나저나, 설거지가 사흘치나 쌓였는데 우리 딸이 설거지 한 번 할 때 되지 않았어? 엄마 아빠를 좋아하는 마음을 한 번 보여 줄 때도 됐잖아.”

   “프테로닥틸루스!”
   그야말로 허를 찌르는 공격이었다. 여태까지 육상 공룡 이름만 주고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익룡 이름을 꺼냈으니 영주가 살짝 당황하길 기대했다.
   “손가락을 가진 날개, 흐흐”
   내 기대와는 달리 영주는 프테로닥틸루스를 흉내 내듯 두 팔을 펼치고 손가락까지 구부리며 말했다. 영은이는 초코 우유를 마시는 것도 잊고 박수를 쳤다. 이젠 영주의 공격 차례였다.
   “갑자기 익룡으로 나오신다면…… 나는 틸로사우루스 프로리게르!”
   공룡 이름이라곤 티라노사우루스밖에 모르는 영은이는 해설자가 된 듯 외쳤다.
   “오! 임영주 선수, 박주은 선수의 공격을 이겨냈습니다. 익룡을 익룡으로 받아치나요?”
   영은이의 말과는 달리 익룡 중엔 이런 이름이 없다. 이 길고 긴 이름은 바다에 사는 장경룡이다. 어제 설거지를 하면서 본 다큐에서 짧게 지나간 장면이 떠올랐다. 영주도 그걸 본 게 틀림없다. 영주는 엄지를 벌써 접고 있었다.
   “다섯.”
   거북이 같은 네 발에 악어 얼굴같이 생긴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주는 단호한 목소리로 검지를 접었다.
   “넷.”
   안경을 벗고 눈을 비벼봤지만, 엄마를 돕던 나처럼 반칙을 도와주기로 한 친구도 없다. 영은이가 도와줄 리도 없고. 괜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영주는 승리를 확신한 표정으로 중지를 접었다.
   “셋.”
   “졌다. 졌어, 정답은 뭐야? 정말 궁금해서 그래.”
   “뱃머리 같은 턱을 가진 도마뱀이란 뜻이야.”
   듣고 보니 기억이 난다고 하고 싶었지만 전혀 처음 듣는 것이었다. 나의 완벽한 패배였다. 나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좋아하는 일로 졌을 땐 이렇게 해야 한다고 어느 씨네필이 그랬으니까. 나도 이제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저도 좋은 승부였습니다. 박주은 박사님.”
   영주는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이제 보니 영주와 내 이름에 모두 주 자가 있었다. 공룡을 좋아하는 마음처럼, 멜론 우유를 좋아하는 마음처럼 영주와 오래오래 좋아하는 마음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 물론, 우유 친구 영은이도 함께.

곽유진

영화를 제일 좋아하는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동화를 제일 좋아하는 방법 역시 동화를 쓰는 것이더군요. 동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2021/01/26
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