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찬



   빛을 걷어내면 또다른 빛이 있다
   물에 빠졌을 때 손으로 물을 아무리 걷어내도 또 물인 것처럼
   희망이 끝이 없다

   실종된 사람이 늙지도 않고 돌아온 아침엔 그것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2인분의 밥을 차리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지도 않고
   말없이 식사를 하는 동안

   그 사람 얼굴이 점점 환해졌다
   환한 얼굴이 입이 있던 자리에 숟가락을 집어넣는다

   눈 감아도 눈부신 장면에 대해
   말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자

   그 사람 점점 줄어든다
   줄어들며 점점 밝아진다

   마침내 그것이 숟가락 하나의 크기로 뭉쳐졌을 때
   박혀있던 숟가락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더니
   그것은 칼이었다

   칼끝 빛난다

   칼을 옆에 두고 아침을 마저 먹는다
   이따금 수저가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 들으며





   히든 밀키웨이



   머그컵에 담겨 있는 흰 액체. 솟아오르는 희뿌연 수증기. 고소한 냄새. 머그컵 손으로 감싼다. 차갑다.

   차갑다니. 고개를 기울여 컵 안 들여다본다. 별거 없다. 그냥 하얗다. 안경에 김 서린다. 안경 닦으려고 안경 벗는다. 눈앞 뿌옇다. 그러나 사물이 부드러워진 건 아니다. 머그컵 손으로 다시 감싼다. 단단하다.
   그러나 차갑다.

   안경 닦으면서. 부드러운 천으로 단단한 렌즈 닦으면서. 무엇이 잘못된 걸까? 머그컵에 담겨 있는 흰 액체. 솟아오르는 희뿌연 수증기. 고소한 냄새. 너는 따듯해야지.

   안경 다시 끼는 찰나. 잠깐 시야 가려지고. 안경 다 끼자 머그컵 안 액체 사라지고 없다. 머그컵 들어본다. 깨끗하다. 고개 숙여 테이블 아래 확인한다. 흰 액체 쏟아져 있다.
   티슈 몇 장 뽑고 흰 액체 닦으려 손 뻗는다.

   그대로 안으로 떨어진다.

   히든 크레바스를 밟은 것처럼. 그러나 이곳은 빙하지대가 아닌데. 여기는 집인데. 어쩌면 내가 착각했을 수도. 빙하지대를 집으로. 집을 빙하지대로. 빙하지대가 너무 사랑스러웠거나 집이 너무 증오스러웠기 때문에. 아니면 둘 다 질렸기 때문에. 어디까지 떨어지는 걸까. 어디에 도착하는 걸까. 추락이 길어지자 기대감이 생기고.

   쿵.

   내가 떨어진 곳은 의자 위. 앞에는 테이블. 머그컵이 있다. 쿵. 머그컵 안엔 아무것도 없다. 쿵.

   쿵.

   설산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여기서 산사태가? 그러나 산사태란 그런 것. 예감하는 순간 이미 일어나버린 것. 내가 컵 안에 그것을 따랐을 때부터.

   컵 안에서 컵을 깨뜨리며 눈덩이가 쏟아져 나온다. 폭발하듯이. 또 쏟아진다. 또 쏟아진다. 또. 아주 멀리서 이 집을 보면 컵 안에 우유가 차오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유라니? 아주 멀리라니? 멀리는 없다. 거리가 모든 걸 망쳐놓았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손을 맞잡으며, 와 춥다 오늘 진짜 춥네 이것 봐…… 희뿌연 김 허공에 퍼트린다. 사람 빼고 모든 게 조명을 두르고 있다. 사람이 두르고 있는 건 코트와 목도리와 사람. 따듯하기 그지없는 캐럴 퍼지며, 글라스에 부어지는 갈자색 액체, 마침 내리는 눈. 사람의 눈동자가 서로를 사랑스럽게 담을 때. 흰자위가 보고 있는 눈꺼풀 뒷면.

   모든 걸 뒤덮은 눈은 따듯하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길었다.
   그건 재난 속에서 내뱉으려고 오랫동안 고심한 유언.

   너 정말 거창하구나.
   그럼에도 그게 네 마음이라면……
   내리는 눈을 보며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말했고

   위 위시 유 어 메리 크리스마스
   위 위시 유 어 메리 크리스마스
   위 위시 유 어 메리 크리스마스 앤드


   그 집은 어떻게 되었죠?
   그 사람은?

   그건

   7년 전 일이니까요. 강산이 절반 넘게 바뀌는 시간이잖아요? 저는 이제 잘 모르겠네요.
   머그컵을 내려놓으며 나는 상담사에게 말했다.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준비된 따듯한 음료였다.

차도하

수족냉증 고칠 줄 아시는 분 연락 바랍니다.

2020/06/30
31호