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여행 14일째, 지긋지긋하다. 철 지난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처럼 반짝이는 별을 보는 것도 멀미가 난다. 푸른 노을호가 지구에서 화성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43일. 앞으로도 29일이나 우주선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처음부터 지루했던 건 아니다. 첫날에는 푸른 노을호에 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창밖으로 보이는 검은 하늘은 신비한 비밀을 감춘 장막 같았고, 별들은 엄마가 자주 하던 귀걸이처럼 예쁘게 보였다. 커다란 나무가 심어진 중앙정원도, 우주선 곳곳에 있는 안내로봇도 마냥 신기했다. 콜라 캔처럼 생긴 안내로봇은 승객과 마주치면 긴 팔로 땅을 짚고 몸통을 앞으로 기울여 인사했다. 게다가 천오백 명이 타고 있는 거대한 우주선 안에는 없는 게 없었다. 영화관, 게임센터, 쇼핑몰, 그리고 버거 플래닛까지!
  하지만 흥분도 잠시, 나 같은 일반실 승객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아니, 난 떡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그림의 피자라고 해야 하나) 특등실 승객들만 선내의 편의시설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다. 물론 일반실 승객들도 이용할 수는 있었다. 별도의 이용료를 낸다면 말이다.
  그런 이유로, 아빠와 둘이 D구역 612호에 머무르고 있는 내가 우주선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산책로를 걷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게 전부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푸른노을 도서관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서관 입구에서 사서로봇이 인사를 했다. 사서로봇은 안내로봇과 달리 흰색 갑옷을 입은 마네킹처럼 생겼다. 그래서 좀 징그러웠다. 나는 로봇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서관에는 오늘도 뿔테안경을 낀 할머니와 야구모자 위에 헤드폰을 겹쳐 쓴 아저씨가 있었다. 두 사람 다 거의 매일 왔지만 일부러 아는 척을 하진 않았고,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살짝 눈인사를 나누곤 했다.
  나는 서가에서 책을 몇 권 골라 내 지정석이나 다름없는 창가 구석 자리로 가서 앉았다. 운동화를 벗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책을 읽을 준비를 하는데, 노란 원피스를 입은 여자애가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자그마한 키에 크고 동그란 눈을 가진 아이였다. 손목에서 빛나는 은색 밴드. 특등실도 아니고 귀빈실 승객이란 뜻이다.
  얼른 운동화 속에 발을 집어넣고, 짧아진 티셔츠 소매를 끌어내려 파란 밴드를 감췄다. 그 애는 어린이 서가로 가더니 눈싸움을 하듯 책을 노려봤다. 그리고는 중대한 결심을 내린 사람처럼 입을 앙다물고 책을 한 권 뽑아들었다. 다음 순간 책을 가슴에 안은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책장을 넘기는 시늉을 했다.
  자박자박, 귀여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두근두근, 발소리에 맞춰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소리가 내 앞에서 뚝 끊어졌다. 그 애가 내 앞자리에 앉은 것이다.
  비어있는 자리도 많은데, 하필 내 앞자리에?
  자꾸만 심장이 콩닥거리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그 애한테까지 들릴까 봐 목에 잔뜩 힘을 주었다. 책에 얼굴을 파묻은 채 가끔 눈만 치켜뜨고 그 애를 봤지만, 그 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책만 읽었다. 영화에서처럼 안녕, 하고 인사를 한다거나 눈을 마주치고 웃는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애가 도서관에서 나간 후, 나는 도서 반납대 위에 놓여있는 책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자이밀 행성의 마법학교』 1권. 나도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다.
  어쩌면 내일 2권을 읽으러 올 수도 있겠지?

*

  다음날, 평소보다 점심을 일찍 먹고 도서관에 갔다. 그리고 서가에서 『자이밀 행성의 마법학교』 2권을 가져와 내 자리에 앉았다. 혹시 그 애가 와서 책을 찾는 눈치가 보이면 다 읽은 척 슬쩍 꽂아놓을 참이었다. 운이 좋으면 말을 걸 수도 있겠지. 공연히 설레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을 같은 페이지만 보고 있는데 그 애가 들어왔다! 오늘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애는 『자이밀 행성의 마법학교』가 있는 쪽으로 가지 않고 서가 맨 위의 책을 뽑으려 했다. 까치발을 들었지만, 손이 닿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 애는 사다리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나 좀 도와줄래?”
  헤벌쭉 벌어지는 입을 꾹 다물며 그 애에게 다가가는데, 언제 왔는지 사서로봇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고객님, 이런 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사서로봇이 긴 팔을 뻗어 그 애가 가리키고 있던 책을 꺼내주었다. 책을 받아든 그 애가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봤다. 내 얼굴도 그 애 못지않게 우스꽝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풉, 먼저 웃음을 터뜨린 건 그 애였다.
  “아, 망했네.”
  그 애는 작은 코를 찡그리더니,
  “사실, 너한테 말 걸려고 일부러 그런 건데.”
  라고 말했다.
  “어?”
  “너도 알잖아. 우주선에 우리 또래가 별로 없는 거.”
  “어, 그렇긴 해.”
  “그럼 우리 친구 할까?”
  그 애가 물었고, 나는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내가 먼저 말했어야 하는데.
  “난 주이라고 해. 넌?”
  주이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기 이름을 밝혔다.
  “난 수오, 한수오.”
  “쉿, 도서관 안에서는 조용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서로봇이 파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우리는 키득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저 사서로봇, 울 아빠가 만든 거야.”
  주이가 대단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저 로봇을 너희 아빠가 만들었다고?”
  “응. 울 아빠, 과학자거든. 로봇 만드는 과학자. 너희 아빠는?”
  “어…… 회사원.”
  아빠가 고장난 로봇을 고치는 기술자라는 말이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렇구나. 너도 혼자야?”
  “아니, 아빠랑.”
  “아빠? 아아, 내 말은 너도 오빠나 언니가―너한테는 형이나 누나겠구나―없냐는 거였는데. 어? 아빠랑 둘이 여행한다고?”
  “응.”
  “엄마는?”
  “엄마는, 없어.”
  주이는 엄마가 죽었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잠깐 동안 눈동자를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굳이 사실을 말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가 작년에 아빠와 이혼하고 금성에 가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진실은 너무 구질구질하다.
  “수오야, 우리 방에 놀러 갈래? 옆방에 마스 데블 오빠들도 있는데.”
  주이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스 데블?”
  “마스 데블 몰라? 요즘 제일 핫한 아이돌 그룹이잖아.”
  “아니, 알지. 왜 몰라.”
  사실은 잘 몰랐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거짓말을 세 개나 하다니.
  “그 오빠들 화성에 순회공연하러 간대. 다섯 명 사인도 다 받았어. 나중에 애들한테 자랑해야지.”
  주이가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우리 옆방에는 아빠 같은 기술자 아저씨가 있었다. 새삼 주이와 내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어때? 우리 방에 가자.”
  “아, 나 아빠랑 할 일이 좀 있어서.”
  거짓말이다. 차라리 안 보는 게 낫지, 귀빈실에 가면 공연히 주눅이 들 것 같아서 그랬다. 이로써 거짓말이 하나 더 추가됐다. 나, 주이랑 잘 지낼 수 있을까?

*

  걱정했던 것과 달리 나는 주이와 금세 친해졌다. 때때로 부러움을 넘어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지만, 주이를 좋아하는 마음에 비하면 그런 건 피자 위의 올리브 토핑 정도였다. 우리는 따로 약속을 하지 않아도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서 만나 시간을 보냈다. 때로는 주이가 버거 플래닛에 가서 햄버거를 사주기도 했다. 나도 모아두었던 용돈으로 문 베이커리에서 주이가 좋아하는 딸기 마카롱을 사주었다.
  나는 주이가 하자는 건 다 했다. 단 하나, 주이의 방에 놀러오라는 것만 빼고 말이다. 몇 번 거절했더니 주이도 더는 조르지 않았다.

  우주선 안에서의 시간이 빨리 흐르기 시작했다.

*

  우주여행 37일째. 이제 주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화성에 가면 주이는 부잣집 애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 가게 되겠지. 그런 학교 등록금은 우리 집 일 년 생활비라고, 엄마가 말한 적이 있다.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 가려는데,
  “수오야, 이 양말 한 짝 못 봤어?”
  부스스한 머리의 아빠가 캐비닛에서 회색 양말을 꺼내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주이랑 있을 때는 목소리가 부드럽고 가벼워지는데, 아빠랑 있으면 왜 거칠거칠한 목소리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저기 좀 찾아봐.”
   아빠는 캐비닛 서랍에 얼굴을 파묻고는 방구석에 세워둔 여행 가방을 가리켰다. 바보, 자기 양말도 제대로 못 챙기니까 엄마가 떠났지. 입술을 쭉 내밀고 여행 가방을 뒤지려는 찰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옆방 아저씨가 또 치약을 빌리러 왔나?
  “안녕?”
  문을 열자, 뜻밖에도 주이가 서 있었다. 커다란 블루베리 파이를 들고.
   “우리 엄마가 너 갖다주래.”
  “어…… 고마워……”
  “수오 친구 왔구나! 어서 들어와라.”
  파이만 받아놓고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아빠가 눈치 없이 나서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블루베리 파이 좋아하세요?”
  “그럼, 그럼. 고맙다. 잘 먹을게. 엄마한테 감사하다고 전해드리렴.”
  주이가 방긋 웃으며 612호실을 둘러봤다. 자그마한 머리를 살짝 돌리는 것만으로도 방 구경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이럴 수가, 양말과 속옷 폭탄이 떨어진 것 같은 캐비닛 서랍도 봐버렸어.
  “우리 나가자.”
  나는 주이의 손을 잡고 객실 밖으로 허둥지둥 나왔다.
   “왜? 무슨 급한 일 있어?”
  주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내게는 주이를 데리고 방 밖으로 나오는 게 가장 급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고, 아빠와 점심을 먹다 식당 벽에서 봤던 광고를 떠올렸다.
  “버거 플래닛 가자. 오늘 어린이들한테 우주선 모형 준대.”
  “우주선? 푸른노을호?”
  “그럼 뭐겠어.”
  내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주이는 신이 나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작전 성공.

  꽝!
  중앙 정원의 큰 나무 옆을 막 지나고 있을 때였다. 온몸이 울릴 만큼 굉장한 소리가 나더니 우주선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우주선 천장에 뻗어있는 나뭇가지에서 잎사귀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주이가 놀란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곧이어 선내에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방금 소행성 206817 P-J가 우리 우주선과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을 위해 객실로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방금 소행성……”
  “우리 방으로 가자.”
  주이가 내 손을 잡은 채 말했다. 이번에는 거절할 수 없었다. 중앙 정원에서는 주이의 객실이 훨씬 가까웠으니까.
  사실 아빠와 내가 있는 D구역은 일반실 중에서도 선체의 꼬리 부분에 있었다. 귀빈실이 있는 R구역은 복도도 넓고 무엇보다 조용했다. 나는 주이의 객실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주이와 닮은 아주머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문 앞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수오구나.”
  주이의 엄마가 나를 보며 웃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최대한 씩씩하게 인사했다.
  “넘어지지 않았어?”
  주이의 엄마가 그 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엄마는, 내가 어린앤가.”
  주이가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며 뾰로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육각형의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귀빈실은 객실이라기보다 또 하나의 우주선 같았다. 아마 넓은 거실 한가운데 있는 작은 정원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통유리창 너머에는 개인 수영장도 있었다. 우리 객실의 두 배만 한 수영장을 보니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우리 아빠야, 인사해.”
  주이가 수영장에 있는 아빠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자, 주이의 아빠도 함빡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난기류 때문에 수영장 물은 파도 풀처럼 출렁였다.
  “엄마, 내 방에 들어가서 놀아도 되지?”
  주이가 엄마를 보며 물었다.
  “그럼요, 당연하죠.”
  주이의 엄마가 그 애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주이는 내 손을 잡고 거실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걸터앉아 얘기를 하고 있는데, 주이의 엄마가 블루베리 파이와 우유를 가져다주었다. 파이를 보자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는 지금쯤 파이를 먹고 있을까? 잃어버린 양말은 찾았겠지?
  “왜 안 먹어?”
  향긋하고 달콤한 파이를 홀린 듯이 먹다가, 주이가 전혀 손도 대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우주선이 흔들려서 그런가, 멀미 난다.”
  그러고 보니 주이의 얼굴이 창백했다.
  “좀 누워있어.”
  내 말에 주이가 베개를 등에 대고 반쯤 누웠다.
  “손 줘봐.”
  나는 주이의 옆에 바짝 다가가 손바닥을 누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멀미를 하면 아빠가 손바닥을 눌러주곤 했다.
  “이렇게 하면 괜찮아질 거야.”
  주이는 내게 손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주이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손에서 자꾸 땀이 배어 나와 바지에 연거푸 땀을 닦아야 했다.

  십 분쯤 지나자 난기류가 사라졌다. 주이의 멀미도 가라앉았고, 우주선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주이와 나는 버거 플래닛에 가서 우주선 모형을 하나씩 받았다. 유선형의 선체며, 가오리 같이 펼쳐진 날개며, 탑승할 때 봤던 푸른노을호랑 똑같다고 감탄하면서 도서관으로 가는데, 안내로봇들이 이상했다. 긴 팔을 고장 난 시곗바늘처럼 빙빙 돌리는가 하면,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어떤 로봇은 벽에 쾅쾅 부딪혔고, 어떤 로봇은 승객들을 향해 돌진했다. 겁을 먹고 도망치다가 로봇과 부딪혀 다치는 사람도 있었다.
  조종실에 있던 선원들이 승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승객 여러분께 알립니다. 안내로봇 오작동으로 여러분께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소행성 충돌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만, 자세한 원인을 파악할 때까지 안내로봇들은 대기모드로 설정해 놓겠습니다. 부상을 당한 분은 선원의 안내에 따라 의무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끝나자 난리를 부리던 로봇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대기모드에 들어간 것이다.
  “좀 무섭다.”
  주이가 말했다.
  “방으로 갈까?”
  “여기까지 왔으니까 도서관에 들렀다 가자. 마법학교, 마지막 권만 보면 되거든.”
  주이가 내 손을 잡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 또 땀날 텐데…… 걱정하며 도서관에 갔는데 정전이 된 것처럼 온통 깜깜했다.
  “여기도 뭔가 잘못됐나 봐.”
  주이의 눈동자가 암흑보다 더 새카매졌다.
  “방에 가야겠다.”
  도서관을 뒤로하고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살려줘요. 거기 아무도 없어요?”
  어디선가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서관 안쪽에서 나는 소리인 것 같았다. 도서관 안으로 고개만 디밀고 들여다봤지만 너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학생, 나야. 여기 갇혀서 나갈 수가 없어.”
  금세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고, 쓰러진 책장들과 바닥에 흩어진 책들이 보였다. 그리고 무너진 책장 뒤에 할머니가 있었다. 매일 도서관에 오던 뿔테 안경을 쓴 할머니였다.
  “할머니, 저희가 어른들을 불러올게요.”
  주이가 말하는데 할머니 뒤에서 하얀 물체가 나타났다. 사서로봇이었다. 사서로봇의 고개가 180도 돌아가더니 새빨간 눈을 빛내며 우리를 봤다.
  “이 도서관은 화재의 위험이 있으므로 폐쇄합니다.”
  로봇이 기계음으로 말하며 할머니 앞에 있는 책장들을 마구 넘어뜨렸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로봇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도와주러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주이가 내 팔을 잡았다.
  “안 돼, 수오야. 너무 위험해.”
  “여기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
  우리가 소리치자 회색 제복을 입은 선원 셋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누나, 저 안에 할머니가 갇혀 있어요. 저 로봇도 대기 모드로 바꿔 주세요. 빨리요.”
  나는 가장 먼저 온 선원에게 말했다.
  “그럴 수가 없어. 사서로봇은 안내로봇들하고 다르거든. 고도의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라……”
  “아! 우리 아빠를 불러주세요. 아빠라면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 아빠가 저 로봇을 설계한 박사님이거든요.”
  주이의 말에 선원이 중앙 관제실에 연락하자 즉시 방송이 나왔다.
  ―현재 도서관의 사서로봇이 고장을 일으켜 승객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귀빈실의 오현오 박사님께서는 방송을 듣는 즉시 도서관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이 두 번 반복되고, 흠뻑 젖은 주이의 아빠가 수영복 위에 남방만 걸쳐 입고 달려왔다. 손에는 작은 리모컨이 들려 있었다. 그 사이에도 사서로봇은 도서관을 마구잡이로 부숴댔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겁에 질린 신음을 냈고, 주이와 나는 할머니가 다칠까봐 마음을 졸였다.
  “강제 종료시키는 수밖에 없겠군요.”
  주이의 아빠는 한숨을 쉬고는, 리모컨을 들어 빨간 버튼을 눌렀다.
  “부적절한 접근입니다. 강제 종료가 거부됐습니다. 자폭 코드를 발동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로봇은 동작을 멈추었다. 로봇의 가슴에 있던 액정에 03:00이라는 숫자가 나타나더니 02:59로 줄어들었다. 58, 57, 56…… 설마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건가?
  “자폭?”
  “자폭이요?”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놀란 얼굴로 외쳤다.
  “이런…… 지금 위기 상황이라고 인식한 거 같은데…… 일단 자폭 모드가 발동되면 저로서도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로봇이 폭파되면 우주선에 큰 타격을 입히게 될 겁니다.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도서관을 선체 밖으로 분리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주이의 아빠가 손등으로 얼굴에 흐르는 물기를 닦아내며 말했다. 로봇의 난동에 미처 들어가지 못했던 선원들이 뒤늦게 할머니를 구하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할머니는 무너진 서가에 다리가 끼어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다.
  “구조하려면 3분 이상 걸릴 것 같습니다.”
  선원 하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어쩔 수 없지. 박사님 말씀대로 도서관을 분리하는 수밖에.”
  언제 왔는지 선장인 듯 파란 제복을 입은 아저씨가 말했다.
  “안 돼요. 그럼 할머니는요?”
  내 물음에 선장과 주이의 아빠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나라도 구하는 데 힘을 보태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아빠였다. 짝짝이 양말을 신은 아빠는 출근할 때 갖고 다니는 커다란 연장통을 들고 있었다. 아빠도 방송을 들었구나!
  “제가 해보겠습니다.”
  아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로봇을 바닥에 눕히고 가슴을 열었다. 마치 아픈 사람을 수술하는 의사 같았다. 용기를 얻은 선원들도 최선을 다해 할머니를 구해내려 애썼다.
  사람들이 도서관 앞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선원들이 위험하다고 말려도 소용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줌마, 아저씨, 아이들, 너나 할 것 없이 주먹을 꽉 쥐고, 혹은 손을 마주 잡고 한마음이 되어 아빠를 응원했다.
  아빠는 날쌘 손놀림으로, 그러나 정확하고 신중하게 복잡한 회로를 만졌다. 저렇게 진지한 아빠의 모습이라니, 아빠가 조금은 멋져 보였다. 아니, 완전 멋졌다. 하지만 타이머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30초.
  “안타깝지만 도서관을 분리할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선원들, 모두 밖으로 나오게. 선생님, 그만하십시오.”
  선장이 괴로운 얼굴로 아빠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아빠는 가까이 오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펼쳐 들었다. 나는 안으로 뛰어 들어가 선장을 막아섰다.
  “우리 아빠는 할 수 있어요! 아빠는 못 고치는 로봇이 없단 말이에요!”
  선장이 코로 길게 숨을 내쉬며 나를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는 중앙 관제실에 연락했다.
  “내가 명령을 내리는 즉시, 도서관을 선체에서 분리하도록 하게.”
  선원들이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에게 안전한 객실로 돌아가 달라고 부탁하는 동안에도 타이머의 시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10, 9, 8, 7, 6, 5, 4, 3……
  아빠, 제발……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서 쿵쿵, 울렸다.
  “됐다!”
  아빠가 큰소리로 외쳤다. 자폭 모드 해제. 겨우 2초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우와아,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아빠를 에워쌌다. 아빠가 나를 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제야 주이와 처음 만난 날, 그 애에게 했던 거짓말이 떠올랐다.
  “미안, 사실 우리 아빠는 회사원이 아니라……”
  “너희 아빠 진짜 멋있다.”
  주이가 쪽, 내 볼에 입을 맞췄다.

*

  아빠는 용감한 탑승객에게 주어지는 표창장을 받았다. 부상으로 선장이 은색 밴드 2개가 들어 있는 상자를 내밀었다. 아빠는 커다란 손을 내저으며 지금 있는 612호가 더 좋다고 했다. 어휴, 역시 우리 아빠는 바보다.

남유하

평범하다 못해 조금은 모자라게 느껴지던 우리 아빠가 세상 누구보다 자랑스러웠던 순간.
빛나던 그때를 기억하며.

2019/07/30
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