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오백 살이 된다고요?”
   어느 날 금강산 할머니 산신령이 여우와 호랑이를 불렀어.
   “이제 산신령 노릇을 그만두고 하늘로 올라갈까 해요. 에그, 천 년 동안 했으니, 쉴 때도 됐지.”
   할머니 산신령이 둘을 번갈아 쳐다봤지.
   “누가 금강산 산신령이 되면 좋을꼬?”
   여우와 호랑이도 오백 살이 되면 산신령이 될 수 있었대.
   호랑이가 먼저 성큼 나섰어.
   “저는 믿음직한 산신령이 되겠습니다.”
   그러자 여우가 말했지.
   “전 지혜로운 산신령이 되겠어요.”
   금강산은 봉우리가 일만 이천 개나 되는 산중의 산이야. 그런 산을 지키는 산신령이라니.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자리지.
   할머니 산신령이 지팡이를 짚고 끙, 하고 일어섰어.
   “산신령은 변신을 잘해야 해요. 곰을 알려면 곰이 돼 봐야 하고……”
   그러더니 눈 깜짝할 새 큰 곰으로 변신했어. 오백 살 호랑이보다 더 커.
   “새와 마음을 나누려면, 새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겠지요?”
   그러더니 뱁새가 되었어. 여우 귓속에 쏙 들어갈 만큼 쪼그매. 호랑이와 여우가 예, 예, 하면서 뱁새 뒤를 따라다녔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할머니 산신령이 말했어.
   “자, 누가 더 변신을 잘하는지 볼까요? 이기는 쪽에게 산신령이 될 기회를 주지요. 지는 쪽은, 미안하지만 금강산을 떠나기로 합시다.”
   “변신이라면, 제가 으뜸이지요.”
   호랑이 말에 여우가 생글 웃어.
   “변신이요? 손바닥 뒤집는 일처럼 쉽……”
   휘익. 그때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었어. 편지 한 장이 산신령 앞에 뚝 떨어졌지. 북쪽 바다 새 용왕에게서 온 편지였대.
   ‘토끼란 놈이 아버님을 속이더니 이번에는 나까지 속이고 또 달아났소. 그 토끼를 다시 잡아서 보내시오. 토끼는 수염이 없으면 힘을 못 쓴다고 하오. 못 잡을 것 같으면 그 놈 수염이라도 몽땅 뽑아서 보내시오.’
   편지를 읽은 할머니 산신령이 중얼거렸어.
   “에이, 버릇없는 용왕 같으니.”
   그러더니 호랑이에게 물었어.
   “그 토끼 말이에요. 용궁에 두 번이나 갔다 왔다는. 금강산으로 이사를 왔다고요?”
   “예. 큰 바위 골 부엉이 말로는 서쪽 골짜기로 왔답니다. 아무도 모르게 밤에 왔다더군요.”
   “새 용왕이 그 토끼를 잡아서 보내라는데……”
   할머니 산신령은 그러기 싫었어.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기고 여기까지 숨어들어 왔다니. 불쌍하잖아. 하지만 새 용왕이 편지까지 보냈는데, 잡는 시늉은 해야 할 것 같았지.
   “어쩐다?”
   곰곰이 생각을 했지.
   “토끼 수염이라도 주면서 달래 볼까.”
   그러다 여우와 호랑이를 흘끗 봤어. 좋은 생각이 떠올랐지.
   
   “그래, 둘 다 그렇게 변신을 잘한다고요? 그러면 아무것으로나 변신을 해서 토끼수염을 뽑아오세요.”
   그러자 여우가 말했어.
   “그 토끼가 유명한 꾀돌이라면서요? 용왕을 속인 것도 모자라서 용왕의 아들까지 속였다니……”
   호랑이가 맞장구를 쳤어.
   “맞습니다. 그런데 용궁에 두 번이나 다녀온 뒤로 의심이 더 많아졌대요. 아예 집 밖으로 나오질 않는답니다.”
   “음, 좋아요. 산신령이 되려면 그 토끼보다 꾀가 더 나아야겠지요?”
   할머니 산신령 말했지.
   호랑이와 여우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어. 그러다 아하, 하면서 여우가 먼저 팔딱팔딱 재주를 넘었어. 그러더니 한쪽 귀가 찢어진 다람쥐가 되었지. 호랑이도 혼자 씩 웃더니, 가죽을 벗고 변신을 했어. 꼬리털이 뭉텅 빠진 토끼가 되었어.
   “볼품없는 다람쥐와 토끼라? 아이고, 고것 참 재미있겠네.”
   할머니 산신령이 박수를 치느라 지팡이를 놓쳤어. 둘은 산신령에게 넙죽 절을 하고, 서쪽 골짜기로 갔대.
   다람쥐로 변신한 여우가 먼저 도착했어.
   “토선생님, 토선생님.”
   한참을 불렀더니, 그제야 쫑긋한 두 귀가 보여.
   
   “나를 불렀소?”
   토끼가 내다보니 다람쥐야.
   “북쪽 바다에 다녀왔다는 그 유명한 토선생님이 맞나요?”
   “맞긴 맞네만.”
   토끼가 대답만 하고 집에서 나오질 않아. 그러자 다람쥐가 골짜기가 떠나가라 큰소리로 호들갑을 떨었어.
   “이제야 제대로 찾아왔군요. 앞산, 뒷산, 지리산, 백두산. 산이란 산은 다 뒤졌답니다. 하도 고생을 해서 이 모양이 되었지 뭐예요.”
   다람쥐 꼴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 자기를 만나려고 온 산을 찾아다녔다니. 토끼는 좀 으쓱해졌어.
   “토선생님, 저도 죽기 전에 용궁에 한번 가보고 싶어요. 어떡하면 용궁에 갈 수 있을까요?”
   토끼가 집 밖으로 고개만 내밀고 점잖게 말했지.
   “그곳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라네.”
   “아무렴 그렇고말고요.”
   “자네에게만 특별히 가르쳐 주겠네. 잘 듣게.”
   “네, 네. 그런데 토선생님 말씀이 잘 안 들려요. 제가 지리산에서 토선생님을 찾다가 나무에서 떨어졌어요. 그때 귀를 다쳐서……”
   다람쥐가 울상이 되어서 토끼에게 찢어진 귀를 보여줬지. 토끼가 혀를 찼어. 그리고 주위를 살피더니 슬그머니 집 밖으로 나오는 거야.
   다람쥐가 토끼에게 쪼르르 다가갔지. 토끼가 자기 자랑에 빠져 있을 때 몰래 수염을 뽑을 생각이거든.
   “그게 그러니까……”
   토끼가 신이 나서 얘기를 시작했지.
   그런데 토끼가 요래 보니까, 다람쥐가 얘기를 건성건성 들어. 자꾸 자기 수염만 쳐다봐.
   ‘좀 수상한데.’
   아무래도 의심쩍어서 슬쩍 냄새를 맡아봤어. 그런데 다람쥐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났어.
   예전에 토끼가 두 번째로 용궁에 끌려갈 때 말이야. 자라로 변신한 백여우한테 잡혔었거든. 다람쥐한테서 그 백여우 냄새가 났어. 토끼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어.
   “용궁에 가고 싶다고? 그럼 자라를 만나야지.”
   “아하, 그렇군요.”
   “마침 자라 친척인 남생이가 동쪽 골짜기에 산다고 들었네. 남생이를 찾아가 보게나.”
   그러고는 쌩 돌아서서 길쭉한 뒷다리로 껑충 뛰었어. 토끼는 굴속으로 쏙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지 않았대. 오백 년 묵은 여우는 토끼 수염은커녕 꼬리털 하나 얻지 못했지.
   그래서 호랑이가 이겼냐고?
   토끼로 변신한 호랑이도 토끼 집에 도착했어. 가짜 토끼는 토끼 집 앞으로 동물들을 불러 모았지.
   “애들아, 내 얘기 좀 들어봐. 안 들으면 후회할걸?”
   노루, 멧돼지, 너구리…… 동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대.
   가짜 토끼가 능청스럽게 얘기를 시작했어.
   “내가 용궁에 다녀왔잖아.”
   “어머나, 네가 그 토끼구나.”
   “자라 등을 타고 바닷속을 다녀왔다던데?”
   “맞아. 내가 바로 그 토끼잖아.”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진짜 토끼가 내다봤겠지.
   ‘여우 냄새나는 다람쥐가 아직도 안 갔나.’
   그런데 자기랑 똑같이 생긴 토끼가 있거든. 꼬리털이 뭉텅 빠진 것도 똑같아. 게다가 그 토끼가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자기 얘기지 뭐야.
   “얼씨구, 거짓말을 잘도 하는군.”
   참다못한 진짜 토끼가 집 밖으로 나왔어.
   “요 거짓말쟁이야! 내가 진짜라고.”
   가짜 토끼가 속으로 웃으면서 펄쩍 뛰는 척했지.
   “무슨 소리야? 내가 진짜야.”
   큰소리치면서 진짜 토끼 앞으로 바짝 다가갔어. 화가 난 진짜 토끼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어.
   ‘바로 지금이야.’
   가짜 토끼가 진짜 토끼의 수염을 막 뽑으려고 했어. 그런데 진짜 토끼가 동물들 사이로 껑충 뛰어나갔어.
   “여러분, 누가 진짜인지 가려볼까요?”
   “좋아. 좋아.”
   동물들은 재미난 구경이 났다고 좋아했지.
   “네가 용궁에 다녀온 토끼라면 대답해 봐.”
   진짜 토끼가 가짜 토끼에게 물었어.
   “용왕님이 아들이 배가 자주 아프다고 좋은 약이 있는지 물어봤지. 그때 뭘 줬지?”
   “그게…… 수염을 뽑아줬던가?”
   온통 수염 생각뿐인 가짜 토끼가 우물쭈물했어. 그러자 흥, 진짜 토끼가 콧방귀를 뀌었지.
   “내 똥을 줬어. 그것도 한 바가지나.”
   그랬더니 동물들이 한바탕 웃었어. 그리고 가짜 토끼에게 한마디씩 했지.
   “요즘 가짜가 너무 많아.”
   “맞아. 똑똑하지 않으면 속는다니까.”
   토끼로 변신한 오백 살 호랑이는 욕만 실컷 얻어먹고 왔다지.
   둘의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 산신령이 호호 웃었어.
   “됐어요, 됐어. 짐승으로 변신하는 것은 그 정도면 충분해요. 진짜 어려운 일은 사람으로 변신하는 거지요.”
   그때 호랑이가 꼬리를 우뚝 세우고 말했어.
   “저는 가끔 사람으로 변신을 합니다.”
   사실 호랑이는 보름달 밤에 남자로 변신을 해서 마을을 돌아다니곤 했어.
   “저도 그래요.”
   여우도 여자로 변신을 해서 밤길을 돌아다니곤 했지.
   “사람과 짐승이 잘 어울려 살도록 하는 것도 산신령의 일! 이번에는 사람으로 변신을 해 볼까요? 사람으로 변신을 해서, 아, 콩 한 쪽을 얻어오세요. 콩 한 쪽이라도 얻으려면 사람 마음을 잘 들여다봐야겠지요?”
   할머니 산신령의 말에 호랑이가 자신 없는 말투로 중얼거렸어.
   “사람 마음은 흐린 물속 같다고 하던데.”
   여우도 고개를 끄덕였어.
   “네, 변덕이 죽 끓듯 한다더군요.”
   그 말을 들은 할머니 산신령이 속으로 그랬대. 천 살이나 먹은 나도 그 속을 잘 몰라. 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지.
   “자꾸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겠어요? 그 마음이?”
   여우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어.
   “네. 그 속을 헤아리려면 겪어봐야겠지요.”
   팔딱팔딱 재주를 넘더니 여자아이가 되었어.
   
   “저도 궁금하긴 합니다.”
   호랑이도 가죽을 벗고 옷을 걸치더니 남자아이가 되었어. 둘은 콩 한 쪽을 얻으러 마을로 내려갔지.
   호랑이 아이는 어느 오두막으로 들어갔어. 수숫대로 지붕을 얹었어. 후 불면 날아갈 것 같았지.
   “저, 콩 한 쪽만 주세요.”
   호랑이 아이가 부엌을 기웃거렸어.
   “콩떡?”
   “콩죽?”
   “콩탕?”
   방문이 왈캉 열리더니 아이들이 우르르 뛰쳐나왔어. 그러다가 마당으로 우당탕탕 넘어졌지. 세어보니 열둘이나 돼. 아하, 흥부네 집이구나.
   ‘흥부는 착하다고 소문이 났으니 콩 한 쪽은 얻어갈 수 있겠군.’
   그런데 아이들을 보니 며칠 굶은 얼굴들이야. 쌀독은 텅 비었고, 솥에는 식은 감자 한 알 없었어.
   ‘쯧쯧, 착하게 살면 뭐해?’
   호랑이 아이가 아이들을 둘러보다가 씩 웃었어.
   “오다 보니까 숲에 커다란 밤나무가 있더라. 나랑 밤 따러 갈래?”
   “좋아!”
   고소한 밤 생각을 하니까 힘이 나나 봐. 아이들 목소리에 수숫대 지붕이 들썩거렸지.
   호랑이 아이가 열두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어. 호랑이 아이가 한쪽 엄지발가락으로 슬쩍 밤나무를 건드렸어. 그랬더니 밤나무가 마구 흔들리더니 알밤이 후두두둑 떨어졌어. 겉은 아이지만 속은 오백 살 먹은 호랑이잖아.
   호랑이 아이와 흥부네 아이들은 마당에 솥을 걸고 불을 지폈어. 왁자지껄 밤을 한 솥 쪘지. 너 먹고 나 먹고 하면서 다 까먹었대. 내기고 뭐고 다 까먹고 밤만 까먹다 돌아왔지.
   그럼 여우가 이긴 거냐고?
   “어느 집으로 갈까?”
   여우 아이도 마을을 둘러보았어. 담장 너머로 보니 어느 기와집 마당에서 콩 타작이 한창이야. 콩이 저렇게 많으니 한 줌도 얻어갈 수 있겠구나 했지.
   “콩 한 쪽만 주세요.”
   여우 아이가 그랬더니,
   “콩 한 쪽을 맡겨 놓았니?”
   집주인 말투가 퉁명스러웠어. 알고 보니 옹고집이야. 심술이 놀부 못지않다는 옹고집말이야.
   “누가 공짜로 달래요?”
   여우 아이가 콩 자루를 번쩍 들었어. 그러더니 곳간에 척척 쌓았지. 겉모습은 아이지만 속은 오백 살 먹은 여우잖아. 타작이 끝난 앞마당도 후딱 쓸었지.
   
   그걸 지켜보던 옹고집이 실실 웃으면서 콩 한 바가지를 가져와. 콩을 한 바가지나 주려나 봐.
   “옜다, 품삯이다.”
   옹고집이 마당에 콩을 좍 뿌렸어. 전부 썩은 콩이지 뭐야.
   ‘괘씸한 어른이네.’
   여우 아이가 콩을 줍는 척하면서 머리털을 하나 뽑았어. 마당에 휙 던졌지. 그랬더니 콩이 모두 쥐가 되었어. 허리 긴 쥐, 왕방울 눈 쥐, 짝짝 다리 쥐, 거무튀튀 쥐…… 쥐란 쥐들이 다 모여서 다다다다 곳간으로 몰려가서 해콩을 다 갉아놓았대.
   “쥐, 쥐, 저놈의 쥐 잡아라.”
   옹고집이 빗자루를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벌러덩 넘어졌지. 여우 아이도 결국 콩 한 쪽 못 얻고 돌아왔지.
   또 빈손으로 돌아온 산신령 후보들에게 할머니 산신령이 물었어.
   
   “그래, 사람 마음이 좀 보이던가요?”
   “아이들 마음은 단순한 게 우리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호랑이가 그랬어.
   “사람 마음을 통 모르겠어요. 웃는 낯인데 속은 웃지 않고 있으니까요.”
   여우가 고개를 갸웃갸웃했어.
   할머니 산신령이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면서 둘을 지그시 쳐다봤지. 누가 되어도 산신령 노릇을 잘할 것 같았대.
   ‘백 년씩 돌아가면서 하라고 할까나?’
   그러다가 아주 재미난 내기가 떠올랐어.
   “한 번 더 사람으로 변신을 해서……”
   여우와 호랑이가 침을 꼴깍 삼켰지.
   “짝을 찾아오세요.”
   “짝이라고요?”
   “호랑이는 색시를 데려오고, 여우는 신랑을 데려오세요.”
   사람의 짝을 데려오라니. 사람 마음을 알기도 어려운데,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어디 쉽겠어? 사람 마음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잖아.
   “산신령님, 그건……”
   여우가 말을 못 해.
   “그게 말입니다, 산신령님. 사람이 저를 좋아하겠습니까? 제가 사람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호랑이도 머뭇거려.
   그랬더니 할머니 산신령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어.
   “겉모습을 바꾸는 일이야 오백 살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마음까지 바꿀 수 있어야 진짜 변신입니다.”
   그랬는데도 둘 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어.
   “그럼 할 수 없군요. 비로봉 꼭대기에 사백 구십 구살 먹은 곰이 산다지요? 한번 오라고 해야겠군요.”
   할머니 산신령이 둘의 눈치를 살폈어.
   “해볼게요.”
   여우가 마지못해 팔딱팔딱 재주를 넘더니 젊은 여자로 변신했지. 호랑이도 망설이다가 호랑이 가죽을 벗고 젊은 남자로 변신했어.
   둘은 깊은 산 속 빈집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환하게 불을 밝혔지. 옛날이야기에 보면 길 잃은 누군가가 찾아오거든. 꼭 한밤중에.
   “계십니까?”
   드디어 여우 여자 집에 누가 왔어.
   “약초를 캐다가 멀리까지 왔어요. 날이 저물어서……”
   젊은 약초꾼이야.
   “들어오세요.”
   여우 여자가 조용히 밥 한 상을 차려왔어. 밥그릇을 깨끗이 비운 약초꾼이 꾸벅꾸벅 졸더니 잠이 들었어. 여우 여자는 상을 치우는 척하면서 약초꾼을 훔쳐봤어. 콧날이 우뚝하고 얼굴이 가무잡잡하니 보기 좋았대.
   “망태기도 두둑한 걸 보니 약초꾼 일도 열심히 하나 봐.”
   여우여자는 무릎걸음으로 약초꾼 옆으로 살금살금 다가갔어.
   
   “사람으로 사는 건 어떤 걸까?”
   한참 동안 약초꾼을 쳐다봤대.
   새벽에 약초꾼이 목이 말라서 잠이 깼지. 부엌 쪽으로 갔더니, 집주인 여자가 돌아앉아서 산나물을 다듬고 있었어. 그런데 치마 밑으로 삐죽 뭐가 나와 있었어. 털이 북슬북슬한 꼬리야.
   ‘여, 여, 여우?’
   약초꾼이 놀라 나자빠졌겠지. 정신없이 망태기를 챙겨 도망쳤대. 그런데 반질반질한 여우 꼬리털이 자꾸 생각나더라는 거야.
   ‘아주 비싸게 팔 수 있을 텐데. 그 돈만 있으면 약초를 찾으러 험한 산을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아도 될 거야.’
   마침 삶아서 먹으면 약이 되고 날로 먹으면 독이 되는 약초가 있었어. 약초를 소맷부리에 감추고 다시 여우 집으로 갔어. 망설이다가 방으로 들어갔지.
   떨리는 목소리로 주인 여자를 불렀어.
   “모, 목이 말라 그러니 무, 물 한 바가지만 주십시오.”
   여우 여자가 얼른 물을 떠 왔어. 약초꾼은 물을 마시는 척하면서 약초즙을 내서 물에 탔지. 그리고 여우 여자에게 들리도록 중얼거렸어.
   “무, 무, 물맛이 이상하군.”
   “그럴 리가요? 우물에서 방금 떠온걸요.”
   여우 여자가 물 한 모금을 마셨어. 약초꾼은 멀찍이 떨어져서 여우여자를 지켜봤지.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좁쌀만한 두드러기도 안 났지. 오백 살이나 먹어서 산신령이 될락 말락 하는 여우잖아.
   후회해 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달달달 떨던 약초꾼이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지.
   “왜 그러세요?”
   여우 여자가 약초꾼을 쫓아갔어. 약초꾼은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줄행랑을 쳤지. 그 모습을 본 여우 여자는 그만 발길을 멈추었지. 돌아와서 달빛에 비친 자기 모습을 우물에 비춰 보았어. 겉은 사람인데, 속은 사람도 여우도 아닌 그림자가 거기 들어있더래.
   그래서 호랑이가 이긴 거냐고?
   “계세요?”
   호랑이 남자 집에도 누가 왔어. 호랑이 남자가 나가보니 웬 젊은 여자가 보따리를 들고 서 있었지.
   “밤중에 무슨 일이시오?”
   점잖게 물었더니,
   “아무것도 묻지 마시고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그러면서 호랑이남자를 쳐다봐. 눈빛이 하도 초롱초롱하고 당당해서 호랑이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어.
   호랑이 남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방을 내주었지. 그리고 한참 동안 문밖에서 서성였대.
   “사람으로 사는 건 어떤 걸까?”
   호랑이 남자는 궁금했대.
   사실 이 여자는 사냥꾼이야. 이 집에 가끔 호랑이가 드나든다는 소문을 듣고 온 거지. 사냥꾼은 자는 척하다가 몰래 일어나서 다락을 뒤졌어. 커다란 호랑이 가죽이 나왔어. 아직 따듯해.
   “저놈은 호랑이가 틀림없어.”
   사냥꾼이 호랑이 가죽을 만지작거리면서 웃었어.
   “이 정도면 산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겠는걸?”
   사냥꾼은 보따리를 풀어서 활과 화살을 꺼냈어. 밖을 엿보니까 호랑이 남자가 마루 귀퉁이에서 졸고 있더래. 살짝 방문을 열고 화살을 겨누었지.
   
   그때 호랑이 남자가 눈을 떴어.
   “이놈, 호랑이야.”
   사냥꾼이 소리쳤어.
   “호랑이라니. 무슨 말이오?”
   호랑이 남자가 잡아뗐어.
   “이래도 잡아뗄래?”
   사냥꾼이 호랑이 가죽을 한쪽 발로 들어 올렸어.
   호랑이 남자는 자기 가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 그 틈에 사냥꾼이 호랑이 남자를 향해 화살을 쏘았어. 화살이 호랑이남자의 어깨에 깊숙이 꽂혔대.
   사냥꾼이 다시 화살을 재는 동안 호랑이 남자가 재빨리 가죽을 빼앗아 달아났어. 사냥꾼은 겁도 없이 쫓아오더래. 오백 살이나 먹어서 산신령이 될락 말락 하는 호랑이인 줄도 모르고.
   호랑이 남자는 호랑이 가죽을 입고 사냥꾼을 확 물어버릴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초롱초롱한 눈빛이 자꾸 생각나서 그럴 수 없었대. 겉은 사람인데, 속은 사람도 호랑이도 아닌 모습으로 밤새 도망만 쳤지.
   그렇게 세 번째 내기도 끝났어.
   그런데 세 번째 내기를 마치고 호랑이와 여우는 어디론가 가버렸대. 어디로 갔는지 바윗골 부엉이도 모른다나 봐. 산신령 앞으로 편지 한 장씩 남겼다지?
   ‘여우가 산신령이 되면 잘 따르겠습니다. 금강산에서 계속 살게 해 주십시오. 오백 살 호랑이 올림.’
   ‘저보다 호랑이가 산신령 노릇을 잘할 것 같아요. 저는 나이를 더 먹은 다음에 다시 도전해 볼게요. 오백 살 여우 올림.’
   그런데 그 날 이후로 약초꾼 집 뒷산에 여우가 자주 나타났대. 사냥꾼이 사는 골짜기에서 커다란 호랑이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어.
   그 여우와 호랑이일까? 산신령이 되려다 만 오백 살 먹은 그 여우와 호랑이 말이야.
   참, 금강산 산신령은 누가 되었냐고? 할머니 산신령 그대로지. 사백 구십 구살 먹은 곰? 그 곰은 오백 살이 되었을 때 왜 산신령이 못 되었냐고? 나야 모르지.

주미경

그 날도 네가 자꾸 생각나서 손에 잡히는 아무것이나 읽었어. ‘고전 캐릭터의 모든 것’. 게네들이나 불러와서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나 짓자 했지. 쓰다 보니 아주 얼토당토않지는 않은 것 같아서 쓰면서 기분이 나아졌어. 나도 그랬어. 물이든 여우든 완벽하게 내가 아닌 것으로의 변신을 꿈꿨어. 너처럼. 그런데 변신한 그 무엇은 내가 아니면서 항상 나더라.

2018/07/31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