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우편함을 볼 것]
   눈을 뜨자마자 받은 문자였다. 답장을 보내지 않고 핸드폰을 닫았다.
   우편함에는 새로운 선물이 들어 있었다. 전에 것까지 합해서 세 개였다.
   탕.
   우편함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얼마 전부터 우편함에는 ‘이수민’이라고 쓰여 있는 선물이 들어 있었다. 한두 번은 기분이 좋았다. 누가 넣었을까 상상하는 것도 신이 났다.
   세 개까지는 뜯었다. 첫 번째는 머리끈이었고 두 번째는 팔찌, 세 번째는 귀걸이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왜 내가 준 거 안 하고 다녀?]
   같은 반 임덕형이었다.
   ‘얘가 나를 좋아했나?’
   몰랐던 사실이 놀랍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슬슬 방구석에 놓인 선물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런 거 필요 없어. 돌려줄게.]
   선물을 원래대로 포장까지 해서 임덕형의 사물함에 넣어두었다. 다음날 그것들은 감쪽같이 우리 집 우편함으로 돌아왔다. 그날부터 학교에 가는 게 즐겁지만은 않았다.
   교실에 들어가자 시선이 느껴졌다. 실수로라도 창가를 보지 않으려고 목에 힘을 줬다. 임덕형과 그 친구들이 몰려 있는 곳이었다.
   옆 반 대한이가 찾아왔다. 대한이와는 부모님들끼리도 친해서 어릴 때부터 가족 여행도 함께 다닌 사이다.
   “수민, 나 물감 좀.”
   “사물함에 있어. 가져가.”
   대한이는 어릴 때부터 변한 게 없다. 나를 부를 때도 다른 남자애들처럼 ‘이수민’이라고 부르지 않고 ‘수민’이라고 부른다.
   임덕형과 친한 남자애들 셋이 우리 쪽으로 몰려왔다.
   “김대한, 너 얘랑 사귀어?”
   애들이 나를 가리키며 대한이에게 물었다.
   “아닌데. 나 여자친구 따로 있어.”
   “근데 왜 맨날 여기 와서 얘랑 놀아?”
   “매일 안 왔는데. 놀러 온 것도 아닌데.”
   “덕형이가 얘 좋아하잖아. 좀 눈치 있게 굴어라.”
   뒤통수가 따가웠다. 돌아보니 임덕형이 우리 쪽을 보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걔가 수민이 좋아하면 말도 못 거냐?”
   남자애들이 말을 하려는데 수업 종이 울렸다.
   “물감 가져간다. 수민.”
   대한이는 남자애들을 헤치고 나갔다. 그제야 나를 둘러싸고 있던 남자애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수업이 시작했는데도 선생님 말씀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옆자리 진아가 내 팔을 톡 건드렸다.
   “수민아, 기분 안 좋아?”
   “아니야. 괜찮아.”
   나는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우리 반이라면 누구나 임덕형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안다. 쉬는 시간마다 임덕형과 친한 남자애들이 몰려와 “야, 쟤가 너 좋아한다더라.” 같은 말들을 던지고 간다. 그 얘기를 들어도 웃음이 나지 않는다. 누군가 날 좋아한다는데 나는 왜 그게 불편할까.
   “선생님! 우리 짝 바꿀 때 됐어요.”
   임덕형과 제일 친한 박지호가 외쳤다.
   “벌써 그렇게 됐나?”
   선생님이 달력을 봤다.
   우리 반은 그동안 한 달에 한 번씩 짝을 바꿨다. 제비뽑기를 하기도 하고, 일찍 온 순서대로 자유롭게 앉기도 했다. 지금은 남남, 여여 짝으로 앉아 있다.
   “이번에는 번호순대로 앉아요. 남녀 짝으로요.”
   박지호가 말하자 몇몇 애들이 키득거렸다.
   나는 여자 12번이다. 남자 12번이 누군지 떠올려보니 임덕형이었다. 박지호 말대로 앉는다면 임덕형과 짝이 되는 거다.
   “선생님, 전 눈이 나빠서 제일 앞에 앉을게요.”
   내가 손을 들고 말했다.
   “수민아, 안경을 썼는데도 그렇게 안 보여?”
   “이건 그냥 멋으로 쓴 거예요.”
   내가 말하고도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내 안경은 누가 봐도 멋스럽지 않고 도수도 상당히 있으니까.
   “그럼 수민이가 맨 앞에 앉고 그 뒤부터 번호순대로 앉자. 그래도 되지?”
   다행히 선생님은 다른 말씀이 없었다. 박지호만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나는 육 년 만에 처음으로 공부에 열정을 보이는 학생이 됐다.
   수업이 끝나고 진아와 함께 학교를 나왔다.
   띠링.
   핸드폰에서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너 안경 그냥 쓴 거 아니잖아. 다 알아.]
   “누구야?”
   진아가 불쑥 고개를 내밀어 메시지를 봤다.
   “이거 설마 임덕형이야?”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갈수록 오버하는 거 같은데. 한마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임덕형이 나를 좋아한다는데 나는 아니라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괜찮아.”
   “으이그, 넌 진짜 너무 착하다니까.”
   진아가 말한 ‘너무 착하다’라는 게 평소와 달리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
   진아와는 횡단보도 앞에서 헤어졌다. 아파트 일 층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데 경비 아저씨가 불렀다.
   “얘, 너 405호지?”
   아저씨가 우리 집 우편함 뚜껑을 열어 보였다.
   “이 안에 있는 거 너희 거냐?”
   아직 선물을 받기로 결심한 게 아니니 분명히 말하자면 내 건 아니었다.
   “우편함이 꽉 차서 우편물을 넣을 수가 없잖아.”
   아저씨가 안에 든 것을 모두 꺼내 내밀었다. 떠안듯이 받아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알록달록한 포장지가 정신없었다.
   사 층에 내려 복도를 걸어가는데 404호 앞에서 택배 아저씨가 초인종을 여러 번 누르고 있었다.
   내가 지나치자 아저씨가 나를 돌아봤다.
   “너 여기 사니?”
   아저씨가 우리 집을 가리켰다.
   엄마가 모르는 사람한테 집 주소를 알려주면 안 된다고 한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당장 옆집으로 들어갈 거면서 거짓말할 수도 없었다.
   “네.”
   “이것 좀 맡아줄래?”
   아저씨가 손으로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밀며 말했다.
   “404호 건데 집이 비어서 그래. 너희 집에서 찾아가라고 문자 넣을 테니까.”
   내키지 않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기분 나빠하시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 겁니까?”
   옆집 할머니가 커다란 화분을 들고 서 있었다. 할머니는 헐렁한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부재중이면 그냥 집 앞에 두고 가시라 했잖아요.”
   “분실될까 봐 그러죠.”
   아저씨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제가 책임질 테니까 제 말대로 하세요. 경비실에 맡기셔도 되고요. 이 정도는 들고 올 힘 됩니다.”
   아저씨가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더니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나갔다.
   “미안하구나. 곤란했지?”
   할머니가 나를 보고 물었다. 할머니에게서 희미하게 페인트 냄새 같은 게 났다.
   “괜찮아요.”
   “부모님 둘 다 일하시는 것 같던데. 혼자 있을 때 아무나 문 열어주고 그러면 안 된다.”
   할머니가 404호 도어락을 여는 동안 나는 오도카니 서 있었다. 오늘따라 혼자 집에 있기 싫었다. 임덕형이 준 선물이 쌓여갈수록 집에 있는 것도 편하지가 않았다.
   “왜? 할 말 있어?”
   할머니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품에 안고 있는 선물이 점점 무거워졌다.
   “괜찮으면 들어와서 시원한 거 마실래? 고양이도 네 마리나 있어. 구경하고 가.”
   할머니가 말했다.
   ‘고양이는 무서운데……’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할머니를 따라 404호로 들어갔다. 우리 집과 똑같은 구조이지만 짐이 적어서인지 훨씬 넓어 보였다.
   할머니 말과 달리 고양이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거실 바닥에는 커다란 캔버스와 물감, 붓 같은 게 잔뜩 널려 있었다. 할머니한테서 나는 게 물감 냄새였나 보다.
   “고양이들이 겁이 많아서 말이야. 모르는 사람이 오면 일단 숨어. 조금 있으면 나올 거야. 아이스티 먹을래?”
   고개를 끄덕였다. 달달한 아이스티는 내가 좋아하는 거다.
   “오늘 생일이야?”
   할머니가 선물을 보고 말했다.
   “아니요.”
   “남자친구가 준 거?”
   “아니에요!”
   내가 외쳤다.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 정보 없음]
   이런 전화는 몇 번 받아봤다. 임덕형 번호로 온 전화를 몇 번 받지 않자 그 뒤로는 이렇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아도 상대는 아무 말이 없어 결국 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번에는 전화를 받지 않고 바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누군데 자기 번호도 안 밝히고 전화를 해? 고약한 장난이다.”
   할머니가 냉동고를 열어 얼음통을 꺼냈다.
   싱크대 밑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배꼼 얼굴을 내밀더니 슬금슬금 나왔다. 하얀 바탕에 검은색 털이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고양이는 할머니 다리에 자기 얼굴을 비비더니 슬쩍, 내 다리에도 한 번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고양이가 몸에 닿은 건 처음이라 놀라 몸이 굳었다.
   “눈인사도 해보렴.”
   눈인사는 고양이의 코나 입을 보고 눈을 깜빡거리는 건데 고양이한테는 ‘나는 너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어.’라는 뜻이라고 했다.
   ‘설마 그게 되겠어.’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얼룩무늬 고양이를 향해 눈을 끔뻑, 했다. 고양이는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내가 세 번째 눈을 끔뻑이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할머니, 할머니, 쟤도 했어요!”
   “네가 마음에 드나 보구나.”
   할머니가 투명한 컵을 내밀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아까는 왜 그렇게 집에 들어가기 싫은 얼굴이었어?”
   고양이가 내 발치에 앉아 골골거렸다.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시자 입안에 진한 단맛이 퍼졌다.
   “그게요……”
   담아만 놨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를 좋아하는 아이와 그걸 알고 있는 우리 반 아이들. 원하지 않을 때에도 아이들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순간순간에 대해서도.
   얼음이 모두 녹을 때까지 할머니는 내 이야기를 끊지 않고 들어주었다. 어디선가 하나둘 나타난 고양이 네 마리도 우리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넌 걔를 어떻게 생각하는데?”
   할머니가 내 컵에 얼음을 몇 개 더 넣어주었다.
   “싫지?”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건 할머니가 처음이었다. 할머니가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할머니의 눈이 크고 반짝이는 고양이 눈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건 아닌데……”
   “오호, 그럼 넌 걔한테 좋은 게 하나라도 있나 보구나?”
   ……없었다. 임덕형의 그림자만 봐도 피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싫어한다고 말해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네가 걔를 싫어하는 건 이상한 게 아냐. 네가 당연히 자기 마음을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하잖니. 이깟 선물로 환심이나 사려 하고 말이다.”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선물을 튕겨 식탁 아래로 떨어뜨렸다. 고양이들이 잠깐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더니 발톱으로 포장지를 톡톡, 긁었다.
   “요놈들, 하지 마.”
   할머니가 ‘웃차’ 소리를 내면서 고양이 네 마리를 한꺼번에 안아 들었다. 고양이들은 요리조리 몸을 뒤틀더니 스르르 할머니 품에서 빠져나갔다. 할머니 옷에 고양이 털이 잔뜩 묻었다.
   “좀 안아 보자.”
   할머니가 두 팔을 벌려 다시 안으려고 했지만 고양이들은 본 척도 안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다들 각자 자리를 잡고 식빵 모양으로 엎드려 있거나 자기 털을 핥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고양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장 오래된 애는 같이 산 지 십 년도 넘었거든. 근데도 내가 아무 때나 안으면 싫어해. 물거나 밀기도 한다.”
   “그럴 때 할머니는 기분 안 나쁘세요?”
   슬쩍 할머니 얼굴을 올려다봤다.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내 멋대로 하고 싶으면 왜 살아 있는 것들과 같이 살겠니. 혼자 인형 놀이나 하고 말지.”
   나는 차가운 컵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난 살면서 싫다는 소리를 삼만 이천 번 정도 해 봤단다. 그럼 뭐가 좋은지 아니?”
   내가 고개를 저었다.
   “속이 후련하지.”
   할머니 대답에 나도 모르게 킥, 웃음이 났다.
   고양이들이 미양미양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알았다, 알았어.”
   할머니는 택배 아저씨가 가져온 상자를 뜯었다. 커다란 사료 봉투가 들어 있었다. 봉투를 뜯고 사료를 꺼내 고양이들 밥그릇에 조금씩 덜어주었다. 고양이 네 마리가 일렬로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저, 할머니……”
   “응?”
   “저 사실 고양이 싫어해요. 좀 무서워서.”
   “어? 그랬어? 괜히 우리 집에 오라고 했구나!”
   할머니가 허둥대는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내가 소리 내어 웃자 할머니도 큭큭 웃었다.
   “거 봐. 생각보다 어렵지 않지?”
   고양이들이 아그극 사료 씹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남은 아이스티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아침에 나오면서 종이봉투를 챙겼다. 안에는 포장을 뜯은 선물 세 개와 뜯지 않은 선물 세 개가 들어 있었다.
   나는 교실이 아닌 연구실로 향했다. 선생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수민아, 왜? 무슨 일 있어?”
   “선생님, 사실은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임덕형이 보낸 문자와 전화를 건 목록도 함께 보여줬다.
   “그건 뭐니?”
   선생님이 종이봉투를 가리켰다.
   “임덕형이 저희 집에 두고 간 선물이요.”
   나는 괜히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선생님이 ‘별것도 아닌 일이네, 뭐.’ 하거나 ‘덕형이가 수민이를 좋아해서 그런 것 같은데?’ 할까 봐 무서웠다. 그런 말을 듣는다면 민망한 것보다 선생님한테 실망하는 마음이 더 클 것 같았다.
   “그래서 수민이가 맨 앞에 앉겠다고 했구나.”
   선생님이 나를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웃겨서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나한테 미안해하고 있었다.
   “미처 몰랐네. 선생님이 어떻게 해 주면 좋을까?”
   걱정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내가 필요로 할 때 선생님이 내 편을 들어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혼자 참지 말고. 약속이다.”
   선생님이 내민 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나는 점심을 먹은 후 운동장 구석 나무 그늘이 내려온 벤치에 앉아 있었다. 멀리서 임덕형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 나무 뒤에 진아와 대한이가 서 있었다. 둘 다 언제든 내 쪽으로 달려올 것처럼 몸이 앞으로 나와 있었다.
   “할 말이 뭐야?”
   임덕형은 머뭇거리면서도 웃고 있었다. 내가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할 거라고 기대하는 것 같았다.
   마음속에서 불쑥 미안한 마음이 솟아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제일 미안해해야 할 사람은 임덕형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그동안 나는 나에게만 참으라고 말해왔으니까.
   “이거.”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임덕형은 종이봉투 안을 들여다보더니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우리 집 우편함에 이런 거 넣지 마. 문자 보내는 거랑 전화하는 것도 싫어.”
   ‘싫어’라고 말할 때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임덕형은 화가 난 건지 창피한 건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나는 어젯밤 이 장면을 몇 번이나 상상해 봤다. 임덕형은 도리어 내게 화를 낼 수도 있다. 사과하거나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아무 말도 안 하고 입을 다물어버릴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나는 변함없을 것이다.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거야.”
   임덕형이 말했다.
   ‘약해지지 말자.’
   나는 꼭 모두에게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일 필요는 없다. 진짜 나를 위해주는 사람은 운동장 나무 뒤에도 있고, 교실에도 있고, 어쩌면 내가 사는 옆집에도 있을 수 있으니까.
   “미안. 난 아니야.”
   임덕형은 아무 말없이 운동장 바닥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종이봉투를 내려놨다.
   “먼저 갈게.”
   임덕형을 뒤로하고 나를 지켜보고 있는 친구들을 향해 걸었다.
   싫다고 말하는 건 할머니 말처럼 후련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나 때문에 누군가 마음이 상하는 걸 보면서 내 마음이 편할 리 없다. 하지만 나도 삼만 이천 번쯤 ‘싫다’라고 말하다 보면 진짜 괜찮아지는 법을 배우게 될 지도 모른다.
   내가 가까이 가자 진아가 얼른 나무 뒤에서 나왔다.
   “쟤가 너한테 못되게 말하지 않았어?”
   고개를 가로젓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잘했어! 너한테 무슨 일 있었으면 가만 안 뒀을 거야.”
   진아가 허공에서 주먹을 날렸다.
   “네 잘못도 아닌데. 고생했다.”
   대한이가 말했다.
   “싫다는데 들이대는 애들은 딱 질색이야. 물론 나한테 그런 애는 없었지만.”
   진아가 한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통조림 코너 옆에는 작게 동물용품 코너가 있다. 고양이 사진이 붙은 캔을 두 개 샀다. 이 정도 선물은 괜찮을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우편함을 열어 봤다. 마트 광고지와 고지서 두 장이 있었다.
   404호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할머니는 물감이 잔뜩 묻은 앞치마를 걸치고 있었다. 고양이들은 또 어디론가 숨었는지 조용했다.
   “어, 왔구나.”
   “이거……”
   고양이 통조림이 들어있는 봉투를 내밀었다. 할머니가 웃어 보였다.
   “우리 애들이 좋아하는 거야. 고맙구나.”
   집 안에서 고양이가 먀먀 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올래?”
   “그래도 돼요?”
   “안 되면 안 물어본다.”
   할머니가 활짝 문을 열었다.
   “아, 근데 고양이 싫어한다고 그랬지?”
   할머니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젠 괜찮아요.”
   한 걸음 집 안으로 발을 내밀었다. 거실에 놓인 캔버스에는 이제 막 시작한 밑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줄 게 아이스티밖에 없구나.”
   할머니가 냉장고를 뒤지며 말했다.
   “그거 좋아해요.”
   할머니가 컵에 얼음을 넣고 아이스티를 부었다. 얼음이 아이스티 위로 둥둥 떠올랐다. 숨어 있던 고양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김다노

나무를 열 번이나 찍어 넘어뜨리려 한다면 나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멋진 할머니가 나오는 동화를 많이 쓰고 싶어요. 저 역시 멋지게 나이 들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습니다.

2020/11/24
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