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생
   겨울방학 동안 보라는 혼자서 몇 번이나 전학 갈 학교로 놀러 갔다. 학교가 좀 크긴 했지만 전에 다니던 학교랑 별로 다를 건 없었다. 서울은 전에 살던 곳보다 뭐든 많은 것 같았다. 사람이나 건물, 심지어 강아지들도 많았다. 철봉에 매달려 거꾸로 학교를 바라보았다. 운동장은 텅 비어있었다. 비가 와서인지 나뭇가지에 잎도 하나도 없었고. “없는 것도 있군.” 보라는 중얼거렸다.
   개학식 다음 날, 어제 이미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는데도 담임선생님은 보라를 ‘전학생’이라고 부르며 교실로 가기 전에 교무실에 들르라고 말씀하셨다. 보라가 모르는 복잡한 일이 담임선생님에게는 있는 것 같았다. 교무실 문을 열고 담임선생님을 찾았다. 보라는 저번에 봤을 때보다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더 파래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무 파래서 멀리서도 담임선생님을 한 번에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어허. 인사를 조용히 해야지.”
   담임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곤 출석부와 기다란 드럼 스틱을 챙겨서 일어섰다. 보라는 담임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향했다.
   “도대체 교무실론 왜 부르신 거야?”

   체육복

   종례 시간에 담임선생님은 체육복에 대해 말씀하셨다. 여자는 분홍색, 남자는 하늘색으로 체육복을 맞춘다는 얘기였다. 보라는 체육복을 맞추고 싶지 않았다. 예쁜 체육복을 입어야 체육을 잘하게 된다는 걸 이 학교 선생님들은 모르는 걸까. 보라는 손을 번쩍 들었다. “싫어요. 체육복을 맞추는 거. 그리고 전 보라색이 좋은데요? 꼭 정해야 한다면 보라색으로 선택하게 해주세요.” 담임선생님은 여전히 파란 얼굴을 저으며 전교생이 모두 맞추는 걸 혼자만 다르게 할 순 없다고 말했다. 보라는 분명히 자기 외에도 다른 색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교실을 살폈다. 하지만 보라 외에 체육복에 불만을 가진 아이는 없는 것 같았다. 보라는 짝에게 이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고 물었다. 짝은 보라를 이상하게 바라보면서 빨리 앉으라고 재촉했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보라와 짝에게 쏠렸다. 짝의 얼굴은 곧 폭발할 것처럼 너무 빨개져 있었다. 보라는 빨간 얼굴과 파란 얼굴을 번갈아 보며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담임선생님은 세 칸으로 나뉜 표가 그려져 있는 에이포 용지를 1분단부터 돌렸다. 첫 번째 칸에는 이름, 두 번째엔 성별, 세 번째 칸에는 S, M, L 사이즈 중에 하나를 적으면 된다. 색깔을 적는 칸은 없는 것이다. 보라는 사이즈에 S, 성별에 ‘남’이라고 적어서 옆 분단 애한테 종이를 넘겼다.

   짝

   보라의 짝 지원이는 좀 이상했다.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보라였다. 보라는 그런 지원이랑 친해지고 싶었다. 보라의 노력에도 지원이는 도통 마음의 문을 열 생각을 안 했다. 지우개를 빌려달라고도 해보고, 가정통신문 줄 때도 짝 것까지 챙겨줬건만 무반응이다. 그래서 보라는 지원이를 미행하기로 했다. 나쁜 미행은 아니다. 그냥 재밌는 미행 정도? 며칠간 지원이를 지켜본 결과, 지원이에게는 단짝친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지원이가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보라도 서울에는 아직 단짝친구가 없으니까. 친구는 많을수록 좋지만 단짝친구는 단 하나, 제일 소중한 친구다. 보라는 그 단짝을 지원이랑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지원이는 걸어가다가 갑자기 떡볶이 가게 앞에서 주춤했다. 떡볶이 가게는 학교가 끝나는 시간이라 엄청 붐비고 있었다. 보라네 반 애들도 꽤 많이 보였다. 지원이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이내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저 애는 항상 저렇게 모든 게 눈에 빤히 보인다. ‘떡볶이를 살 돈이 없는 게 틀림없군.’ 보라는 떡볶이 가게에 잔뜩 몰려있는 애들을 제치고 아주머니께 천원을 내밀었다. 아줌마 컵 떡볶이 두 개요! 줄을 서서 기다리던 아이들이 일제히 보라를 째려봤다. 아주머니께 컵 떡볶이 두 개를 건네받고 보라는 소리쳤다. “미안하다! 우정을 위해 부디 용서해라!”
   보라는 떡볶이 국물을 흘릴까 조심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새 지원이랑 좀 멀어졌기 때문이다. 간신히 지원이를 따라잡고는 지원이의 가방을 팔꿈치로 툭 쳤다. 지원이는 움찔하며 돌아봤고, 보라는 두 개 중 하나의 떡볶이를 내밀었다.
   “뭔데.”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지원이는 잠시 울컥하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너는 돈으로 친구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
   “그럼 이건 뭐야? 내가 거지야? 왜 사주는데.”
   “아니, 이건 돈이 아니고 그냥 떡볶이인데. 친구가 되기에 떡볶이만 한 음식은 또 없잖아.”
   지원이는 아까처럼 울컥했다가 갑자기 축 힘이 빠졌다. 그리곤 마지못해 받는 것처럼 힘없이 떡볶이 한 컵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말이 없는 지원이로 돌아갔다. 지원이와 보라는 마치 짠 것처럼 학교 뒷산 방향으로 걸었다. 뒷산 입구를 지날 때쯤 보라가 소리쳤다.
   “도라지꽃이다!”
   지원이는 이번에도 깜짝 놀랐다. 놀랄 때마다 어깨를 크게 들썩거린다. 보라는 잠깐 멈춰서 도라지꽃을 바라봤다.
   “이게 도라지꽃이야?”
   “응. 확실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거든. 원래 여름에 피는 건데! 따뜻해서 얘네만 돌연변이로 피어버렸나 봐.”
   도라지꽃은 아름다운 보랏빛깔이었다. 그중에서 두세 개 정도는 흰색도 섞여 있었다. 이건 백도라지야, 하고 보라가 말하자 지원이가 보라를 쳐다봤다.
   “보라색은 뭐든 다 좋아하는구나.”
   “응. 뭐 이름부터 보라니까.”

   수채화 물감

   미술 시간에는 미영이라는 애가 50색깔 수채화 물감을 가져와서 자랑했다. 그 물감에는 색깔 띠랑 영어로 물감 이름이 쓰여있었다. 보라의 물감은 뽀로로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물감이다. 저학년용이지만 싸고 귀여워서 샀다. 옆을 보니 지원이 것도 같은 것이었다. 오늘 주제는 가장 친한 친구의 얼굴을 수채화 물감을 사용해서 그리는 것이었다. 보라는 누굴 그릴까 하다가 전학 오기 전에 가장 친했던 친구를 그렸다. 지원이는 사람 두 명을 그렸는데 떡볶이를 들고 있는 걸 보아하니 보라랑 자길 그린 것 같았다. 보라는 지원이를 그리지 않은 게 좀 미안해졌다. 지원이는 4B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수채화 물감으로 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 전봇대를 색칠하던 지원이는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그리고는 귤색으로 얼굴을 칠했다. 보라는 팔레트에 주황색과 흰색을 짜서 섞었다. 그리고 지원이에게 내밀었다. 지원이는 보라의 팔레트를 보더니 놀라서 물었다.
   “살색 어디서 났어?”
   “섞었어. 주황색이랑 흰색. 넌 이런 것도 몰라?”
   “어쩐지 나만 빼고 다 색깔이 많더라.”
   지원이는 지금까지 계속 귤색으로 얼굴을 칠했다고 했다. 보라는 좀 더 많은 색을 섞어 보았다. 노란색과 파란색을 섞으면 초록색이 되고, 빨간색과 노란색을 섞으면 주황색이 되었다. 섞어서 나온 색깔에 다른 색깔을 섞으면 처음 보는 신기한 색이 나오기도 했다. 보라와 지원이의 팔레트는 어느새 미영이의 팔레트처럼 가득 찼다. 그때 보라의 머릿속에는 좋은 아이디어가 지나갔다.
   방과 후에 아이들이 청소를 마칠 때까지 보라는 교실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는 빨리 학원에 가봐야 한다는 주번을 구슬려서 자물쇠와 열쇠를 받아냈다. 지원이가 기다리는 것 같았지만 오늘은 먼저 가라고 말해주었다. 마침내 교실에 혼자 남자 보라는 사물함에서 하늘색 체육복을 꺼내왔다. ‘남’이라고 적어내는 바람에 하늘색 체육복을 받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담임선생님께 잔소리를 들었다. 당분간 어쩔 수 없이 하늘색 체육복을 입게 되었지만 보라색 체육복이 갖고 싶은 건 여전했다. 보라는 팔레트에 빨간색과 흰색물감을 다 짜냈다. 그리고 휘휘 저으니 여자 체육복과 비슷한 색깔의 연한 분홍색이 되었다. 가장 큰 붓으로 물감을 묻혀 체육복의 하늘색 부분을 따라 칠했다. 이렇게 하면 옷과 물감이 섞여서 보라색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물감은 체육복의 색과 섞이지 않았다. 체육복은 미술 시간에 장난을 한 것처럼 물감으로 범벅되었다.
   “실패한 것 같군.”
   보라는 창문에 축축이 젖은 체육복을 널어놓았다. 그리고 운동장에서 하늘색 체육복을 입고 축구를 하는 남자애들을 바라보았다. 한 시간쯤 지나고, 물감이 말라서 체육복이 딱딱해졌다. 보라는 체육복을 가방에 넣지 않고 든 채로, 교실을 나섰다.

   레인보우스쿨

   체육 시간은 여자와 남자를 나눠 피구, 축구를 했다. 보라는 물감 때문에 하늘색 체육복조차 입지 못하게 돼서 평범한 티셔츠를 입었다. 물론 보라색으로. 담임선생님의 얼굴은 파랗다 못해 거의 까맣게 되었다. 피구를 시작하기 전, 담임선생님은 보라를 보더니 “난 널 포기했다. 정말.” 하고 말했다.
   “저도 쌤을 포기했어요. 저는 축구 하고 싶은데 이번엔 또 피구를 하라니.”
   그 말에 아이들은 크게 웃었다. 피구가 시작되고 여자애들은 튀는 색깔을 입은 보라에게만 공을 던졌다. 하지만 보라는 그때마다 공을 받아내서 던진 애한테 더 세게 던져버렸다.
   피구를 두 판 하고 나니 다들 금방 지쳐버렸다. 담임선생님은 남은 시간 동안 자유롭게 행동하라고 하시곤 교무실로 가버렸다. 보라는 철봉 밑 모랫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원이도 머뭇거리더니 보라의 옆에 와서 똑같이 주저앉았다.
   “보라야. 내일은 나도 주황색 티셔츠 입고 올까?”
   “왜?”
   “솔직히 체육복 맞추는 거 나도 싫어. 난 주황색이 좋던데.”
   “그런데 왜 그땐 한마디도 안 했어?”
   “무섭잖아. 선생님한테 혼날 것 같고. 그리고 그런 튀는 얘기하면 다들 쳐다보고. 종례 시간도 길어지고……”
   “야. 종례 시간 보다 네 변명이 더 길다! 그런데 우리 말고도 체육복 마음대로 입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포스터를 붙여보는 거 어때? 정문이랑 후문 담벼락에다가.”
   “혼나는 거 아냐?”
   “언제 그런 걸 신경 썼다고.”
   피구 때문에 내심 풀이 죽어있던 보라는 지원이의 말에 기운이 솟는 것 같았다. 둘은 마주보며 웃었다. 당장 포스터를 만들어 붙이고 싶었다.

   ?What we want? 레인보우스쿨!?
   체육복을 맞춘다는 건
   부당합니다!
   우리는 좋아하는 색의 티셔츠를
   자유롭게 입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 의견에 동의하시는 분들은
   9월 5일 4시 운동장 정글짐으로 모여주세요.
   우리는 알록달록한 학교가 보고 싶어요.
   협조해주세요.

   글은 보라가 쓰고 아래쪽에 일곱 명의 사람을 그려 지원이가 색칠을 했다. 티셔츠는 당연히 무지개색이었다.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복사를 했다. 컬러라복사를 하느라 열 장에 5천 원이나 들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너무 많은 사람이 오면 어쩌지 하는 기대감에 자꾸만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아기 무지개

   보라와 지원이는 각자 보라색과 주황색 티셔츠를 입고 정글짐 앞을 서성거렸다. 이미 다섯 시가 한참 넘었지만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둘은 티는 내지 않았지만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보라는 정글짐에서 내려와 철봉에 매달렸다.
   “너는 몇 명 왔으면 좋겠어?”
   보라가 쥐어짜듯 말했지만 지원이는 고개만 저었다.
   “나는 다섯 명 왔으면 좋겠는데. 그럼 딱 일곱 빛깔 무지개가 되는 거잖아!”
   보라는 일부러 씩씩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기분이 점점 더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
   둘은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길고 짧은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정유경

세상의 모든 귀여움을 사랑하는 사람

2019/01/29
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